
따라서 금등지사를 입수해야만, 죄인 신분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나아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정치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금등지사가 세상에 공개되면, 영조를 압박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기득권층인 노론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금등지사에 담긴 정치적 함수는 정조가 이기느냐 노론세력이 이기느냐, 그것이었다.
금등지사의 비밀은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뿐만 아니라,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과 안성기 주연의 영화 <영원한 제국>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다. 그렇다면, 금등지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무왕이 살아 있었을 때에, 정확히 말하면 생전의 무왕이 잠시 중병에 걸렸을 때에, 주공은 무왕의 쾌유를 비는 기도문을 만들어 금등 속에 넣어둔 적이 있다. 기도의 대상은 죽은 조상들인 태왕·왕계·문왕이고, 기도의 요지는 ’나를 죽이고 형인 무왕을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당신들의 원손인 아무개(무왕을 지칭)가 모질고 급박한 병을 만났으니, 당신들 세 왕은 …… 저로써 아무개의 몸을 대신하소서!"
여기서, 무왕의 이름을 쓰지 않고 ’아무개’라고 표현한 것은, 고대 한국과 중국에서는 왕의 이름 즉 휘(諱)를 부르는 것을 피(避)하는 피휘(避諱)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로써 아무개의 몸을 대신하소서!"란 표현은 나를 죽이는 대신 무왕을 살려달라는 뜻이다.
형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는 의지가 담긴 금등지사는, 주공이 조카 성왕의 왕위를 탐낼 만한 인물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였다. 다시 말해, 주공은 수양대군 부류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임을 보여주는 자료였던 것이다. 결국 금등지사가 공개됨에 따라 주공은 비로소 혐의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외형적’으로는 조카의 왕위를 탐낸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카에 대해 진심을 갖고 있었던 주공에 대해, 영조 임금은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꼈던 모양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아들에 대한 영조의 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들 수군거리는 세상 분위기에 대한 반발심의 표현이었는지, 영조는 주공의 고사를 모방하여 ’영조판 금등지사’를 남겼다. ’외형적’인 조치와 달리 자신이 ’내면적’으로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음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듯하다.
나중에 부분적으로 공개된 영조판 금등지사에는 "천추(千秋, 오랜 세월 동안)에 나는 그리워하노니, (네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라노라."(千秋予懷, 歸來望思)라는 표현이 실려 있다.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막판에는 반역까지 꿈꾸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직접 죽인 아들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사도세자를 죽인 일을 후회하는 것인 동시에 그의 반역 혐의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일 때에 영조의 태도는 매우 가혹했다. 영조 38년 윤5월 13일(1762.7.4)에 세자를 뒤주(곡식을 담는 상자)에 가두고도 분이 채 풀리지 않은 영조는 세자가 혹시라도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추가적인 조치까지 취했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서는 "대처분(뒤주에 가둔 일)을 내린 이틀 뒤인 윤5월 15일(7.6)에 대조(大朝, ’영조’ 지칭)께서는 (밧줄로 뒤주를) 단단히 묶고 (풀 같은 것으로) 깊이깊이 덮어 놓았다"고 말했다. 그런 상태에서 사도세자는 윤5월 21일(7.12) 뒤주 안에서 숨이 끊어졌다. 한창 더울 때에 뒤주에 갇힌 채로 죽었으니, 사도세자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아들을 참혹하게 죽인 영조가 실제로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영조판 금등지사였다.
그런데 영조가 지은 금등지사는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세자의 반역음모를 고발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몬 기득권세력과의 정면충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세자를 죽인 사람들이 잘못을 범했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 정조는 금등지사를 어떻게 입수했을까? 이 문제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정조 임금이 그것을 입수하기 위해 일련의 비밀작업을 벌였다고 했다. 특히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정조가 정약용 및 유생들의 힘을 빌려 그것을 찾으려 했다고 설정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정조가 금등지사를 입수하게 된 경위는 정조 17년 8월 8일자(1793.9.12) <정조실록>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정조가 신하들에게 그 경위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즉위 초기인 병신년 5월 13일(1776.6.28)에 문녀(文女)의 죄악을 공포할 때에, 전 영의정(채제공)이 조칙(왕명)을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내게) 보고한 바가 있었고, (내가) 승지와 한림을 파견해 그것을 확인하도록 하는 조치가 있었다."
여기서 ’문녀’란 영조의 후궁인 문숙의(숙의 문씨)를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문숙의와 그의 오빠인 문성국은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시키고 세자를 죽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 문숙의의 죄상을 공포하는 조칙을 교정하는 작업에 참여한 채제공이 이 기회를 빌려 정조에게 금등지사 문제를 은밀히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지’는 비서를 가리키고, ’한림’은 실록 원고인 사초를 담당하는 예문관 검열을 가리킨다.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승지 및 예문관 검열을 수은묘에 파견해서 ’금등지사란 것이 진짜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영조의 친필인지’ 등등을 확인하도록 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정조는 금등지사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 일은 등극 2개월 뒤인 정조 즉위년 5월 13일(1776.6.28) 이후에 있었다. 이때 정조의 나이는 25세였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그는 그렇게 수월하게 확보했다.
그래서 그는 드라마 속의 정조처럼 금등지사를 찾기 위해 젊은 학생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또 드라마 속의 정조처럼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금등지사를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다. 드라마 내용과 달리, 그의 금등지사 입수는 젊은 시절에 아주 손쉽고 싱겁게 종결되었다.

글 사진 =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논문심사 중).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에서 역사 강의를 하고, 오마이뉴스에서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를 역임했다. 역사 관련 저서로는 <철의 제국 가야>, <최숙빈>, <한국사 인물통찰>, <조선사 클리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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