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병역의무의 모순
조선의 백성들을 괴롭게 한 요소 중의 하나가 군역이었다. 조선 군사제도는 세조 때 정착된 진관(鎭管)체제였는데, 이는 중앙은 오위(五衛)가 방어하고 지방은 진관(鎭管)이 방어하는 체제였다. 이는 각 도의 주요지역을 거진(巨鎭)으로 삼고 주변의 여러 진을 거진에 소속시켜 유사시에 각 진관이 독자성을 살려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조선 초 중기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가 오래 지속되다보니 각 관아에서는 농민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대신에 포(布:무명이나 베)를 받는 대신 군역을 면제시켜 주는 편법이 횡행했다. 관아에서는 납부 받은 포보다 낮은 가격에 다른 사람을 고용해 군역의무를 지우면서 중간 차액을 관아에서 사용한 것이다. 이를'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라 하는데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각 관아에서 공공연히 시행했으므로 피할 수 없는 추세가 되어 중종 36년(1541)에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로 명칭이 바뀌면서 합법화되었다. 이는 재산이 있는 양인들은 합법적으로 군역의무에서 면제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지방수령이 군역의무자에게 포를 징수해 올리면 병조에서 이를 다시 지방에 나누어 보내 군사를 고용하게 한 제도였는데, 지방관청에서 포를 징수하는 과정, 중앙에 올리는 과정, 분배된 포로 군사를 모집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부정의 온상이 되었다.
병역의무에도 성역이
군적수포제의 더 큰 문제는 군포 징수에 성역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일반 양인(良人)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정병(正兵)과 봉족(奉足)으로 구성되는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지만 양반사대부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중인들과 노비들은 따로 신역이 있었으므로 결국 일반 농민들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던 것이다. 군적수포제가 실시된 후에는 군포를 내느냐 내지 않느냐가 양반과 일반 양인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병역의무에서 면제된 양반사대부들은 군포 납부의 의무가 없는 것을 지배층의 당연한 권리로 알았고, 일반 백성들은 군포 납부를 피지배층의 천역(賤役)으로 여기는 가치관의 전도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군사가 전쟁 때 제 기능을 발휘할리는 만무했고, 조선군은 왜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이다.
여기에다 양란 이후 양반의 수효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양반층의 군역면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양반 수효 증가의 직접적 원인은 납속책(納粟策)과 공명첩(空名帖)의 남발에 있었다. 납속책이나 공명첩은 국가에 쌀이나 포를 헌납하면 그에 상응하는 벼슬을 주는 것이었다. 이 납속책이나 공명첩은 국가에서 쉬쉬하며 시행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시행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다음해인 선조 26년(1593) 호조는 비변사의 계사에 따라ꡐ납속사목(納粟事目)ꡑ을 제정해 반포했는데, 여기에 따르면ꡐ향리는 3석(石)이면 3년간 역을 면제하고 30석이면 향리의 역을 면제하여 참하(參下)의 영직(影職)을 제수한다ꡑ는 등 돈만 있으면 누구나 양반이 되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공명첩은 대상자의 이름을 빈칸(空名)으로 둔 관직임명장(帖)이었다. 비록 공명첩에 의한 벼슬은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으로 행세하게 되지만 양반은 양반이므로 군역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이었다. 『숙종실록』에 흉년이 들자 공명첩 2만 장을 팔도에 나누어 팔게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많을 경우 한 번에 수만 장의 공명첩이 발행되었다.
납속책과 공명첩의 남발은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양인들은 대부분 양반이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재력 있는 농민들은 박지원이「양반전」에서 풍자했듯이 가난한 양반으로부터 족보를 사서 군역을 면제 받을 수도 있었다.
급격히 증가한 양반숫자
이런 경로를 거쳐 양반의 수효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대구지역의 경우 숙종 때인 1690년만 해도 양반의 비율은 9.2퍼센트였고 양민이 53.7퍼센트, 노비가 37,1퍼센트였는데, 약 1백년 뒤인 1783년(정조 7년)에 이르면 양반은 37.5퍼센트로 급격히 늘어난 반면 양민은 57.5퍼센트, 노비는 5.0퍼센트로 급감했다. 이는 노비들이 양인으로 상승하고 양인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한 결과이다. 그 후 약 70년 뒤인 철종 때의 1858년에는 양반의 비율은 70.3퍼센트로 수직 상승한 반면 양민은 28.2퍼센트로 줄어들고 노비는 1.5퍼센트로 거의 무시해도 좋은 비율로 줄어들었다.
즉 양반은 급격히 증가하는 반면 일반 양민과 노비는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양반의 증가는 국민 다수의 신분향상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나쁠 것이야 없겠지만, 문제는 이들에게 병역의무의 면제라는 특권이 뒤따른다는 점이었다. 사실 양인들은 이 특권 때문에 기를 쓰고 양반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다.
부유한 양인들이 양반으로 신분상승함에 따라 가난한 양인들이 이들의 군포까지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부자는 군포를 안내고 가난한 양인들은 등골이 휘도록 군포를 이중․삼중으로 내야했던 것이다.
여기에 양란 이후 군사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문제가 가중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진관체제의 불합리함을 깨달은 정부는 훈련도감을 설치했는데, 포수, 살수, 사수로 편재된 삼수병이 주요 구성원인 훈련도감은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직업군인들이었다.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을 계기로 어영청을 설치했고, 경기 일대의 방위를 위해 총융청을 설치했으며, 정묘호란 뒤에는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설치했고, 17세기 말에는 수도 방위를 위해 금위영을 설치함으로써 군영이 5개나 되었다.
군사 숫자는 늘어나는데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할 양인의 수는 줄어드는 모순은 당연히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국방비는 늘어나는데 국방비를 납부할 사람의 숫자는 줄어들었으니 많은 모순이 생기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양역변통론과 그 반대들
이는 곧 체제위기이기도 했으므로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들이 논의되었는데 이를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라 한다. 양역변통론은 병역제도와 국방비 마련을 위한 여러 방안을 강구하자는 것이었다. 영조 28년(1752)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대리청정하는 사도세자에게 올린 균역(均役)에 대한 보고서에는 이런 문제점이 잘 드러나 있다.
「지금 백성들 가운데 양역(良役)에 응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내(畿內) 삼남(三南) 해서(海西) 관동(關東) 여섯 도(道)의 1백 34만 민호(民戶) 중 잔호(殘戶) 독호(獨戶) 72만을 제하고 나면 실호(實戶)는 겨우 62만입니다. 그런데 사부(士夫) 향품(鄕品) 부사(府史) 서도(胥徒) 역자(驛子) 등 양역을 부과할 수 없는 자가 5분의 4나 되기 때문에 양역에 응하는 사람은 단지 10여 만 뿐입니다. 이들은 세업(世業)도 없고 전토(田土)도 없어 모두 남의 전토를 경작하고 있기 때문에 1년에 수확하는 것이 대부분 10석을 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 반을 전토의 주인에게 주고나면 남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비록 날마다 매질을 가하더라도 바칠 수 있는 계책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지 않으면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영조실록』 28년 1월 13일)」
홍계희의 보고서는 무려 4/5가 군역에서 면제되고 남의 토지를 경작해 먹고 사는 전호(佃戶)들만 군역을 중복 부담하는 문제점이 잘 담겨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도망가면 그 가족에게 대신 부담지우는 족징(族徵)을 실시했고,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그 이웃에게 부담지우는 인징(隣徵)을 실시했기 때문에 한 마을이 모두 도망가 마을이 텅 비는 상황이 발생했다. 홍계희는ꡒ이것이 양역을 변통시키자는 의논이 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ꡓ라며 양역변통에 관한 네 가지 방안을 소개했는데, 유포론(遊布論), 호포론(戶布論), 구전론(口錢論), 결포론(結布論)이 그것이었다.
유포론은 군역 기피자를 색출해서 군역의 의무를 지우자는 것이었고, 호포론은 호를 단위로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군포를 받자는 것이었다. 유포론은 직책이 없이 놀고 있는 양반들에게 군역을 부담시키자는 다소 타협적인 안으로서 호를 단위로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자는 호포론보다는 약한 개혁론이었다. 이처럼 양역변통론은 결국 양반사대부들에게 어느 정도의 부담을 지울 것인가가 핵심사항이었다.
호포론이 양반 개인이 아닌 가호를 단위로 포를 받을 것을 주장했음에도 양반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발을 받았음을 생각해보면 양반 개인 모두에게 돈을 받자는 구전론(口錢論)이 더 큰 반발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이런 모든 개혁안에 대해 양반 사대부들은 중국 고대 위진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왕구(王球)가 말한ꡒ사대부와 서민의 구별은 국가의 헌법이다(士庶之別 國之章也)ꡓ라는 사대부 특권 의식에서 나온 숭유양사론(崇儒養士論)으로 반대했다. 양반들은 절대 군역을 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양반사대부들의 이런 저항 때문에 호포론과 구전론은 시행될 수 없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대두된 것이 결포론(結布論)이었다. 결포론은 수포(收布) 대상을 인정(人丁) 단위에서 전결(田結) 단위, 즉 사람 단위에서 토지면적 단위로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부과 단위를 토지면적의 과다로 변경함으로써 토지가 많은 백성들은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백성들은 면제하자는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가 잇따랐다.
군역 문제를 풀기위해 조선은 이미 숙종 28년(1702)에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하고 양역폐 개선에 대해 논의했다. 양역폐의 핵심은 결국 양반사대부들이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현실에 있었으므로 그 개선 방안도 양반사대부를 포함한 모든 백성들이 군역의무를 지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사대부들의 저항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숙종 때의 양역폐 개선 논의는 군사숫자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며 군영의 수를 줄이는 군제변통론(軍制變通論)에 머물렀다. 국왕 숙종도 1개 군문 철폐에 동조했으나 나중에는 국왕 경호(侍衛)가 약화된다는 이유로 반대로 돌아섰다. 그래서 각 군문의 숫자를 약간씩 감축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5군영의 불요불급한 군사 3만 7천여 명을 감축하는 미봉책으로 끝나고 말았다.
영조의 눈물과 균역법
역대 국왕 중에 이런 군역폐를 해소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노력한 임금은 영조로서 그는 재위 18년(1742) 양역사정청(良役査正廳)을 다시 설치해 양역폐 시정에 나섰다. 숙종 때 논의된 군제변통론이 양반의 특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군문의 수를 줄이거나 군사의 수를 줄여 양역폐를 부분적으로 개선하자는 소변통이라면, 영조 때 제기된 양역개혁론은 양역폐의 근본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대변통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양반사대부들의 반대가 거셌다. 영조는 모든 양반에게 군역을 지우는 구전론은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유포론도 군역기피자를 색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조는 호포론과 결포론 중에 하나를 선택해 시행하려 했다.
영조는 재위 26년 5월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직접 백성들과 유생들을 만나 호포론과 결포론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은 지를 묻고 이렇게 흐느꼈다.
「아! 오늘의 신민은 열성조께서 애휼(愛恤)하셨던 자들이다. 모든 부형(父兄)이 항상 아끼던 세간을 아들이나 아우에게 주면 아들과 아우된 자는 아끼고 보호하여 혹시 상하기라도 할까 항상 걱정하는 것인데, 하물며 억조(億兆) 사서(士庶)를 어찌 아끼고 보호하는 세간에 비교하겠는가? 부르짖고 원망하여 바야흐로 도탄 속에 있어도 구해내지 못하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조(先祖)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영조실록』 26년 5월 19일)」
그러나 이렇게 영조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호포제나 결포제를 시행하려고 했지만 양반들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낙착된 것이 균역법(均役法)이었다. 균역법은 양인 농민의 군포 부담을 반으로 줄이는 대신 부족한 액수를 왕실과 양반사대부가 나누어지자는 개량적 방안이었다.
균역법에 따라 농민들이 연간 2필씩 부담하던 군포는 1필로 줄어들었다. 반감된 군포 수입은 결작미(結作米)와 어염선세(漁鹽船稅), 은여결세(隱餘結稅),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등을 통해 보충하게 되었다. 결작미는 양반들이 주로 부담하는 것으로서 평안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전국의 전결(田結)에 1결당 쌀 2두(혹은 돈 2錢)를 부과 징수하는 것이었고, 어염선세는 왕실에 속해있던 것을 정부 재정으로 돌린 것으로 왕실이 양보한 것이었다. 은여결세는 전국의 탈세전을 적발해 부과한 것이었고, 선무군관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군포 부담에서 벗어난 양민들을 선무군관으로 편성한 것으로서 전국에서 24,500여명이 새로 편입되었다.
균역법은 양역변통의 목적이었던 양반 과세는 관철시키지 못한 채 양반들이 다수였던 토지 소유자에게는 결작을 징수하고, 왕실에는 어염선세를 양보 받음으로써 일반 농민의 군포 부담을 반감시킨 것이었다. 이는 농민들의 자리에서는 과거에 내던 세금의 1/2이 감해진 것이었으나 군역폐의 핵심인 양반사대부의 군역세 부과는 외면한 개량적 방법의 세법이었다.
균역법의 한계와 그 후유증
균역법은 잠시 효과를 보는 듯 했으나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개량적 균역법은 곧 한계를 드러내었다. 양반지주들은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미 2두를 전호(佃戶:소작농민)에게 부담 지웠다. 결국 농민들은 군포 1필을 감면 받은 대신 소작료가 늘어나 별 혜택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정부가 당초 감액했던 군사 숫자를 다시 늘임에 따라 농민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군역폐 해소는 양반사대부들도 군역의 의무를 지는 국민개병의 원칙에 따라 처리되어야 했다. 이것은 단순한 평등의 개념이 아니라 신분제의 해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시대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사대부들의 반대에 밀려 그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채택한 균역법은 군역폐를 해결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가난한 농민들을 괴롭혔다. 이는 세도정치 시대 농민들의 전면적인 저항, 곧 민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민란으로써 체제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배층은 무수한 특권만 누린 채 아무런 부담을 지지 않고 피지배층만 이중 삼중의 부담을 지는 체제가 외부의 충격에 견딜 수는 없었다. 자체적 개혁에 실패한 조선은 멸망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는 운명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지배층에 대한 불신의 뿌리도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었던 조선 시대 지배층의 이런 성격이 이어진데 있는지도 모른다. 일반인들에 비해서 턱없이 높은 병역면제의 비율, 외국 국적 취득을 통한 병역 기피, 가진 재산과 소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세금,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건강한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에 혜성같이 등장했던 대원군이 뒤늦게 호포법을 실시해 모든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았으나 1백년 이상 역사발전을 가로막았던 오류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시간이 많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의식의 붕괴를 막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회복인 것이다.
<출처> 山寺愛人 (dwban22.egloos.com) #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