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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 <계유정난> 명분 없는 쿠데타였나?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6.04.15|조회수520 목록 댓글 0

‘역사는 돌고 돈다!’는 불편한 진실!


 

▲ 야전부시도 (夜戰賦詩圖), 31×41.2㎝
이 그림은 세조 때, 함경도 도제찰사 신숙주가 여진족을 물리친 이야기이다. 전투의 혼란 속에서도 신숙주는 누워서 막료를 불러 적군을 위로하는 시 한수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신숙주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출처: 고려대학교 박물관


 ‘4월은 잔인한 달’, 엘리엇의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올해 4월은 잔인한 달이다.
바로 선거가 있는 정치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의 발달과 몰락에는 규칙적인 주기가 있음을 주장하여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다. 그는 문명의 성장이란 문명을 이끄는 창조적 소수자가 그 문명이 직면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치인도 창조적 소수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이 정치의 계절에 세상에 넘쳐나는 ‘자칭 창조적 소수자’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런 밝은 눈은 ‘역사에서’ 키워야 한다.
계유정난은 조선 초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5·16과 12·12 군사 쿠데타처럼 현대사에서도 되풀이 되는 것을 보면,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다.

 

숙주나물을 아시나요?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던 신숙주와 성삼문은 한글창제에 기여한 집현전 학자였다. 신숙주가 한 살 위였지만 “성삼문이 없는 나는 이미 허물어진 뼈와 다름없다.”라고 했을 만큼 그들의 우정은 깊었다. 그러나 계유정란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둘의 우정은 명분과 실리의 길에서 갈라서고 말았다.


신숙주와 수양의 만남 


 특히 세종이 신숙주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추운 겨울 집현전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엎드려 잠든 신숙주를 보고 자신의 어의를 벗어 덮어준 일화에서 보듯이 세종이 얼마나 신숙주를 아꼈는지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신숙주는 선비로서 학식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유연한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리고 외교와 병략에도 재능을 보인 만능형 인재였다. 이러한 능력의 신숙주를 눈여겨 본 이가 바로 수양대군(세조)이다. 1452년 당시 집현전 직제학이었던 신숙주는 단종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나라 사은사로 떠나던 수양대군과 동행하게 된다. 어쩌면 이 여행으로 두 사람이 교감하여 뜻을 같이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사육신이 된 성삼문 


 한편 선왕의 유지를 받들던 성삼문은 세조 즉위 이듬해에 이개, 하위지, 박팽년, 유성원 그리고 무관 유응부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위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거사는 동지였던 김질이 배신함으로 실패로 끝났다. 오늘날 성삼문을 비롯한 이들을 충의와 절개의 대명사인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르고 있다. 이들 여섯 명을 특별히 사육신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른바 ‘생육신’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는 남효온이 <추강집>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서 여섯 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숙주나물>로 다시 태어난 신숙주 


 한편 신숙주는 세조 집권 이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가의 의례절차를 담은 오례의와 병서 등 수많은 책을 편찬하며 조선의 문화부흥을 견인했다. 그는 병법에도 능해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특히,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이처럼 신숙주는 여러 분야에서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큰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신숙주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관대하지 못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면서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추진됐고, 신숙주 등 정난공신에 대한 평가는 나빠졌다. 민중은 쉽게 상하는 녹두나물에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때문에 그에게 ‘변절자’라는 이미지가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문충(文忠)공 VS 충문(忠文)공 


 성삼문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 ‘충(忠)’을 다하며 목숨을 바쳤다. 그의 대의는 단종을 잘 보필하는 것이었다. 반면, 신숙주는 왕권강화를 위해 현실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그에게 대의란 조선을 튼튼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강한 군주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고, 신숙주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충(忠)을 위해 목숨을 버린 성삼문과 문(文)을 우선하고 그 발전에 기여한 신숙주, 두 사람의 삶을 그대로 나타낸 시호 같아 4월, 정치의 계절에 ‘지조’와 ‘변절’이란 말에서 무상함이 묻어난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

진양대군이 수양대군으로


 세종대왕과 소현왕후는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첫째가 문종이고, 둘째가 세조(수양), 셋째가 안평이다. 원래 수양의 이름은 진양이었다. 수양이란 이름으로 고친 사람은 세종이다. 아마 수양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수양은 어린 조카인 성왕을 성군으로 만든 주나라의 주공(周公)처럼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수양이 세조가 되어 단종 폐위까지 이르는 최악의 상황으로 나타났다.


고명대신들의 등장


 문종은 왕이 된 뒤 2년 만에 병사하였고, 아들인 단종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때 단종의 나이가 12세이다. 문종은 황보인, 김종서 등을 고명대신으로 임명하여 자기가 죽은 뒤 단종을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또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도 같은 당부를 하였다.


피바람을 몰고 온 살생부


 그 후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년), 당시 실권자였던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건 직후 수양은 김종서가 모반하여 급하게 척결하였다고 단종에게 사후 보고하였다. 곧 이어 왕명이라고 속여 대신들을 소집한 뒤, 미리 준비한 살생부에 따라 대신들을 궁궐에 불러들여 차례로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심지어 라이벌 격인 안평대군이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을 내렸다. 이렇게 수양대군은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때 그는 국무총리, 행자부장관,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의정부영사와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겸직하였다. 또 정인지를 비롯한 측근들을 중용하였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癸酉)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한다.

관련도서
왕도와 신도 | 김용상 글, 나남
공주의 남자 | 이용연 글, 페이퍼스토리
수양대군 | 유주현 글, 신원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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