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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

[옮긴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6.06.13|조회수110 목록 댓글 0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1667~1701)는 조선 숙종의 계비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680년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사망하여 불과 반달 만인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그녀는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했다. 왕자를 낳지 못해 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15세에 결혼하여 3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


더욱이 명성왕후의 사후 숙종은 과거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궁인 장씨(張氏:희빈장씨)를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기 위해 영빈김씨를 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킨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숙원이었던 장씨는 귀인 김씨에게 문안을 들지 않았다. 장씨의 교만함에 인현왕후는 장씨에게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씨는 회임을 하였고, 숙종의 총애를 더욱 받게 되었다. 당시 장씨는 독이 든 대추를 인현왕후와 김귀인에게 보내 회임을 막으려 했다고 전한다.


1688년 후궁 장씨(소의 장씨)가 아들 윤(昀)(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이를 미루자고 주장했다. 원자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한다. 장씨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


폐출된 지 5년이 지난 1694년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여 정권을 교체한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며 그녀에게 왕비 복위령을 내렸다. 동시에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된다. 본래의 희빈 작호를 돌려받은 것이다.


그 뒤 민씨의 복위가 결정되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겼다. 노론은 장씨의 친정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칼끝을 돌려 남인과 함께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남구만과 소론의 강력한 제지로 남인 영수 민암 부자만 죽이고 장희재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35세로 사망한다. 민씨 사망 2개월 후 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는 숙종에 의해 사사된다.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다.


인현왕후 민씨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책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졌다.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녀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된다.


한편 장희빈은 인조의 계비가 되는 장렬왕후 양주조씨의 수발나인으로 궁에 입궁하였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은 여인이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남인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시어머니 명성왕후한테 궁 밖으로 쫒겨났다. 무려 6년이 넘는 세월을 궁 밖에서 보낸 것이다.


명성왕후가 4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녀는 숙종이 아닌 인현왕후의 명으로 다시 입궁했다. 궁에 들어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숙종의 첫아들 경종(敬宗)을 낳아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그 뒤 서인이 실각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이었던 남인이 정권을 잡자 중궁(中宮)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남인의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던 숙종이 인현왕후의 재입궁을 시작으로 남인을 실각시켰다. 다시 서인을 등용하는 와중에 그녀는 취선당에 유폐되었다. 7년 후에 인현왕후가 죽자 그녀를 저주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자진하는 것으로 그녀의 기구했던 인생은 끝이 난다.


한편 화경숙빈 최씨는 집안이 한미하여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로 궁에 입궁하였다. 그러나 몰락했다고는 하나 그녀는 엄연히 양반의 신분이었다. 중인의 신분이었던 장희빈과는 신분의 차이가 있다.


최씨는 인현왕후를 복위하기 위해 장씨를 자주 참소했다. 이로 인해 숙종과 장씨의 사이가 멀어졌다. 그녀는 숙종에게 세 아들을 연달아 낳아 주면서 당시 세자였던 경종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서인이자 노론측이 그녀의 아들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인현왕후가 죽고 난 후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야기를 숙종에게 고한 것은 그녀였다. 자신의 아들인 연잉군을 세자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도 장씨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한다. 당시 인현왕후와 최숙빈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장희빈과 화경숙빈은 모두 숙종이 정궁에게서 얻지 못했던 후사를 낳아준 여인들이다. 각자 자신이 낳은 아들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살았다. 그래서 후사 문제와 숙종의 총애를 가지고 대립했다.

인현왕후와 장씨가 대립했듯이 장씨와 최씨 역시 대립을 했다. 훗날 장씨의 아들은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19대 임금 경종이 된다. 그리고 최씨의 아들은 경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20대 임금 영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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