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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20.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1) 우리는 원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6.09.20|조회수100 목록 댓글 0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우리는 원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매장과 풍수

 

우리나라가 아주 옛날부터 예를 숭상하여 사신을 매장해왔던 것으로 알면 오산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묘지라는 것이 없었다. 모두 화장이었다. 고려 시대도 왕족들은 화장하고 남은 뼈를 작은 관에 넣어 묘를 만들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성리학을 국가 기본 사상으로 삼으면서 화장을 야만의 관습으로 주지시키니 그때부터 온 나라가 묘지강산이 되고 말았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오래된 화장 국가였다.

 

1700년대까지 중국도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선조 27년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 중 한 사람이 죽었다. 중국 측에서는 화장으로 하겠노라고 부탁해왔다. 조정에서는 당연히 시신을 관에 넣어 운반할 것으로 알았다가 화장을 하겠노라고 하니 개탄해 마지 않았다.

 

1546년 명종 1년에 표루하여 유구국에 갔다 온 제주도에 사는 박손의 보고에 의하면 그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위 아래 방을 만들고 화장을 해서 남은 뼈를 거두는데 온 일가가 한곳에 안치되어 있고 봄 가을로 들어가 제사를 모신다 하였다.

 

몽골에서는 왕비가 죽어도 화장을 했으니 오랑캐 풍습이라고 얼마나 멸시했을까?

 

조정의 강권으로 온 백성들이 매장을 시작했지만 그 절차가 너무 까다롭고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상복을 입는 초상 기간도 양반은 3년이고 상민들은 100일로 하더니 얼마있지 않아 앞으로는 모두 3년으로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중종 때 조광조 등 사림파의 유교 정책 개혁으로 상하 구별 없이 모두 3년상을 치르라는 강제 명령이 내렸다.

 

그렇게 되면 산소 근처에 초막을 짓고 3년간 거주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굿은일도 하지 않고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음식도 간소하게 막어야 한다, 양반일지라도 과거 응시를 불허했다. 3년간은 모두 일시 휴직상태에 들어가야 하고 그걸 어기면 엄벌에 처했다.

 

세조 때 조효례는 이것을 어기고 1년 만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발각되어 규정대로 하면 곤장 80대를 맞아야 하지만 80세 된 공신의 아들이라 하여 관리 임명장의 직첩만 회수되었다. 그 후 왕이 바뀌고 관직에 임명은 되었으나 과거의 그런 경력 때문에 끊임없이 파직 상소에 시달려야 했다.

 

성종 때의 유생 유진도 모친상 3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과거에 응시했다가 적발, 영영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매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나타난 것 중의 폐단이 본격적인 풍수사상이다. 한국의 풍수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이것은 땅과 공간의 해석과 활용에 대한 특유의 사상으로 세계에서 이것을 신봉하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뿐이다.

 

하도 복잡한 세계라 뚜렷한 원칙도 별로 없어서 먼저 주장하는 사람이 임자인 분야지만 근래 들어 최창조 교수가 '자생풍수'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이론을 만들었다. '지금 좋은 명당이란 가기 쉽고 아늑하면 된다'는 솔직하고 간편한 이론이다.

 

중국이 하는 일은 모조리 상전국의 발달된 문명으로 받아들은 것이 조선인데 이런 풍수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턱이 없다. 당연히 본격적인 풍수가 만개한 것이 조선이었다.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는 별로 풍수라는 사상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왕들이 먼저 솔선하여 풍수를 맹종하고 지관을 우대했다.

 

태조의 역활은 이런 점에서 못할 일을 많이 만든 사람이다. 그의 측근 하륜은 고급 지관으로 서울 천도를 주장한 사람이다. 태조는 그에게서 풍수이론을 많이 익혔다. 그는 본격적으로 '음양 산정도감'이라는 부서를 만들고 지리와 도참에 대한 여러 책을 모아 연구토록 했으니 이곳이 바로 조선 풍수의 시작점으로 본부격이었다.

 

조정 대신들도 풍수에 대해서 기본 지식을 익혀서 모두 반 풍수 전문가가 되어 조정 안에서도 공공연히 풍수 논쟁이 벌어졌다.

 

1457년 세조 3년에 세자 도원군이 죽었다. 묘지를 찿기 위해 조정이 시끄러웠다. 세조는 대신들을 불러 지관이 살펴본 산형도를 가지고 왕세자의 묘지를 의논했다. 이쯤 되면 조정이 아니라 풍수 왕국이 된 셈이다.

 

왕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현장을 답사하게 하니 돌아온 강맹경 등이 보고하기를,

'신 등이 살펴 본 여러 산들은 모두 쓸 수 없었으나, 오로지 한강 나루 남쪽에 북북서를 등지고 남동향의 금산이 있는데 쓸 만합니다."

 

정인지가 홀로 반대하면서,

"그 산은 산이 물을 따라 달리니, 왼쪽으로 안고 돌지 않아서 결단코 쓸 수 없습니다. 다시 좋은 곳을 골라야 하겠습니다."

 

노목은 여러 사람의 의논과 같았고, 안효래, 조수종 등은 정인지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전지하기를,

"나는 항상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랐다. 내일 날이 개면 마땅히 친히 가서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니, 경 들은 나를 따르도록 하라." (세조실록 3년 9월 10일)

 

다음 날 임금이 한강을 건너 사평원 동쪽 언덕에서 그 땅을 살펴보았다.

"주맥이 어지럽게 흩어져 기운이 귀일하지 않으니,  결코 쓸 수가 없다."

 

이쯤 되면 왕과 신하 모두 풍수 전문가였다. 매번 왕실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하나둘 아닐 터인데 그때마다 조정은 풍수 논의장이 되었을 것은 뻔하다.

 

능을 정하는 것도 빨라봐야 한 달이다. 영조가 승하하자 능을 정하는 데 걸린 날짜가 36일로 이는 매우 빠른 편에 속한다. 물론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 이미 도처에 왕릉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옆에 안치하느라 빨리 끝나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풍수들이 이 일을 주도적으로 맡았으니 그들의 말도 사람마다 다르고 앞뒤도 서로 맞지 않았다.

 

영조 승하 후 정조가 왕 위를 물려받고 선왕의 산릉을 정하고, 능 이름을 원릉으로 정했다. 위치도 처음에는 홍릉 쪽으로 정했다가 다시 근처를 두루 살펴보았는데 의논이 제각각이었다.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므로, 여러 차례 대신들과 예조 당상을 보내 다시 여러 곳을 찿아보게 하였다. 옛 영릉 자리가 완전한 길지라고 말하는 의견이어서 영의정 김양택, 좌의정 정존겸, 판중추부사 김치인 등 여러 관계 대신들의 의견을 물으니, 김양택과 이은이 말하기를,

 

"이미 중험해 본 땅이 마치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정존겸은 반대했다.

"더 없이 중요해야 할 자리에 틈이 있습니다."

 

송시열도,

"석회가 굳데 엉키어 있어 크고 작은 도끼가 서로 부딪치므로 신의 마음이 애통스러우며 마치 도끼가 가슴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김기량이 말하기를,

"옛 영릉 자리의 형세는 건원릉과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국세가 비록 건원릉의 주가 되기를 하지만 정간의 정신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유동형이 말하기를,

"불암산의 정간의 면목이 모두 이곳으로 향하고 있으니, 진실로 완전한 대지입니다."

 

김상현이 말하기를,

"온 국(局) 간의 원기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산을 보아 온 지 50년이지만 이런 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정조실록 즉위년 4월 11일)

 

결국 이런 논란 끝에 그대로 능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결코 만장일치는 아니었다.

 

효종 때 인조의 능을 결정할 때도 대사헌 조익이 차자를 올렸는데,

"당초 장릉으로 결정한 것은 지관 이간의 주장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관 김백련은 그곳이 좋지 않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또 듣건데 그 뒤에도 좋지 않다고 말하는 술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길흉도 분간되지 않고 의혹도 풀리지 않았는데 그대로 그 자리에 능을 모신다면 무궁한 후회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술사들을 모아 다시 살펴보고 각각 소견을 진술하게 하면 그 길흉을 판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예조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니, 아뢰기를,

"장릉을 처음 정할 때는 모두 길지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말들이 서로 다른니 새로 논의해야 되겠습니다."

 

총호사 이경석이 이뢰기를,

"당초 장릉을 정할 때 지관 김백련이 산세를 논하면서 그 자리가 으뜸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아니라고 하니 그 자는 본디 믿을 만하지 않으므로 무시해 버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논란이 다시 심해지니, 왕이 결정하기를,

"그 산릉은 선조께서 직접 정하시고 이미 사후에 묻히시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더구나 자손이 번성하고 조금도 해로운 것이 없다. 다만 술사들에게 묻기로 한 것은 조금이라도 미진한 곳이 잇으면 보강하여 미진한 염려가 없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제와서 자리를 옮길 수는 없다." (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

 

결국 논란을 일으켰던 최초의 발언자 조익은 이 때문에 면직되고 말았다.

 

세조가 죽고 나서도 시끄러웠다.

"지나번 지관들을 불러 길흉을 물으니, 최호원이 명당이지만 위치가 비뚤어져서 보토를 해야겠다 말하더니 이제 현지에 가서 물으니 이번에는 자리가 좁아서 쓸 수 없다면서 억지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이는 반드시 남의 촉탁을 들은 것이다. 잡아다가 추국하도록 하라."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3일)

 

이처럼 조선은 민생이 토탄에 빠지고 유랑자가 늘어나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이런 풍수와 장례, 제사 등으로 국력를 낭비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풍수에 입각하여 명당 자리를 찿기 위해서 지리한 논란을 거듭하여 겨우 선정하고, 갖은 예를 다하여 정례를 3년 동안 치르고, 때마다 성의를 다해서 제사를 올리고 축원하였건만 선조 때는 임진왜란을 당하고 정묘재란을 당하였으며, 인조 때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장자가 왕위를 이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 서출들이 왕위를 이었고 조선 팔도 사방에서는 민란이 발생하고 반정과 반란과 빈발하였다. 부자, 형제, 혈륙 간에 치열한 왕위 다툼은 물론 여러 차례의 당쟁으로 수많은 사대부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외척과 척신들이 준동하여 권력을 농단하다가 결국에는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500년 역사를 유지한 것이 풍수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운좋게 명맥을 겨우 유지하였을 뿐이었다. 잘못된 사상을 도입하여 시작된 조선은 허레와 허식이 가져다 주는 폐악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고 조선이 망한 이후 한반도는 일제치하 36년,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두 동강 나 버렸고 이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수많은 목숨이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이 땅은 풀뿌리 하나 제대로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그후 63년, 지금까지도 남북이 서로 대치하면서 치열한 싸움질로 세월을 이어왔다.

 

헬기를 타고 한번 이 땅위를 날아보아라, 온 산들이 종기가 나 것처럼 묘지 투성이며 어디를 가던지 군데군데 묘지가 없는 산이 없을 정도이다. 이제는 묘지를 쓸 자리도 없고 장소도 없다. 주인없는 묘지도 허다하고 왕릉처럼 꾸며 놓은 돈많은 후손들의 묘지도 많다. 그래서 납골당이 등장하였지만 그것도 문제인 것이 최소한 수천 만원의 비싼 비용을 들여가며 모신다.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때뿐이다. 한 10년만 지나봐라, 찿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기억에서 가물가물 멀어져 간다. 인생은 어치피 한번 왔다가 바라처럼 사라지는 것인데 이렇게 재력과 국력을 낭비하여 왔으니 나라가 온전할 리가 없었다.

 

모두가 허세이며 허식이다. 땅이 좁은 이 나라에서 이제 매장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장례, 제례도 간소화내지 없애고 화장을 하여 수목장이나 자연장을 장려하여야 한다. 장례문화의 번잡성과 낭비는 우리 미래의 적이다. 대부분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재물을 과다하게 낭비하고 번거러운 절차와 형식으로 재력과 예를 논하지만 모두가 허식이다. 그래서 그런 폐악을 우리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유교의 각종 허례허식의 폐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하는 것이 첯째이며, 둘째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불행이 이러한 폐악에서 비롯된 것이니 만큼 그 좋다는 풍수사상은 이 땅에서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   

 

 

천도, 집권 그리고 풍수

 

조선에서 이런 풍수와 지관을 규탄하고 있는 것은 광해군 때의 명 문장가 이정귀가 대표적인 듯하다. 광해군은 지관 이의신을 매우 신뢰했는데 그는 서울을 떠나서 한강 하류의 교하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여 광해군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도성의 왕기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으로 옮겨야 한다는 이런 주장에 예조판서 이정귀가 상소하기를,

"삼가 이의신의 상소를 보건데,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이 사람을 현혹시킬 뿐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풍수의 설은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말로 괴상하고 아득하여 본디 믿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성상께서 나라를 세우려고 여러 곳을 살펴보고 여러 해를 경영한 끝에 끝내 이곳에 정하였으니, 깊고 먼 계략을 어찌 미미한 일개 술관과 비교하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의신은 임진년 변란과 역변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과 조정의 관리들이 파당하는 것과 사방의 산들이 벌거벗은 것이 모두 서울의 위치 탓이라고 합니다. 왜적의 무도한 침략이 서울의 위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무지한 백성들이 국법을 존중하여 도끼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산의 나무는 저절로 무성할 것입니다. 편협되고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왕도를 바로 세우면 조정의 의논도 저절로 통일될 것입니다. 이는 모두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 모두가 힘써야 할 바입니다. 고금 천하에 이찌 그런 것을 이유로 국도를 옮기는 일이 있었습니까.

 

듣건데,  그 사람은 상당히 구변이 있고 문자도 제법 알기 때문에 방서에 의거하여 큰 소리 치고 있으나 실상은 그들의 동료들도 비웃는 자가 많다 하며 사대부의 가문에 묘 자리와 집터를 지정해준 것도 대부분 효험이 없다 합니다.

 

그가 이른바 교하 땅은 복지이고 한양은 흉하다 하고 있으나 당당한 국가가 어찌 일게 필부의 허망한 말을 선뜻 믿어 2백 년의 굳건한 터전과 살고 있는 수많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일거에 떠돌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터전을 장대하게 하고 영원한 명을 비는 참다운 도리는 다만 올바른 정치와 취사를 살피는 것, 백성들을 사랑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는 것, 내정을 잘 닦고 외적으로 물리치는 일뿐입니다. 참으로 이 도리를 반대로 하면 비록 해마다 도읍을 옮긴다 하더라도 위란만 불러들일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4년 11월 15일)

 

이미 중종 때에도 천도에 관한 주장이 일어나자 중종은 이와 비슷한 조처를 취했다. 술수에 관한 그림이나 서적을 엄금토록 명한 것이다. 그런 책을 좀 읽고 와서 종일 떠들어대니 서운관에 명하여 술수. 지리에 관한 서적을 모두 없애 버리게 했다.

 

근래 1980년대의 일이다.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풍수 한 사람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박정희 대통령 묘지 아래 상당한 물이 흐르고 있어 천하의 흉당이다. 물이 없다면 내가 지관 노릇을 그만두겠다.' 그런 호언장담을 해서 실제로 시추를 해 보기로 일정이 잡혔다. 방송사에서도 촬영준비를 하고 기다렸지만 정작 그 시간이 되자 지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풍수는 조작된 허황된 학문에 속한다. 조선 시대 당시 최고의 지관들이 고르고 고른 땅이 대부분 왕릉이 들어선 곳이다. 그러나 조선은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강남구 도심 한복판에 선릉이 있다. 여기 기막힌 사연이 있는데, 그 능은 9대 왕 성종과 그 왕비인 정현왕후가 묻힌 곳이다. 그런데 처음 그곳에는 원래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이 묻혀 있던 곳이다.

 

성종이 죽자 당연히 묘지 논란이 일었고 온갖 풍수논쟁이 벌어졌다. 영의정 윤필상을 비롯하여 당대의 풍수 실력가인 노사신 등 5명이 쓸 만한 묘터를 찿아 헤매더니 드디어 광평대군이 묻혀 있는 선릉 자리를 강력히 추천했다. 조선 왕실의 어떤 자리보다도 명당이며 길함이 있을 뿐 흉이 없는 유일한 곳이라고 하였다. 광평대군의 묘는 이장하면 되었다.

 

왕은 망설였지만 이런저런 논리에 눌리고 말앗다. 좌청룡, 우청룡이 뭐며 사유를 다 갖다 붙이고 사람의 복이 미약한데 왕의 땅에 묻혔으면 오히려 흉한 것이다며 옛날부터 명당은 옛 무덤을 파내지 않은 곳이 없다며 현란하게 주장하여 광평대군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성종과 왕비가 묻혔다.

 

그 결과는?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연을 듣고 폭정이 계속되었고 많은 대신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쫓겨나고 말았다. 지금 선릉에는 성종과 왕비의 시신이 없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묘지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서 모두 불살라버린 것이다. 그 대신 쫓겨서 내려간 광평대군의 후손들은 번창하여 화가 복이 되었다.

 

대원군은 집권하기 전까지 지관 정인만에게 부탁하여 전국의 명당 터를 수소문했다. 드디어 지관은 최고의 명당 터라면서 덕산의 한 산기슭을 알려 왔다. 대원군이 직접 그곳에 가보니 그곳에는 가야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었다. 그는 가보로 내려오고 있던 귀한 단계 벼루를 팔아서 충청감사에게 뇌물을 주고 절을 헐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연천 남송정에 묻혀 있던 선친 남연군의 시신을 상여에 담아 5백 리 길을 모셔와서 매장했다.

 

그 결과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고 훗날의 고종이 되었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펴던 대원을 궁지로 몰 요량으로 외국 군대가 상륙하여 남연군의 묘지를 파헤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이 유택을 보고 연구하려는 풍수를 연구하는 지관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과연 그 터가 명당 터일까? 오백 년간 긴 왕조가 망해버리고 왕비 민씨가 일본놈들 손에 죽었고 왕 역시 비운에 죽었는데 그 터가 명당 터란 말인가? 자손은 일본으로 끌려가고 후손도 모두 흩어져 버렸으며 정작 자신도 평화롭게 죽지 못했다. 이처럼 나라를 망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으니 그 터가 명당이 아니라 지독한 흉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전북 모악산 최고의 명당에 긴일성 선조의 묘가 있다. 그 묘 때문에 5백 년 뒤에 민족의 숙적 김일성이 태어났단 말인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프리카 케냐가 고향인데 그곳의 명당에 선조가 묻혀 있단 말인가?

 

1980년대 국내 최고 재벌이었던 한 사람도 지관을 동원, 명당에 선조들을 모셨지만 얼마 후 회사는 망하고 말았다. 그때 지관의 해석이 가관이다. 명당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사람의 사주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풍수관행이 뿌리 깊이 남아 있는 시대지만 잘  된 사람들이 조산의 무덤을 잘 써서 그리된 것은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강하고 풍수지관들의 현란한 말 쏨씨에 넘어가 잘 된 사람들의 묘지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현혹시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지관들은 또 이렇게 과학적인 이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시신이 아무리 썩어도 대퇴부의 큰 뼈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기가 살아 있는 자손들에게 텔레파시를 교환한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자손을 도와주기 힘든 터에 죽은 시신의 텔레파시가 도와준다는 이론이 허망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묘지를 잘 쓰면 몇백 년 후에는 왕이 나오고 재벌이 나온다? 하긴 태조부터 그런 걸 신봉했으니 후손들이 별 수 있었겠는가?

 

이런 풍수이론이 등장한 것이 바로 조선의 매장문화 때문이다. 화장을 하면 이런 풍수가 나올리가 없을 것이고 명당이론이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빨리 우리 사회가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장례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헬기를 타고 한번 우리 나라 땅 상공을 날아보라, 온 산천이 묘지로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온 국토의 산들이 종기난 산처럼 부스럼이 더덕더덕 난 모습이다. 이 모두가 나라를 병들게 만들었고 허송세월을 보내게 했으며 허례와 허식에 빠진 사상인 조선 시대의 유교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기둥뿌리 썩어가도 고담준론으로 수백 년

 

 

민생은 없고 권력 싸움만 벌인 조선

 

여자들의 치마자락을 왼쪽으로 두르느냐 오른쪽으로 두르느냐 그것을 두고 시끌벅적한 회의와 대립이 계속되었던 나라가 바로 조선왕조다. 노론과 소론 사이에 그런 치열한 대립이 있었는데 패션이나 편의성을 가지고 대립한 것이 아니라 음양오행설을 가지고 그렇게 다투었다.

 

각 왕조의 정월 초하루와 연말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두 가지다. 하나는 통상 연초에는 그해 새로운 계획으로 이런저런 일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계획 자체가 일체 없었다는 점이며 년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올해의 잘한 일 잘못한 일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 같은 것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런 것도 전무하였다.

 

그 대신 정월에 왕들이 가장 치중한 것이 제사 모시는 것이었다.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망궐례를 비롯하여 춘향대제, 창덕궁으로 들어가 선원전, 휘령전에 전배를 올리고 연복전에 작헌례를 올리고...... 그런 식이다. 그 논의들이 조정에서는 몇 달 전부터 치열하게 벌어진다.

 

왕들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왕은 공부와 회의를 많이 한다. 주강이라 하여 당대의 고매한 대신들의 강의도 듣고 경연이라 하여 신하들과 함께 공부와 토론, 그리고 대신들과 함께 상참, 조참 등 여러 모임이 있다. 다음에는 각 대신들과 지방관들이 보내온 상소 등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도 주요 업무다.

 

상당히 바쁘게 일과가 짜여 있다. 그런데 정작 바쁜 내용을 보면 좀 맥이 빠진다. 대부분 인사발령과 권신 집안의 초상 소식, 부의 전달, 들어온 선물, 권신들에게 내리는 선물, 헌릉의 비석 크기에 대한 논의, 지진 보고, 유언비어를 막으라는 지시, 봄 대제 모시는 문제, 초하루 제사를 모시는 논의, 가볍고 작은 배를 만들어 사용하라는 지시, 권신 한 사람이 죄인의 집과 혼사를 맺었으니 처벌하소서, 혼례 예물을 간소하게 하소서, 양녕대군에게 아첨한 무리들을 탄핵하소서, 조강지처를 내친 아무개를 처벌하소서, 금은 채취를 금하소서, 절도 3회는 중죄로 다스리소서, 이것만 보면 태평성대 시절의 한 모습 같다.

 

그 달 통틀어 회의에서 백성들을 위한 논의는 두 가지뿐이다. 굶주린 군정들이 각 고을을 떠돌고 있으니 구제하소서, 묵은 쌀 2천 석과 콩 1천 석을 풀어 백성들을 구조하라, 이상이 세종 5년 5월의 기록이다.

 

기록으로 본다면 그때도 기근이 들었다. 군정들이 성을 쌓고 길을 닦으며 농지 개간에도 동원되어 중책을 시행하고 있는 터인데 배가 고파 밥 동냥을 하러 일을 팽개치고 여기저기 떠돈다면 그야말로 국가 중대사인데 그냥 한두 마디로 끝내버린 것이다.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며. 어떤 대책이 나오면 그것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최종적으로 왕이 명령을 내리고, 그런 수순으로 진행되어야 하나 그런 일은 보이지 않는다. 그다음 달에도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백성들에 대한 관심은 적고 사대부에 대한 관심은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 문제로 한 달 내내 바쁘다 한들 백성들의 삶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지금 우리 국회를 봐도 그렇다. 국가적으로 가장 고민해야 할 교육문제, 실업문제, 주택문제, 복지문제, 사회적 범죄문제 등 그런 것으로 여야가 충돌하고 밤을 세우고 두둘겨 부수고 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국민들의 삶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문제로 해머를 휘두르고 단상이 점거되고 국화가 파행을 거듭한다면 조선 시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조선은 무수한 당쟁을 치렀다. 그 당쟁의 원인 역시 국가나 국민을 위한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오로지 조정 대신들끼리의 권력을 둔고 싸운 암투일 뿐이다. 요즘 NLL 문제로 국회가 시끄럽다. 여야가 서로 자신들의 명분과 상대를 죽이기 위한 싸움질일 뿐이다. 죽은 박정희, 노무현을 가지고 서로 깍아 내리고 싸우고 잇다. 야당은 박정희의 친일행각과 도덕성을 빌미로 박근혜 정권을 비하하며 깍아내리기에 혈안이고 여당은 죽은 노무현의 발언을 가지고 야당을 싸잡아 매도하려는 야당 죽이기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이 당장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것은 아니다. 또 전두환 비자금 환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해외 비밀계좌에서 전씨 아들의 계좌가 나오자 검찰이 전씨 환수금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행태는 죽은 권력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

 

태안 바닷가에서는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고등학생들이 5명이나 물에 빠져 죽었다. 헤엄도 못치는 무자격 강사들과 알바생들을 고용하여 주민들도 위험하다는 곳에서 버젓이 영업을 한 것이다. 그런 영세 여행사에게 그런 무자격 영업을 허가한 관계 기관과 지자체, 그 업체가 조달청 온라인 장터에 버젓이 올려져 있어 학교에서 선택하였다고 한다. 이런 업체들이 전국에 여름철이면 수천개가 난립하여 안전사각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담당부서도 서로 핑퐁치면서 최근 5차례나 바뀌었고 그래서 감독기관도 없고 사고도 빈발하고 있으나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름철 반짝 영업을 하는 업체들이 대부분인데도 그런줄도 모르고 고등학생을 그 곳에 반강제적으로 군대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사설 훈련장으로 보낸 학교 당국 등 모두가 안전에 무감각하고 치밀하지도 못했으며 전적으로 우리 사회와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인재이다. 또 비가 내리는 장마철 노량진 지하 급수관 공사장에서 돌관작업을 하던 중 물막이가 터지면서 불어난 한강물이 갑자기 유입되어 인부가 여럿이 죽었다. 또 분당 야탑역에서는 깊이가 꾀 깊은 에스컬레이트가 역주행하여 여러 사람이 다쳤고, 세종대 실험실에서는 황산이 폭발하여 사람이 다쳤다. 안전불감증이 죽어버린 사회다. 우리 사회의 각 시스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이익과 비리, 그리고 부패에 연연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이 나라는 청년실업과 주택문제,  부동산 경기 침체로 건설업체가 줄도산을 하고 장마로 인해 춘천 등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산사태와 침수로 재난을 당하고 도로가 붕괴되는 등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시아나기 사고 문제, 전작권 전환 문제, 개성공단 문제, 사회적 각종 범죄 문제를 포함하여 초고령,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고 사회적으로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문제를 개혁하려는 정부와 국회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현실이 과거 조선 시대와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었다. 단종을 죽이고 오아이 된 세조를 풍자한 그의 글을 실록에 실은 것이 발견되면서 반대파였던 유자광 등이 왕을 충동질하여 김종직 세력을 모두 죽였다. 이미 죽은 김종직의 시신을 파내 부관참시를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둘러싼 연산군의 개인적인 복수극이지만 한편에서는 왕권 확립 차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연산군은 게속된 폐륜적인 폭정으로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쫓겨나고 말았다.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반대파들의 보복이고, 을사사화는 소윤과 대윤 사이의 권력 싸움에 불과하다.

 

수백 명이 죽고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이런 사화는 백성이나 국가적으로 볼 때에는 터럭 한 올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건일뿐 모두가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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