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뿐 아니라 봉림대군(효종)도 인질로 끌려가는 것이 강화 조건 중 하나였다. 소현세자와 함께 명나라의 몰락 장면을 목도하면서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달랐던 게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소현세자가 여진족(만주족)이 중원의 새로운 패자가 되는 현실을 인정했다면, 봉림대군은 그들을 꺾는 설치(雪恥)를 꿈꿨다.
소현세자가 급서한 날은 인조 23년 4월 26일,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기로 작정한 날은 윤6월 2일이었다. 청 세조와 섭정왕 다이곤은 공부상서(工部尙書) 흥능(興能) 등을 소현세자 장례의 조제(弔祭)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들의 도착 예정 날짜가 윤6월 4일이었다. 이들이 소현세자의 뒤를 원손 석철로 하여금 잇게 할 것을 요구하기 전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결정하려는 것이 인조의 생각이었다. 청 사신들은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에는 공개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봉림대군으로서는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한 셈이었다. 봉림대군은 인조의 후사가 되었으나 문제는 원손 석철이었다. 이 민감한 문제는 석철이 인조 26년(1648) 9월 18일 제주도에서 죽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아들과 손자까지 죽인 인조가 재위 27년(1649)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세상을 떠나고 봉림대군은 5월 13일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했다.
효종은 원손(元孫)의 자리를 대신한 정당성을 북벌에서 찾았다. 그러나 강화조약에 군비 증강 금지 조항이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시선을 속이면서 군비를 강화해야 했다. 그러자면 표면적으로 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했다.
이건창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반정 초에 공신들이 회맹하면서 두 가지 밀약(密約)을 했는데 ‘국혼(國婚)을 잃지 말자’는 것과 ‘산림을 높여 임용하자’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국혼은 세자의 혼인을 뜻하는 것으로서 왕비는 서인 집안에서만 내겠다는 뜻이었다. 산림은 재야에서 독서하는 유학자들을 뜻하는 말인데, 쿠데타 명분이 부족했던 서인으로서는 이들의 지지가 절실했다. 효종 또한 산림의 지지가 중요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산림이 소현세자 부인 강씨의 신원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효종은 “지금 역강을 구하려 하는 자들이 어찌 역적과 다르겠는가?”라고 퍼부었다. 강빈을 신원하면 그 아들도 신원시켜야 했고, 효종의 왕위에 대한 정당성 시비가 일 수밖에 없었다. 효종이 강빈 옥사 언급을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이 문제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다.
산림도 사육신처럼 효종의 왕위를 거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을 추대하든지, 효종의 즉위를 인정하고 먼 후왕(後王)의 신원을 기다리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산림은 효종의 즉위는 인정하면서 강빈의 옥사는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조씨의 소행으로 돌리는 절충안을 택했다.
그러나 효종 5년(1654) 재변이 잇따르자 내외에 구언(求言)했는데 황해도 감사 김홍욱이 응지상소(應旨上疏:임금의 구언에 응하는 상소)를 올려 이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분개한 효종은 김홍욱을 압송해 친국했다. 구언에 따른 응지상소는 처벌하지 않는 관례를 깬 것이므로 큰 반발이 일었다. 이 사건은 효종과 산림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국왕은 제1사대부에 불과할 뿐 임금은 명나라 황제’라고 생각하는 서인에게 언로를 막고 사대부를 죽인 효종에 대한 거부감은 커져 갔다.
효종 4년(1653) 8월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를 올려 이상한 배 한 척이 난파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인이었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 북부의 텍셀(Texel) 섬을 떠난 일행은 그해 7월 16일 대만에 기착했다가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서 난파되었다. 하멜은 10월 말께 제주목사 관아에서 뜻밖에도 한 서양인을 만난다.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목사 이원진의 질문에 “홀란드(네덜란드) 사람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이원진은 껄껄 웃으며 “이 사람은 조선 사람이니 너희가 잘못 보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사람’은 26년 전인 인조 5년(1627)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벨테브레이(J J Weltevree)였다. 인조는 벨테브레이를 동료 두 명과 함께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화포를 개량하게 했는데, 동료 둘은 병자호란 때 전사했고 벨테브레이는 조선으로 귀화했다. 이듬해 서울에 올라온 하멜 일행은 효종에게 귀국을 간청했으나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을 내보내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멜 일행도 박연과 함께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북벌에 대비했다. 그가 바로 박연(朴燕)으로서 조선 여성과 혼인하고 후사도 둔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하멜 표류기』는 효종 5년 8월 ‘청나라 사신이 오자 국왕은 우리를 요새로 보내 사신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명했다는데, 그 요새가 남한산성이었다. 효종 때는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러시아와도 맞닥뜨려야 했다. 효종 5년(1654) 2월 청나라에서 온 차관(差官) 한거원(韓巨源)이 나선(羅禪:러시아) 정벌에 조선군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러시아의 하바로프(E Khavarov)는 원정대를 이끌고 흑룡강까지 진출해 강 우안(右岸)에 알바진(Albazin) 성(城)을 쌓고 군사기지로 삼았다. 만주를 선조의 발상지로 중시하던 청조는 효종 3년(1652) 군사를 보내 영고탑 부근에서 맞붙었으나 거듭 패배했다. 청은 효종 4년(1653) 사이호달(沙爾虎達)을 영고탑 지방 앙방장경(昻邦章京:장군의 명칭)으로 삼고 다음 해 명안달례(明安達禮)에게 북경수비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을 격퇴하라고 명하면서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조창수를 요구했다는 것은 조선 조총수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조 14년(1636) 청에 항복한 후 맺은 강화조약 때문에 청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효종은 함경북우후(北虞侯) 변급을 영장(領將)으로 삼아 군사를 파견했다. 제1차 나선 정벌군이었다. 조선군은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5월 16일 철군해 6월 21일 두만강을 건너 84일간의 원정을 마무리지었다.
청조는 이듬해(1655) 명안달례에게 호마이(呼瑪爾) 하구에 있는 러시아의 근거지를 공격하게 하고 효종 8년(1657)에는 사이호달을 보내 상견오흑(尙堅烏黑)에서 러시아와 싸웠으나 다시 패배했다. 그러자 효종 9년(1658) 재차 조선군의 출병을 요청했다. 효종은 일단 거부했으나 재차 회계(回啓)가 내려오자 함북병마우후 신류(申瀏:1619∼1680)를 총병관으로 삼아 정벌군을 구성하게 했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기회에 청군의 허실을 엿볼 생각이었다. 조선군은 이렇게 1, 2차 나선 정벌을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 청군과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효종은 더욱 강하게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삼전도의 치욕’ 이후 모두 북벌을 주창했지만 속내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효종과 병조판서 박서(朴筮)·원두표(元斗杓), 훈련대장 이완(李浣)처럼 실제 북벌을 단행하자는 쪽이었다. 다른 하나는 입으로는 북벌을 주창하지만 실제로는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반대하는 쪽이었다. 대다수 문신이 여기에 속했다.
효종은 재위 2년(1651) 8월 박서를 병조판서로 임명했다. 박서는 문관이었지만 도승지를 역임한 데다 효종의 군비 확장 계획에 대다수 문신이 반대할 때 홀로 ‘수륙군환정사목(水陸軍換定事目)’이란 군정 개혁 5개조를 내놓고 찬성했던 인물이다. 박서에게 지경연(知經筵)을 겸하게 한 이유는 경연을 북벌 논의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벌 대의에 동조하던 박서는 효종 4년(1653) 6월 급서하고 말았다. 효종은 박서의 뒤를 원두표에게 맡겼다. 원두표 역시 군비 증강을 지지하는 소수 문신 중 한 명이었다. 효종은 또 이완을 어영대장에 임명해 문무를 조화시켰다. 문신 원두표에게는 북벌 기획을, 무신 이완에게는 실행을 맡기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 대의 앞에는 수많은 암초가 가로막고 있었다. 가장 큰 암초는 사대부의 숭문천무 사상이었다. 임진·병자 양란을 겪고도 이런 사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효종은 이런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효종은 숭문사상에 젖은 사대부와 싸우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무장을 양성하려 했다. 무장 양성에 좋은 제도는 영장(營將) 제도였다. 임란 때 류성룡의 주도로 양반과 노비들을 함께 배속시켜 조직했던 부대가 속오군(束伍軍)인데 지방의 몇 개 속오군을 통합 지휘하는 직책이 영장이었다. 처음에는 무장이 임명되었다가 임란이 끝난 후 지방 수령이 겸직했는데 정묘호란 때 문신 수령들이 지휘법을 몰라 기껏 기른 군사들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병조판서 박서는 효종 3년(1652) 2월 “만약 군정을 다시 밝히려 한다면 무엇보다 다시 영장을 설치해야 합니다”며 부활을 건의했다. 효종은 의정부에 논의시켰으나 논의만 분분할 뿐 박서가 죽을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효종이 12월 무신 유혁연(柳赫然)을 승지로 임명한 것도 무신을 우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사헌부에서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효종은 문신의 반대를 묵살하고 유혁연의 승지 임명을 강행했다. 효종은 또 문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위군인 금군(禁軍)을 늘리고 창덕궁 후원(後苑)의 담장을 헐어 기사장(騎射場)을 만들어 주었다. 이처럼 갖은 방법으로 무장을 양성하고 군비를 증강한 결과 재위 6년(1655) 무렵에는 상당한 병력을 갖게 되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지 20여 년 만이었다. 효종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북벌에 나서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북벌 추진에 대한 문신의 반발은 작지 않았다. 가장 강하게 북벌을 주창한 세력이 숭명(崇明) 의리를 당론으로 삼던 산림(山林), 즉 산당(山黨)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효종의 군비 증강 계획에 안민을 내세워 반대했다.
효종 즉위년 우의정 김육(金堉)이 양호(兩湖:전라·충청)에 대동법 확대 실시를 주장했을 때 산당 영수 이조판서 김집(金集)과 송시열·송준길 등 양송(兩宋)이 일제히 반대했다. 양반 사대부의 반발 때문에 효종 2년(1651)에야 겨우 충청도만 확대 실시될 수 있었다. 안민은 결국 일부 사대부의 북벌 반대 명분이자 기득권 수호 논리에 불과했다.
효종이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재위 8년(1657) 무렵부터는 사대부의 집단 저항이 노골화되었다. 그래서 효종은 산당과 대연정을 구성하기로 결심했다. 효종 9년(1658) 9월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인사권과 탄핵권을 쥐었으니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셈이었다. 산당이 책임지고 북벌을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실제 북벌 추진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 11일 송시열과 담판을 지었다. 이른바 기해독대(己行對)였다. 효종의 북벌 주장에 대한 송시열의 대안은 오직 ‘자신의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수기형가’였다. 이날의 독대는 송시열에게 ‘더 큰 권력을 주겠지만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산당에게 준 정권을 회수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기도 했다. 송시열이 입장 정리를 위해 상황을 모색하는 동안 급변이 발생했다. ‘앞으로 10년은 보장한다’던 효종이 독대한 지 두 달이 채 못 된 재위 10년 5월 4일 급서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현종 즉위 직후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예송논쟁이 발생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12호 2009년 5월 3일, 제113호 2009년 5월 10일, 제114호 2009년 5월 17일, 제115호 2009년 5월 24일, 제116호 2009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