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려

[옮긴글][고려] 신화가 된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08.19|조회수53 목록 댓글 0

   

반원주의자 공민왕,
그가 원나라 노국공주와 사랑에 빠졌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함께 반원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켜 자주국가 고려의 꿈을 실현시켜 가는데…밤낮으로 죽은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왕은 항상 여자 모양으로 화장을 하였다 - <고려사>
 

 

1. 왕이 이상해졌다!  

1367년 1월.

공민왕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부인의 영정을 앞에 두고서.

아내가 죽은 지 이미 삼년째였지만 왕은 여전히 공주의 죽음을 부정하고 있었다.

"왕은 공주의 초상과 마주 앉아서 음식 드는 절차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 <고려사> (공민왕 16년)

그는 요동을 정벌하고 권문세족을 숙청했던 개혁군주였지만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질환, 정신병에 걸린 군주일 뿐이었다.

사랑을 잃은 왕의 마지막은 시리고..또 아팠다..

공민왕.

고려의 개혁군주로 평가받는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고려는 이미 기우러져 가고 있었지만 그가 왕이 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화려한 전성기를 맞는다.

공민왕 뒤로 우왕, 창왕, 공양왕이 즉위했지만 고려는 사실상 공민왕으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그런 공민왕이 정신질환을 앓았다.

공민왕의 정치적 업적과 달리 개인적으로 '정신병'이란 단어로 못박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에 아주 자세하게 실려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39권의 방대한 기록 <고려사(高麗史)>가 보관되어 있다.

고려왕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물론, 열녀와 간신 등 약 천여 명의 열전까지 실은 역사서다. 

그중 공민왕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왕의 본래 모습은 왕다웠다.

"왕위에 23년 있었으며, 나이는 45세였다."

"왕의 성격이 본래 엄격하고 신중하였으며 행동이 예의에 맞았다.                                     

"그러나 만년에 와서 의심이 많고 조포하며 질투가 강하였다." - <고려사> (공민왕 23년 9월)

같은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는 급격한 변모.

그 시작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과도하게 슬퍼한 나머지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로는 과도하게 슬퍼하여 의지를 상실했다." -<고려사> (공민왕 23년 10월)

왕비의 죽음을 공민왕은 감당하지 못하였다.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서 밤낮으로 마주 대하여

밥 먹으면서 슬피 울고 3년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민왕 24년 4월)

그녀는 몽골 사람이었다.

공민왕은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몽골음악을 듣고 또 연주했다.

"공주의 영정과 마주 앉아 연회를 베풀었으며 몽골 음악을 연주하였다."-<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시간이 흘려도 그리운 마음은 바래지 않았다.

공주의 영정이 빗물에 상하지 않을까 늘 살필 걱정했으며 공주의 생일에는 연회를 베풀었고 공주의 재일에는 직접 제사를 지냈다.

공민왕은 생시처럼 공주를 극진히 챙겼다.

공주를 보낸 지 8년이 지나도 공민왕은 여전히 공주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민왕 22년.

공주가 유난히 그리웠던 10월.

공민왕은 제사를 지낸 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능 밑에서 밤을 보낸다.

"왕이 친히 정릉(노국공주 무덤)에 제사지낸 다음

술좌석과 음악을 베풀어 놓고 그날 밤 능 밑에서 잤다." - <고려사) (공민왕 22년 10월)

 "공민왕에게 있어서는 노국공주가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는 듯 합니다.

성스럽고, 정신적 지주이고, 어머니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신용구(정신과 전문의)

 

  

충남 예산군 <수덕사>.

이곳에 공민왕의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리 풍부했음을 보여주는 그의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공민왕 금(琴)'이 있다.

'공민왕 금'은 수덕사의 승려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 이강(의친왕)으로부터 1899년 물러받은 거문고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 밤마다 슬픔을 달래 뜯었다고 하는 거문고엔 '공민왕 금'이란 금명이 선명하다.

거문고 바닥엔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이조묵의 시도 새겨져 있다.

'공민왕이 신령스러운 오동나무를 얻어 이 거문고를 만들었으니...'

음악을 사랑한 감성적인 공민왕.

그의 성격이 섬세한 만큼 슬픔은 깊었다. 공민왕은 공주를 잃은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시 1372년 10월 1일의 <고려사> 기록이다.

공민왕의 기묘한 버릇, 그것은 여장이었다.

"항상 자신을 여자 모양으로 화장하였다."- (공민왕 21년 10월) 

분명 기이한 모습이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다 정신병을 얻은 탓이라고 역사는 판단하고 있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을 얻었다." - (공민왕 21년 10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그 슬픔의 깊이가 고스란히 <고려사> 속에 스며들어 있다.                                                 

노국공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길래, 그야말로 국경을 넘어 영혼이 통하는 사랑이었던 듯 하다.

 

 

2. 반원주의자 공민왕, 원나라 공주와 사랑에 빠지다

그렇다면 고려 왕자였던 공민왕과 멀고 먼 원나라의 노국공주의 사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고려가 처했던 비극적 현실속에 그 답이 있다.

중국의 베이징.

베이징은 공민왕이 살았던 시절에도 '대도(大都)라 불리는 수도.

원나라 황제가 살았던 황도인 만큼 토성 등의 유적지가 곳곳이 남아있다.

'원 대도성 토성 유적지(元 大都城 墻遺址)' 

가로 24미터, 높이 12미터였던 토성은

600여 년의 세월에 늙어버려 이제는 작은 언덕으로 변해버렸다.

토성 내부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한 켠에

쿠빌라이 칸(원 세조, 1215~1294)의 석물이 세워져 있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베이징에 입성할 당시 모습이다.

원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전무후무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나라의 예술은 화려하게 발달했다.

이때 수많은 이민족이 유입되었고 원나라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관청을 설치했다.

"원나라 대도에는 외국인들을 접대하는 전문관청이 있었습니다.

그 관청은 대도성을 설계할 당시에는 외성 쪽에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교류가 늘어나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자 황성의 앞부분과 지금의 왕푸징에서 자금성에 이르는 북동쪽에 외국인 관련 시설을 집중 배치했습니다."- 진따수 교수(베이징대 고고연구소)

현재의 자금성은 명나라가 건국되며 새로 지은 것이다.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기 이전에 이곳에 공민왕이 있었다.


 

1441년.

열두살에 볼모로 끌여온 어린 공민왕.

공민왕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황태자의 시중을 들었다.

"몽골족은 원나라를 세운 뒤 투항한 정권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질들은 주로 원나라 황제의 호위군이 되었습니다.

고려의 많은 왕들 역시 젊은 시절, 원나라의 대도(수도)에서 황제의 호위군을 맡았습니다."- 짱판 교수(베이징대학 역사학과)

그러나 공민왕은 고작 12살.

이곳에서의 공민왕은 단지 어머니와 생이별한 어린아이 일뿐이었다.

외롭고 두려운 볼모생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지배는 왕자를 볼모로 잡아두는데 그치지 않았다.

원나라는 고려의 왕들을 맘대로 임명했고 또 폐위시켰다.

공민왕의 아버지와 형은 왕위를 두 번씩 주고받는 기행까지 겪었다.

父 - 충숙왕 : 1313~1330, 1332~1339,

兄 -충혜왕 : 1330~1332, 1339~1344.

고려의 왕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고려왕의 귀향살이도 흔했다. 

 

형 충혜왕이 왕위에서 내려오며 귀향길에 겪은 수모는 특히 모욕적이었다.

원 사신은 고려왕 충혜를 꾸짖고 때리기까지 했다.

"왕을 발로 차면서 포박하였다."

"원나라 사신은 고려왕을 꾸짖었다." - <고려사> (충혜왕 후4년, 1343)

충혜왕은 북경에서 2만리 떨어진 게양으로 귀향갔다.

수행하는 이가 없이 손수 옷보따리를 들고 떠났는데, 그 길로 단명하고 말았다. 충혜왕 나이 29살이었다.

"게양은 연경(베이징)에서 2만 리나 떨어진 곳이다."

"한 사람도 수행하는 이가 없어 손수 옷보따리를 들고 떠났다." - <고려사> (충혜왕 후4년, 1343. 12월)

그것은 고려의 비극이었고 공민왕 개인적 원한이었다.

"원의 집권기는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몽고족은 뛰어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래서 몽고족이 정복한 국가는 거의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려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 역시 국가의 독립은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원 집권기 중국과 동아시아 관계는 매우 특수하였습니다."- 짱판 교수(베이징대학 역사학과)


[출처] 본 게시물은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foryou8317/ 에서 스크랩 하였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