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치하 고려는 전쟁 그리고 또 전쟁을 거듭하는 처절한 역동의 시기였습니다.
동북아는 혼란의 도가니 였죠.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은 그의 즉위 5년에 이르러서야 무력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당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원의 역참인 8참을 공격해서 파사부[단동]등 3참을 격파하였고
같은 시기 류인우 휘하 고려군은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공민왕의 반원개혁은 절정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 1차 개혁은 두차례에 걸쳐 홍건적의 침입과 대규모 왜구의 침입에 의해 좌절됩니다.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한 고려에게 원제국과의 군사적 충돌이 시작됩니다.
1362년 요동 몽골 군벌 납합출과 쌍성총관부의 잔존세력 조소생의 연합군과 함경도로 진군합니다.
2월, 조소생이 원나라 심양행성 승상 나하추를 유인하여, 삼살홀면의 땅에 쳐들어오니, 도지휘사 정휘가 여러 번 싸웠으나 크게 패전하여 태조를 보내기를 청하므로, 이에 태조로써 동북면 병마사로 삼아 보냈다.
7월 나하추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조소생·탁도경 등과 함께 홍원의 달단동에 둔치고, 합라 만호 나연첩목아를 보내어 여러 백안보하 지휘와 함께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으로 삼았는데, 태조는 덕산동원의 들에서 만나 쳐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고, 함관령·차유령 두 재를 넘어 거의 다 죽였으나, 군기를 버린 것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이 날에 태조는 답상곡에 물러와서 둔치니, 나하추가 노하여 덕산동으로 옮겨서 둔쳤다. 태조는 밤을 이용하여 습격하여 이를 패퇴시키니, 나하추가 달단동으로 돌아가므로, 태조는 사음동에 둔쳤다. 태조가 척후를 보내어 차유령에 이르니, 적이 산에 올라가서 나무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지라, 적을 사로잡고 목 베어 거의 다 없애고, 스스로 날랜 기병 6백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가서 차유령을 넘어 영 아래에 이르니, 적이 그제야 깨닫고 맞아 싸우려고 하였다.
그 후 며칠 만에 태조가 함관령을 넘어서 바로 달단동에 이르니, 나하추도 또 진을 치고 서로 대하였다.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태조는 용감한 기병으로써 이를 짓밟으니, 적병이 저희들끼리 서로 밟았으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돌아와서 정주에 둔치고 수일 동안 머물면서 사졸을 휴식시켰다.
먼저 요충지에 복병을 설치하고서 이에 삼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성곶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군은 도련포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중군을 거느리고 송두 등에 나아가서 나하추와 함흥 들판에서 만났다. 유인하여 요충지에 이르러, 좌우의 복병이 함께 일어나서 합력해 쳐서 이를 크게 부수니, 나하추는 당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도망해 갔다
은패(銀牌)와 동인(銅印) 등의 물건을 얻어서 왕에게 바치고, 그 나머지 얻은 물건들은 이루 다 셀 수도 없었다.
이에 동북 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후에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어 화호(和好)를 통하여 왕에게 말[馬]을 바치고, 또 비고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태조에게 주어 예의(禮意)를 차렸으니, 대개 마음속으로 복종[心服]한 때문이었다
1364년엔 원과 최유가 옹립한 대립국왕 덕흥군 및 원군 1만여명과 평안도로 침입하였습니다.
공민왕 13년(1364) 갑진, 처음에 여러 기씨들이 참형을 당하니, 기 황후가 공민왕에게 감정이 있었다.
본국의 최유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장작 동지가 되었는데, 여러 불량배들과 더불어 기 황후를 달래어 왕을 구함하여 폐위시키고 덕흥군인 탑사첩목아를 세워 왕을 삼으려고 하여, 요양성의 군사를 내어 정월에 압록강을 건너왔다.
왕은 찬성사 안우경 등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였으나, 패전하여 물러와서 안주를 지켰다. 왕은 찬성사 최영에게 명하여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로 빨리 가서 여러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 태조에게 명하여 동북면으로부터 날랜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적병은 이미 패하여 달아났는데, 다만 먼지가 공중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1364년 여진족 대추장 김삼선. 김삼개가 고려의 동북부로 진격하다 패주하였고
태조가 한방신·김귀와 함께 삼면에서 전진해 공격하여 크게 부수어 그들을 달아나게 하고
화주와 함주 등 고을을 수복하니 삼선과 삼개는 여진 땅으로 달아나서 마침내 돌아오지 않았다
1364년 1월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북 영변]으로 칭곰하였다가 최영 휘하 고려군에 의해 패주하였습니다.
박백야대는 고려에 대한 원의 최후의 공세였습니다.
그로부터 4년뒤 1368년 원제국은 수도 대도가 명에 의해 함락되므로써 사실상 멸망에 길을 걷습니다.
공민왕 18년[1369] 동녕부를 공격하여 북원(北元)과의 관계를 끊고자 하여
12월에 태조를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삼고, 지용수(池龍壽)와 양백연(楊伯淵)을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삼았다
원제국이 붕괴되고 아직 요동과 만주의 힘의 공백기안 원.명 교체기.
공민왕은 즉시 원과의 관계를 단절합니다.
이어 공민왕은 충격적인 군사작전을 단행합니다.
북의 동녕부 정벌.
동녕부는 원종 11년에 원나라 세조가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자비령 이북을 원나라의 영토로 편입했는데 충렬왕의 요청으로 이를 폐지하여 그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겼습니다.
즉 동녕부는 발해 멸망후 우리가 잃어버린 고토.
동녕부는 요동입니다.
공민왕 19년 이성계.양백연 휘하 기병 5천과 보병 1만.
1만 5천여 병력이 동원되어 요동정벌을 시작합니다.
공민왕 18년, 아태조를 동북면 원수로 임명하여 동녕부를 공격하게 하고 이로서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19년 정월 태조는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초황 및 설렬한의 두령을 넘어 갑진(14일)에 압룩강을 건넜다.
이때에 동녕부 동지인 이월로치므르는 태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월라산성으로 옮겨들어가 험한 지대를 근거로 하여 거전하였다.
태조가 야돈촌에 도착하니 월로치므르는 이곳으로 와서 도전하였으나 갑자기 갑옷을 벗고 두번 절을 하고 말하기를,
"나의 선조는 본시 고려인이나 원컨대 신복이 되고자 하오"라고 하면서 3백여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그 부하 장사인 고안위는 그래도 성을 근거지로 하여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고려군은 이를 포위하였다.
당시 태조는 궁시를 몸소 지니지는 아니하고 그의 부하의 활을 취하여 편전을 가지고 사격하여 무릇 70여발에 모두 적의 얼굴을 쏘아맞추니 성안에서는 기세가 꺽이고 안위는 처자와 일족을 데리고 밤중에 성벽을 타고 도망쳐버렸다. 이튿날 성안의 두목 20여명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니 여러 산성에서도 정세를 관망하고 모두 항복하였다. 만여호의 항복을 받았는데 노휙한 소 2천 두와 말 수백여필은 모조리 주인에게 돌려주니 이곳 북방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여 아군에 귀순하는 자가 운집하였다.
동쪽은 황성까지, 북쪽은 동녕부까지, 서쪽은 바다까지, 남쪽은 압룩강에 이르는 일대에 이로써 북원 세력이 일소되었다
1970년 1월-2월에 거친 1차 동녕부 정벌을 통해 고려는 고구려의 첫 도읍이었던 우라산성[올라산성 혹은 오녀산성]을 함락시키면서 요동을 세력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투에 주목해야 할건 편전.
편전으로 대표되는 장거리 화력의 우위속에 고려는 비교적 손쉽게 천혜의 요새 우라산성을 점령합니다.
고려의 기새인치므르는 원나라에 입사하여 평장이 되었는데, 원이 망하자 요양지방의 분사관리들인 평장 김백안, 우승 합라파두, 참정 덕좌불화 등과 함께 원나라의 유민들을 소집하고, 동녕부 땅을 근거로 하여 그 부친인 기철이 처형된 것을 원망하면서 우리 북부 국경에 침입하여 복수하려 하였다.
공민왕은 19년 7월 아태조(이성계)및 서북면 상원수 지룡수와 부원수 양백연에게 명령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의주에 이르러 부교를 만들어 압룩강을 건넜는데 우리 군대는 3일만에 다 건넜다.
이날 저녁 뇌우가 갑자기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근심하였다. 병마사 이구는 말하기를,
"좋은 징조인데 무엇을 읫미하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원수들은 그 까닭을 질문하였다. 구는
"용이 움직일때에는 반드시 뇌우가 있는 것인데 이제 상원수의 이름이 용이요, 강을 건너는 날에 뇌우가 있으니 승전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여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나장탑에 도착하니 요동성 까지는 앞으로 3일 노정이었다. 물자들은 이곳에 두고 7인간의 양식을 가지고 떠났다. 비장 홍인계와 최공철 등을 시켜서 경무장을 한 기병 3천명을 인솔하고 가서 요동성을 습격하게 하였다. 적은 우리군대가 소수임을 보고 경시하다가 대군이 계속하여 도착하였으므로 성안에서 멀리 이를 바라보고 낙담하였다.
적장 처명은 자기 용맹을 믿고 그래도 전투를 하려 하였다. 태조는 이원경를 시켜서 그에게 권고하기를,
"너를 죽이기는 매우 쉬운 일이나 다만 너를 살려서 등용하려고 하니 속히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원경은 말하기를 "너는 우리 장군의 재능을 알지 못하고 있다.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단번에 쏘아 너의 몸을 관통시킬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그래도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는 일부러 그의 투구를 쏘아젖히고 또 원경을 시켜타일럿으나 또 듣지 않았다. 태조는 또 그 다리를 쏘았으나 처명은 화살에 맞아 달아나다가 얼마 후에 다시 와서 싸우려고 하였다. 또 원경을 시켜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시 너의 얼굴을 쏘겠다."라고 하였다. 처명은 마침내 말에 내려 머리를 땅에 대고 항복하였다.
어떤 사람 하나가 성 위에 올라와서 소리 지르기를 "우리는 대군이 온다는 것을 듣고 모두 항복하려고 하나 관원들이 억지로 항전케 하고 있다. 만약 당신들이 힘을 모아 공격한다면 이 성을 탈취할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은 매우 높고 가파르고 화살은 비오듯하였으며 나무와 돌을 퍼부었으나 우리 보병들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에 접근하여 공격하여 드디어 이를 함락시켰다
새인치므르는 달아났으나 김백안은 생포하였다. 성 동쪽으로 아군은 물러서서 나합출과 야선불화 등지에 포고문을 보내에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아군 부대는 성 서쪽 10리에 주둔하였는데 이날 밤 하늘에 적기(赤氣)가 있어 우리 진지를 비추었다. 천문관들은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진지에 임하였으니 옮기는것이 좋겠다"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철수하기로 하였다
처음 성이 함락되었을떄 아군은 창고에 불을 질러 이를 거의 다 태웠기 떄문에 양식을 조달할 데가 없었다. 이에 우마를 도살하여 먹었으므로 결진을 할 여가가 없었고, 추격해오는 적병이 있을 것을 경계하여 간도로 귀환하였다. 밤에 숙영할때에는 군대들에게 각각 뒷간과 마구를 짓도로 명령하였다. 나합출은 아군의 뒤를 2일간 추격하여 오다가 말하기를
"뒷간과 마구를 만들어 가면서 질서있게 행군하고 있으니 습격하여서는 안되겠다."라고 하고 돌아가버렸다.
이때 중국 사람들은 "성을 공격하여 반드시 탈취하는 것은 고려 사람을 당할자가 없다."고 말하였다.
이어 1970년 11월 제 2차 동녕부 정벌이 시작되었고 고려는 동녕부를 정벌하고 요성 우리의 역사에 자주등장하는 요동의 최중요 요새 요동성을 함락시키므로서 이 사건 이후 요동의 주요 도서는 고려에 귀부를 청하였고 고려는 요동을 평정하게 됩니다.
원의 세력은 요동에서 말소되었고 명은 아직 요동에 힘을 뻗지 못하고 있는 사이 요동은 고려의 힘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1371년 신해환국. 신돈의 역모로 유배처형 되는 사건 이후
1371년 9월 안우경. 이순 휘하의 반신돈세력에 의한 3차 동녕부정벌이 강행됩니다.
고려군은 동녕부를 정벌하고 오로산성( 五老山城 )을 함락시키며
우리 역사 최후의 요동정벌로 기록된 군사작전을 성공리에 마칩니다.
하지만
3차례에 걸친 동녕부 정벌에도 고려는 요동을 귀속시키는데는 실패합니다.
요동에 힘을 뻗혀오는 강대한 명과 원이 붕괴하면서 폭주하는 여진족들...
그리고 고려의 내부 정치적 갈등과 북쪽의 수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통제되지 못한 왜구들.
원의 지배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국고.
고려는 요동을 정복할수 있었지만 그 요동을 수호할수는 없었습니다.
1374년 최영이 314척의 병선과 2만5천6백5명의 병력을 동원한 탐라총관부. 수복작전을 단행하고 있을때..
[1366년 1차 제주도 정벌은 김유가 1백여척을 이끌고 진군했지만 패퇴하였습니다.]
1374년 원의 속국임을 거부하며 고려재건에 나섰던 공민왕은 최후를 맞이하면서 그의 치세는 종결되면서 고려는 붕괴합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적극적인 북벌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을수 있었고
두만강 유역과 간도로 나아갈수 있었음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돈이 종결되었습니다.
신돈이 아닌 공민왕이 주인공이었다면 그 치열한 내부 정치 암투와 외부의 군사적 충돌이 드라마로 만들어 졌다면
공민왕에 의해 단행된 우리 역사 최후의 요동정벌이 방영되었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우왕과 최영이 주장하고 이성계가 반대한 요동정벌은 앞선 3차례의 성공사례가 있었기에 강행했던것입니다.
우왕과 최영이 아무런 근거도 이득도 없이 요동정벌을 단행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성계의 반론이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위해 쓰여진 역사가 아니었나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조선에 의해 공민왕과 우왕 창왕. 그리고 최영등의 조선의 반대세력들의 역사는 승리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희생되었습니다.
이들의 역사가 재평가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