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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옮긴글][고려] 왕건의 공신들 - 유금필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08.25|조회수142 목록 댓글 0

 

왕건의 공신들 - 유금필

유금필(庾黔弼)은 평주출신으로 평산유씨()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유검필이라고도 부르죠.

黔이란 한자가 검을 검, 귀신이름 금으로 읽히는데, 사람을 부르면서 귀신이름 금을 붙이진 않았겠죠. 묘비명쓸때나 黔를 금이라고 읽는 다고하고 조야기문(朝野記聞)같은 조선시대 사료에서도 한글로 검필이라 표기하고 있다고하니 유검필이라 부르는게 맞을겁니다.

하지만 보통 유금필이란 이름이 더 익숙하게 쓰이니 이 글에선 그냥 유금필이라 쓰겠습니다. (-_-;)

개국공신이라곤 하는데 1등 공신은 4대 마군장군(홍유, 복지겸, 신숭겸, 배현경)뿐이고 7명의 2등공신 중에서도 유금필의 이름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918년의 역성혁명은 신속하고 아무도 궁예편을 들지않고 북치며 떠들었다고 기록이 남을 정도로 비교적 소규모라서(파장이야 컷지만) 공신수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3등공신은 각지의 호족, 난에 참여한 병사 포함 2천여명을 책봉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론 평주 박씨가문 밑에 있다 박지윤이 궁예에게 투항할때 군문에 투신해 공을 세워 마군장군까지 올랐다 혁명에 참여한게 아닌가 추정은 해보는데 확실한건 기록이 없으니 아무도 모릅니다. 상상력 좀 보태 병졸이었다가 먼치킨 포스로 장군 된거 아닐까 생각도 하곤합니다.

918년 왕건이 즉위하자 궁예가 끌어들였던 청주세력은 일부는 왕건에게 가담하고 일부는 왕건에게 반발해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918년 7월, 왕건은 마군장군 홍유와 유금필에게 군사 1500명을 거느리고 진주(鎭州 충북 진천)에 주둔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합니다. 이것이 기록상으로 보이는 유금필의 첫번째 군사활동입니다. 이때까진 4기장이나 다른 공신들에 비해 명성이나 지위가 떨어졌습니다.

920년(태조 3) 3월, 북계의 골암진이 여진족의 잦은 침략에 시달린다는 소식이 들어옵니다. 당시 골암진을 다스리던 이는 염주(鹽州) 사람 윤선(尹瑄)으로 침착, 용맹한 성격에 병법에 능숙했다는 평이 전해지는데, 궁예 말년에 폭정을 피해 변방에서 무리 2천여 명을 모아 골암진에 독자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왕건 즉위 직후 귀순할 뜻을 밝혔으나 이 무렵 여진족들의 잦은 침략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남방의 후백제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북방이 시끄러워 지는것을 경계한 왕건은 신료들과 의논끝에 만장일치로 유금필을 파견할것을 결의합니다. 골암성도 먹고 이참에 북변도 평정해 1석 2조를 노리겠단 생각이었지요.

군사 3천을 이끌고 골암진으로 향한 유금필은 도착 즉시 축성작업에 들어가 거점을 마련한 다음 북변 평정 계획에 착수합니다.

먼저 인근 여진족 부락의 추장 3백여 명을 소집한 다음 성대한 주연을 베풀어 그들이 취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추장들이 신나게 술 마시고 있을 때 군사들이 들이닥쳤고, 그들은 추장들을 모조리 꽁꽁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엄포를 놓습니다. 항복 안하면 죽는다! 추장들은 모두 복종하자 다시 여러 부락에 사람을 파견해 “이미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했으니 너희들도 와서 복종하라.”고 다시 한번 엄포를 놓습니다.

이를통해 923년(태조 6) 4월, 여진족 1500명을 귀부시켰고 사로잡혀간 고려인 3천여명을 되찾아오는 성과를 올립니다. 그후 고려가 한창 후백제에 밀리는 927년~928년 이전까지 북방을 다스리며 훗날 일리천 전투에 참전했던것과 같은 여진족 기병대를 양성한듯 합니다. 정세가 무척 불안했던 북방을 오랫동안 다스리며 사나운 말갈족들을 고려군 최강 전력으로 훌룡히 편입시켰던것을 보면 그가 전장에서의 용맹뿐 아니라 도독, 민정관으로서 수완도 무척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게임으로 치면 5툴 플레이어죠.) 

925년(태조 8) 10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에 임명된 유금필은 태조의 명을 받아 후백제의 연산진(燕山鎭 충북 문의)을 쳐서 그곳을 수비하던 장군 길환을 죽이고, 다시 임존군(任存郡 충남 예산)을 쳐서 3천여 명을 살획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이건 나중에 왕건이 따로 기억하고 포상을 약속할 정도로 큰 전과였습니다.  

잔깐 이야기를 돌려보면 924년 7월, 견훤의 아들 수미강과 양검은 대야성과 문경등지에서 병사를 징발한 다음 고려의 영향력아래 있던 조물성으로 진군했습니다. 고려는 장군 애선과 왕충을 시켜 구원하게 했으나 고려군은 참패했고 애선은 전사합니다. 조물성이 성민들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함락을 면했다는게 유일한 위안이었지요.

그리고 925년 10월 벌어진 2차 조물성 전투때는 왕건과 견훤이 직접 참전함으로서 후삼국시대 최대 라이벌의 첫 맞대결이 성사됩니다. 왕건은 군대를 상, 중, 하군의 3군으로 나누어 제궁(帝弓)에게 상군을 왕충(王忠)은 중군을 박수경에게 하군을 맡겼는데 전투 결과 박수경만 승전을 거뒀을 뿐 나머지는 백전연마의 후백제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했습니다. 

후백제군의 위력을 맞본 왕건은 지구전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 사이 충청도 일대를 휩쓸고 온 유금필이 왕건진영에 합류합니다. 유금필 휘하에는 북방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길러낸 말갈 기병대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이는 고려군을 크게 고무시켰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고려에 상당히 불리했던지 여전히 이길 자신이 없었던 왕건은 화친을 택했고 견훤은 외생(外甥) 진호를 왕건은 당제(堂弟) 왕신을 볼모로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사서에야

왕은 견훤의 나이가 10년이나 위이므로 그를 상보(尙父)라 불렀다. 왕이 견훤을 군영(軍營)으로 불러오게 하여 일을 의논하려고 하니 유금필이 간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려운 것인데 어찌 가벼이 적과 서로 가까이하겠습니까." 하므로 왕이 그만두었다. 
-고려사절요-
 
라고 나오기는 한데 자기 진영에서 화친 협상하겠다는걸 뜯어말리고 겨우 10살 차이나는 적국왕을 상부라 부를 정도면 당시 고려가 수세에 몰려 있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2차례 조물성 공방에서 모두 맥없이 패하고 물러나면서 소백산맥 이남에서 고려의 영향력은 상당부분 감소되었습니다. 별도로 그해 12월 거창(居昌) 인근 20여 성이 후백제에게 함락됩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왕건의 시련(=유금필의 활약)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출처] 본 게시물은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foryou8317/ 에서 스크랩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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