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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옮긴글] 최충과 9재 학당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4.07.24|조회수260 목록 댓글 0

고려시대에는 유교와 불교가 함께 발전하였습니다. 유교는 정치와 관련한 치국(治國)의 도로서, 불교는 신앙생활과 관련한 수신(修身)의 도로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사실 삼국시대에도 불교와 유교는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 이념으로 유교가 활발하게 적용되지 않았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활발하게 적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유교를 더욱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해동공자 최충입니다.

 

최충은 984년 해주 최씨 최온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호는 문헌입니다. 최충은 풍채가 뛰어나고 성품과 지조가 굳건하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짓기를 잘했다고 합니다. 최충은 스물 살이 넘도록 학문 연구에 힘썼습니다. 선비들이 최충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네는 왜 과거를 보지 않나?”
  “저는 과거에 합격하려고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학자가 되어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최충은 벼슬에 마음이 없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그러나 22세 때인 1005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한 후 벼슬길에 나아가 승승장구하여, 현종 때에는 총36권인〈7대 실록〉편찬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최충이 50살이 되던 해에는 무엇보다도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덕종에게 북쪽 변방에 성을 쌓도록 건의하였습니다. 덕종은 최충의 건의에 따라 압록강 어귀의 의주 지방에서부터 성을 쌓도록 명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려 시대에 이루어진 ‘천리장성’의 시작이었습니다.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은 최충을 오늘날 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에 임명하였습니다. 재상이 된 최충은 율령을 개정하고 형법을 정비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등 제도정비에 주력하였습니다. 최충의 나이 7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재상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여 벼슬생활을 마감하고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최충은 개경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자리 잡고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최충 선생께 글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참된 사람이 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훌륭한 관리가 될 수 있다!” 
학생들이 너무 몰려드는 바람에 거리까지 넘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최충은 이 모든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털어 새 학당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낙성재, 대중재, 성명재, 경업재, 조도재, 솔성재, 진덕재, 대화재, 대빙재가 바로 그것인데 9개의 재(재는 지금의 교실과 비슷합니다.)로 이루어졌다 하여 ‘9재 학당’이라고 불립니다. 이 9재학당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입니다. 9재 학당의 교육 목적은 인격을 다듬고 덕망을 쌓는 데 있습니다. 최충의 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국자감을 능가하여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은 최충의 벼슬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불리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렀습니다.

 

최충의 9재 학당을 본뜬 학당이 여러 곳에 세워졌습니다. 그 중, 개경에서 유명한 학당은 9재 학당을 포함하여 11개나 되었는데, 이것을 통틀어 ‘12공도’라 불렀습니다. 이 ‘12공도’는 고려의 학문을 크게 꽃을 피우게 하였습니다.〈고려사〉에는〈동방에 학교가 일어난 것은 최충에 의해서이며, 따라서 최충을 ‘해동공자’라고 일컬었다.〉라는 글귀가 실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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