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정도감 敎定都監
1170년에 정중부등이 쿠테타를 일으키고나서, 그는 원래 최고 군사기구였던 중방을 중심으로 정치를 펼쳐나갔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무인정권이 권력기반이 확실히잡히지않았으며, 1인 독재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대변해줄 따름이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교정도감·정방·도방 등 독자적 권력기구가 생기면서부터 무인정권은 안정되었다.
교정도감이란 무엇인가. 교정도감은 도방과 함께 최씨 무인정권의 권력기반으로서 軍國의 庶政을 담당하는 막부적 성격의 정청이다. 표면상으로는 최충헌 부자의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반당들을 수색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최충헌이 권력을 강화하는데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중방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데 있는 것 같다.
앞서 서술한 후자의 이유로 교정도감은 최충헌 부자의 모살음모사건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어 반대파에 대한 정보 수집과 밀고의 처리, 국가의 비위를 사찰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별공과 선세를 비롯한 각종 특별세를 거둬들이는 일도 하였다.
그밖에 등과자(과거에 합격한 자)로서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의 천거를 명하기도 하고, 또 지방의 행정에 대해 관여했다는기사도 있다. 요약해서, 교정도감은 애초 설립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이 최씨 무인정권의 권력 강화를 위해 國政 전반에 걸쳐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 교정도감의 長을 '敎政別監'이라고 한다. 그런데 교정도감이 설치된 이후 역대 별감들 중에서 확실하게 교정별감으로 임명받은 것으로 사료에 드러난 이는 오직 최씨정권의 3대인 최항뿐이다. 창립자 최충헌과 2대 최우등이 교정별감 직을 차지했는 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굳이 그 자리를 갖고 있지 않았더라도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교정도감을 총지휘하고, 당시의 정치를 마음대로 주물렀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별감직은 형식상 국왕이 임명하는 절차를 취했는데, 이는 무인정권의 합법성을 획득하면서, 할일없는 허수아비였던 국왕에게도 할 일을 주어 왕으로서 자기 위치를 확인할수 있도록 했다.그리고 교정별감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將軍'이란 직함을 가져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회의가 借將의 지위를 제수받고서야 교정별감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그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막부적 정청으로서 교정도감 및그 長인 교정별감의 존재와 그에 의한 군국서정의 관장이 무신정권을 무신정권답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교정도감의 위상이 그러했으므로, 무신정권이 완전히 몰락한 이후에 교정도감이 해체된 것은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것이다
(2) 서방(書房)
書房이란 政房과 함께 최씨 무인정권 이후로 무신정권을 뒷받침하던 文武축의 하나였다. 서방은 최씨무인정권의 2대 집정인 최우가 설치한 文士들의 모임으로서 무력기구인 都房6番에 대응하여 3番으로 조직되었다. 최우는 이 서방을 통해 文政雙全의 정책을 폈다고 할 수있다.
서방이 설치되는 것은 정방이 설치되고 나서 2년후인 고종 14년이다. 정방 역시 文士들의 기구로서 양자가 이와 같은 시차를 두고 설치된 것에 대해 가장 유력한 해석은 일단 최우는 먼저 정방을 설치하여 文士들을 정치적으로 등용하고 뒤에 다시 서방을 설치하여 나머지 인원을 편입시켰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방의 역할에 대해서는 자문기구라는 설이 원래 유력했다. 요즈음 서방이 도방·삼별초등과 함께 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기사를 해석하여, 서방이 家兵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것에 준하는 조직이 아니었겠느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지만, 군사 임무와 관계없는 옹위나 호위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은 무리라고 본다. 최우가 자신의 세력 과시를 위해서라도 동원할 수도 있다. 굳이 서방의 역할을 군사 면과 결부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며, 통상 논의되어 오던 바로 서방은 자문기구로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서방은 정방과 더불어 문사들의 기구이고, 앞서 설명했듯이 최씨정권은 이 서방을 통해 문무의 실권을 아울러 장악하는 실효를 거두게 되었으며, 문인들은 이 두 조직(政房과 書房)을 통해서 문신의 지위가 추락할대로 추락한 당시 상황 속에서 자구책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서방은 林性茂가 살해되어 무신정권이 끝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폐지되었다. 다만 정방은 조선건국때까지 존속하여 여전히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3) 정방(政房)
政房은, 최우가 인사문제처리를 위해 고종12년에 자신의 私第에 설치한 기관이다. 이 기관 역시 무신정권기의 다른 기구와 마찬가지로유력한 지배기구의 하나로, 이것이정방이라는 명칭을 띠고 공식기구로 발전하는 것은 고종 12년이다. 정방에 관해서는 이제현의<역옹패설>에 잘 나와있다.
원래 인사문제는 吏部와 兵部 소관이다. 문신은 이부에서, 무신은 병부에서 政案에 따라 처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옹패설>에 보면 최충헌때부터 최충헌이 인사권을 자신의 개인집에서 자의적으로 휘둘렀다고 나온다. 최우는 이것을 자신의 사제에 '정방'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인사기구를 설치하면서 공식화한 것이다. 이로써 최씨무인정권의 권력은 확고해졌다. 무릇 권력의 핵심은 인사권에 있는 바, 이것을 자의적으로, 그것도 권력자의 (공관도 아니고) 집에서 이루어졌다는것은, 모든 권력이 이제 최씨 무인정권으로 귀속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政色承宜라는 요원도 갖추었던 정방은, 그 직책 문제로 현재 약간의 논란이 일고 있으나, 직제상의 문제보다는 정방의 요원이 최씨 무인정권 주변의 문사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이제 무신정권기에 정방이 문반의 仕路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이제는 무신정권이 무신만을 대표하는 정권이 아닌 무인도 포괄하는 정권으로 탈바꿈하는것으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정방은 다른 무신정권기의 기구들과 달리, 최의가 암살되고 柳璥文에 의해 무인정권의 사적 기관이 아닌 국가기관으로 바뀌면서 무신정권이 완전히 몰락한 뒤에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이름만 바꾸어가면서 여전히 국가기관으로서 중요한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모든무신정권기의 권력기구가 무신정권이 몰락한 뒤에 소멸된 것과는 달리 그 뒤에도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특징은 아마 정방이 문신들의 기구였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초기의 정방과 달리 후기의 정방은 그 성격을 일률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오랜동안 소멸의 위협속에서도 기적적으로 버텨온 역사를 생각할때 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이런 점을 고려할때 정방은 고려 후기 정치사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4) 도방(都房)
정중부에서 이의민에 이르기까지 역대 무신정권 집권자들은 별다른 사병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일으킨 각종 쿠데타에 동원된 병력은 일반 관군이었다. 물론 각기文客·惡少·死士·용사·장사등으로 불리던 사료에 나타나는 사병조직이 있으나, 이들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조직이었느냐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이때에는 사병조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 중에서 다만 예외인 인물이 경대승이었으니, 그는 모든 무신들을 적대세력으로 집권한 만큼 신변보호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었다.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도방은 이 경대승이 조직하였다. 경대승의 도방은 신변호위만이 아니라, 정보수집, 반대파숙청, 심지어 권세를 배경으로 살인 등 갖가지 폐단을 끼쳤다가 경대승이 病死한 이후 해체된다.
신종 3년에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고 나서, 본격적인 사병조직이 건설된다. 최충헌이 신변보호와 정권 안정을 위해 다시 경대승의 도방을 설치하는데, 새로운 도방은 이전의 경대승 도방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대규모였으며,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內都房'과 '外都房' 으로 도방을 나누어 내도방은 직접적인 신변보호를 담당케 하고, 외도방은 친척과 기타 외부의 경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도방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무인정권의 호위 및 집권체제 강화와 안전을 위해 존속했다. 그러나 한편 도방이 직접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원된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두고 도방은 관군이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던 무인정권'의 양해하에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할때, 종래의 해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도방은 무신정권의 출발에서 형성되어 무신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해체되는 것에서 보이듯이 이 기구는무신정권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主家의 권세를 배경으로 백성을 약탈하는 등, 많은 폐단을 끼쳤다고 것을의미하는 것이다.
(5) 농민(農民)과 천민(賤民)의 봉기
무신 집권기는 정치·경제 면에서 혼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혼란이 야기된 시기였다. 이른바 민란으로 불리는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특히 명종과 신종조의 30여년간이었는데, 민란의 선행단계라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유민화현상은 이미 예종조부터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12세기초반부터 진행되고 있던 대토지겸병은 무신집권기에 이르르면 상당히 만연되어 있었고, 아울러 농민들에 대한 착취는 날이갈수록 그 정도를 더해가고있었다. 대지주만이 아니라 관리들에 의한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져 갔던 것이다. 또한 무신정권 초기의 정치 혼란은 정치기강의 문란과 더불어 중앙권력의 지방통제를 어쩔 수 없이 느슨하게 하여,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주었다.
이와 더불어 하층 민중들의 향상된 사회의식을 들 수 있다. 무신란 이후 하극상풍조가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종래의 신분제도는 동요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의민도 천민출신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특히 천민들로 하여금 신분제에 대한 관념을 변모시킴과동시에 그들의 지위 상승 의욕을 크게 자극했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만적의 난이다. 만적은 최충헌의 노비로서 적극적인 신분 해방을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신분해방의 요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202년엔 동경(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 부흥운동이 일어났는가하면, 1217년에는 고구려의 부흥을 외친 서경에서 최광수의 난, 그리고 1237년에는 전라도에서 이연년이 백제의 부흥을 외치며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민란들은 반무신정권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으며, 무신 집권 초기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이들 민란의 주요원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6) 민중의 대몽항전
몽고의 2차 침입에 직면하여,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결정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섬과 산성으로 입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조정은그 이상의 대책을 세우지도않았으며, 몽고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흔히 강화천도를 결사항전의 민족주의적 자세로 높이 평가해왔지만, 천도 이후 그들이 수행한 정책을 볼때 매우 의심스럽다.
몽고군과 정면으로 결전을 벌인 것은 1차 침임 때가 고작이며, 그 이후엔 강화도에 틀어박혀 사치스런생활을 누리면서, 몽고와 협상을 궁리하기 바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몽고에 용감히 대항한 민중들에게 일정한 보상을 해주는 것 뿐이었다. 그외의 적극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비록 박포와 최춘명 등의 일선 군지휘관 일부가 몽고군을 일부 격퇴하기는했으나, 그들이 몽고의 대군을 맞아 싸우긴 힘들었다. 이때 민중들이 대몽항전의 주역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들은 어떻게 몽고와 싸웠는가.
초적(도적)들을 비록한 농민·천민·노비등의 하층민들이 가장 용감하게 몽고군과 싸웠다. 특히 초척의 경우, 정부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도적이 된 것인데, 이제 그들이 관군을 대신해서 몽고의 대군과 정면 대결헀던 것이다. 최우도 이들 초적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廣州의 군민도 지방수령과 하나되어 몽고군과 치열한 격전끝에 그들을 물리쳤으며, 다인 철소민 역시(이들은 천민이다) 몽고군을 격퇴한 공로로 천민의 신분에서 양민으로 지위상승을 이루고, 다인철소는 익안현으로 승격되는 보상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예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이렇게 민중들이 몽고침략자들과 끈질긴 투쟁을 거듭하고 있을때, 조정은 무엇을 했던가. 고려 조정은 몽고와 화해와 강화를 바라고 있었다. 다만 무신 정권의 실력자들때문에 강화를 못하고 있었다. 무신집권자들조차 자신의 권력 기반 잠식을 우려하여 항전을 주장할 뿐, 실제적인 항쟁에 관한 적극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몽고와 강화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반사항을 고려할때, 고려의 대몽항전의 주체는 고려 조정이 아닌 민중으로 재설정되어야 한다.
(7) 농장(農莊)
農莊은 사료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분명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개념이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대토지 지배의 특수한 형태로서 지배의 거점인 莊舍를 거점으로 형성된 넓은 토지의 집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시과 체제로 일컬어지는 고려 전기의 토지제도는 12세기를 기점으로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된다. 전시과제도 자체의 모순점과 이자겸의 난 이후 가중된 귀족간 세력경쟁의 일환으로 대토지겸병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무신란 이후 더욱 가속화되어, 어떤 농장은 자연산천을 그 경계로 삼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몽고 간섭기에 원의 황제가 그 시정책을 마련하라고 고려의 왕에게 지시할 정도였을까.
이러한 농장의 설립은 몇 가지 요소가 있다. 개간·買得·사택·탈점·長利(고리대)등이다. 이중개간을통한 농장형성은 합법적인 것으로 정부의 권장사항이기도 했다. 개간은 사실상 부유한 자가 아니면 힘들었던 이유때문이다. 매득과 기증에 의한 농장형성도 있었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그리고 문제가 많았던 것은 탈점에 의한 농장형성이었다. 탈점 자체가 불법이었던것이다. 수조권을 집적함으로써 형성되는 농장도 농장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도 있지만, 결국 수조권의 집적은 소유권의 집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는 점에 비추어 볼때 농장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농장은 그곳을 관리·경영하는 거점으로 莊舍 또는 農舍를 설치하여 관리인을 두었다. 이는 농장주들이 대부분 不在地主임을 의미한다. 농장주들은 대부분 중앙에 있고, 농장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관리인을 통하여 전호들과 농장주는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은 사적인 지배·예속관계였다. 농장의 일꾼들은 노비들도 섞여 있었으나, 전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들은 수확의 절반을 지주에게바쳤다(병작반수제).
이러한 농장의 형성은 국가재정에는 치명타였다.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호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에 세금을 내느니보다는 차리라 전호가 되는 것이 덜 뺏겼다고 한다.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전호가 더 나앗다고 한다. 이것은 악순환의 연속이다. 국가는 줄어드는 재정수입을 타개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농민들로부터 거둬들이려 시도하고 농민은 이에 반발하여 떠나버리거나 전호가 된다. 전호가 되면 국가에 내는 세금보다 덜 뺏기니까. 결국 이렇게 해서 농장은 더욱 확대되고 국가재정은 만성적으로 쪼들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언하면, 농장제는 농민의 부담 또는 경제적 지위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때의 농장은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때의 농장은 경제외적인 요소에 더 좌우되었다. 즉, 농장주가 권력을 쥐고 있으면 농장은 확대일로를 걷지만, 권좌에서 물러나면 금방 해체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농장경영이 국가권력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어서 안정되지 못하고, 한계성이 뚜렷한 것이다. 또한 농장주들은 서양 중세의 봉건영주처럼 불수불입권을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농장이 가지는 또 다른 미숙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고려후기 사회의 농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고려 전기의 토지제도가 전시과체제라면, 후기의 토지제도는 대토지겸병의 농장제였다. 무신난을 기점으로 시대가 구분되는 고려후기의 경제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이 농장의 문제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