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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옮긴글]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12.14|조회수1,313 목록 댓글 0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

 

Ⅰ. 시작하는 글

Ⅱ. 혼인으로 본 고려여성의 생활

   1. 고려의 결혼관행

   2.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1) 일부일처제

     (2) 일부다처제

     (3) 결론

   3. 혼인의 거주규정

   4. 자유로운 이혼과 재혼

     (1) 이혼

      (2) 재혼

Ⅲ. 상속으로 본 고려여성의 생활

   1. 호적

   2. 균등상속

   3. 봉작과 음직의 상속

   4. 재산상속에 따른 의무

Ⅳ.  고려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

Ⅴ. 마치는 글

 

 

 

 

Ⅰ. 시작하는 글

 

 개인은 태어나면서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며, 혼인을 통해서도 가족을 구성하게 된다. 흔히 혼인은 사랑의 결실 내지는 두 사람간의 결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통시대에는 두 집단을 결합시키는 사회적 장치로서의 기능도 컸다.

 또한 가족 내에서 차지하는 구성원의 지위는 곧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가족은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로서 사회체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된다. 즉 가족 간의 윤리를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나 통치 원리를 추출해낼 수 있고, 부부간의 역할을 통해 남성이나 여성의 지위도 알 수 있다.

 여성의 지위를 살펴볼 때 주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결혼과 상속제도를 들 수 있다. 즉 어떤 형태로 혼인하고, 혼인 후 어디에서 생활하며, 이혼녀나 과부가 될 경우 다시 가정을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재산 상속에 있어 남녀의 차별은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짚어보는 것이 전통시대 여성의 지위를 가늠할 수 있는 일차적인 방법이라 하겠다.

 흔히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고 이야기된다. 그 근거로는 첫째, 서류부가 혼속으로 결혼한 뒤에도 여성은 장기간 친정에서 생활했으며, 재산도 아들과 딸 간에 균등히 분배되었다. 둘째, 재혼이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재혼녀에 대한 어떠한 불이익도 없었다. 셋째, 내외법이 없어 성적인 억압 없이 자유로운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절부(節婦, 수절하는 부인)뿐 아니라 의부(義夫, 아내가 죽은 뒤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남편)도 표창 대상이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절이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 등을 든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들을 되짚어보면서 고려시대의 민중,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혼인으로 본 고려 여성의 생활

 

 1. 고려의 결혼관행

 

 고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여자들이 야외에 나가 그네 뛰는 놀이를 금지하였다. 여성들이 이런 장소에서 거리낌없이 남성들과 교제했기 때문이다. 젊은 남녀들은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행사나 축제가 있을 때 자유스럽게 어울려 교제하였고 동네의 모임에서도 별 제약없이 자주 어울렸다. 여름철에는 시냇물에서 남녀 구분 없이 옷을 둔덕에 벗어놓고 몸을 드러낸 채 목욕하였다. 여자와 비구니들은 절을 할 때 남자와 똑같은 형식으로 하였다. 남자절과 여자절이라는 격식이 따로 없었다.

 유학자 출신의 정치가들은 틈만 나면 자유연애를 통제하려 들었다. 유교사회에서는 매파를 통한 혼인만 인정하고 자유연애에 따른 혼인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사랑노래를 부르고 다니면서 활발하게 남자들과 교제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 혼인을 했다. 그렇다고 고려의 여성들이 완전한 자유연애를 구가하면서 부부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다. 일단 짝을 찾더라도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혼인이 성립되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부모의 허락이 없으면 혼인은 인정되지 않는다. 신분이 다른 남녀가 부부가 될 경우에는 관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부곡 출신의 총각이 양민의 딸과 결혼을 하려면 관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이를 어기면 엄한 처벌을 받았다. 이는 평민과 천민이 하부로 섞이는 것을 막으려는 장치였다.

 혼인은 간소하게 치렀다. 벼슬아치나 부자들은 폐백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서민들은 저녁에 이웃과 친척들을 불러 신랑․신부에게 절을 받게 하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이렇게 공인을 받으면 한 쌍의 부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근친혼도 자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분히 황실의 혼인 풍속을 본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가 중국의 여러 제도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근친혼 문제가 제기되었다. 11세기 들어 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근친혼 금지를 공포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새로운 조치를 내렸다. 1096년 소공1 이상 곧 재종형제나 재종자매, 당질과 당질녀 등 가까운 친척 사이에 혼인하여 난 자손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147년 의종이 유교제도를 수용하면서 당고종 자매, 당질녀 사이의 혼인을 철저하게 중지시켰다. 이때 약간의 효과를 보았으나 근본적으로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 원인은 왕실이 근친혼을 버리지 못한 데에 있었다. 이것이 고려의 결혼 관행에서 비난과 지탄을 받는 부분이다.

 

 

 2.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당시 국가가 법적으로 용인한 결혼 형태가 ‘일부일처제’였는가 아니면 ‘일부다처제’였는가에 대해서는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당시의 기록 중에는 고려가 일부일처제 사회였음을 지적하는 자료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 일부다처제 사회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도 있어,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럽기 때문에 논란에 약간의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왕실의 경우는 우선 따로 떼어놓고 살펴보아야 한다. 왕실은 확실히 일부다처를 지향하고 있었다. 왕손의 존부(存否)가 왕조의 존폐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당연히 왕실은 다처를 지향함으로써 왕손이 끊기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은 29명의 왕비를, 현종은 13명의 왕비를 거느렸다.

 혼인의 형태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배층의 경우이다. 일반 관리들이 법적으로 부인을 두 명 이상 동시에 거느릴 수 있었던 듯한 자료도 있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도 있다.

 

(1) 일부일처제

 원종과 충렬왕대의 사람인 임정기는 ‘노진의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번째 부인을 삼아서 연좌되어 파면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임정기는 부인이 있는데도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여 파면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어, 고려가 일부일처제 사회였음을 주장하는 학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파면을 당한 것은 두 명의 부인을 거느렸기 때문이 아니라, 두 번째 부인이 노진의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노진의는 당시 ‘김방경 무고사건’을 일으켰던 사람인데, 임정기가 바로 그의 사위가 되어서 결국 연좌․파면되었던 것이다. 즉 그가 파면된 것이 부인을 두 명이나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임정기의 사례만으로 고려가 일부일처제였음을 단언할 수는 없다.

 고려가 일부일처제임을 주장하는 사례로 다음의 내용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가 몽고인이 세운 나라인 원나라에 복속되어 있는 시기에 원나라에 보낸 글 중에, “우리나라의 국법은 비록 임금이라고 오직 한 명의 적실과 혼인하며 또 다른 첩을 두지 않기 때문에 왕족의 후손이라도 대개 번성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나라가 작고 구석에 있기 때문에 관료로서 반열에 오른 사람도 많지 않고 관리들이 한 명의 아내를 맞이하고 있으므로 소생이 혹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하여 많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고려가 일부일처제 사회임을 강조한 것이 있다. 이 기록은 원나라가 고려에 계속 공녀를 요구해오자 제발 공녀를 요구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성한 글이다. 고려는 왕족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모두 첩을 거느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소생 자녀가 많지 않으니 당연히 원에 공녀로 보낼 만한 자식도 별로 없음을 강조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에는 사실과 다른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실제 왕실에서는 부인을 여러 명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위의 기록은 당시 고려의 실정을 정확하게 반영한 내용은 아닌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일부일처제를 주장할 때 위의 기록을 적극 사용하기에는 꺼려지는 점이 있다.

 일부일처제 사회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박유의 경우이다. 충렬왕대의 재상이었던 박유는 어느날 조정에서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도 지금 신분의 고하를 논하지 않고 처를 하나 두는 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인원수의 제한이 없이 장가를 드는데, 이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모두 북쪽으로 몰려가게 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서첩(庶妾)을 두게 하되, 그 관품에 따라서 그 수효를 줄여서 서인(庶人)에 이르면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얻도록 하고, 그 소생 자녀는 적자와 마찬가지로 벼슬살이를 할 수 있도록 하소서. 만약 이와 같이 되면, 원성은 줄어들고 인구는 번성될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도리도 됩니다.”2

 그런데 그의 이 상소 내용이 알려지자 부녀자들이 모두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 연등회를 보기 위해 그가 왕을 모시고 가는 것을 본 한 노파가 "첩을 두자고 요청한 자가 저 늙은이다."고 하니 모든 여인들이 손가락질을 하였다고 한다. 이 광경에서 당시 개경의 여인들이 다처를 두자고 하는 박유의 주장에 집단적인 행동으로 반대하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위 관료들이 부인들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 논의가 행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고려는 원래 여자가 남자에 비해 수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몽고와의 전쟁 이후 많은 몽고인과 중국인이 고려에 몰려와서 여자들을 데려가게 됨으로써 여자가 모자라게 될까 염려한 박유가 첩을 둘 것을 제안했던 것으로, 적어도 몽고인이 고려에 몰려오기 전까지는 고려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국왕이었던 충렬왕도 박유와 마찬가지로 축첩제를 실시하려고 하였다.

 처음에 왕이 호구가 날로 줄어, 사민으로 하여금 모두 서처를 거느리게 하려 하였다. 서처란 양인의 딸을 지칭하는 것이다....그리고 만약 신의를 돌아보지 않고 구처를 버리고 신처를 따르는 자는 즉시 죄를 주게 하려 하였다. 관련 관서에서 바야흐로 의논하여 이것을 시행하려고 하였는데, 김혼이 예를 범하게 됨에 이르러 드디어 의논이 그치게 되었다.

 박유의 주장처럼 당시 인구가 많이 줄어서, 국왕인 충렬왕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첩을 거느리는 제도를 마련하려고 했는데, 마침 김혼이란 사람이 죽은 김문비의 부인과 사통을 맺은 사건이 벌어져 이 제도는 의논으로만 그치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고려가 충렬왕 때까지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 일부다처제

 이처럼 일부일처를 보여주는 자료가 있었음에 대해 한편으로 일부다처를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주목되는 기록은 <고려도경>3이다. 그 기록 중에 “고려의 귀족들은 부인을 여러 명 거느린다”고 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해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것은 외국인의 기록이며 그것도 불과 한 달 동안 고려를 살펴본 후 본국인 송나라에서 기록한 것으로 서긍이란 사람이 당시 고려의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쓴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여, 이 기록을 부정하고 있다. 또한 법적으로 일부일처제인 사회에서도,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그 법망을 피해 여러 명의 처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고, 서긍이 잠시 고려에 머물면서 그런 사람을 눈여겨보고 고려가 일부다처의 사회였던 것처럼 기록한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이 기록에 별다른 신빙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한편 실제로 동시에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린 예가 있다. 무신정권기의 유명한 무인집정으로 2명의 부인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었던 최충헌, 경처와 향처로 각각 불린 2명의 부인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던 이성계4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고려말의 사람인 지윤에 대한 기록에는 “희첩(姬妾)이 거의 30명에 이르렀는데, 다만 부유한 여자만을 취하고 미색으로 취하지는 않았다. 문호(門戶)를 세운 자만 12인이었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강윤충에 대한 기록에는 “현재 왕씨의 처가 있는데, 또한 죽은 조석견의 처로 아직 남편의 장례도 마치지 않은 사람에게 장가 들어 조석견의 가산까지 차지하였다”라는 내용도 있다. 이외에도 사실 고려 후기와 말기에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린 예가 있다.5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최충헌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예들은 국가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여겨지던 후기와 말기의 사례라는 점이다. 고려말은 이미 국가의 법제가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예들은 모두 고려의 말기적 현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한편 최충헌의 경우도 좀 특수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왕과 거의 다름이 없는 권력을 휘둘렀던 무인집정 최충헌은 국법 위에 존재할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실 그의 이런 행위에 대해 당시 어떤 사람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일부다처제를 주장할 만한 근거로 제시된 이 예들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다.

 

(3) 결론

 고려가 일부일처제 사회였음을 당시인들이 주장하는 글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실제 고려인 중에 다처를 거느린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예는 대체로 후기와 말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사례를 종합해 보면 고려는 원래 일부일처제를 지향하고 있던 사회였는데, 고려 후기에 이르러 이 제도가 무너져 일부다처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 후기에 일부다처의 경향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을 단순히 말기적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너무 결정론적 시각일뿐 아니라 조선시대 사람들이 고려시대를 이해했던 인식의 틀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즉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고려가 말기에 이르러 전체적으로 혼란이 가중되었고 그런 까닭에 멸망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멸망의 원인 가운데 가장 먼저 꼽는 것이 바로 혼인제의 문란이었다.

 일부다처의 경향이 고려말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고려 후기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몽고의 풍습이 ‘다처제’였고, 실제로 그들이 고려에 와서 그런 풍습대로 부인을 여러 명 거느리고 살았다는 점이다. 이런 몽고의 풍습이 고려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결국 고려사회에도 다처제가 뿌리내리도록 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다처제의 경향은 오랜 전쟁의 결과라는 점이다. 고려는 몽고와 약 3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하였고, 그 와중에 많은 남성들이 희생당했다. 그런 까닭에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 일시적으로 성비의 불균형이 생기게 된다. 여성의 숫자가 남성의 숫자보다 많아진 것이다. 이런 조건은 바로 남는 여성들이 첩으로라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이 미혼으로 지낸다는 것은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성비 불균형의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곧바로 결혼형태의 변경으로 연결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런 까닭에 고려는 원래 일부일처제 사회였는데 고려 후기에 이르러 일부다처제 사회로 변화해 갔다고 할 수 있다.

 

 

3. 혼인의 거주규정

 

 여성의 위상은 아무래도 일부다처제였을 때보다 일부일처제였을 때에 좀 더 나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일처를 철저히 준수하고 있었던 조선사회에서는 대체로 남성의 지위가 여성보다 높았다. 이렇듯 단순히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만으로는, 그 속에서 남성과 여성이 차지하는 위상까지 판단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혼례를 치른 후 신혼부부가 어느 곳에 거주하며 생활하는가 하는 규칙을 인류학에서는 거주율이라고 한다. 이 거주율은 사회적 관습을 따르는데, 크게 남편 집에서 사느냐, 아니면 여자 집에서 사느냐로 나누어진다. 부인이 남편의 거주 지역으로 들어가는 부거제는 부인이 남편의 친족 집단에 흡수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이다. 반면 남편이 처가살이를 하는 모거제는 모계친족 제도를 가진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거주율을 살펴보면 가족 내, 나아가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지위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고려 고종 때의 문인 이규보는 “아, 슬프다. 옛날에는 사람이 장가를 가서 부인을 맞이하여 왔기 때문에 처가에 힘입을 바가 얼마 없었는데, 지금인즉 장가를 갈 때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니, 무릇 내 몸에 쓰이는 모든 것을 처가에 의지한다. 그러니 장인과 장모의 은혜가 부모와 같다.”고 하였다. 이런 고려의 혼인 풍속을 두고 서류부가혼 또는 솔서혼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혼례를 치른 후 일정 기간 동안 사위가 처가에서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려의 거주율이 모거제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것은 여성의 지위가 현대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했을지라고, 적어도 조선시대보다는 높았음을 의미한다.

 서류부가혼의 거주기간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어서, 집안마다 형편에 따라 달랐다. 조선시대의 기록처럼 아예 처가댁에 뿌리를 내리고 그곳에서 손자까지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몇 년만 그곳에서 살다가 다시 자신의 본향으로 부인과 함께 돌아가 생활하는 경우도 있어, 그 차이는 천차만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거주 기간을 결정해 주는 요소는 아마 여자 쪽 집안의 재산 정도일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딸에게도 아들과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남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여자 쪽의 재산이 본가의 재산보다 많다면 처가댁에 머물러 사는 기간이 당연히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일정 기간 서류부가혼을 유지하다가 남편의 집으로 가서 살았을 경우에도 남편과 사별하면, 고려의 여인들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왕족이었던 왕영의 여동생은 과부가 된 후 친정으로 돌아와 살았다. ‘시집을 가면 죽어서도 그 집 귀신이 된다’는 조선시대적 사고는 당시의 여인들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4. 자유로운 이혼과 재혼

 

(1) 이혼

 처가살이를 했던 고려의 혼인 풍습은 이혼과 재혼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혼을 요구하는 측은 대개 남편이었고,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이나 사회 전체에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남편이 부인과 이혼하는 경우는 부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고려 중기의 인물인 권수평이란 사람은 벼슬살이하던 중 견룡이란 직책에 보임되었다. 그런데 당시 견룡은 비록 직위는 낮지만 권귀에게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당시인들은 모두 이 직책에 보임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직에 있으면서 권귀에게 총애를 얻으려면 사실 돈을 조금 써야했고, 집이 가난하였던 권수평은 이로 인해 이 직에 보임됨을 사양했다. 그때 그의 친구가 “이것은 영광스런 것이다. 대개 부인을 바꿔 부를 구하는데. 그대가 만약 새장가를 간다면 부가 중에서 누가 딸을 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나 그는 끝내 부인을 버리지 않고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권력을 얻기 위해 부인과 이혼한 예는 송유인6이 대표적 경우이다. 그는 본래 부유한 상인의 아내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부인 집안의 재산으로 고위직에 나아갈 수 있었는데, 무신정변이 일어난 이후 무인집정인 정중부의 딸과 재혼하기 위해 자신의 부인을 섬에 버렸다고 한다.

 한편 전쟁 때문에 이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몽고와의 전쟁으로 피난하다가 부인을 잃어버린 경우 남편들은 대개 새 장가를 갔는데, 전쟁이 평정된 이후 전부인이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전부인을 버리지 말 것을 명령했지만, 실제 많은 남편들은 새 부인에게 마음을 이미 빼앗겨 전부인을 버렸다고 한다. 이상의 사례들을 종합해보면 당시의 이혼은 주로 남편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이 먼저 이혼을 요구한 경우는 단 한 사례만 찾을 수 있다. 고려 후기의 왕인 충숙왕의 5번째 부인인 수비권씨의 사례가 그것이다. 수비권씨는 원래 전형이란 사람과 일찍 혼인했으나 전씨 집안이 신통치 않아 이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씨의 거부로 이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그녀의 아버지는 왕에게 부탁하여 왕명으로 딸을 이혼시키고는 왕에게 그녀를 바쳤다. 이것이 기록에 나오는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였던 유일한 사례이다.

 종합해 보면 이혼의 경우 고려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는 할 수 없다. 여자는 주로 이혼을 당하는 입장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혼의 명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와는 크게 달랐다. 조선시대의 가장 큰 이혼 명분은 삼종지도7에서 벗어났다거나 칠거지악8의 조건에 따른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굳이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아들을 못 낳았다는 것이 이혼의 명분으로 악용되지도 않았고, 이혼 후에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새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이혼의 절차는 쌍방 합의를 지향하였다. 법적으로 부모의 동의가 없이 무고하게 처를 버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즉 “부모의 화론이 없었는데, 무고하게 처를 버리는 자는 관직에서 파면한다”고 하여, 부모의 동의가 있다면 이혼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데 무고하게 부인을 버리면 관직자의 경우는 파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2) 재혼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가 된 고려의 여인들은 재혼을 꺼리지 않았기 때문에,조건이 된다면 재혼을 할 수도 있었다. 재혼에 대해 사회적 반감이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다. 따라서 결혼에 실패했을 경우 상당수가 재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왕비 중에서도 재혼녀가 있다는 사실에서 유추된다.

 성종의 6번째 부인인 문덕왕후는 일찍이 종실인 흥덕원군에 출가하였으나 남편이 사망한 후에, 당시의 국왕인 성종과 재혼하였다. 충렬왕비인 숙창원비는 원래 진사인 최문과 혼인했으나 남편과 일찍 사별한 후, 충선왕이 아버지인 충렬왕을 위하여 그녀를 왕비로 들였다. 충선왕비인 순비허씨와 수비권씨 모두 재가녀로서 왕비가 된 경우이다. 특히 순비허씨는 평양공 왕현의 부인으로 3남 4녀의 자녀를 두었으나 현이 죽자 자녀를 거느리고 충선왕비가 되었고, 소생 자녀 모두 왕자와 공주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재가한 경우가 많았음은 ‘의자(義子)’라는 용어가 존재했음에서도 증명된다. 의자란 ‘전남편의 자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의붓자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을 호칭하는 용어가 따로 존재했음은 바로 당시 재가녀가 자식을 데리고 재가한 경우가 많았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인들은 여성의 재가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조선 전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문화유씨족보>(1562)의 서문에는 “개가한 여자의 전후 남편의 성명을 사실대로 기록하고 여러 사람이 보는 것을 꺼리지 말고 숨기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재가의 사실을 떳떳하게 기록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칠거지악이라는 규제 속에서 쉽게 이혼을 당하고도 재가는커녕 친정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던 조선의 여인과는 현격한 대조를 보이는 풍습이 아닐 수 없다.

 

 

Ⅲ. 상속으로 본 고려 여성의 생활

 

 우리 민법상 재산상속에서 자녀가 모두 균등하게 상속을 받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일찍이 민법상으로 딸과 아들에게 상속분의 균등을 규정하였지만, 시집간 딸에 대해서는 여전히 차별을 두었었기 때문이다.

 

 

1. 호적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호주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여성이 재산권이나 상속권을 행사하였다는 증빙이 된다. 이렇게 친가와 외가를 동등하게 친족 범위에 포함시키는 사회를 양측적 친속사회라 일컫는다. 친족 범위는 부계와 모계를 가리지 않고 8촌 이내였다. 조선시대와 근래까지 부계 8촌 모계 4촌으로 규정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늘날 민법의 친족 규정은 고려의 친족 범위를 따르고 있다. 친족 범위 규정은 상복제도에도 영향을 미치며 음직에도 적용되어 사위도 아들과 똑같은 혜택을 받았다.

 남녀 차별 문제는 호적과 족보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고려는 호적을 매우 상세하게 만들었다. 조세와 부역의 대상을 가리고 군역의 의무를 매기는 데에 기본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호적과 함께 동족의 직계 혈통을 적는 가승이 있었다. 이외에 직계자손을 적은 문건으로는 죽은 이의 행적을 적어 묻은 묘지명이 있고, 말기에는 드물기는 하나 족보가 등장했다.

 이들 문건에 아들 딸의 내력을 적은 기록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호적을 쓸 때 자녀를 낳은 순서대로 적었지, 남녀를 구별하여 아들을 먼저 적지 않았다. 딸이 맏이면 딸 이름과 내력을 먼저 적고 아들이 맏이면 아들을 먼저 적었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나이에 따라 1녀, 2남, 3녀, 4남으로 표시하였다.

 여자의 이름과 함께 사위의 이름을 별도로 표시하였다. 조선시대에 사위의 이름만 적고 여자의 이름은 아예 빼거나 딸이 시집을 가면 남편의 성을 붙여 박실, 최실로 부르는 경우와 확연히 다르다. 외가나 처가의 부모, 조부모 등의 내력도 소홀하게 다루지 않았다. 이는 음직을 주거나 효자 열녀를 표창할 때 기본 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이었다.

 사회관습이 이러니 남아를 선호하는 풍조가 심각할 리가 없었다. 또 세 살 이전에 다른 성바지 아이를 데려다 길러서 자신의 성으로 호적에 올릴 수도 있었다. 혈통이 달라도 어린 나이에 데려와 기르면 가통을 이을 수 있게 허용한 것이다. 아내가 예전 남편에게서 낳은 아이를 데려오면 의자로 인정하여 재산 상속을 받게 하였고, 의자는 의부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또한 여자도 호주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재산권의 행사와 함께 가정의 여러 일을 결정할 권리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여성의 별도 재산도 인정해주었다. 호구단자의 내용을 살펴보면 노비가 어디에서 왔는지 밝혀놓았다. 노비를 아내가 데리고 온 경우에는 별도의 소유권을 인정하여 이혼할 때 데려갈 수 있었으며 자식 없이 죽으면 친정으로 귀속되기도 하였다. 이는 결혼한 여자도 자신의 재산을 소유했음을 알려준다.

 

 

2. 균등상속

 

 고려인들은 상속에 관한 한 철저히 자녀 균분의 정신을 지켜 왔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던 중국인들은 균분상속을 하되, 대체로 여자는 배제하고 남자 형제끼리 균분상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형제와 자매가 모두 균등하게 상속받았다.

 당시 고려인의 재산상속에 대한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나익희의 경우이다. 그는 집안의 외아들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어머니가 미리 재산을 나누어주면서 따로 그에게 노비 40구를 더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의 호의를 사양하며 말하기를, “1남으로 5녀 사이에 있으니 어찌 차마 이것을 더 받아서 어머니의 은혜에 주가 되게 하리요”라고 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의롭게 여겨 그의 의견을 따라 자녀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나누어주는 것이기에 그에게 노비 40구를 더 주어도 법적인 하자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당시에는 균분 상속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려 했던 어머니의 뜻을 당시의 관습과 다른 조치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당시인들의 재산상속에 대한 인식을 좀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지저의 사례이다. 이지저는 마음가짐이 관대하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일시의 호걸이 되었지만, 인색한 편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동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지 아니하여 당시인듸 기롱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지저가 아무리 마음가짐이 관후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이었어도 당시의 관행과 달리 혼자서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했던 것에서 당신인들의 비웃음을 샀던 것이다.

 현재의 재산상속법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서도 재산상속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부모, 즉 재산 소유자의 의사이다. 부모의 유언장을 문계라고 하는데, 이것이 있을 경우 그 내용에 따라 상속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커다란 하자만 없다면 자식은 부모의 유언인 문계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효’라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도 자녀에게 균등하게 재산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크게 훼손시킬 때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것의 대표적인 살{가 바로 손변의 경우이다. 그는 일찍이 경상도의 현재의 도지사격에 해당하는 안찰사가 되었는데, 그 고을에 남동생과 누이가 재산 문제로 오랜 기간 재판을 지속하고 있었다. 남동생 측은 “한 부모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누이 혼자 부모의 모든 재산을 갖고, 동생은 그 몫이 없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였고,누이 측은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 전 재산을 나에게 주고 네가 가질 것으로는 검은 옷 1벌, 검은 관 1개, 신발 1켤레, 종이 한 장뿐이었다. 문계가 있으니, 어찌 어기겠는가”라고 대응하였다. 법대로라면 문계가 이미 있으므로 누이가 전 재산을 갖는다 해도 별다른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아들에게 전혀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는 것은 인정상 좋아 보이지 않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손변이 이 지방에 부임하기까지 이미 여러 명의 수령이 여러 해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이 지방에 부임한 이후 이 송사를 맡아 해결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고른 것이다. 어찌 장성하여 시집간 딸에개는 후하고 어미도 없는 어린 아들에게는 야박하겠는가. 어린아이가 의지할 사람은 누이였으니 만일 누이와 고르게 재산을 물려주면 동생의 양육을 소홀히 할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아이가 자라면 이 종이에 그 사정을 적어서 물려준 옷과 갓을 쓰고 신발을 신고 관아에 알리면 잘 처리하여 주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네 가지 물건만을 물려준 뜻이 여기에 있다.9

 손변이 이렇게 말을 마치고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주었다. 이 말을 들은 남매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처럼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이 사회 통념이었다. 이 일은 13세기 초의 사례였으나 고려 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3. 봉작과 음직의 상속

 

 ‘상속’이라 하면 대부분 ‘재산’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재산뿐만 아니라 ‘봉작’이나 ‘음직’도 함께 떠올렸을 것이다. 특히 그가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지배층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당연히 ‘피’의 유지였다. 다시 말해 순수한 혈통에 만약 조금이라도 불순한 ‘피’, 즉 일반 양민이나 천민의 피가 섞이게 되면, 그 피의 순수성은 보존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순수한 ‘피’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사실 아무리 좋은 혈통을 가지고 있더라도 벼슬살이를 몇 대 이상 하지 못하면, 지배층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느냐의 여부가 그들의 신분 유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당시인들은 재산의 상속만큼이나 지위의 상속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상이 재산을 많이 물려주지 못하더라도 관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관직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얼마든지 늘릴 수 있었기에 당시 지배층에게서 더욱 중시되었던 것은 오히려 ‘지위의 상속’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이런 지위의 상속에서도 딸과 아들이 거의 균등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관직자가 될 수 없었으므로 당연히 딸아게 주어지는 지위의 상속 몫은 그녀를 통한 어떤 남성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때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다름아닌 그녀의 남편이거나 아들이었다.  다시 말해 고려에서는 조상의 음덕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제도인 음서제(蔭敍制)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위 관직자의 아들과 손자뿐만 아니라 사위와 외손자도 포함되었다.

 음서란 국가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자손들에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서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제도로, 일반음서10와 특별음서11로 나뉜다. 일반음서의 경우 음서를 받을 수 있는 최대 수혜의 범위는 아들과 손자 이외에 수양자, 동생, 조카까지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특별음서의 경우이다. 특별한 공로가 있는 공신이나 왕손에게 주어지는 이 음서의 혜택 범위는 매우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조종묘예에게 주는 음서의 범위를 기록한 것 중에, “성조묘예(聖朝苗裔)는 비록 협20녀라도 1호(戶)마다 한 명의 입사(入仕)를 허락한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선왕의 후손은 1호마다 한 명씩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협20녀’라는 말이다. 비슷한 용어로 협5녀나 협22녀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5나 22와 같은 숫자는 가계의 계보 중간에 들어가는 여성의 숫자를 뜻한다.12 위의 기록에 따르면 충렬왕 때 선왕의 후손 중 1호마다 1명씩에게 음서의 혜택을 주는데, ‘협20녀’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어떤 한 국왕의 후손 중에는 계속하여 20대까지 딸로만 연결된 후손이 있을 수 있는데 그 21대의 남자가 바로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리고 같은 국왕의 후손으로 협1녀에서 협19녀까지의 집안 모두가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고, 다만 중간에 21명의 여자가 있는 협21녀 집안부터는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종합해보면 당시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범위는 남자에서 남자로 이어지는 부계혈연 가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딸에서 딸로 이어지는 가문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지위의 상속에서도 남녀가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4. 재산상속에 따른 의무

 

 재산을 남녀의 구분 없이 상속받느니 만큼 의무도 함께 주어졌다. 고려시대에 딸이 아들 못지않게 상속분을 얻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 의무의 주체자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상속이 점차 아들 위주로 정해졌던 것은 바로 부모에 대한 봉양과 제사가 하나의 의무이자 권리로써 장자에게만 주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장자들에게는 제사가 의무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실제 그것은 좀더 많은 재산상속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서의 의무였다.

 아들과 딸이 동등한 몫의 재산을 나누어 받았던 고려에서는 조상을 위한 제사도 동등하게 나누어 지냈다. 그것을 윤행(輪行)이라고 한다. ‘윤(輪)’자는 ‘바퀴’라는 뜻을 가진 한자로, 윤행이란 바로 ‘돌아가면서 행한다’는 뜻이 된다. 즉 조상의 제사를 한 사람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들끼리 돌아가면서 지낸다는 뜻이다.

 윤행의 관행은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기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중기인 1524년에 3형제가 있던 어떤 한 집안에서 제사를 각각 분담하는 내용을 기록한 분재기13를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장남은 조상의 제사를 전담하고, 차남은 부모의 기제사를, 막내는 외조부모의 제사를 전담하였다고 한다. 그 기록에서 외조부모의 제사를 외손주가 맡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고려인이나 조선 전기인은 사실 꼭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별로 없었다. 아들이 있으면 좋지만, 딸만 있을 경우에는 자신의 제사를 사위와 외손주에게 밭기는 것이 상례였다. 아들이 없는 경우 ‘대’극 끊기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 다른 사람의 자식을 입양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딸에게 가야 할 재산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당시인들은 입양을 꺼려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제사는 딸을 통해 외손주에게 맡기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유명한 유학자이자 16세기 중엽의 인물인 이율곡의 집안에서도 이런 윤행의 관행을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17세기 말에도 일부 집안에서는 여전히 제사를 윤행으로 치르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697년 8남매가 있었던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인 부모의 기제사는 장자가 담당하지만,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묘기제)는 8자녀가 돌아가며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재산의 상속에서 차별받지 않았던 딸들은 그애 걸맞은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부모 생전의 봉양도 고려시대에는 주로 딸이 맡고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공녀(貢女)의 문제로 원나라에 고려가 상소한 글 중에, “고려의 풍습은 중국과 달라서 아들은 비록 따로 떨어져 살더라도 딸은 함께 동거합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원나라에서 너무 지나치게 많은 여성들을 자기 나라에 보낼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 집안에서의 딸의 위치를 과장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적어도 부모의 봉양 책임을 무조건 아들, 그것도 장남의 몫으로 여겼던 조선 후기와는 매우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Ⅳ. 고려 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

 

 1477년 조선 성종 8년 재가녀의 자손을 관직에 천거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것이 바로 재가금률(再嫁禁律)이다. 여성을 남성보다 못하게 여기던 사회가 결국 명분을 위해 여성에게 새로운 족쇄를 채운 것이다. 예와 조화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조선시대는 여성에게는 속박과 규제의 시대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것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오늘날보다 더욱 활발한 여성들이 고려시대에는 존재했다. ‘박 유 사건’이라는 당대의 해프닝을 살펴보면 남성 부럽지 않은 고려 여성에 대해 느낄 수 있다. 고려가 일부일처의 사회였는가 아니면 일부다처의 사회였는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였다가 고려 말 몽고의 영향으로 일부 관인 층에서 일부다처의 경향이 나타났다고 한다. ‘박 유 사건’ 또한 이 시기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박 유는 원 간섭기의 재상이었는데 평소 늘 고려에 남성보다 여성이 많아 결혼하지 못한 이가 많음을 주장하며 조정에 축첩제도를 두자고 상소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소문의 내용이 알려지자 부녀자들이 모두 박 유를 원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 연등회를 보기 위해 박 유가 왕을 모시고 가는 것을 본 한 노파가 “첩을 두자고 건의한 거렁뱅이 늙은이다” 라고 외쳤고, 이에 주의의 여인네들이 모두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재상들 중에는 자신의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었기에 박 유의 건의는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고려가 당시까지 일부일처제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성들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남녀가 혼인을 한 뒤에 어느 쪽에서 거주했을까? 고려는 주로 서류부가흔(壻留婦家흔)이 일반적이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류부가흔, 즉 결혼식을 처갓집에서 하고 결혼 후에도 일정 기간 사위가 처가살이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겉보리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 않는다”라거나 “뒷간과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거나, “출가외인” 이란 말은 모두 조선시대에 나온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의 경우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을 뿐 아니라 사위가 처가살이 자체를 어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손자까지 처가에서 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왕자도 외가에서 자라는 경우가 있었다. 그 예로 인종을 들 수가 있다. 물론 아버지인 예종은 왕이기에 처가살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인종은 외가(이자겸의 집)에서 자랐다. 이렇듯 처가살이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결혼 생활이었고 그만큼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시집살이를 강요당했던 조선시대에 비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특권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과부가 되었을 경우에도 계속해서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려의 경우는 상당수의 과부들은 친정에 되돌아가서 생활을 했다.

 재산은 자녀간의 균분 상속이 이루어졌다. 부모의 유언이 특별히 없을 경우 재산은 자녀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재산 상속은 관습적인 것이어서 누구나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부모가 죽은 후 자매에게 재산 나누어주기를 꺼렸던 이 지저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음을 볼 때 균분 상속의 관행을 생생히 알 수 있다. 균분 상속은 다른 한편으로 그에 따른 의무도 균등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러하듯 자녀의 의무는 부모가 살아서는 부모 봉양을 잘하는 것이고 부모가 죽어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를 잘 지내는 것이다. 부모 생전에 봉양을 조선시대에는 전적으로 장남의 몫으로 돌렸던 것에 비해 고려시대에는 딸도 그 역할을 수행했다. 고려시대에는 부모가 딸과 사위와 함께 사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므로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딸의 역할이 상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고려 시대 호적에서 아들, 며느리와 동거하는 경우 뿐 아니라 딸, 사위와 동거하는 경우도 상당수에 달했던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부모 사후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돌아가며 맡았고 이를 윤행(輪行)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균등한 재산 상속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상속받은 몫에 대한 여성의 재산권 행사가 인정되고 보호되었다. 호구단자 등에 기록된 노비의 기록을 보면 노비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점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여성이 가지고 온 노비의 소유권이 결혼하여 남자 집에 산다고 하여도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부인에게 그대로 소유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부인이 재혼하거나 후손이 없을 경우에는 다시 친정에 귀속됨으로써 노비의 소유권은 명백히 나누어졌다. 이는 결혼한 여성이 자신 명의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나라가 법적으로 부부 별산제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부인 명의의 재산에 대해 세금을 더욱 높게 매김으로써 여성의 재산권 행사에 제한을 주는 것에 비하면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보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혼도 재혼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조선시대 재혼이 금지되고 수절을 강요당한 것과 매우 다른 양상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이혼율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송나라 사신의 고려 견문기인 <고려도경>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고려인들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로울 뿐이다’ 라고 적혀 있다. 물론 지금만큼은 아니겠지만 이혼이나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시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혼은 남편과 부인 어느 한 편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질 수는 있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시대처럼 “칠거지악” 이란 아주 애매한 조건으로는 부인에게 이혼을 청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들을 못 낳는 것을 이유로 부인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열전이나 묘지명의 기록 중 “무자(無子)” 라고 하여 자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였다는 점이 바로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혼 이후에 과부로서 재혼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마지막 왕의 재위 기간까지도 여성의 재혼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왕의 부인 중에도 재혼녀는 있었다. 충숙왕비인 수비 권씨가 그 얘이다. 충렬왕의 세 번째 부인인 숙창원비도 역시 과부였는데 왕에게 재혼하였다. 또한 충선왕 비인 순비 허씨는 원래 평양후 현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낳았는데 남편이 죽자 그후 충선왕의 비가 되었으며 그 자식들은 모두 왕자와 공주의 예로써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여성의 재혼이 흔하였음을 보여주는 용어로 의자(義子)라는 것이 있다. 의자란 전 남편의 자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이런 의자에게도 음서의 혜택이 주어지고 있었다. 의자라는 용어가 쓰이고 이들이 음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의자가 일반적인 존재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여성의 재혼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던 고려시대는 “양측(兩側)적 친 속 사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친족의 범위를 부계(父系)만 강조하였던 조선시대와 달리 모계(母系)도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시하고 있던 사회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친족범위에 대한 민법(民法) 규정은 1990년에 와서야 비로소 개정되어 부계와 모계 혈족 모두 8촌 이내로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또 하나의 전통이 계승된 것이다. 위의 설명처럼 양측 적 친 속 사회였던 고려에서는 그만큼 친 속내에서 외가나 처가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처 족이나 외가의 친족 내 위치는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복 제(五服制)와 음서 제(蔭敍制)이다. 오복 제는 상례(喪禮)에 상복을 입는 친족의 범위와 상복의 종류를 정한 법이다. 아버지의 상에는 가장 높은 단계의 상복인 참최 3년복을 입고 어머니 상에는 자최 3년복을 입으며 조부모 상에는 그보다 낮은 단계의 상복을 입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웃나라였던 중국에 비해 고려시대에 시행되고 있던 오복 제는 상대적으로 처 족이나 외가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즉 중국에서는 외할아버지 상에 5개월 상복을 입은 것에 비해 고려의 경우는 1년 상복을 입고 있으며 중국에서 상복을 입지 않았던 처의 형제에 대해서 고려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그만큼 고려시대에는 처 족이나 외족이 친족 내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 친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호적에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고려시대 호적을 보면 남편이 죽었을 경우엔 비록 장성한 아들이 있더라해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호적에 기록하는 서열 순서도 조선시대처럼 아들에게 우선 순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출생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묘지명 등의 기록을 보면 낳은 자녀의 수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무조건 '몇 남 몇 녀'라는 식으로 기록하지 않고 출생 순서에 딸이 먼저일 경우에는 '몇 녀 몇 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문제인 듯 싶지만 당시 여성의 지위를 단편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주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여성의 지위를 반영하는 제도가 있다. 고려시대 관리등용방식에는 과거제도와 음서제도가 있는데 이런 음서제도에 여성의 지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당시 음직이 수여되는 범위는 해당 관리의 아들, 손자, 사위 등에서 협 5녀(挾五女)나 심지어 협 22녀에까지 이르고 있다. 협 5녀나 협 22녀라는 것은 가족의 계보에 끼여 있는 여성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음직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주고받는 처음과 끝은 남성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에 1명에서 5명의 여성이 끼어있는 집안에까지 음서의 혜택이 주어지는 규정인 것이다. 이렇듯 어머니에서 딸로, 정해진 숫자만큼 여성이 있는 집안에까지 음서의 혜택이 내려지므로 고려시대의 족보는 여성 쪽도 끝까지 밝혀 놓았다. 물론 음서의 혜택을 누리려는 목적만으로 여성의 계보를 기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상으로 당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높았던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의 영향으로 낮아지고 만다. 그리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오늘날에는 교육과 고용의 평등, 가사 노동의 가치 인정 등 여성의 자율과 평등에 관한 법률적 보장과 양적으로 늘어난 여성 취업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어느 정도 상승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남녀의 불평등 구조가 아주 개선된 것은 아니다. 물론 여성의 지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점차 개선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여성의 가치가 아직도 고려시대만 못하다는 것이다.

 

 

 

 

Ⅳ. 마치는 글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이란 것은 전체 역사 기간 중에서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존속했기 때문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우리 민족이기에, 기껏해야 20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만 존속했던 ‘사실(史實)“에 전통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겨진다. 재산상속의 ’전통‘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도 바로 그 짧은 시기의 역사에 속해 있다. 우리는 재산상속에서 딸과 아들을 차별하는 것이 오랜 전통인 양 착각하고 그것을 최근까지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산상속에서 자녀를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즉 17세기 말에 시작되어 조금씩 정착된 것이다.

 혼인과 상속을 통해서 살펴본 고려사회에서 남녀가 평등했다고 말할기는 어렵다. 다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리가 늘어났을 뿐이다. 여성들은 무엇보다 관직에 나갈 수 없었고 생산 노동에 종사하는 일 이외에 다른 사회활동은 보장되지 않았다. 남존여비의 기존 질서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부분적 또는 상대적으로 권리나 인권이 보장되어 있을 뿐이었다. 즉 고려 여성의 생활상은 시대를 뛰어넘어 평가될 수는 없다. 고려의 여성들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고난 신분이나 가족의 지위에 의해 그 자신의 지위나 생활까지도 결정되는 ‘전근대 여성’이었다는 한계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참고 문헌

 

이기백,『한국사시민강좌』제15집-한국사상의 여성 특집호, 일조각, 1994

강숙자,「한국 전통사회 여성의 삶에 대한 연구 」, 이화여자대학교, 1987

박병호,「한국의 전통사회와 법」, 서울대학교, 1985

박용옥,「한국 여성 근대화의 역사적 맥락」, 지식산업사, 2001

강숙자,「한국여성학연구서설」, 지식산업사, 1998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 「한국근대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1987

강숙자,「인문과학」, 성신여자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1995

김성희,『한국여성의 가사노동과 경제활동의 역사 』, 신정, 1995

권순형,「고려시대 혼인제도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1996 


<출처> mahan.wonkwang.ac.kr/non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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