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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옮긴글] 최영의 요동 정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6.11.30|조회수94 목록 댓글 0

『고려사』고종 45년(1258년) 12월의 기록에 따르면, 원(元)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고려를 배반하고 화주(和州) 이북 지역을 바치면서 원(元)에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원(元)은 그 지역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趙暉)를 초대 총관으로 삼았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龍津縣人趙暉, 定州人卓靑, 以和州迆北, 附蒙古. 蒙古置雙城摠管府于和州, 以暉爲摠管, 靑爲千戶."


즉, 번역하면,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화주(和州) 이북 지방을 몽고(蒙古)에 넘겨주었다. 몽고(蒙古)가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역사적인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형태시 내구현 주변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림 1] 쌍성총관부 등의 추정 위치


즉,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었던 지역은 천혜의 요새지로서 698년에 대진국(발해)을 건국한 대조영이 처음에 나라를 세웠던 동모산(東牟山)과 같은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대진국(발해) 무왕(武王, 재위: 719~737년) 대무예(大武藝)가 732년에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등주(登州)를 점령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모산(東牟山)·등주(登州)·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근거는 『요사』지리지와 『신당서』지리지이다.

즉, 『요사』지리지 남경(南京)에 관한 기록에 따라 요(遼) 남경(南京, 연경)의 위치가 춘추전국시대부터 유주(幽州)로서 현재의 북경시가 아니라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임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당서』지리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기록에 따라 요동(遼東)은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잠시 두었던 요동성(遼東城)으로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광부진임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2] 유주(연군성), 영주, 안동도호부(요동성) 등 추정지역


즉, 『신당서』지리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기록에 따르면, 연군성이 있었던 당 유주대도독부에서 동쪽으로 500리 거리에 안동도호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 둔유현에서 동쪽으로 당척 500리 거리(실제이동거리)에 현재 광부고성(요동성, 안동도호부)이 위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혹자는 500리가 되는 거리가 거기만 있겠느냐고 본 연구원을 비웃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신당서』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데로 연군성(당 유주)과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밝히고 그 거리가 500리인지 밝힐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숫자는 정확한 것이다.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연군성(당 유주)에서 안동도호부까지 500리임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공부를 더 해야만 할게 아닌가?

아니면, 사서 기록이 틀렸다고 어거지를 피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울러 요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 둔유현에서 요동성을 거쳐 동쪽으로 현재의 황해로 빠져나가는 청장하(淸河)로 추정할 수 있으며, 압록수는 현재의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 남쪽을 지나 현 안평현을 거쳐 동쪽으로 황해로 빠져나가는 현재의 호타하(滹沱河)로 추정할 수 있다.


이어서 『고려사』원종 10년(1269년) 10월의 기록에 따르면, 최탄(崔坦)이 서경유수(西京留守) 등을 죽이고 몽고(蒙古)에 투항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崔坦殺西京留守及龍·靈·鐵·宣·慈五州守, 西北諸城官吏, 皆歿於賊. 坦詭言於蒙古使脫朶兒曰, “高麗卷土, 將欲深入海島, 故殺諸城守, 欲入告于上國耳.” 於是, 執義州副使金孝巨等二十二人, 歸于蒙古."


즉, 번역하면,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최탄(崔坦)이 서경유수(西京留守)와 용주(龍州)·영주(靈州)·철주(鐵州)·선주(宣州)·자주(慈州) 등 5개 주의 수령을 죽이니, 서북지역 여러 고을의 관리가 모두 반적에게 살해되었다.

최탄(崔坦)이 몽고(蒙古) 사신 탈타아(脫朶兒, 톡토르)에게 거짓말하기를, “고려는 온 나라가 장차 깊은 섬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 고을의 수령을 죽이고 원(元)에 들어가서 보고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주부사(義州副使) 김효거(金孝巨) 등 22인을 붙잡아서 몽고에 투항하였다."


또 『고려사』원종 11년(1270년) 2월의 기록에 따르면, 몽고(蒙古)가 서경(西京)동녕부(東寧府)를 두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丁丑 崔坦請蒙古兵三千來鎭西京, 帝賜崔坦·李延齡金牌, 玄孝哲·韓愼銀牌 有差. 詔令內屬, 改號東寧府, 畫慈悲嶺爲界."


즉, 번역하면,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최탄(崔坦)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西京)에 주둔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崔坦)·이연령(李延齡)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玄孝哲)·한신(韓愼)에게 은패(銀牌)를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서경을) 직접 몽고에 속하게 하고, 동녕부(東寧府)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자비령(慈悲嶺)을 (고려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즉,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된 화주(和州) 등은 1258년에 넘어갔고,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된 서경(西京) 등은 1269~1270년에 넘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충렬왕 16년(1290년) 3월의 기록에 따르면, 원(元)이 동녕부(東寧府)가 있었었던 서북 지방 여러 성을 돌려주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元)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동녕부(東寧府)를 없애고 우리나라 서북지방의 여러 성들을 다시 돌려주었다.

왕이 동녕부 총관(摠管)인 한신(韓愼)과 계문비(桂文庇)를 대장군(大將軍)으로, 현원열(玄元烈)을 태복윤(大僕尹)으로, 나공언(羅公彦)과 이한(李翰)을 장군(將軍)으로 임명하였다."


이어서 『고려사』공민왕 5년(1356년) 7월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탈환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東北面兵馬使柳仁雨陷雙城, 摠管趙小生, 千戶卓都卿遁走, 收復和∈·定·長·預·高·文·宜州, 及宣德·元興·寧仁·耀德·靜邊等鎭. 咸州以北, 自高宗戊午, 沒于元, 今皆復之."


즉, 번역하면,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유인우(柳仁雨)가 쌍성(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摠管) 조소생(趙小生),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이 도망쳐버리니,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함주(咸州) 이북 지역은 고종(高宗) 무오년(1258년)부터 원(元)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여기서 정리해 볼 사항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함으로써 되찾은 지명들이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함주(咸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이다.

서경(西京) 등 서북 지역의 지명들로서 용주(龍州)·영주(靈州)·철주(鐵州)·선주(宣州)·자주(慈州)·의주(義州) 등이 기록되어 있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주변 지명 중에 등주(登州)가 포함되어 있으니 등주(登州)란 지명은 대진국(발해) 시기 이전부터 있었던 지명으로서 고려 시기에도 사용했던 지명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당시 고려군이 1356년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되찾기 위하여 쌍성(雙城)을 공격할 때, 쌍성총관부의 총관은 조휘(趙暉)의 증손자 조소생이었는데, 천호 탁도경과 함께 필사적으로 방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58년에 쌍성(雙城) 지역을 원(元)에 바쳤던 배반자 조휘(趙暉)의 손자 조돈(趙暾)과 이자춘, 그의 아들 이성계가 내부에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의 성문을 열므로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함락되고, 조소생은 도망갔다고 한다.

한편, 고려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함락시킨 후, 함락에 공을 세운 이자춘은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쌍성총관부의 초대 총관이었던 조휘의 후손 조돈(趙暾)도 쌍성총관부 함락에 적극 협력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조상의 배신을 청산하고 새로이 고려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고 한다.

이어서 『고려사』공민왕 18년(1369년) 11월 및 공민왕 19년(1370년) 1월 기록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은 1369~1370년에 원(元)이 쇠퇴하고 명(明)이 건국(1368년)되는 혼돈의 시기에 원(元)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즉, 『고려사』공민왕 18년(1369년) 11월의 기록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가을 이후 동북면(東北面)과 서북면(西北面)의 요해처(要害處)에 만호(萬戶)와 천호(千戶)를 많이 배치하였으며, 원수(元帥)를 보내어 장차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북원(北元, 몽고)과 단절하려고 하였다."


이어서 『고려사』공민왕 19년(1370년) 1월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 .... 이성계가 기병 5,000명과 보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00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으며, 또 700여 리를 행군하여 갑진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 .... 우라산성(亏羅山城, 오녀산성)을 점령하니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가 공격했다는 동녕부(東寧府)가 어디인가?

앞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원(元)이 충렬왕 16년(1290년) 3월에  동녕부(東寧府)가 있었었던 서북 지방 여러 성을 돌려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가 1370년에 공격한 동녕부(東寧府)는 서경이 있었던 서북지방이 아니다.

그렇다면  동녕부(東寧府)가 과연 어디로 이동한 것인가?

그런데 상기한 『고려사』의 기록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대체로 횡설수설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즉,  '황초령(黃草嶺)'과 '설한령(雪寒嶺)'이란 그 당시 1월 추운 겨울의 누런 풀과 눈 내리는 추위를 의미하는 게 아닌가?

또 '우라산성(亏羅山城, 오녀산성)'이란 현재의 요령성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오녀산성을 의미하고 있는데, 압록강까지 약 50km로서 산지에 불과한데 『고려사』의 기록처럼 텅 비는 지역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은가?

또 동쪽에 있었다는 황성(皇城)은 현재의 집안시를 의미하는 것같은데, 현재 교과서에 서있는 것처럼 고구려의 도읍지(국내성)가 그곳에 있었다는 게 아닌가?

또 서쪽에 무슨 서해가 있었으며, 북쪽에 무슨 동녕부(東寧府)가 있었다는 말인가? 

즉, 상기한 『고려사』의 기록을 그려보면, [그림 3]과 같이 지명들을 변이시키고 꾸며댄 기록에 불과함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3] 오녀산성 등의 위치


그러나  상기한 『고려사』기록만으로는 동녕부(東寧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가 1369~1370년에 압록강을 넘어가서 북쪽으로 동녕부를 공격했다는 것은 현재의 요령성 지역을 공격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요동성이 있었던 곳을 현재의 요령성 요양시로 변이시켜놓았으니 북쪽으로 공격했다는 것은 요동을 공격했다는 게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서 1370년 당시는 주원장이 이미 1368년에 명(明)을 건국했으며, 원(元)이 북쪽으로 이동한 지 2년이 되는 해이므로 요동이 비어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요동의 본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주변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1370년에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했다는 것은 현재의 요령성 요양이 아니라 압록수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의 하북성 호타하(滹沱河)를 남쪽으로 건너가서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을 지나 요동까지 공격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고려사』의 기록처럼 실제 고려가 1370년에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했다면, 바로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에 있는 요동성을 점령했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는가?

이어서 『고려사』  우왕(禑王) 14년(1388년)의 기록에 따르면, 명(明)이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조(元朝)에 속했던 땅이니, 철령(鐵嶺)을 요동(遼東)에 귀속시키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禑王)이 명(明)에 보낸 표문에 철령(鐵嶺) 이북 지역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는데,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철령(鐵嶺)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다.

요(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점거하니, 예왕(睿王, 예종)이 요(遼)에 고하고 토벌할 것을 청하여 병사를 보내어 쳐서 회복하고서, 함주(咸州)에서 공험진(公嶮鎭) 등까지 성을 쌓았다.

원(元) 초기 무오(戊午, 1258년)에 이르러 몽골의 산길대왕(散吉大王, 산지대왕)·보지관인(普只官人, 부지르노얀)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정복하던 때에, 본국 정주(定州)의 반란민인 탁청(卓靑), 용진현(龍津縣) 사람인 조휘(趙暉)가 화주(和州) 이북 지방을 가지고 나아가 항복하였다.

금(金) 요동(遼東) 함주로(咸州路) 부근의 심주(瀋州)에 쌍성현(雙城縣)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본국의 함주(咸州) 근처 화주(和州)의 옛날에 쌓은 작은 성 2개를 모호하게 주청하여 마침내 화주(和州)를 가지고 쌍성(雙城)이라고 모칭하였는데, 원(元)은 조휘(趙暉)를 쌍성총관(雙城摠管)으로, 탁청(卓靑)을 천호(千戶)로 삼아 인민을 관할하게 하였다.

지정(至正) 16년(1356년) 사이에 원(元) 조정에 아뢰어, 윗 항의 총관과 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和州) 이북을 다시 본국에 속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여 인민을 관할하게 하였다. 반적으로 인하여 침탈당했다가 대방(大邦)에 아뢰어 복귀시킨 것이다.

명(明)이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元)에서 개원(開元)에 속하였으나, 관할하는 군민들도 요동(遼東)에 속하게 하라고 하였다. 철령의 산은 왕경(王京)으로부터 거리가 겨우 300리이며, 공험진을 변방의 경계로 삼은 것은 1, 2년이 아니다.'


즉, 철령(鐵嶺) 이북 지역에 해당하는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공험진(公嶮鎭) 등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쌍성총관부에 해당하는 화주(和州)·정주(定州)·고주(高州)·문주(文州)·함주(咸州) 등과 같은 곳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철령(鐵嶺) 이북 지역이란 쌍성총관부가 있었던 주변 인근지역임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이어서 『고려사』에 따르면, 1388년 4월에 요동을 정벌하기 위하여 좌·우군을 편성하였는데, 좌·우군을 합쳐 38,830인, 시중군[겸(傔)]이 11,634인, 말이 21,682필이었다고 한다. 1388년 4월 18잉 좌·우군이 평양(平壤)을 출발했는데, 사람들이 10만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또 1388년 5월 7일 좌·우군(左·右軍)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였는데, 이성계 등은 5월 23일 다시 압록강을 건너 회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사』14년(1388년)의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 등이 우왕(禑王)을 쫒아가며 회군하는 데, 우왕(禑王)의 이동 경로 중에 평양(平壤), 대동강(大同江), 개경(開京)등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5월 26일. 우왕(禑王) 평양(平壤)에 이르러 재화를 거두어 대동강(大同江)을 건너고, 밤에 중화군(中和郡)에 이르렀다."


"5월 28일. 우왕(禑王)이 길에서 여러 군대가 이미 가까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샛길로 빨리 말을 달려 기탄(歧灘)에 이르렀다. 다음 날 아침에 개경(開京)에 돌아와 화원(花園)에 들어갔는데, 따라온 자가 겨우 50여 기 정도였다."


그런데 이어서 이성계 등 반란군의 이동 경로에는 서경(西京)과 경성(京城) 등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경(西京)으로부터 경성(京城)까지 우왕을 시종하였던 신료들과 백성들 중에서 술과 음료를 가지고 (회군하는) 대군을 맞이하는 자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끊어지지 않았다."


즉, 같은 지역을 서로 다른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개경(開京)을 경성(京城)이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평양(平壤)과 대동강(大同江)이란 지명을 삽임한 것은 지명의 위치를 [그림 4]와 같이 서경(西京)의 위치를 현재의 이북 평양으로 변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림 4] 교과서에 써있는 이성계 회군경로(잘못된 해석임)


또 『고려사』  우왕(禑王) 14년(1388년) 6월 기록에 따르면, 최영 장군이 이성계 반란군에 패한 후, 성문 밖에서 동요가 돌았다고 하는데,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경성(西京城) 밖에 불빛이 있으며, 안주성(安州城) 밖에 연기가 비친다. 왕래하는 사이에 이원수(李元帥)가 있으니, 원컨대 백성들을 구제하소서.”라고 하였다."


즉, 이미 경성(京城)이 점령되었는데, 요동정벌을 준비한 서경성(西京城)에서부터 안주성(安州城) 사이에 회군한 이성계가 있었다고 하니 바로 안주성(安州城)이 경성(京城), 즉, 개경(開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왕(禑王)이 명(明)에 보낸 표문에 따르면, '철령의 산은 왕경(王京)으로부터 거리가 겨우 30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문안현을 그 당시 고려의 도읍지  개경(開京)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출처: 동북아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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