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옮긴글] 통일신라의 사회 변화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10.02|조회수305 목록 댓글 0

 

사회의 안정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전쟁이 끝나자, 고통스러웠던 백제들에게 평화로운 세상이 찾아왔다.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는 넓어진 영토와 정치적인 안정 속에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고 인구도 늘어났다. 삼국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과 힘을 합쳐 당을 몰아냈고,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자라났다. 신라는 통일 이후 지방 제도를 새롭게 재편하면서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전제 왕권의 확립

 

삼국의 항쟁이 한창이던 7세기 중반, 김춘추는 김유신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태종 무열왕에 즉위하였다. 이후 무열왕계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가면서 왕권 강화의 기반을 다졌다.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은 통일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을 누르고 측근 세력을 확대시켜 왕권을 강화하였다. 문무왕을 이은 신문왕은 자신의 장인이자 진골 귀족을 대표하는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녹읍을 폐지하여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성덕왕 때에는 농민들에게 정전을 지급하고 조세를 바치게 하여 왕의 지배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 태종 무열왕릉비 

비문은 사라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아 있다.

 

 

신문왕의 개혁 정치

 

⑴ 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들의 경제적 바탕이었던 녹읍을 폐지하였다. → 귀족세력 약화

⑵ 군사 조직을 9서당 10정으로 확대하여 민족을 통합하는 지방군을 정바하였다. → 민족 통합, 군사력 강화

⑶ 국학을 설립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 유교 장려

⑷ 유교적 소양을 갖춘 6두품을 등용하였다. → 진골 귀족 세력 견제

 

 

제도의 정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넓어진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다스리기 위하여 더욱 정비된 정치 제도가 필요하였다. 중앙의 정치는 왕의 직속 기관인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그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시중은 왕명을 받들어 행정을 집행하고 국정을 책임졌다. 집사부의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화백 회의의 기능이 축소되고, 상대등의 의 권한도 약화되었다. 영토가 확장되자 지방 통치 조직도 새롭게 정비하여 넓어진 영토를 9주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5개의 소경을 두어 수도가 남동쪽에 치우친 단점을 보완하고 고구려, 백제 출신의 귀족들을 자연스럽게 흡수하였다. 주 밑에는 군과 현을 두어 지방관을 보내 다스렸고 말단 행정 구역인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촌주들은 조세와 공물 등을 부과하기 위해 촌락문서와 같은 문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군사 제도는 9서당 10정으로 편성하였다. 중앙군인 9서당에는 고구려, 백제, 말갈인도 포함되었다. 또한, 지방군은 주마다 1개의 정을 두고, 국경 지역인 한주에는 특별히 2개를 두어 모두 10정으로 편성하였다.

 


▲ 9주 5소경 

 

 

신라 촌락문서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문서는 통일 신라 시기 촌락의 경제 상황과 조세 행정을 알려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촌락문서는 서원경에 속한 4개 촌락의 토지 종류와 면적, 가구와 인구 수, 노비 수, 소와 말의 수, 논과 밭,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의 수 등이 적혀 있다. 3년마다 작성된 촌락문서는 사람을 남녀로 구분하고 16세에서 60세의 남녀를 연령 기준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이는 중앙 정부가 조세를 징수하고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 신라의 촌락문서 

일본 도다이 사(동대사)쇼쇼인에서 발견 되었다.

 

 

불교의 대중화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귀족 중심의 불교가 성장하였다. 그러나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불교는 일반 대중에게도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한 이는 원효이다. 원효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러 스승을 찾아 다양한 불교 교리를 배웠으며, 순박하고 무지한 백성들에게 어려운 불교 교리 대신 ♠'나무아미타불'만 열심히 외운다면 극락 정토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한, 복잡하고 방대한 불교 사상을 종합하여 불교를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였다. 한편, 원효와 함께 통일 신라 불교의 수준을 높인 승려로 의상이 있다. 의상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후 화엄종을 열어 많은 사찰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렀다. 또한, 신라의 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신라인들의 정신적 통합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 원효(왼쪽)와 의상(오른쪽)

 

부석사

 

부석사의 창건 실화에는 의상과 선묘에 관한 내용이 있다. 당으로 유학을 간 의상은 덩저우 지방에 도착하여 한 여인숙에 머물렀는데, 그 집에는 선묘라는 예쁜 딸이 의상을사모하였다. 10년의 유학 생활을 마친 의상이 떠나게 되자 선묘는 의상이 탄 배가 안전하게 신라에 갈 수 있도록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 의상이 신라에 돌아와 불법을 전파할 장소를 찾다가 경북 영주 봉황산에 좋은 곳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다른 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용이 된 선묘가 바위를 뜨게 해서 그 무리를 쫓아버렸다. 이후 의상이 그곳에 부석사를 세웠다.

 

 

▲ 부석사 

 

 

▲ 부석(浮石) 

선묘가 하늘로 뜨게 했다는 바위이다.

 

불교문화의 발전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경주에는 수많은 불상과 탑들이 만들어졌다. 부처의 나라를 꿈꾸었던 불심의 절정은 불국사와 석굴암이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8세기 중반 김대성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당대 최고의 건축술과 예술성을 보여 주고 있다. 20여 년에 걸쳐 완공된 불국사는 부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33개의 계단과 단아한 불국사 3층 석탑, 아름다운 다보탑 등 완벽한 조화와 불교적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불국사 3층 석탑에서는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이 발견되었다. 석굴암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인공 석굴로서 한차의 오차 없이 짜여진 휼륭한 건축 과학을 보여 주며, 석굴암의 본존불상은 부처의 위엄과 경건함의 극치를 나타낸다. 성덕 대왕 신종 역시 섬세하고 뛰어난 신라의 금속 주조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 석굴암 본존불상 

석굴암은 국보 24호로,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 성덕 대왕 신종 

종소리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린다.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 경주 불국사 다보탑

 


▲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 경주 불국사 전경 

 

유학의 증진

 

통일 신라는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신문왕 때 국가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치하였으며, 원성왕 때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평하고 관료를 선발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두를 정리한 설총, 외교 문서에 능한 강수, 당에 가서 빈공과에 합격한 최치원 등 6두품 출신의 학자들은 통일 신라의 유학 수준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다. 한편, 진골 출신인 김대문은 화랑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 등을 지어 중국의 문화와 다른 신라 문화의 독자성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안압지

 

경주에는 신라 귀족들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기와집이 줄을 이었고 금으로 장식한 저택도 나타났다. 인공 연못으로 만든 안압지의 원래 이름은 '월지'였으나, 조선 시대에 연못에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당시의 시인들이 안압지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곳에 진기한 새, 동물, 식물들을 키워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 안압지 설경 

 


▲ 안압지에서 출토된 주사위(주령구)

안압지에서 발견된 14면체의 주사위이다. 주사위에는 간지럼 태우기, 콧등 때리기 등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 귀족들의 놀이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녹읍 

귀족들이 농민들에게 조세를 걷고,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지급한 토지이다.

 

♣시중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불교식 용어로, '아미타불'은 극락 세계를 다스리는 부처를 의미한다.

 

♥이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에 맞추어 적던 표기법이다. 문장의 실질적인 부분은 주로 한자가 사용되었고, 문법적인 부분에서 주로 이두가 사용되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ikcr 커뮤니티, '7.용산구 원효로' 불교신문, 위키백과, 영주 문화관광, Pleasure from Emptiness님의 블로그, 계림의 국토 박물관 순례 블로그, 역사 여행 블로그, 山寺愛人 블로그, 아름다운 풍경이야기 블로그, Panoramio(Google maps)

자료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위키백과, 네이버 카페 우리역사바로잡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