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은 먼저 퀴즈하나 풀어보면서 시작할까 합니다.
[서울, 평양, 개성, 경주, 공주, 부여, 전주, 철원] 지금 나열한 도시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모두들 맞추셨나요? 정답은 한 나라의 수도 이름입니다.
서울(한양)은 조선의 수도였으며, 현 대한민국의 수도입니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현 북한의 수도이고,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습니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였으며, 공주와 부여는 백제의 수도였습니다.
그리고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였습니다.
여기까지는 독자분들 모두 맞추셨을꺼라 생각됩니다.
그럼 마지막 철원도 한 나라의 수도였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어느 나라였을까요?
정답은 후삼국시대 후고구려라 불리기도 한 [태봉]입니다.
[태봉?] 역사에 관심 없으신 분들은 아마 처음 듣는 나라일수도 있을 겁니다.
강원도 철원이 한 나라의 수도였다는 사실도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태봉]은 궁예가 세운 나라입니다.
후삼국시대에 후고구려로 불리우다, 철원에 도읍을 정하면서 [태봉]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역사에 관심 있으신 분들도 잘 모르실 수 있는 나라 [태봉]이지만 [태봉]은 후삼국시대에 가장 큰 영토와 세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습니다.
결국 [태봉]의 한 지방호족이었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웠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태봉]이 후삼국 중 가장 강대국이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과연 [태봉]이 어떤 나라이며, 이 나라를 세운 궁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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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삼국 판세도 - 중원에 가장 큰 나라가 [태봉]이다)
통일신라 말기인 진성여왕때에 이르자 신라가 더 이상 삼국을 통치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각 지방의 지방호족들은 서로 독자적인 세력들을 쌓기 시작하였고, 강력한 지방호족들은 주위의 지역들을 하나둘씩 흡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제땅에서는 견훤이 전라도 지역의 지방호족들을 규합하여 백제부흥을 이끈다는 명분으로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을 세웠습니다.
강원도 지역에서도 많은 호족들이 일어났는데 그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인물이 궁예였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의 헌안왕(또는 경문왕)의 후궁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궁예는 유모의 손에 세달사라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가 통일신라 말기 혼란기에 절을 나와 북원(지금의 원주)지역의 호족이었던 양길의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궁예는 양길의 부대를 잘 지휘하여 명주(지금의 강릉일대)를 평정하자 스스로 장군이라 부르며 독자적인 세력으로 일어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양길과의 일전에서 승리한 궁예는 강원도 전 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궁예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많은 지방호족들이 자진 투항하기 시작하였는데, 개성의 가장 큰 해상호족이었던 왕건도 이때 궁예에게 투항하였습니다.
궁예는 왕건을 매우 총애하였습니다.
왕권도 궁예의 은총에 보답하듯이 청주지역을 공략해 충청도 전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후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금성(지금의 나주)을 공격해 후백제를 큰 곤경에 빠트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중원에 큰 세력과 영토를 차지한 궁예는 드디어 정식 도읍지로 철원을 선택하고 [태봉]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궁예가 세운 [태봉]은 제후국이 아닌 황제의 나라를 표방하였습니다.
궁예는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수덕만세]라는 연호를 사용하다가 [정개]라는 연호로 바꿔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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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봉의 철원궁궐 조감도)
(철원의 풍천읍 일대와 비무장지대(DMZ) 사이에 건설된 궁궐로 외성둘레만 12km에 달한다)
(비무장지대(DMZ)에 많은 유적들이 있을거라 추정하고 있음)
대부분 고대 민족국가들은 도읍지를 큰 산과 강이 둘러싸여 있는 곳으로 선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방어에 유리하고, 배를 통한 신속한 교통이 가능한 곳으로 수도를 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수도입지 조건으로 볼때 철원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철원지역에는 큰 산이 없었으며, 교통으로 이용가능 한 강줄기 또한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민족국가들이 산 골짜기에 궁궐을 지어 안전하게 방어하는 것에 비해 궁예는 넓은 철원평야 한 가운데 궁궐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태봉]이 황제국이라는 자존심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궁예는 후백제와 신라만 복속하여 한반도만 통일하는 작은 통일왕국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중국을 지배한 통일왕조국가들도 넓은 평야에 대궐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한나라의 수도가 방어를 위한 수도가 아닌, 정복을 위한 수도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황제국을 표방한 궁예도 넓은 철원평야 한 가운데 왕도를 건설하여 중국을 도모하겠다는 큰 꿈을 널리 표출하였습니다.
우리 민족국가 중 황제국을 표방한 나라는 [발해]와 [태봉]밖에 없었습니다.
한반도 중원에 큰 나라를 세운 궁예의 [태봉]은 곧 삼국을 통일하고 중국을 도모하는 강성한 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바로 큰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태봉을 세운 궁예는 이때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정치를 선포하였습니다.
고대 민족국가들은 대부분 지방호족의 세력들을 인정하고 이들과 연합하는 일종의 분권형 왕권정치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세력을 가진 지방호족들에게는 임금이 눈치를 볼 정도로 지방호족들의 권세와 세력은 임금못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재산과 노비를 소유하였으며, 독자적인 수조권(세금을 거둘수 있는 권리)및 대규모 사병을 소지한 지방호족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궁예는 이러한 분권형 왕권정치로써는 새로운 시대를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지방호족들의 독자적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관리로 편입하기 위해 많은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중에 가장 돋보이는 제도는 신라의 골품제같은 신분제도를 완전히 철폐하여,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신분과 상관없이 모두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파격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지방호족들은 자신의 재산이었던 노비들이 관직에 등용될 경우 사유재산을 잃게 되므로 격렬히 반대하였지만, 궁예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강력하게 실행해 나갔습니다.
또한 절에서 보유한 많은 사유재산이나 노비들도 국가에 귀속하도록 추진하였습니다.
이또한 많은 절들이 심하게 반대하였지만, 스님이었던 궁예는 태봉을 미륵국으로 천명하면서 태봉을 온전히 받드는 것은 부처의 뜻을 받는 것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궁예 또한 자신을 미륵보살로 명명해 임금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로서 백성들을 보살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궁예의 개혁정치를 환영하였지만, 지방호족들과 절들은 극심한 반감을 표출하였습니다.
큰 세력을 지닌 지방호족들은 서로 연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모든 재산과 사병들은 국가에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이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방호족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었던 왕건은 지방호족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궐기하여 궁예를 몰아내자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명성산 일대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궁예의 친위부대는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궁예는 왕건에게 임금 자리를 내주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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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의 석등 - 일제시대에 발굴된 것으로 크기가 일반사람의 3배나 됨)
왕건은 태봉을 장악하고 국호를 고려로 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겨 자신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졌습니다.
그러나 왕건에 대한 반역도 만만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청주지역의 호족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으며, 공주지역의 30여성이 후백제로 투항하기도 하였습니다.
왕건은 대국을 꿈꾸는 큰 야심가가 아니였습니다.
그는 후백제와 신라와 경쟁하였고, 그의 정책도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왕건은 지방호족 세력들을 흡수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선택하였습니다.
정략결혼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것을 토대로 후백제와 신라를 병합하여 통일고려를 탄생시켰습니다.
한반도를 통일한 왕건은 정략결혼을 더욱 전략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왕건에게는 무려 29명의 정실부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지방호족들의 딸들이었습니다.
지방호족의 세력들을 모두 인정하므로, 안정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왕건 사후 지방호족들의 치열한 왕권다툼으로 다시 혼란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후 발해의 멸망으로 중원을 도모하던 북망민족국가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역사는 한반도로 국한된 반도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사인 삼국사기나 고려사에서는 궁예는 포악, 잔인하여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민심을 잃고 전쟁에 패하여 도주하다가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맞아 죽은 것으로 기록되 있습니다.
필자는 궁예의 기록도 승자에 의해 각색된 기록으로 보고 있습니다.
궁예가 왕권강화를 위해 무리한 정책을 사용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미신적인 종교극단주의의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이면에는 대국건설의 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 때문에 이상해진 군주가 아니라,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종교를 통해 지방호족들을 흡수하려고 하였지만, 그의 선택은 효과적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한반도에 큰 이상국가를 건설해 대륙까지 호령하려고 하였지만, 궁예의 이상은 몽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연 궁예의 이상은 몽상이었을까요?
발해와 연합하여 같이 중원을 도모할 수는 없었을까요?
태봉과 발해의 멸망으로 우리민족국가 중 중원을 도모한 황제국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역사는 지나간 옛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정치를 정확히 반영하는 지금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성산에 있는 궁예바위 - 궁예가 철원도성을 바라 보면서 매일 울었다는 전설이 내려옴)
철원에 있는 명성산(鳴聲山)의 이름은 궁예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왕건의 반란으로 대궐을 내주고 명성산으로 쫓겨간 궁예는 이 바위에 앉아 철원도성을 바라보며 매일 울었다고 합니다.
결국 보개산성전투에서 대패하고 궁예도 최후를 맞이하였는데, 이때 명성산이 철원지역 백성들과 같이 울었다는 전설이 내려와 울음산으로 불리웠고, 그것을 한자로 표시해 명성산(鳴聲山)이 되었습니다.
철원지역에 이런 전설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궁예가 백성들에게 민심을 잃은 폭군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궁예와 태봉은 패자가 되어 역사속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많은 전설을 남기며 승자의 기록에 항변하고 있습니다.
18년의 짧은 꿈이었지만 궁예와 태봉이 꿈꾸웠던 큰 나라를 지금의 후손들인 우리들이 기억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출처] [후삼국사 - 궁예와 태봉 이야기] (mice72 돌나라 한농) |작성자 공공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