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가 망하고 조선시대로 오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일 중에 하나가 귀족들이 가노들을 둘 수 없도록 한 것이었죠. 사헌부에서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고려 종친들이나 거실들이 보유한
노비는 천여구를 넘는 것도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그들의 사병이 될 수 있었으니, 이런것을 혁파하지 않는다면 당장 군사적으로도 왕권에 위협이 될
것은 뻔한것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가 들어와서도 양반들이 다수의 노비를 거느리는 것은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고 조선시대 청백리로 통하던 이맹현도 전국 70개 군현에 752명의 노비를 두고 있었고, 기묘사화로 이름이 있던 권벌 또한 경북 지역에 317명의 노비를 거느렸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과부 홍씨 라는 여성도 자기 소유의 노비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세종때 김무라는 사람은 죽기 전 자손들에게 노비 225명을 골고루 나누기도 했습니다. 전라도 같이 곡창지대라면 하멜의 목격으로 2~3000에 이르는 노비를 두고 있기도 했다죠.
물론 한 집안에 수백 수천명의 노비를 두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말했듯 솔거노비 말고 외거노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고, 양반들의 토지 기반은 자신의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있었기 떄문에 그 지역에서 신공을 바치는 노비들을 합치면 이정도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노비들을 관리하기 위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양반들은 체면상이라도 경제 운용 문제를 운운하기에는 체통이 떨어진다 생각했고, 여자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일반 양인은 신뢰하기 힘들고 부리기도 힘드니 노비 중에서 일 잘하는 노비를 골라서 관리를 맏겼지요. 그런 노비를 수노(首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주인집 노비들을 관리하고, 외거노비들이 바칠 신공을 관리하거나 먼 지역의 경우 신공을 직접 받으러 다니기도 했죠.
헌데 양반들은 자신의 토지를 노비에게 경영을 맡기기도 했지만, 양인들에게 소작을 주기도 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가면 노비를 관리하기 어려워져서 임금노동자(머슴)로 부리거나 소작을 내주는 경우가 더 많아졌죠. 그 사람들을 양반들이 직접 컨트롤 했을까요? 그럴리 없죠. 이 수노들이 그들까지 관리했습니다. 분명 양인보다 노비가 신분상으로 더 밑인데 양인이라고 이 수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삼성전자 계장을 하청업체 이사가 어찌할 수 있겠냐는 말이지요. 이들의 영향력은 주인의 영향력과 마찬가지로 위세가 대단해서 이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양인이 설설 기기도 했습니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고 조선시대 청백리로 통하던 이맹현도 전국 70개 군현에 752명의 노비를 두고 있었고, 기묘사화로 이름이 있던 권벌 또한 경북 지역에 317명의 노비를 거느렸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과부 홍씨 라는 여성도 자기 소유의 노비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세종때 김무라는 사람은 죽기 전 자손들에게 노비 225명을 골고루 나누기도 했습니다. 전라도 같이 곡창지대라면 하멜의 목격으로 2~3000에 이르는 노비를 두고 있기도 했다죠.
물론 한 집안에 수백 수천명의 노비를 두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말했듯 솔거노비 말고 외거노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고, 양반들의 토지 기반은 자신의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있었기 떄문에 그 지역에서 신공을 바치는 노비들을 합치면 이정도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노비들을 관리하기 위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양반들은 체면상이라도 경제 운용 문제를 운운하기에는 체통이 떨어진다 생각했고, 여자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일반 양인은 신뢰하기 힘들고 부리기도 힘드니 노비 중에서 일 잘하는 노비를 골라서 관리를 맏겼지요. 그런 노비를 수노(首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주인집 노비들을 관리하고, 외거노비들이 바칠 신공을 관리하거나 먼 지역의 경우 신공을 직접 받으러 다니기도 했죠.
헌데 양반들은 자신의 토지를 노비에게 경영을 맡기기도 했지만, 양인들에게 소작을 주기도 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가면 노비를 관리하기 어려워져서 임금노동자(머슴)로 부리거나 소작을 내주는 경우가 더 많아졌죠. 그 사람들을 양반들이 직접 컨트롤 했을까요? 그럴리 없죠. 이 수노들이 그들까지 관리했습니다. 분명 양인보다 노비가 신분상으로 더 밑인데 양인이라고 이 수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삼성전자 계장을 하청업체 이사가 어찌할 수 있겠냐는 말이지요. 이들의 영향력은 주인의 영향력과 마찬가지로 위세가 대단해서 이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양인이 설설 기기도 했습니다.
허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월급쟁이. 이들 말고 노비로 살면서 엄청난 부를 모은 노비들도
꽤나 있었습니다. 세조 13년에 공노비나 사노비가 쌀 100가마를 국가에 헌납해 그것을 함길도까지 이송하면 면천을 해 주겠다는 포고를 내린적이
있었죠. 1968년이전까지 논 300평에서 나오는 수확이 불과 112kg 정도인데 조선시대라면 그보다 더 적었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 쌀
100가마니를 헌납할 수 있다면 논 수백 수천평을 가진 거부라고 봐야 합니다. 더더구나 그걸 저 먼 변방 함길도까지 운송하려면 그 비용도 만만치
않죠.
국가가 변경 방위를 위한 자금이 부족해 그런 명을 내렸습니다만 세조 13년 9월 그러니까 명을 내린지 2개월만에 이를 취소하는 결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았거든요. 그 돈을 내고 면천을 하겠다는 노비들이 너무 많아 노비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 상황이 되어버린지라 어쩔 수 없이 취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부를 축적한 노비들이 많았다는거죠.
다른 것으로 성종때 큰 기근이 있었는데 이떄 충청도 진천에 사는 사노비 임복이 기근으로 굶는 사람을 돕고자 미곡 2000석을 국가에 헌납합니다, 그러자 성종이 뜻이 가상하다며 그를 면천해 주었죠. 헌데 이를 보고 전라도 나주의 가동이란 노비가 똑같이 2000석을 헌납했지만 이미 충분한 양의 곡식을 모았으니 면천해 주지 말라는 명을 내립니다. (역시 차는 첫차를 타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포스팅에서도 이야기 한 바 있는 불산이라는 노비는 면포를 저화로 바꾸라는 명을 어기고 1500필에 달하는 면포를 숨기고 있다가 적발되기도 하죠.
제주도의 경우도 전재산을 내어놓아 제주도 지역의 흉년을 해결하고 상으로 금강산 구경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 만덕은 제주도 의녀로 기생노비죠. 그리고 정확한 재산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6세기 당대 한양을 흔든 미인 기생 성산월을 마누라로 삼은 것은 장흥고 소속 공노비였습니다. 노비는 노비끼리 결혼한다지만 성산월 같은 큰 기생은 양반집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노비와 결혼했다는 것은 그가 엄청난 부자였다는 추측을 할 수 있죠. 물론 그 노비가 무척 잘생겼다면 다르겠지만 알려진 바로는 목에 호리병 같은 혹까지 붙이고 다니는 못생긴 남자였답니다. 애시당초 노비가 최고 기생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그가 한가락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죠.
뭐, 이런건 어디까지나 일부 노비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이야기에서도 [성호사설]에 조선땅에서 가장 불쌍한건 사노비라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이렇게 재산을 모으거나 한가락 한 노비들도 있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 꺼리죠.
국가가 변경 방위를 위한 자금이 부족해 그런 명을 내렸습니다만 세조 13년 9월 그러니까 명을 내린지 2개월만에 이를 취소하는 결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았거든요. 그 돈을 내고 면천을 하겠다는 노비들이 너무 많아 노비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 상황이 되어버린지라 어쩔 수 없이 취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부를 축적한 노비들이 많았다는거죠.
다른 것으로 성종때 큰 기근이 있었는데 이떄 충청도 진천에 사는 사노비 임복이 기근으로 굶는 사람을 돕고자 미곡 2000석을 국가에 헌납합니다, 그러자 성종이 뜻이 가상하다며 그를 면천해 주었죠. 헌데 이를 보고 전라도 나주의 가동이란 노비가 똑같이 2000석을 헌납했지만 이미 충분한 양의 곡식을 모았으니 면천해 주지 말라는 명을 내립니다. (역시 차는 첫차를 타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포스팅에서도 이야기 한 바 있는 불산이라는 노비는 면포를 저화로 바꾸라는 명을 어기고 1500필에 달하는 면포를 숨기고 있다가 적발되기도 하죠.
제주도의 경우도 전재산을 내어놓아 제주도 지역의 흉년을 해결하고 상으로 금강산 구경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 만덕은 제주도 의녀로 기생노비죠. 그리고 정확한 재산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6세기 당대 한양을 흔든 미인 기생 성산월을 마누라로 삼은 것은 장흥고 소속 공노비였습니다. 노비는 노비끼리 결혼한다지만 성산월 같은 큰 기생은 양반집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노비와 결혼했다는 것은 그가 엄청난 부자였다는 추측을 할 수 있죠. 물론 그 노비가 무척 잘생겼다면 다르겠지만 알려진 바로는 목에 호리병 같은 혹까지 붙이고 다니는 못생긴 남자였답니다. 애시당초 노비가 최고 기생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그가 한가락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죠.
뭐, 이런건 어디까지나 일부 노비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이야기에서도 [성호사설]에 조선땅에서 가장 불쌍한건 사노비라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이렇게 재산을 모으거나 한가락 한 노비들도 있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 꺼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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