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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육자료

[옮긴글] 백성과 조선을 살린 - 김육의 대동법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09.16|조회수237 목록 댓글 0

 

1.공납의 현실

  조선시대 백성이면 3가지 의무가 있었는데 토지에대한 세금인 전세와 군대를 가거나

  안간다면 대신 군포를 내야하는 군역 그리고 특산물을 내는 공물이었다

  이중에 특히 공물이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하였다 (삼정:전정,군정,환정)

  특산물을 내는 공물은 늘 풍작일리도 없거니와 지역특산물이 아닌것이

  강제할당으로 내려오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다보니 특산물을 대신 납부하는 방납인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 방납인은 사재기를 하여 폭리를 취하거나,지방수령은 품질에 시비를 걸어 "점퇴"를 놓고

  방납인의 상품을 고가에 구매토록 유도하여 뒷거래로 받는 돈인  "인정"을 받아 챙겼다

  더군다나 공납은 개인부과가 아닌 마을단위 부과이다보니 부재인에 대한 의무가 가중되어

  더욱 백성을 어렵게 하였다


  일반적으로 300두를 생산하는 1결에서 12두를 부과하였지만,

  방납의 폐단으로 실질적인 부담은 60두 정도로  서서히 부담이 늘어났기에

  백성들도 당연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가, 임진,병자 양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세수가 대폭 줄어들자  경제적인 문제점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2.대동법의 정착화

  공물을 쌀로 대치한다는것은 쌀이 지역적으로 큰 품질차이가 없는 균질화 되었고

  전국 어디서든지 생산 가능한 작물이였기 때문이여서 방납이 불필요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때에 시작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정착화 되기까진

  100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는 실행력의 차이에서 나타났고 관련된 인물의 평을 보면

  " 이원익 - 은혜를 베풀었으나 넓히지는 못했고

    권  반  - 문서만 갖추고 시행을 하지 못했다

    김  육  - 과단성있게 시행했다  "

 

 



3.현장경험의 실행력을 갖춘 김육

  기묘사화로 풍비박산난 가난한 가문의 김육은  계축옥사에 실망하여 27세에 성균관유생을

  박차고 나와 34세까지 은거를 하면서 토굴에서 거주하다가 2년뒤 겨우 초가집을 마련하였다

  심마니.어부,농사꾼,숯제조등의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그는 해가 뜨면 동대문을 제일 먼저 들어왔다고 한다


  인조반정후 관직에 나간 그는 결당 12두면 국가재정이 적절하다고 판단을 하였던것은

  그만큼 현장경험이 풍부한 실용주의자였기에 가능한것이였다

  70세의 김육은 효종이 부름에 "신을 쓰려거든 대동법을 실시하고 아니면 신을 내쳐라"

  유언으로도 "대동법을 당부한다는것"이였다

 


4.대동법의 영향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대동법은 수공업생산의 전문화를 통해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였고 화폐경제로 넘어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종전후 중국은 명청교체가 되었고, 일본도 도쿠가와막부로 전환이 되었지만

  가장 피해가 컸던 조선이 왕조변경이 없었던것은 대동법으로 인한 민심안정이 그만큼 기여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였다

  

 


[출처] 백성과 조선을 살린 - 김육의 대동법 (한양길라잡이 - 히스토리텔링) |작성자 한양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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