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 목구멍이 포도청 " 이란 속담을 아십니까?
먹고살기 위해선 별짓을 다해야 하고, 해서는 안될 일까지 한다는 뜻의 속담입니다.
여기서 포도청이란 먹는 포도와는 관련없는, 조선시대에 경찰업무를 수행하던 관청을 지칭하는 말로서, ' 무서움 ' 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답니다.


< 예나 지금이나 포돌이한테 끌려가면 좋은꼴 못당하는건 맞긴 합니다만ㅋㅋ >
왜 하필 포도청일까요? 조선시대 사법기관은 포도청 말고도 많았는데요.
6조중 하나인 형조, 중죄인을 심판하는 의금부, 관리를 감찰하는 사헌부도 있었고 한성부도 어느정도 사법사무를 처리했었지요.
사실 무섭기로 따지면야 포도청보다는 의금부가 훨씬 더했습니다. 역모죄나같은 중죄인 및 양반과 왕족들의 잘못을 다스리던 곳이 의금부였으니깐요.
의금부에서 왕명을 받들어 형을 집행하던 관직은 종 5품 도사였습니다, (이하 금부도사). 그닥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왕이 유배지의 죄인을 사형시키거나 의금부에 수감된 죄인들의 형을 집행할때는 금부도사가 이를 수행하기 때문에 금부도사는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이 때문에 귀양간 죄인들은 ' 금부도사가 떴다 = 사형 ' 쯤으로 인식하는게 다반사였습니다.
일화로, 조선 중기 명종때, 소윤의 당수였던 윤원형은 권력을 잃고 첩인 정난정과 귀양가있었는데, 금부도사가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소문을 듣고 처형되기 전에 정난정과 독약을 마시고 음독자살합니다.
근데 금부도사는 오지도 않았다는거.. (사실 이때 3사의 관원들이 윤원형 사사를 주장하긴 했었습니다.)
서론이 길어졌군요. 각설하고, 구전되는 속담은 대개 평민층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 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평민들이 의금부를 들어갈 기회가 있기나 했을까요(있어도 별로 좋은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포도청 편제는 갑오개혁이 시작되는 1894년까지 지속됩니다.

< 갑오개혁을 주도한 영의정 김홍집 >
1894년, 일본의 압력으로 영의정 김홍집의 주도하에 1차 갑오개혁이 시작됩니다.
개혁기구인 군국기무처에서는 중앙관제를 기존 6조에서 8아문으로 변경합니다.
또한 내무아문(지방행정을 포함한 기타 행정을 초괄하는 중앙관청. 지금의 행정안전부와 비슷합니다.) 산하에 근대적 경찰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고, 좌우 포도청을 통합하여 경무청을 창설하였습니다.
또한 이듬해인 1895년, 고종의 칙령 제 85호로 <경무청관제> 가 제정됩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
경무청에는 아래에 열거한 직원을 둔다. 경무사(警務使)는 1인인데 칙임관(勅任官)이고, 경무관(警務官)은 12인 이하인데 주임관(奏任官)이며, 주사(主事)는 8인 이하인데 판임관(判任官)이고, 감옥서장(監獄署長)은 1인인데 판임관이고, 총순(總巡)은 30인 이하인데 판임관이고, 감옥 서기(監獄書記)는 2인 이하인데 판임관이며, 간수장(看守長)은 2인 이하인데 판임관이다.
어찌보면 내부(=내무아문)의 지시를 받는다는 경찰기관이라는 면에서 현대 대한민국의 행정안전부의 지시를 받는 경찰청과 비슷한 위치입니다만, 현대의 경찰청과는 달리 경무청은 서울과 경기 일원의 경찰권만 있었습니다.
지방경찰의 경우 경무청의 지휘및 감독을 받지 않았고, 각 도 마다 관찰사 휘하에 경찰부가 설치되었습니다. 각도 경찰부는 각도의 경무관이 담당했었고, 경찰권은 각도 관찰사가 경무관의 도움을 받아 행사하였습니다. 또한 각도 관찰사는 경무사(경무청장)처럼 내부대신의 지휘, 감독권하에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경찰서는 경무서로 불리웠고, 경무서 휘하에는 경무분서가 있었습니다. 일반 경찰관들은 순검이라고 불렀습니다.



< 맨 왼쪽 사진은 순검, 가운데는 경무관(경무청의 제 2직급으로, 경무청 각 과의 과장이나 경무서장, 각도 경찰 책임자에 임명), 맨 오른쪽은 경무사(경무청장)의 제복입니다. >
경무청이 감당하는 업무의 양은 1개 부(部)에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경무청은 내부(內部)에 소속된 일개 기관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1900년, 고종 황제는 칙령 제 20호, <경부 관제>를 반포하여 경무청을 경부(警部)로 승격시킵니다.
아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中 고종실록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칙령(勅令) 제20호, 〈경부 관제(警部官制)〉를 재가(裁可)하여 반포하였다. 경부(警部)는 국내의 모든 경찰 사무를 관리하며, 한성(漢城) 및 각 지방 개항장(開港場)의 경찰 사무와 감옥서(監獄署)를 통할(統轄)하고 경찰 관리(警察官吏)를 감독(監督)한다. 대신(大臣)은 1인(人), 협판(協辦)은 1인이며, 칙임관(勅任官)이다. 국장(局長)은 서무 국장(庶務局長) 2인은 칙임관 또는 주임관(奏任官), 경무관(警務官) 15인은 주임관, 주사(主事) 8인과 총순(總巡) 40인은 판임관(判任官), 감옥서장(監獄署長) 1인은 주임관, 간수장(看守長) 2인과 주사(主事) 2인은 판임관으로 하며 이하는 생략한다.
1개 부로 승격되었지만, 경부는 1년도 채 못간 1901년 2월, 경무청으로 복설되어 내부 휘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유는 전국의 경찰권을 행사하다보니 경부대신의 힘이 막강해지고 그에따른 폐단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한제국의 경찰제도에도 일제의 마수가 침투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경찰의 본 임무인 치안 유지권도 빼았기기 시작했습니다. 왜냐구요?
바로 이자들이 일본 헌병대가 활동하기 시작한겁니다.
대략 러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일본 헌병들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주차 일본 헌병대가 창설된건 1896년의 일이지만 그간은 다른 열강들 눈치를 볼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일반 경찰업무에는 일절 끼어들지는 않았습니다.)
1904년 7월 16일에는 일본 헌병대가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운동을 펼친 보안회를 습격하여 간부들을 체포하고 해산시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일본 헌병의 한국인 체포문제에 관해 당시 경무청에서도 당황했었음은 분명합니다. 아래에 인용된 기록을 보면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警務使 申泰休가 日本憲兵의 韓國人 체포문제 해결을 外部에 요구하다.
(경무사 신태휴가 일본헌병의 한국인 체포문제 해결을 외부에 요구하다) - 고종시대사 6집
위의 보안회 습격사건 외에도 1904년 8월 20일에는 친일단체였던 일진회의 집회를 막기위해 정부에서 경무사 신태휴로 하여금 이를 해산시키게 했습니다만, 일본 헌병들이 해산시키러 온 경무청 순검을 가로막고 위협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또한 1904년 8월 22일에 1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어 일본의 고문이 파견되는 고문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이 주로 장악한 분야는 재무와 경무 분야였는데, 이때문에 경무고문으로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취임하면서 경무청은 더 많은 간섭을 받게 됩니다.
1905년 1월 10일 서울및 그 인근지역의 치안경찰권을 일본 헌병대가 장악하였고 경무청 업무는 실질적으로 경무청이 아닌 경무고문부(마루야마 및 일본인들이 경무청 업무에 조언명령하는곳)에서 담당하게 됩니다.을 하기는 개뿔
1907년 7월 27일, 경무청이 경시청으로 개칭됩니다. (아마도 일본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도 일본 도쿄지역을 담당하는 경찰기관으로 경시청이 있기 때문이죠. )
경무청(警務廳)은 경시청(警視廳)으로, 경무사(警務使)는 경시총감으로, 경무관(警務官)은 경시(警視)로 하고 경시 총감(警視總監)의 다음 자리에 경시 부감(警視副監)을 더 둔다 - 순종실록
1907년 8월 2일에는 경무고문이던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경시총감으로 임명됩니다. 경술국치가 가까워오기 시작합니다
마루야마 시게토시가 물러난 후에도 경시총감은 계속 일본인이 맡게됩니다. (각부 차관도 일본인으로 대체되는 마당에 부속기관장이 한국인일 리가..)
대략 경무청에서 경시청으로 바뀌면서 위 기록에 나온 명칭의 변화 외에도 다른 명칭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일례로 순검은 순사(이 명칭은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져서 일제 강점기를 경험하신 연세드신 분들은 순사에 대해 안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사족으로 일본 경찰에선 아직도 일반 경찰관을 순사로 부릅니다.)로 변경되었고, 경무서는 경찰서로 변경되었으며 경무분서는 경찰분서로 변경되었습니다. 또한 파출소 개념으로 순사주재소를 두었습니다.

< 일본 순사들. 죄없는 사람들 착취하고 고문하는데는 이만한 인간들이 없었죠 >
1907년 10월 7일에는 일본이 한국주차 헌병대를 1000명까지 증원시켰고 10월 29일에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 경관들이 경시청으로 흡수되면서 대한제국 경찰조직에 일본인들이 대폭 증가하게 됩니다.
이후 경시청도 일본 헌병대처럼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쯤으로 전락하여 의병소탕에 앞장서게 됩니다. (물론 이건 그 이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군대 해산을 전후로 군인들이 경찰서나 주재소를 습격한것도 이에대한 악감정 때문이었습니다.)
1910년 6월 24일, ' 한국경찰권위탁각서 ' 가 조인되어 명목상이었지만 경찰권이 대한제국 정부 소속에서 통감부로 이관됩니다.
(아래 자료 참조)
隆熙 4年 6月 24日(金) 警察事務委託韓日約定覺書가 成立되다
(융희 4년 6월 24일 (금) 경찰사무위탁 한일약정각서가 성립되다) - 고종시대사 6집
통감부는 경시청을 폐지하고 경찰통감부를 설치했고, 각도 경찰부는 지방 행정기관과 독립시켰습니다.
또한 경찰통감부를 관할하는 경무총장에 한국주차 헌병사령관을 임명했고, 각도 경찰부장 역시 해당 지역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경찰 구성을 보면 일본인 경관이 1708명이었고, 한국인 경관은 3325명이었으며 일본 헌병병력은 2500여명이었습니다.
또한 헌병보조원(한국인들로 구성되어 일본 헌병을 보좌하는 업무 수행. 대부분이 해산군인이나 부랑배들이었음) 4700여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제는 경술국치로 인해 2달만에 사라지게 되고,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일제는 더더욱 혹독한 헌병경찰제도를 시행합니다.
(헌병을 일반 경찰관서에 정식으로 배치하여 경찰업무를 수행하게 함. 1919년 사이토 총독이 부임하여 보통경찰제를 부활시키기 전까지 헌병이 경찰업무를 수행했었습니다.)
[출처] 대한제국의 경찰제도에 관한 잡설 (우리 역사 바로잡기 시민연대) |작성자 K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