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내용은 박종기 저 《고려의 부곡인, 경계인으로 살다》에서 발췌한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의 모습.
한국 고대사회에 향(鄕)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자료 중 하나이다.
고대 향·부곡 형성의 사회경제적 배경
삼국시기의 향과 부곡은 목간에 나타난 노인과 노인촌의 발생과정과 유사한 경로를 통해 형성된다. 신라의 경우 기원전후 철기문화를 수용하면서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어 경작지가 확장되고 생산량도 증대되엇다. 소의 축력을 이용한 우경(牛耕)의 보급과 농업 용수 확보를 위한 관개시설의 축조와 정비도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다. 이에 따라 6세기 무렵 이후 새로운 촌락이 광범하게 형성되고, 인구도 증가했다. 또한 읍락공동체 내부의 계층 분화와 해체가 진행되면서 그에 기반한 공납제적인 수취질서도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계층은 선진 철기문화를 먼저 수용한 재지 유력층이다. 당시 하층민들은 농기구의 소유나 재력 자체가 빈약하여 4~6세기 읍락공동체의 분화 과정에서 대체로 재지 유력층의 용작민으로 흡수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유리되었다. 철제농기구, 축력(畜力) 등 우세한 생산기술과 재력을 가진 재지 유력층이 이러한 용작민이나 하층민을 이용하여 미개간지를 개간, 토지 소유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촌락이 상당수 형성되었다. 철기문화를 선진적으로 수용한 재지 유력층 주도의 농경지 개간책이 당시 촌락의 신설과 분화, 촌역의 확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또한 주군제를 통해 유리농민(流離農民)을 안집(安集)하여 토지에 긴박시켜 그들의 재정적 기반을 정화시키려던 신라국가의 정책도 새로운 촌락이 형성되는 여건이 되었다. 지증왕 6년(605)의 주군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행되었다. 즉 개간 확장으로 인해 지방 사회에 새로운 촌락이 많이 형성되어 인구가 늘어나고, 촌의 영역이 확대되는 등 촌락 사회가 성장·발전함에 따라 시행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6세기 초 주군제는 한편으로는 재지 유력층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행정단위를 신설하는 과정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사회에 광범하게 형성된 신촌(新村)과 그 주민을 국가질서로 편제하는 과정이었다. 신라국가는 신설된 촌락 가운데 일부는 주군제 속에 편입시켰으며, 그렇지 못한 영세한 촌락은 뒷날 향과 부곡으로 편성시켰다. 이러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 주군제의 시행이었다. 신라시기 향과 부곡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 속에서 발생한다. (중략)
고대 향·부곡 제도의 성립
향과 부곡이 지방제도의 일부로서 제도화한 것은 언제일까? 향과 부곡이 지방제도의 일부로서 제도화된 것은 통일신라기 군현 재편 때다. 구체적인 근거는 〈등장신조〉의 기록이다. 〈등장신조〉의 해당 기사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지금 살펴 보건대 신라가 주(州)와 군(郡)을 설치할 때 전정(田丁)과 호구(戶口)가 현(縣)이 될 수 없는 곳을 향(鄕)이나 부곡(部曲)으로 삼아, 이들이 있었던 군현[소재지읍所在之邑]에 소속시켰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주와 군을 설치할 때 토지와 인구가 현이 될 수 없는 소규모 촌락(거주지)을 향과 부곡으로 편제하고, 가까운 군현에 소속시켜 군현제도의 일부로 제도화했다. 시기는 대체로 통일신라기 혹은 9주 5소경을 설치한 신문왕(神文王) 때로 보고 있다. 또한 그 시원(선행) 형태는 앞에서 검토했듯이 5세기 후반 노인과 노인촌의 발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기원후 4~6세기경 철기문화 수용에 따라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으면서 신라 사회에는 많은 촌락이 신설되었고 인구도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지배질서 속에서 수렴하는 과정이 6세기 초의 주군제 시행이다. 6세기 초 주군제 실시로 향과 부곡이 군현제의 일부로서 제도적으로 형성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7세기 후반 통일신라기 군현 개편으로 향과 부곡은 군현제의 일부로 제도화된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대대적인 군현개편을 단행한다. 옛 백제와 고구려 영역을 흡수하여 전국에 새로운 수취체제를 수립한다. 또한 6세기 중엽 이후 광범하게 형성된 새로운 촌락 가운데 인구와 토지 규모가 군과 현이 될 수 없는 곳을 향, 부곡으로 삼아 군현제의 하부구조에 편제시켰다. 또한 고구려나 백제 영역의 군현 중에서도 군이나 현의 세를 유지할 수 없는 지역은 향과 부곡으로 재조정했다. 7세기 후반 군현 개편은 이전부터 성장·분화해온 촌락을 국가질서로 수렴하여 향과 부곡으로 편제, 군현제도의 일부로 제도화한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기록에 보이는 고대의 향과 부곡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리지〉 서문에서, '9주가 관할한 군현은 무려 450개나 된다. 방언으로 이른바 향과 부곡 등의 잡소(雜所)는 다시 갖추어 싣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9주'라는 표현으로 보아, 9주가 설치된 시점에 이미 향과 부곡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9주는 빠르면 7세기 후반 신문왕대에서 늦어도 8세기 중엽 경덕왕대에 설치된다. 따라서 신라시대 향과 부곡은 늦어도 경덕왕대인 8세기 중엽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의 여러 기록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향덕(向德)은 웅천주(熊川州)의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번길(番吉)이며, 성품이 온아하여 향리에서 그의 행동거지를 높이 평가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향덕 또한 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천보 14년(755, 경덕왕 14)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질병까지 발생했다. (향덕의) 부모도 굶주리고 병이 들었고, 어머니는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은 종일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양식이 없어 자신의 살을 베어 부모에게 벅이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부모님을 편안하게 해드렸다. 향사(鄕司)에서 그 사실을 웅천주에 보고하고, 웅천주는 국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교서를 내려 조(組) 3백 곡(斛), 주택과 토지를 주었다. (《삼국사기》 권48 향덕 열전)“
위의 기록에서 판적향에 거주한 향덕은 지극한 효심으로 부모를 봉양하여 국왕으로부터 곡식과 토지 등을 포상으로 받았다. 그의 부친 역시 훌륭한 품행으로 향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향덕 부자의 행동거지를 통해 그들은 개인이나 국가에 예속되어 천대를 받는 부자연스러운 천인 신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 판적향에서 일어난 사실이 웅천주로 보고된 것으로 보아, 판적향은 웅천주의 지휘를 받은 지방 행정단위였던 것이다.
또한 882년 무렵 건공향(建功鄕)이라는 향이 있었으며, 향의 책임자로 향령(鄕令)이 존재했고(《한국금석전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향촌주(鄕村主)도 존재했다(《한국금석유문》 신라청주연지사종(883년 조성))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통일신라기 향(鄕)은 지방 행정단위의 하나이며, 여기에는 행정을 책임진 향령과 향촌주가 있었다. 향령과 향촌주는 향사(鄕司)에서 치안 유지, 조세 및 역역의 징수 등 향의 행정업무를 담당했을 것이다.
한편 낭원대사 개청(854~930)의 아버지 김유거는 유강군에서 벼슬을 했다가 '탁향(啄鄕)'에 은둔하여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한국금석전문》 지상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 그가 은둔한 '탁향'은 천민의 집단 거주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인 출신인 그가 굳이 그러한 곳에 머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탁향'은 현이 될 수 없을 정도로 토지와 인구가 소규모인 한적한 벽촌(僻村)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또한 《삼국사기》 권37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조〉에 따르면 이름만 있고 소재지를 알 수 없는 49개의 향명(鄕名)이 수록되어 있다. 반면 부곡의 경우 천산(穿山) 부곡(《경지》 수산현조)과 대병(大幷) 부곡(《고려사》 권57 지리2 공성현조) 등 명칭만 전해질 뿐 그 이상의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출처] [역사노트]고대 한국사회의 향·부곡|작성자 원한의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