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 교육자료

[옮긴글] 고려(高麗)의 선박-(일반 배, 전함)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12.22|조회수1,958 목록 댓글 0

누선

 조선사화의 누선도


 남선기의 대황선도


-누선-
◎고려와 중국의 누선에 관한 기록
<고려사>(高麗使)에 태조 왕건이 보유한 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조는 100여 척의 배를 다스렸는데, 그 중 10여 척의 대선은 각각 길이가 거의 16보(步, 1보는 6척(尺)으로 지금의 180cm에 해당됨)로 갑판 위에 누노(樓櫓)가 있고 가히 말을 달릴 수 있다.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군량을 싣고 나주를 원정했다.”

이 내용은 실제로 배 위에서 말을 달리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을 실어 나를 수 있을 정도의 큰 배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중국의 누선(樓船)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왕건은 수군 전함 함대를 직접 이끌고 왕이 되기 전에 다섯 차례, 왕이 된 후에 한 차례, 도합 여섯 차례(903년~935년)에 걸쳐서 견훤의 나주 수군 기지(전 신라의 서남해방수(西南海防守))를 공략하여 936년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중국 사서에서 누선은 이미 한무제(漢武帝) 때부터 등장하는데 <무경총요>(武經總要, 1044년) 누선조(樓船條)를 보면 “누선은 선상에 3중으로 누(樓)를 세웠는데, 그 중 큰 것에서는 차(車)를 몰고 말을 달릴 수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 표현 또한 실제로 차를 몰고 달렸다기보다는 배가 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려 누선의 특징
하지만 태조의 누선이 중국의 누선을 똑같이 모방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굳이 두 배를 비교하자면 중국의 누선은 3층 누각을 두고 한쪽 현에 노를 7개씩 달았으며 범장(帆裝 ; 돛대)은 없다. 태조의 누선은 주로 개경에서 호남 지역을 내왕하는 데 쓰였으므로 노역장치보다는 오히려 범장(돛대)이 더 중요시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고려 태조가 당시에 갑판 위에 상장을 꾸미고 길이가 무려 96척이나 되는 장대한 누선을 운영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누선은 신라 말에 장보고가 사용한 대형 무역선 건조 경험 등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며 조선기술이 그만큼 발달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사용된 일반 군선은 왕건과 견훤이 전쟁 때마다 동원한 군선과 군사의 수가 각각 70~100척, 2,000~3,000명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 척당 탑승인원이 30명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원이 30명 정도인 군선의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타나는 중대선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어 있는 소맹선(小猛船)의 정원도 모두 30명이고, 조선 후기 병선의 승원도 17~36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한국의 역사,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30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는 군선이 가장 전투하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마선-

 

조운(漕運)이란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곡물로 거두어 선박을 이용하여 임금이 살고 있는 수도로 운반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에서 조운제도가 처음으로 확립된 것은 고려 초기이다. 고려는 949년경에 남도에 12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세곡을 서해안 해로와 남한강 및 북한강의 수로를 통하여 예성강으로 들여와 개경으로 운반했다. 이때 조운선의 용도로 쓰인 것이 바로 초마선(哨馬船)이다.

 


 고려를 멸한 이성계는 고려의 정치 경제 문물 제도를 그대로 승계하였다. 조운제도나 조운선도 그대로 인수하여 재정비하였다. 조선의 조운선은 고려의 조운선을 승계한 것으로 보아 조선의 조운선을 인용하였다. <각선도본>은 1800년경에 도화서에서 그린 선박에 대한 옛날의 설계도로서 조선을 45도 투시도법으로 배의 만듦새와 모양새를 채색하여 그렸고 치수를 자세히 설명하여 놓았다.
배밑의 길이 : 57자(17.8m)
배밑의 너비 : 13자(4.06m)
배의 깊이 : 11자(3.43m)

 

<을묘원행정리의궤>에는 조선(조운선)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의궤 속의 조운선은 1795년(정조 19년)에 정조가 수원으로 원행할 때 가설한 주교(배다리)의 다리 받침 배로서 징발되었다. 동호에서 노량지에 걸처서 가설되는 이 주교에는 총 86척의 조운선이 동원 된다.



-중국신안무역선-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원대 교역선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배가 발굴 인양되었다. 발굴 장소의 이름을 붙여 신안무역선(新安貿易船 , 이하 신안선)이라 했는데, 이 배와 배 안의 유물은 중세 동북 아시아의 정치,경제, 사회, 조선술, 교역, 공예, 미술 등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 이 배는 중국 영파(寧波)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안 발굴 인양선

-누전선과 평전선-

 



누전선:
누전선은 고려 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으로, 고려말 여몽 연합군과 일본의 해전을 그린 자료 속에 흔적이 남아 있다.

누전선을 비롯한 고려 전함의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판은 굵은 통나무 여러 개를 그대로 사용하여 다용골 저판을 이루고 있으며, 삼판과 비우 쪽을 5치 이상 두꺼운 널로 쌓아 올렸다. 삼판에는 참나무 배못인 피새를 S자 모양으로 때려서 넣고 끝을 쐐기로 박아 마감하였으며, 배의 횡강력(橫强力)을 위해 장쇠(長釗를 좌우의 양 삼판마다 네모 구멍을 뚫어 꿰어 걸고 쐐기로 마감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이물비우를 통나무 바깥쪽의 둥근 모양을 그대로 살려 삼판보다 더 두꺼운 널을 대어 박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강한 파도를 만나거나 바위에 부딪혀도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고려 전함의 견고함은 여몽연합군의 1,2차 일본 원정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범해소록>에서는 “크고 작은 함선들이 다 파도 때문에 부서졌으나 지고 부딪혀 깨졌으나 유독 고려의 전선은 배가 견고하여 온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원나라의 정우승도 세조에게 고려 전함의 견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강남(남송)의 전선은 크기는 크지만 부딪히면 깨진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배를 만들도록 하여 재차 일본을 원정하면 승리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전함이 견고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제작방식 때문이다.
1. 고려 전함의 선형이 방주(舫舟)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안전성이 있고,
2. 선체는 두꺼운 판재를 썼으면서도 자연스런 유선형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3. 이물비우와 고물비우는 자연 목재를 그대로 썼으나 파도를 타고 넘는 능파성(凌波性)이 우수하였고,
4. 배밑을 기다란 창과 같이 생긴 참나무 장삭(제주도에서는 장삭이라고 하고, 경기지방과 서남해안에서는 가새라고 한다)으로 좌우에서 어긋나게 매겨서 때려 박았으며,
5. 5치(약 15cm) 이상이 되는 삼판과 이물비우, 고물비우에 참나무 배못인 피삭(피새라고도 한다)을 S자 모양으로 때려 박아 배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누전선의 이물 머리에 고려선 특유의 닻줄 물레인 정륜(椗輪)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형태와 구조를 갖는 정륜은 당시의 중국 즉 원(조선지는 옛 송의 지역인 강남)에는 없었다. 현재도 그러한 정륜은 찾아 볼 수 없다.

평전선

평전선은 기본 구조와 모양이 누전선과 동일하다. 다만, 누전선은 누각을 설치하고 평전선은 누각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고려 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으로, 고려말 여몽 연합군과 일본의 해전을 그린 자료 속에 흔적이 남아 있다.

평전선을 비롯한 고려 전함의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판은 굵은 통나무 여러 개를 그대로 사용하여 다용골 저판을 이루고 있으며, 삼판과 비우 쪽을 5치 이상 두꺼운 널로 쌓아 올렸다. 삼판에는 참나무 배못인 피새를 S자 모양으로 때려서 넣고 끝을 쐐기로 박아 마감하였으며, 배의 횡강력(橫强力)을 위해 장쇠(長釗를 좌우의 양 삼판마다 네모 구멍을 뚫어 꿰어 걸고 쐐기로 마감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이물비우를 통나무 바깥쪽의 둥근 모양을 그대로 살려 삼판보다 더 두꺼운 널을 대어 박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강한 파도를 만나거나 바위에 부딪혀도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고려 전함의 견고함은 여몽연합군의 1,2차 일본 원정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범해소록>에서는 “크고 작은 함선들이 다 파도 때문에 부서졌으나 지고 부딪혀 깨졌으나 유독 고려의 전선은 배가 견고하여 온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원나라의 정우승도 세조에게 고려 전함의 견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강남(남송)의 전선은 크기는 크지만 부딪히면 깨진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배를 만들도록 하여 재차 일본을 원정하면 승리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전함이 견고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제작방식 때문이다.
1. 고려 전함의 선형이 방주(舫舟)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안전성이 있고,
2. 선체는 두꺼운 판재를 썼으면서도 자연스런 유선형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3. 이물비우와 고물비우는 자연 목재를 그대로 썼으나 파도를 타고 넘는 능파성(凌波性)이 우수하였고,
4. 배밑을 기다란 창과 같이 생긴 참나무 장삭(제주도에서는 장삭이라고 하고, 경기지방과 서남해안에서는 가새라고 한다)으로 좌우에서 어긋나게 매겨서 때려 박았으며,
5. 5치(약 15cm) 이상이 되는 삼판과 이물비우, 고물비우에 참나무 배못인 피삭(피새라고도 한다)을 S자 모양으로 때려 박아 배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여몽 연합군이 일본의 하까다를 공략할 때 참전하였던 평전선을 일본의 화가가 보고 그린 그림이다.

고려 시대의 함선의 형태와 구조를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