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이란 … 아직도 명확한 개념이 없다
실학 개념에 대한 논쟁
광복 후 한국사 연구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조선후기 실학연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실학연구는 시작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실학이 무엇이냐’ 하는 개념 논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관심을 집중시키며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三實論’ 비판한 경세치용학
실학개념 논쟁은 먼저 천관우 교수가 實正·實證·實用이라는 ‘三實論’을 제창한 이후에, 한우근 교수가 명말청초의 경세치용학에 대한 검토를 하면서 ‘경세치용학’이라는 정의를 내리어 ‘三實論’을 비판하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60년대에 자본주의 맹아를 찾는 사회경제사 연구가 농업·상공업 분야에 활발해지면서, 이러한 사회 변화를 이끌어 가는 사회사상으로 실학사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정의가 등장하게 되는데, 김용섭 교수가 ‘최근 실학연구에 대하여’에서 근대적 성격이라고 제시한 것과 1970년 천관우 교수가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 재론’에서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을 갖는 개신유학으로 정의한 개념이 이를 반영하였다.
이후 이우성 교수가 ‘실학연구서설’에서 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학이라 정의하고,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14권에서는 ‘근대적 사상의 맹아’라는 주제 속에서 ‘실학사상의 발흥’, ‘중농적 제도개편론’, ‘중상적 제도개편론’, ‘국학의 발달’로 정리하는 데서도 잘 나타났다.
개념의 애매성에 대한 비판만 나와
이러한 실학개념들은 사회경제사 연구를 바탕으로 내려진 정의들이어서 철학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1970년대 후반에 이를 고찰한 연구가 나온다. 즉 윤사순 교수가 ‘실학적 경학관의 특색’과 ‘실학사상의 철학적 성격’이라는 논문에서, 실학적 경학관의 특색을 주자학을 반대하는 것으로 논증하고 실학의 철학적 성격을 主氣說로 규정하는 것이나, 이을호 교수가 ‘실학사상의 철학적 측면’에서 탈성리학적이라고 정의한 것이 이에 속하였다.
이러한 개념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실학자는 성리철학에 대해 실용·실증에 근거한 博學을 위주로 한다는 백과전서학파, 지주·전호제의 봉건성을 반대하는 균전·한전론자, 주자학을 반대하는 철학자 등으로 개념 지어지며 연구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사연구입문>(한국사연구회편)에서는 실학연구의 문제점과 방향을 정리하면서 실학을 ‘중세 체제를 탈피하려는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문경향’으로 개념 지었다.
이와 같이 실학에 대한 여러 개념들이 모두 실학을 주자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실용·실증 등 근대사상적 요소를 띠어 가는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풍으로 보는 데 일치하고 있다. 또 이와 함께 실학을 전기실학·후기실학으로 나누거나, 중농적·중상적 실학으로 구분하는 것도 약간의 문제점은 있지만 일반화되는 경향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실학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제시되지 않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도 실학사상은 이미 조선후기사상으로 정립되어 갔다. 이러한 추세에 반해 80년대에는 이를 명확히 개념 지으려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실학개념의 애매성에 대한 구체적이고 비판적인 검토만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은 空論만 벌였나
실학 연구의 문제점으로 이미 많은 것이 지적되었지만 가장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20여 년에 걸친 연구에서 실학개념이 명확히 제시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다. 이는 우선 실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통시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 일차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통시대적인 실학이 조선후기사상으로 정립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애초에 실학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은 禮訟이나 理氣哲學의 공허한 논쟁이나 벌이면서 실제 민생문제나 사회개혁에 대한 논의는 도외시했다고 규정하는 반면, 실학은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민생 문제나 사회개혁을 추구했던 학문으로 역사에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음의 의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후기사회가 중세봉건체제를 탈피하여 근대사회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이므로 실학의 사회개혁적인 사상이 결국에는 조선왕조의 중세봉건사회체제를 부정하고 근대사회체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실학은 통시대적인 추상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근대사상적 요소를 가지는 개념으로 정립되어 조선후기사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붕당정치에 대한 긍정적 시각 등장
그러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사연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며 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해졌다. 이제까지 17·18세기 조선후기 당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을 비판하고, 사림파의 등장을 통해 이루어진 붕당정치와 또 그를 잇는 탕평정치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려는 연구가 정치사, 정치제도사 연구에서 진행되어, 한국사 개설서에도 반영될 정도였다. 이처럼 조선후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사상·예술 등의 분야에서도 실증적 검토가 이루어져, 조선후기 문화를 사대주의적이고 공리공담적으로 규정했던 시각을 비판하고, 오히려 ‘조선=중화’라는 ‘조선제일주의’를 주장하며 이 시기를 조선 나름의 고유색을 띠는 독창적 전통문화를 확립하는 시기로 보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여태껏 조선후기를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피폐한 사회로 보았던 시각을 비판하고, 부국강병을 외치며 사회경제적 발달을 이루어 번영을 누리던 시기로 파악하는 연구도 나왔다. 이렇게 사회경제적 발달 양상을 비롯하여 정치·문화면 등에서 조선후기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연구는 필연적으로 그 시기를 이끌었던 조선성리학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60·70년대 실학 연구가 조선후기사회를 부정적 시각으로 보고 그 시대를 이끌었던 성리학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에, 80년대 조선후기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연구시각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고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실학 연구가 실증에 바탕을 둔다고 하면서도 이와 같이 파행성을 드러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 이유는 물론 실증하는 방법이나 그 수준이 낙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직접적인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조선후기 중세사회를 탈피하여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정상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주체적 역량의 성숙 정도에 관계없이 외세의 영향이 지대하게 작용하게 되었고, 이에 주체적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데 많은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연구가 임진왜란 후에서 개항 전까지를 조선후기로 설정하여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로 다루면서 상·공업 발달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맹아를 찾는 것처럼 실학을 근대사상의 맹아로 연구하였다.
실학연구의 파행, 실증법적 수준 낙후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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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 박제가. |
그러나 80년대 들어 정치사 분야에서 조선후기를 17세기 붕당기·18세기 탕평기·19세기 세도정치기로 세분하는 연구가 나옴에 따라 이러한 시각은 반성되기 시작했다. 또 이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16세기 士禍期를 거쳐 등장하는 성리학을 전공한 士林派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 및 조선성리학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전면적 재검토를 요구받기에 이르렀다. 물론 재검토의 기본적 시각은 17·18세기와 19세기를 시대구분하는 것이었다. 즉 17·18세기 붕당기·탕평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대동사회로 표현되는 요·순시대의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해 전반적 사회개혁을 주도했던 조선성리학이, 19세기 세도정치기에는 사회를 이끌어 갈 능력을 상실하고 공리공담화 되어 말폐현상을 드러내는데 이러한 조선성리학의 폐단을 비판하며 새로운 개혁이념으로 등장하는 것이 북학파의 북학사상이라 하여, 17·18세기 조선성리학시기와 19세기 북학사상시기로 나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래의 연구에서는 양란이후 개항까지를 붕괴해가고 있는 ‘조선후기’라는 하나의 시기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사회가 붕괴해 가는데도 불구하고 예송 등 공리공담만을 일삼았던 사상이 주자성리학인데 반해 미미하게나마 이를 개혁하려던 사상이 실학사상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해 80년대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가운데 17·18세기를 양란의 피폐를 곧 회복하고 번영을 누리는 시기로 파악하고, 이 시기의 번영을 주도한 사상을 오히려 조선성리학으로 보았다. 또한 19세기에 이르면 상·공업이 농업과 분리되어 발달하면서 농업중심사회를 이끌어오던 17·18세기 조선성리학이 치세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폐를 드러내게 되자, 이를 비판하는 북학사상이 ‘실학’으로 등장하는 것이라 하였다. 즉 북학사상 이전의 실학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성리학이 말폐현상을 드러내기까지는 조선성리학 자체가 사회개혁을 주도하는 이념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학개념은 시대마다 상대적
조선시대 사상의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보면, 1960·70년대에 연구된 조선후기 250여 년을 포함하는 실학사상이 위치할 곳은 없다. 오히려 주자성리학도 고려전기 사상에 비하면 실학이요, 조선성리학도 주자성리학에 비하면 실학이요, 북학사상도 조선성리학에 비하면 실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근대사상적 요소를 가진다고 하는 ‘실학(實學)’을 굳이 말한다면 ‘북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북학사상은 상공업 중심사회를 지향하면서 농업 중심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성리학을 탈피하여 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17세기 초 지봉 이수광(芝峰 李晬光, 1563∼1628) 이후 19세기 후반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綺, 1803∼1879)까지 250여 년간을 실학사상 시기로 보아 조선성리학자와 이들을 비판 탈피하고 나오는 북학사상가들을 같은 성격의 실학자로 규정하려 한 오류를 시정하여, 17세기 초 이수광 이후 18세기 후반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 1712∼1791)까지는 조선성리학자로 보고 다만 이들을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이루려는 조선성리학자 중의 개혁파·보수파로 나누는 데 그쳐야 한다.
조선성리학 탈피하는 북학사상이 '실학'
그리고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1783) 이후의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 정유 박제가(貞蕤 朴齊家, 1750∼1805),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綺, 1803∼1879)로 이어지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의 북학사상가를 근대사상을 가진 실학자로 규정하여, 중세 체제를 대변하는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 순암 안정복 등 조선성리학자와는 구분하는 것이 실학개념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렇게 북학사상가들을 실학자로 보면 조선성리학자들은 오히려 실학자들의 부정 대상이 되는 것이라서 유형원·이익·안정복도 실학자라 할 수 없게 된다.
물론 기존의 추상적 개념대로 논한다면 조선전기 주자성리학에 비하면 조선후기(17·18세기) 조선성리학은 실학의 근대지향적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으므로 이수광·유형원·이익·안정복도 실학자가 될 수 있다.
탈주자학과 탈성리학은 달라
그러나 조선성리학을 부정하는 개신유학·탈성리학적인 사상은 조선성리학자인 성호 이익이나 순암 안정복은 가질 수 없고, 북학사상가 시기에 해당하는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이후의 북학파를 비롯한 그 이후 세대들만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즉 현재 조선후기 새로운 학문경향으로서의 실학개념이나 중세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사상적 요소를 다분히 가지는 실학개념은 북학사상만을 실학으로 정의할 때 성립될 수 있다. 결국 유형원·이익·안정복 등은 조선성리학자로서 북학사상가들에게 철저히 비판받는 대상이었고 이들이 혹시 탈주자학적일 수는 있지만 성리학 자체를 부정하는 탈성리학적 학자들은 아닌 것이므로 성리학자일망정 실학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두환 / 국민대·국사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조선전기 국가의례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사상사> 등의 저서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