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대왕 : 태종 이방원 1367년-1422년. 재위 : 1400년11월-1418년 8월. 17년10개월.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자 병권을 장악하고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 나갔다.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 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윈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게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 그리고 1400년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왕으로 등극 했다.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 와 인구를 파악했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한층 박차를 가했고,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고려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제정을 안장시켰다. 노비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자유롭게 청원케 하는 등 새로운 사회 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태종은 교육과 과거제도 정착에도 역점을 두어 귀족위주의 관리 등용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주력했다. 태종은 이처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그가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인 1418년 장자인 양녕대군이 절제없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세자에서 폐하고 충령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권을 이양했다.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네 차례나 선위파동을 일으켰고, 상왕이 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 박습의 옥을 치죄하고 병선 227척, 군사1만7천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1422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은 12명의 부인과 29명의 자녀를 둠.
※ 양녕대군 : 자유분방. 사냥과 풍류를 좋아함.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고하나 정확 치 않음. 1418년 세자에서 폐위 69세 사망.
※ 효령대군: 동생 충령이 세자에 책봉되자 스스로 불교에 심취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 세종.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대왕에 걸쳐 91세까지 삶. 왕의 연고 존친으로 극진한 대우와
존경을 받음.
※ 충녕대군: 세종.
● 원경왕후 민씨 :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1365년에 태어났다. 태종보다 두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었고, 1398년 8월 그녀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 시켰고 방원은 그녀의 정보 덕분에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태종은 외척세력의 권력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 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이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 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 태종시대의 주요 5대사건
민무구 형제의 옥 - 태종은 제위 18년 동안 네 차례의 선위파동을 일으켰는데, 제1차 선위파동이 민무구 형제의 옥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태종이 선위를 표방하자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왕후사이의 불화였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써 아버지 민제와 왕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 할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하게 된다.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서인으로 전락시키고 여흥으로 유배시켰다. 태종은 정비 민씨와 장인 민제 장모 송씨의 면목을 생각해 가급적 생명만은 보전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씨 형제는 유배 중에도 대간 등의 논핵을 가중시킬 행동을 자주 하다가 결국 1410년 자진하였다.
육조조직 단행 - 태종은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의 품위를 정3품에서 정2품으로 높였다.
1414년 태종은 육조직계제를 단행했고 그 때까지 왕-의정부-육조 체제이던 국정이 왕-육조 로 전환되면서 왕권과 중앙 집권이 강화되어 왕조의 안정을 이루게 된다.
거북선의 개발 - 태종실록의 태종 13년에 보면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태종15년에는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 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일종의 장갑선으로 짐작된다. 거북선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문고 설치 -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1401년 송나라 등문고를 본 따 설치했다.
한양으로 다시 천도 -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개경으로 옮겨갔다. 태종은 등극 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5년 창덕궁이 준공되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종 대에는 이 사건들 외에도 호구법을 제정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포백세와 호포세를 폐지했고, 환자치료를 위해 처음으로 동녀를 선발하여 부인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1402년 보헤미아의 프라하대학 총장이 된 후스는 로마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하며 종교개혁을 시도하려다가 발각되어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쫓겨난다. 이후 후스는 1412년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비판하고 이 때문에 그는 파문당하고 1414년 콘수탄츠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받고 이듬해 화형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