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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육자료

[조선] 제20대왕 : 경종(1688년-1724년), 21대왕 : 영조(1694년-1776년)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6.06.10|조회수227 목록 댓글 0

20대왕 : 경종(1688-1724. 재위 : 17206-17248. 집권 42개월. 37세일기.)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희빈장씨 소생이다. 이름은 균이었다. 왕자 균은 생후2개월이 될무 렵 숙종의 정비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 정호를 받았으며 3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노론계는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태어 난지 두 달밖에 안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 하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서인 노론측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일만에 왕자 균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 를 빈으로 격상시켰다. 이에 송시열의 반대 상소가 올라오자 숙종은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원자로 확정 했는데도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지적하며 심하게 분노했다. 이 때문 에 송시열이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 균은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 이었던 노론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세제책봉이 거의확실 했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는 왕위를 탐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 나름의 자구책 이었을 것이다.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그것은 왕위 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경종 시대는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 다툼으로 조정이 항상 피바람에 휩싸였고 이 때문에 경종은 재위 4년간 뚜렷한 치 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경종은 재위42개월 만에 37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했다.



21대왕 : 영조(1694-1776. 재위: 17248-17763. 집권 517개월. 83세일기.)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 마져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 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 정국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 적인 사건이사도세자사건이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하게한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소론,소북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김씨,수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사이를 벌여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 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 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다.

1762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세자를 제게 할 기회를 노리 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또 계비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윤급,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세자나이는 28세였다.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思悼 라는 시호를 내리고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행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켰으며, 1772년에는 과거 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균역법을 시행하고,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 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 이 고 구마를 가져와 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 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슬기롭게 극복 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 를 마련하였으며 1776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 27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정순왕후 김씨(1745-1805) :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소생은 없고 영빈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 죽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4년간 한다.(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함.)

 

 

혜빈 홍씨(1735-1815)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 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 켜볼 수 밖에 없었다.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사도세자(1735-1762) :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영조가 40세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혜빈홍씨와 가례. 15세 때 서정을 대리함.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정순왕후 김씨, 숙의문씨 등이 그를 무고했다.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다.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의 일종인 조울증에 시달린 듯함.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 하자 영조는 분개했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령하나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그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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