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흉배(胸背)는 왕과 문무백관의 품계를 구별하기 위해 상복(常服, 집무를 볼 때 입는 옷)에 부착하던 표식이다. 흉배의 제도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초기에는 이등체강원칙에 의해 무늬를 사용하였으나 점차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정립되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의 옷에 달리는 것은 보(補)라 하고 가슴, 등과 양 어깨의 네 곳에 부착하였으며 백관의 흉배는 가슴과 등 두 곳에만 부착하여 차별을 두었다. 왕과 왕비, 왕세자의 보에는 최고 권력자의 대표적인 무늬인 용으로 장식하였다. 왕과 왕세자의 용포에는 정면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는 용을 금사로 수놓은 화려한 보가 부착되어 있는데 용의 둘레에는 영기 형태의 구름무늬가 가득히 배치되어 있다. 황후와 왕비 등 여성의 보에는 금사로 수놓은 용 주위에 산, 바위, 물 등의 십장생무늬를 다양한 색사로 수놓아 왕과 왕세자의 것에 비해 다채롭고 더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흉배는 조선초기부터 사용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제도가 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28년에 흉배제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시행하지 않았고 단종 2년(1454) 12월에 비로소 흉배제도가 제정되었다. 대군(大君)은 기린(麒麟), 도통사(都統使)는 사자(獅子), 제군(諸君)은 백택(白澤), 문관 1품은 공작(孔雀), 2품은 운안(雲雁), 무관 1·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표(熊豹), 그리고 대사헌(大司憲)은 해치로 정하였는데 명나라 제도를 수용한 것으로 이등체강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오자치(1426~미상)는 조선초기의 무관으로 세조 13년에 일어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이등에 녹훈된 인물로 흉배가 달린 단령을 입고 있는 그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 흉배에는 호랑이와 표범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여백에는 각종 꽃과 영기형태의 구름이 묘사되어 있는 호표흉배로 무관 1·2품에 해당하므로 그의 품계와 일치한다. 호랑이와 표범은 용맹하여 무(武)를 상징하기도 하며 악을 물리치는 벽사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유순정(1459~1512)은 조선 전기의 공신(功臣)을 지낸 문관으로 그의 정국공신상에서 문관의 흉배를 확인할 수 있다. 짙은 남색의 단령에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있는 공작이 묘사되어 있으며 모란과 구름이 여백을 가득 메우고 있는 커다란 흉배이다. 공작은 영조(靈鳥)의 하나로 인식된 존귀한 새이다. 공작의 깃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관직과 함께 주었기 때문에 가장 높은 관직을 상징하는 새로 여겼으며, 역경(易經)에 의하면 공작은 아홉 가지 덕(德)을 지닌 인격체로 묘사되고 있고 위엄과 아름다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흉배는 시대에 따라 크기가 변하였는데 조선 전기에는 크기가 가슴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크다가 점차 작아진다.

연산군 11년(1505) 11월에 다시 흉배제도에 재정비되었다. 이때까지는 문무관 당상관만이 흉배를 할 수 있었는데 4품 이하 9품까지의 당하관도 흉배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猪(돼지)、鹿(사슴)、鵝(거위)、雁(기러기) 등의 무늬로 품계를 구분하도록 하는 등 중국과는 다른 획기적인 양식을 추구하였다.
조경(1541~1609)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정2품에 해당하는 한성부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초상화에는 한 마리의 호랑이의 흉배가 부착된 흑색 단령을 입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 흉배는 무관 1·2품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품계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묘에서는 해치 흉배가 출토되었다. 옷에 달려있지 않고 단독으로 수거된 것으로 갈색으로 변하여 본래의 색은 알 수 없으나 금사와 비단실로 수놓인 아름다운 흉배로 추정된다. 해치는 대사헌의 것으로 무관이며 대사헌을 지내지 않았던 조경의 묘에서 해치흉배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해치는 서수(瑞獸)의 하나로 해태로 알려져 있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화재나 재앙을 물리친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머리에는 뿔이 있으며 머리, 다리, 등, 꼬리에서 영기(靈氣)가 서려있으며 역시 영기 형태의 구름과 꽃등이 여백을 메우고 있다.

숙종 17년(1691)에는 ‘문·무관 단령의 흉배에는 각각 제도가 있어서, 문관은 비금(飛禽)을 쓰고 무관은 주수(走獸)를 쓰는데, 이제는 혼잡하여 법도가 없으니 신칙(申飭)하여야 한다’고 거론되고 있어 당시에 문관은 날짐승, 무관은 길짐승의 무늬로 구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 시에는 관리들은 상복이 아닌 융복(戎服) 차림을 하게 되니 흉배사용이 없어져 제도가 유명무실하게 된 시기도 있었으나 문관은 날짐승, 무관은 길짐승 무늬의 흉배라는 커다란 구분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지속된다. 영조 21년(1745)의 기록에서도 당상은 학(鶴)을, 당하는 백한을, 왕자(王子)와 대군(大君)은 기린[麟]을, 무신은 호표(虎豹)·웅비로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흉배는 반드시 남성 관리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조 12년(1788)에는 종친(宗親) 명부(命婦, 품계를 받은 관리의 부인)는 기린·연못 무늬이고, 문관 명부는 공작·기러기·백한 무늬이며, 무관 명부는 호랑이·표범·곰·말곰 무늬로 규정을 하고 있어 부인들도 남편과 같은 품계의 흉배를 사용하였으며, 조선중기의 분묘에서 흉배가 달린 여성의 옷이 출토되어 그 실체가 확인되고 있다.
정조 19년(1795)에 당상관에게는 쌍학흉배를, 당하관에게 단학흉배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809년에 쓰여진 『규합총서』에는 ‘문관9품 이상부터 옥당까지 외학(孤鶴)이요, 당상관부터 1품까지 쌍학(雙鶴), 대군은 금봉(金鳳), 부마는 금학(金鶴) 흉배이다. 무관 당상관 이상은 쌍사(雙獅), 당하는 독사(獨獅), 변장류는 호랑이 흉배다’라고 하여 짐승의 수에 의해 당상과 당하관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구분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지속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단령에 달린 흉배는 기린흉배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자신은 대원군에 봉해졌는데 기린흉배는 대군의 지위에 일치하는 흉배이다. 기린은 서수(瑞獸)의 하나로 상서로운 동물로 신성시되었으며, 기린의 도상은 대체로 이마에 뿔이 있고 말과 같은 발굽과 갈기로 묘사된다. 기린흉배는 금사로 수를 놓았는데 기린을 중심으로 구름, 바위, 물결 등의 보문(寶紋)으로 여백을 채운 화려한 흉배이다.
현재 남아있는 실물 흉배들은 주로 조선시대 말기의 것으로 크기가 작으며 단학, 쌍학, 단호, 그리고 쌍호흉배가 주를 이루고 있다. 흉배의 무늬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데 초기에는 회화적으로 표현되나 후기로 갈수록 구름무늬 산악문, 물결무늬 등 더욱 도식화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문화유산채널> 글 . 사진 = 박윤미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