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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육자료

[옮긴글] 조선조의『고려사』열전 정리를 통해 본 역사 바로 세우기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6.12.14|조회수125 목록 댓글 0

조선조의『고려사』열전 정리를 통해 본 역사 바로 세우기


윤훈표*

<차 례>

1. 머리말
2. 기전체로의 전환과『고려사』열전의 위상

3. 창업과 수성의 논리 전개
4. 보수와 쇠망 단계에 대한 정리 체계
5. 맺음말


<국문요약>


본 연구는『삼국사기』와 함께 기전체 정사에 속하는『고려사』의 열전 정리 체계를 분석하여 편찬 주체의 역사관을 파악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삼았다. 더불어 그것이 구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조선 사회 만들기의 일환으로 추진된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관점에서 비롯되었음을 해명하였다.


왕조 개창 직후부터 편찬 작업이 추진되었으나 몇 차례 수정 작업에도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기전체로 전환되면서 문종 원년(1451) 8월에 완료되었다. 그런데 기전체로의 전환이 논의될 단계부터 고려의 사적이 소략하고 빠진 것이 많아 ‘體例闕略’이 예견되었음에도 그대로 진행된 것은 특별한 의도가 내재했기 때문이다. 기전체 정사는 특유의 위계적 질서를 지녔는데 황제의 치적을 기록하는 본기가 최고의 위치를, 그 다음 세가, 열전 순으로 되었다. 거기에 단대사로 전왕조사를 전할 경우에는 정형화된, 즉 왕조의 유덕한 창업자, 위기에 처한 왕실을 구할 賢君, 의로운 신하와 간신을 양편으로 거느리는 포학하고 타락한 최후의 군주라는 구성이 제시되어 있다.


『고려사』의 경우에도 전왕조사의 편찬을 통해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천명한다는 취지에서 기전체로 전환이 모색되고 마침내 이룩되었다.
다만『삼국사기』와 달리 정사임에도 국왕의 치적을 본기 대신 세가로 표시하여 서술했고 이로 인해 표현상의 여러 문제점이 나타났다. 특히 廢假立眞이라며 우왕, 창왕을 열전에 배치했던 것은 결국 마지막 폭군이 세가에서 사라짐을 의미했다. 이는 본기를 대신하는 세가로서는 심각한 ‘체례궐략’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위계적 질서에도 상당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기전체 사서에서 본기(실제 세가)와 특수 관계에 있던 열전이 앞서 삭제된 일부 기능까지 끌어안아 전체를 체계화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것은『고려사』에서 열전의 위상을 매우 독특하게 만들었던 요인이 되었다.


열전은 구체적으로 창업과 수성, 보수와 쇠망의 단계로 구분돼 정리되었다. 고려의 흥망성쇠가 전체적으로 조감되도록 구성되었다. 특히 쇠망 단계에서 중점을 둔 것은 자체 모순으로 붕괴되는 모습이었다. 최후의 폭군으로써 우왕을, 나라를 망친 간신에 이인임 등을 전면에 내세우며 총체적인 혼란상을 그렸다. 필히 수반되는 의
로운 신하로 조준, 정도전 등을 등장시켜 통치체제의 가파른 위기와 난신적자들의 준동 따위를 적시하며 자체적인 해결 능력의 부재를 부각시키려 했다. 이는 조선이 건국돼야 구폐들이 척결될 수 있음을 의미는 것이기도 했다.


새로운 조선 사회 만들기는 구폐, 특히 전왕조의 남겨놓은 폐단들을 철저하게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역사 바로 세우기는『고려사』열전의 정리 체계를 통해 한층 구체화되었다.


핵심어:『고려사』, 기전체, 세가, 열전, 우왕

* 歷史實學會 會員, 한국중세사.



1. 머리말


『고려사』는『삼국사기』와 함께 기전체로 된 正史에 속한다. 사학사상의 위치는 고려왕조사의 기저가 되는 것인 만큼 그에 관해 비견될만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찬 과정부터 내용이나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한 고찰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1)


1)『고려사』에 대해 사학사적으로 검토했던 연구 성과들은 상당수에 이른다. 우선 주요 업적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며 이후 세부적으로 참조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표시하고자 한다. 申奭鎬,『高麗史』의 編纂始末,『海圓黃義敦先生古稀記念史學論叢』, 古稀記念論叢編纂會, 1960 ; 金哲埈,《高麗史》- 文化整理 方向의 摸索,『韓國史學史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90 ; 李基白, 高麗史解題, 『高麗史』, 延世大東方學硏究所, 1972( 韓國史學의 方向, 一潮閣에 수록, 1978) ; 邊太燮,『 高麗史의 硏究』, 三英社, 1982 ; 閔賢九, 高麗史에 反映된 名分論의 性格,『震檀學報』40, 1975; 鄭求福, 朝鮮前期의 歷史敍述, 『創作과 批評』 11-3, 1976(韓國中世史學史(Ⅱ) - 朝鮮前期篇,景仁文化社에 수록, 2002) ; 윤국일, 『고려사』의 편찬과 그 내용에 대하여 ,『력사과학』86, 1978; 李元淳, 朝鮮前期史書의 歷史認識,『韓國史論』6, 國史編纂委員會, 1979 ; 韓永愚, 《高麗史》·《高麗史節要》의 比較硏究, 『震檀學報』 48, 1979( 朝鮮前期史學史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에 수록, 1981) ; 南智大, 朝鮮前期의 歷史意識, 『韓國思想史大系』 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 노명호, 고려사ㆍ고려사절요 , 『韓國의 歷史家와 歷史學(上)』, 創作과 批評社, 1994 ; 朴杰淳, 朝鮮初『高麗史』의 編纂過程과 葛藤, 『韓國史學史硏究 - 于松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 1997 ; 吳恒寧. 朝鮮初期 《高麗史》改修에 관한 史學史的 검토 ,『泰東古典硏究』 16, 1999(『朝鮮初期 性理學과 歷史學』,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에 수록, 2007) ; 김의규, 《高麗史》의 編纂과 體裁,『人文科學硏究』 6, 1999 ; 박종기,『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고즈윈, 2006 ; 신은제,『高麗史』편찬 후 고려에 대한 기억 ,『한국중세사연구』23, 2007 ; 장동익,『고려사』의 편찬과정에서 改書, 『퇴계학과 한국문화』 46, 2010 ; 최종석, 『고려사』 세가 편목 설정의 문화사적 함의 탐색 ,『韓國史硏究』159, 2012 ; 이정란,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의 修史方式 비교 - 睿宗代 ‘王言’ 기록을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2, 2013 ; 노명호, ≪고려사≫의 ‘僭擬之事’와 ‘大赦天下’의 ‘以實直書’ - 핵심이 삭제된 고려의 황제제도 ,『한국사론』 60,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014 ; 김난옥,『고려사』의 편찬과 조선전기 前朝史 인식 ,『사학연구』 116, 2014.



총 139권으로 目錄 2권, 世家 46권, 志 39권, 年表 2권, 列傳 50권으로 구성되었다. 부록 형식의 목록을 제외한 각 구성 내용은 ‘纂修高麗史凡例’에 그 서술 원칙이 수록되었다. 세가는 本紀에 해당되는 군주에 관한 기록이다. 태조부터 공양왕에 이르는 32명의 군주에 관한 기사가 연대기 식으로 기술되었다. 다만 우왕․창왕이 僞朝로 간주돼 세가에서 제외돼 열전에 실린 것이 특징이다.


지는 제도 문물의 변화상을 기술한 것으로 天文부터 刑法에 이르는 12분야로 되어 있다.
표는 연표인데 하나의 표로 단일화되었다. 이는 중국의 정사들과 달리『삼국사기』를 본으로 삼았던 것에서 기인한다.


열전은 13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后妃傳을 필두로 宗室傳(附公主傳), [諸臣傳], 良吏傳, 忠義傳, 孝友傳, 烈女傳, 方技傳, 宦者傳, 酷吏傳, 嬖幸傳, 姦臣傳, 叛逆傳에 걸쳐 해당 인물들의 활동 내력이 기재되었다. 770명이 立傳되고 238명이 附傳되어 총 1,008명이 수록되었다. 열전은 우선 분량 면에서『고려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제일 컸으며, 나아가 수록된 인물의 시비와 득실이 기술되었던 관계로 가장 중요시되었고 또한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2)
기전체 정사에서는 간혹 표나 지가 생략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기와 열전은 반드시 설정되었다. 이는 곧 양자의 중요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3) 그런데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부터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실제로 특정 사서를 대상으로 그 관계 설정에 대한 논의가 여러모로 진행되기도 했다.4) 그 관계가 책의 성격 규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고려사』도 예외가 아니다. 본기가 세가로 대체된 것과 더불어 자체에 여러 문제점이 내포되었는데 그것은 열전과의 상관성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역사상 일어났던 가장 크고 중요한 변화로 옛 왕실의 멸망과 새로운 왕가의 흥기로 보는 관점이 매우 지배적이었다. 『고려사』에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었는데, 그 중에서 열전은 그 시절 인간들의 활동상을 통해 그 구체적인 상황을 전하는 역할을 맡았다.5)


2) 이상의 서술은 모두 邊太燮, 위의 책에 의거하여 작성되었다.
3) 이성규 편역, 사기해설 ,『수정판 사마천 사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73쪽.
4) 널리 알려진 사례로는 陳壽의『三國志』를 들 수 있다. 그는 魏書에만 帝紀를 세우고 蜀書와 吳書에는 그 군주조차 열전에 배치함으로써 훗날 커다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5) ‘列傳’의 ‘傳’을 ‘주석’의 의미로 ‘列’을 ‘烈’과 ‘例’가 복합된 의미로 각각 해석한다면 ‘뛰어난 개인, 또는 모범적인 개인의 행적을 통하여 본기․세가․표․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주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이성규 편역, 앞의 책, 77쪽).



본고에서는『고려사』의 중심을 이루었던 열전의 정리 체계를 분석,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구 체제를 대신한 새로운 사회의 여러 조치 가운데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관점에서 비롯되었고 체계화되었음을 밝혀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고려사』열전에 대한 검토가 그 자체는 물론 개인에 대한 것도 매우 활발하며 구성 항목에 대한 분석도 다양한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열전의 전반적인 내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구성과 특징에 대해 분석한 연구들이 나왔다.6) 더불어 열전의 13개 항목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으며 그 의미도 밝혀졌다.7)


이어서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열전 기사와 관련 문집이나 묘지명 등의 내용을 서로 정밀하게 대조해서 그 실상을 복원하거나『고려사』서술의 특징 따위를 찾는 연구가 시도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방면을 개척했다고 평가된다.8) 뿐만 아니라 열전 정리와 관련해서 나타난 문제점인 고려말의 왜곡, 특히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부정적 평가를 부각시켰던 사실에 대해 세밀하게 천착해서 그 의미를 밝히거나 구체적으로 세가에 수록되어야 함에도 반역전에 넣은 辛禑傳을 고찰하여 논란의 본의를 파악함으로써 그 취지를 새롭게 부각시키기도 했다.9)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로 인해 방대한 성과가 축적돼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으며 잘못 알려진 것은 일부 수정되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 업적들에 기반하여 열전을 살펴보되 개인이나 항목이 아닌 전체적인 정리 체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열전의 편찬 과정을 보면 일단 먼저 항목을 설정하고 그에 합당한 인물들의 전을 적당히 배치하거나 아니면 수록하려는 사람들의 명단과 자료 등을 미리 확보한 다음에 적절한 항목을 상정했을 것이다. 어느 방식이 실제로 취해졌는지 알 수 없으나 그에 앞서 전체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방향의 설정이 우선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연구들에서 지적했듯이『원사』를 필두로 한 중국의 정사들이 참조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정리 체계와 그 방향의 정립이 중요했다. 그것은 곧 편찬자들의 기본 입장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열전 전체의 정리 방향과 체계를 검토하고서 이를 통해 편찬자들의 구체적인 입장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앞서 열전이 성립하게 되는 배경과 그 과정을 알아보고자 『고려사』편찬에서 기전체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 검토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기가 세가로 대체되었고, 더불어 그 자체의 문제점들로 인해 열전과의 관계가 종래의 정사 체계와 다른 양상으로 정립되는 상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고려사』열전이 지닌 독특한 위상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어서 『고려사』역시 정사들의 보편적 관점인 전왕조의 흥망성쇠를 창업과 수성, 그리고 補修와 쇠망의 단계로 구분했던 것에 입각하여10) 열전의 정리 체계를 그에 맞춰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때 각각의 단계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의 傳의 내용을 간략하게 분석함으로써 방향성과 함께 전반적인 체계를 짐작하고자 한다. 이것으로 열전의 정리를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실질적 내용과 그 의미 등을 해명해 보려고 한다.


본 연구는 모든 항목과 전들을 상세하게 고찰하는 것을 전제로 수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명 과정에서 일정한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만 과감한 이해를 통해 일단 대강만이라도 헤아려 보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6) 먼저 邊太燮에 의해 그 전반적인 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그 뒤를 이어 姜聲媛,『高麗史』列傳에 대한 分析的 考察, 『梨花史學硏究』17ㆍ18, 1988에 의해 좀 더 보강되었다.
7) 金光哲,『高麗史』姦臣列傳 所載人物에 대한 分析,『馬山大學論文集』3, 1981 ; 姜聲媛,『高麗史』列傳硏究 - 叛逆傳을 중심으로 ,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 姜聲媛,『高麗史』 叛逆傳의 分析, 『정신문화연구』13-1, 1990 ; 崔在晋, 『高麗史』列傳의 嬖幸傳 硏究,『東西史學』 2, 1996
; 노예진, ≪高麗史≫ 列傳 孝友篇의 孝友說話 硏究,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 朴胤珍,『高麗史』叛逆傳 立傳 기준과 고려말 조선초 ‘附元’ 인식 ,『韓國史學報』 52, 2013 ; 이재범,『高麗史』姦臣列傳 硏究, 『고조선단군학』 28, 2013 ; 김동선,『고려사』환자전 연구 ,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한편 后妃傳에 의거하여 王室의 族內婚에 대해 세밀하게 검토했던 鄭容淑,『高麗王室族內婚硏究』, 새문社, 1988의 성과도 이 범주에 속한다.
8) 최영호, 고려시대 묘지명과 『고려사』열전의 서술형태 ,『한국중세사연구』19, 2005 ; 이정호, 고려후기 文人年譜와 『高麗史』列傳 기사의 비교 검토 ,『韓國史學報』 48, 2012.
9) 金塘澤,『高麗史』列傳의 編纂을 통해 본 朝鮮의 建國,『한국중세사연구』23, 2007 ; 이정란,『高麗史』 辛禑傳의 편찬방식과 자료적 성격 , 『韓國史學報』48, 2012.

10) 이는『고려사』의 서두에 나오는 ‘진고려사전’에서 구체적으로 지적되었다.



2. 기전체로의 전환과『고려사』열전의 위상


『고려사』는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된 사서로 유명하다. 태조 때부터 시작해서 문종 원년(1451) 8월에 겨우 끝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전체로 편찬 방식을 전환하면서 세종 31년(1449) 1월부터 시작하여 불과 2년 8개월도 걸리지 않은 채 총 139권에 달하는 거질의 정사를 편찬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축적된 풍부한 편찬 경험과 함께 기전체의 특징을 살린 분찬 방식의 도입, 즉 분야별로 나눠 정리하면서 전체를 체계적으로 묶어 통일성을 기하는 방법 등을 활용했던 것에서 기인했다.11)


그렇다면 애초부터 기전체로 편찬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해진다. 만약 시작할 때부터 택했다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무엇 때문에 상당한 시일과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쳤는지가 의문이다.


기전체로의 전환을 모색했던 것은 세종 20년(1438) 3월의 경연에서 許詡가 당시 완성된『고려사』를 검토하면서 體例가 未安하다며 역대의 예를 따라 紀·傳·表·志를 지어서 本史를 새로 편찬하고 현재의 것은 史略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새로 개찬의 책임을 맡았던 權踶는 여사의 본초가 소략한데[但麗史本草疎略] 만약 기·전·표·지로 나누게 되면『사기』의 체례와 같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12) 이 당시 기전체는 채택되지 않았다.


그 뒤에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었다. 재차 개찬된『고려사』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또 다시 개정해야 하는 지경에 처했다. 이때 辛碩祖를 비롯한 다수의 사관들이 구례에 의거해 기전체로 편찬하되 이미 편찬된 編年에다가 다시 깎고 보태어 따로 한 책을 만들어 본사와 함께 전하게 하자고 했다. 이어서 고려의 사적이 본래 소략하고 빠진 것이 많아서 기·전·표·지를 이루고자 하여도 일을 성취하기가 어렵다[或以爲高麗事跡, 本多疎缺, 欲爲紀傳表志, 難以就緖]는 의견에 대해, 前史의 열전에 한 사람의 일을 겨우 두어 줄만 쓴 것도 있으니 여기에서도 반드시 전을 세워야 하나 사적을 잃어서 실을 수가 없거나 사적이 갖추어지지 못해 빠진다고 하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이들에 반대했던 魚孝瞻 등은 기전체가 상례이지만 일을 쉽게 성취할 수 없으므로 수년 안에 반드시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또 체례가 빠지고 간략하여 옛 사람의 지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이니, 비록 이룩될지라도 도리어 볼 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又體例闕略, 不似古人之作, 雖或成之, 反不堪觀也]라고 주장했다.

마침내 김종서 등이 편년체에 시사를 갖춰 기록하면 통하지 않는 例가 많다며 동궁을 움직여 기전체로 전환시켰다.13)


고려의 사적이 소략하고 빠진 것이 많아 기전체 사서를 편찬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강행했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단지 상례에 따라 본사는 기전체로 엮어야 한다는 체재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체례의 궐략함을 면한 길이 없어 비록 편찬되더라도 볼 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음에도 끝내 기전체로 전환했던 것은 표면적인 것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기전체로 된 정사가 편년체의 그것과 다른 특징을 지녔기 때문에 전환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흔히 전자는 위계적 질서를 갖추고 있다고 평가된다. 우선 본기가 최고의 위치를 점했다. 황제의 치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것이므로 당연했다. 그 다음에 세가, 열전이 위치하였다.14) 이로써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상하 관계의 질서가 확연하게 드러나 보이게 하였다. 제왕과 신하 간의 위계가 역사 편찬을 통해 명확하게 구분되기 위해서는 기전체의 채택이 필요했다.15)


11) 邊太燮, 앞의 책, 16∼19쪽.
12)『세종실록』권80, 20년 3월 21일(을사)
13)『세종실록』권123, 31년 2월 5일(병진)

14) 한영우,『역사학의 역사』, 지식산업사, 2002, 25쪽.
15) 일찍이 韓永愚에 의해 인물 중심의 역사, 특히 열전을 가진『고려사』를 쓰고자 한 데 기본 동기가 있었던 것이라고 지적되었다(韓永愚, 앞의 책, 1981, 45∼46쪽).



한편 세종 20년 경연에서 기전체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던 허후는 史體에 2가지가 있는데 左氏는 年代를 經으로 국가를 씨[緯]로 하였으며 반고․사마천은 국가를 경으로 연대를 씨로 하였다고 했다.16) 여기서 좌씨는『춘추좌전』을, 반고․사마천은『한서』․『사기』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기전체 사서에서 ‘경’에 해당하는 국가는 구조상 궁극적으로 본기를 통해 그 대체가 제시된다고 볼 수 있다. 세가나 열전도 어느 정도 그 역할을 수행하나 대개 본기 기사의 배경 및 그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17)


그런데 단대사로 전왕조사를 전하는 기전체 정사18)에는 정형화된, 즉 왕조의 유덕한 창업자, 위기에 처한 왕실의 운명을 부흥시킨 賢君, 의로운 신하와 의롭지 못한 측근을 양편으로 거느리고 있던 포학하고 타락한 최후의 군주라는 구성이 제시되어 있다. 동시에 특유의 위계적 질서에 입각하여 신하, 심지어 조공을 받치던 이웃 종족 등에 이르기까지의 활동상이 서술되었다. 종국에는 왕조 교체의 정당성이 그 자체로 선명하게 구현되도록 꾸며졌다.


『고려사』의 경우도 전왕조사의 편찬을 통해 조선 개창의 정당성을 천명한다는 취지에서 기전체로 전환이 모색되고 마침내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동안 편년체를 가지고 왕조 교체의 정당성 등과 연계시켜 위계질서에 입각하여 구조화를 해나가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거두지 못했다고 인식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기전체로 전환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편년체로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나 전체적으로 위계질서에 입각하여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려면 상대적으로 기전체로 된 정사가 유리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문종 원년(1451) 8월에 편찬된『고려사』에는 본기가 설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삼국사기』가 나왔던 고려 중엽과 비교해서 주변 상황, 특히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정사에 ‘본기’라고 표기하는 것이 고려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애초부터『사기』의 체례와 같은 것이 나오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주지하듯이『고려사』에서는 본기를 세가로 대체했다. 결국 이전부터 우려했던 ‘體例闕略’의 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외형, 외적인 구성 체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작게는『고려사』권35, 충숙왕세가 2 (후)3년에 수록 기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크게는 우왕, 창왕이 세가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廢假立眞에 의거해서 몰아냈기 때문에 세가에 넣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것이 편년체에서 기전체로 전환함에 있어 가장 큰 난제였을 것이다. 결국 우왕, 창왕은 열전의 맨 마지막 반역전에 수록되었다.


이로써 본기의 기능을 대신해야 하는『고려사』 세가에 심각한 허점이 노출되었다. 우․창이 제외됨으로써 외형상의 체례가 궐략되었다는 차원을 넘어서 본래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발휘될 수 없게 되었다.

즉 우․창왕이 빠지면서 세가의 핵심에 해당하는 마지막 폭군이 사리지게 되었다. 과연 마지막 폭군이 들어 있지 않은 정사의 세가(실질적으로는 본기)가 본연의 역할을 다할지는 의문이었다.19) 공민왕과 공양왕으로 대신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것에는 무리한 측면이 적지 않다.


내적으로도 세가에는 문제가 많았다. 이미『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일찍부터 표현 방식에 直書 주의가 채택됨으로써 ‘僭擬之事’가 다양하게 수록되었다. 편찬 과정에서 일부 改書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완벽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세가로 했다면 오히려 이제현, 정도전 등과 같이 철저하게 참의지사를 삭제하는 편이 체제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이미 돌이키기 불가한 원칙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태조세가 , 혜종세가 등과 같이 다소 낯선 표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안팎의 여러 문제점들로 인해 세가가 기전체 정사의 본기에 해당하는 본래의 기능을 충실하게 발휘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것은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천명해야 하는 『고려사』로서는 극복해야 할 커다란 과제가 되었다. 마침내 세가와 긴밀히 연결되었던 열전이 그 기능의 일부까지 흡수해서 전체를 체계화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것은『고려사』에서 열전의 위상을 매우 독특하게 만들었던 요인이 되었다.


16)『세종실록』권80, 20년 3월 21일(을사)
17) 기전체 정사의 본기와 열전의 관계에 대해 상당수 유자들이 전자를 ‘經’ 후자를 ‘傳’으로 비정하였다.
『사통』의 저자인 劉知幾는 열전은 마치『춘추』의 傳과 같아서『춘추』가 전을 가지고 경문을 설명한 체례이듯이『사기』․『한서』는 열전을 가지고 본기를 설명한다고 보았다(오항녕, 『史通』의 구조와 역사비평 ,『泰東古典硏究』29, 2012, 148쪽).
18) 주지하듯이 단대사의 기전체 정사는『한서』로부터 비롯되었다(李宗侗 저, 조성을 역,『중국사학사』,
2009, 혜안, 77쪽).

19) 폭군(마지막 황제), 간신(마지막 재상) 서술은 대부분 포폄과 권계에 맞추어 조작되었다고 한다(이성규, 역사서술의 권력, 권력의 서술 ,『歷史學報』224, 2014, 16쪽).



3. 창업과 수성의 논리 전개


세가 기능의 일부까지 떠안게 된 열전은 정사로서의 기전체 사서들의 보편적 관점인 전 왕조의 흥망성쇠를 창업과 수성, 그리고 補修와 쇠망의 단계로서 구체화하여 체계화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첫 번째 단계인 창업은 열전 제5 洪儒附裵玄慶․申崇謙․卜智謙에서 비롯되었다.20) 그에 앞서 열전 제1∼제4까지는 후비전과 종실전에 해당하였다. 이는 ‘찬수고려사범례’에 의하면 ‘尊’과 ‘親’을 받들기 위함이었다. 즉 ‘존존친친’을 실현하기 위해 설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창업에 관한 문제는 열전 제5 개국 공신전에서 거론되기 마련이었다.21)


맨 처음 나오는 홍유 이하 4명은 개국 1등 공신이다. 그 수록 순서가 공적의 크기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 순서는 창업 논리의 정립과 관련해서 큰 의미를 지닌다.
먼저 홍유는 나머지 3명을 이끌고 태조에게 와서 최초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삼한이 분열된 이후 도적의 무리가 다투어 봉기하자, 지금의 왕(궁예)이 용맹을 떨쳐 크게 호령하여 마침내 초적을 평정하고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 나라 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지도 스물 네 해 남짓 지났으나, 이제 끝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고 잔학한 짓을 너무 제멋대로 하며 형벌을 부당하게 행하여 아내와 아들을 살육하고 신료를 죽여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그를 원수같이 미워하니 걸과 주의 악정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습니다. 포악한 왕을 내몰고 현명한 왕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바라건대 공께서는 은나라와 주나라의 옛 일을 실행하소서.”22)


위 주장은 궁예의 폭군으로서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며 창업의 대의를 밝힌 것으로『고려사』 전체 주제의 압축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비록 고려조의 성립을 말하는 것이나 실질적으로 조선조의 개창과도 직결된다. 조선조 인물로서 고려의 쇠망을 논하는 것에는 많은 한계가 따르며 설득력도 떨어진다. 반면에 고려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 특히 개국 공신의 주장했던 논리가 훨씬 의미가 크다. 바로 그러한 사실, 즉 홍유 등이 태조 왕건에게 올렸던 왕조 교체의 당위성이 고려말에 고스란히 재현되게 만드는 것, 따라서 고려의 쇠망이 태조 이성계와 그 일파의 모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내부 모순에 의해 붕괴되었음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20)『고려사』열전은 대체로 시대 순으로 편찬되어 동시대의 사람들이 한 권에 편입되었는데, 이때 동류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원칙을 적용하였다. 가령 제신전의 첫 권인 열전 제5는 太祖의 開國功臣으로 革命功臣과 歸順城主 등이 수록되었다(邊太燮, 앞의 책, 105쪽).
21) 후비․종실․공주 등 왕실 관계 인물이 열전 50권 중 4권이나 차지할 정도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개국 공신의 경우 따로 설정하지도 않고 1등 공신 4명의 행적만 홍유전에 간략하게 병기하는 소극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등으로 미루어『고려사』열전이 군주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한다(韓永愚, 앞의 책, 1981, 113∼116쪽).

22)『고려사』권92, 열전 제5, 홍유



쇠망이 내부로부터 기인했음은 창업자의 유덕함을 하나도 본받지 않으며 오히려 과거의 악독한 군주상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최후의 폭군에 의해 촉발된 것임을 분명하게 공포해야 했다.
왕위 교체의 첫 번째 권유를 받았을 때 태조 왕건은 자연스럽게 부덕한 자신은 불가하다는 겸양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그 때 홍유 등은 첫 번째 논리와도 연결되는 두 번째의 것을 꺼내든다.


“때는 만나기 어려우나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는다면 도리어 하늘의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악정의 해독을 입은 나라 안 백성들은 밤낮으로 복수하고자 생각하고 있으며, 게다가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여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덕망으로는 공과 견줄 사람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의 뜻이 공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공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王昌瑾의 거울에 나타난 글이 저러한데 어찌 하늘의 뜻을 어기고 포악한 왕[獨夫]의 손에 죽겠습니까?”23)


상황이 아무리 잘 조성돼 있어도 유덕자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당시는 극심한 폭정의 시대였다. 작은 의리를 지키고자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 포악한 왕[獨夫]의 손에 희생되는 것이 세상을 구할 덕망 있는 자의 본분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결심을 촉구하였다. 마침내 이들의 주장을 경청했던 태조 왕건은 단안을 내렸고 이에 힘입어 왕조 교체가 실현되었다.


홍유 등의 주장이라는 형태로 제시된 2개의 논리에서는 창업을 위한 객관적 상황이 이미 조성되었고 덕망을 지닌 자도 출현하였으나 유덕한 사람의 결단이 그 이상으로 의미가 컸음을 보여준다. 그런 과정과 논리는 고려말 서술에서 유사한 구조로 재현되었다.24)


그 다음에 거론된 것은 부전된 배현경․신숭겸의 건의였다. 태조가 청주사람 현율을 순군낭중으로 임명하자, 둘이 함께 “지난 날 임춘길이 徇軍吏로 있으면서 모반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죄를 자백하고 사형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곧 그가 병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출신지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시 현율을 순군낭중으로 임명하니, 신들은 적이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반대하므로, 태조도 이 말을 옳게 여기고 병부낭중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25) 창업 직후의 불안한 정치 상황에서 재빨리 체제를 안정시키려면 제일 중요한 조치 중의 하나가 관리의 인사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불온한 생각을 품고 변란을 꾀하는 무리들을 척결하는 것이 중요했다


신생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표면상의 공정함 이상으로 창업에 찬동하고 이바지할 수 있는 인물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해서 그에 맞게 직위를 부여해야 한다.
이로써 신속하게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배현경․신숭겸의 건의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세 번째는 신숭겸인데, 견훤과의 전투에서 대장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였다. 특히 자신을 희생해서 태조를 구원하였다.26) 끝으로 복지겸은 모반을 꾀했던 환선길, 임춘길 등을 몰래 고발하여 제거하게 했다.27)

이 두 사람의 공적은 컸으나 앞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홍유를 비롯한 4명 공신들의 공적 크기가 서술 순서에 반영된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홍유 등의 첫 번째 주장과 끝의 복지겸 고발 건에는 중요도에 있어 차이가 있다.
창업 논리의 정립과 그 공적을 4명의 서열화를 통해 제시하였다.


한편 홍유 등 4명 다음에 庾黔弼傳이 이어진다. 그는 참소를 당해 유배 중임에도 전세가 불리하자 스스로 군대를 뽑아서 대응하였다. 그 일에 대해 태조는 “참소를 믿어 어진 이를 내쫓은 것은 내가 현명하지 못한 탓이로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사자를 보내어 소환하고는, “경은 아무런 죄도 없이 유배되었으나 지금껏 원망하거나 분개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생각만 하였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고 후회되오. 대대로 포상함으로써 경의 충절에 보답하는 것이 내 바람이오.”라고 위로하였다.28)


여기에서 유금필은 개국 공신 가운데 충절의 전형임을 보여준다. 특히 ‘武人’의 자질과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대의와 공의를 위해 사사로움을 잊고 헌신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23)『고려사』권92, 열전 제5, 홍유

24) 이 문제는 본 논문 ‘제4장 보수와 쇠망 단계에 대한 정리 체계’에서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25)『고려사』권92, 열전 제5, 홍유 부 배현경
26)『고려사』권92, 열전 제5, 홍유 부 신숭겸
27)『고려사』권92, 열전 제5, 홍유 부 복지겸
28)『고려사』권92, 열전 제5, 유금필



그 다음에는 崔凝傳이 나온다. 그는 밤낮으로 부지런하고 신중하였으며 왕에게 옳고 그름을 따져 건의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태조가 매번 그의 건의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경은 학문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아울러 정치의 요체를 잘 알고 있소. 나라 일을 근심하고 멸사봉공하여 자기 한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하니 옛날의 뛰어난 신하들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을 것이오.”라고 칭찬했다.29)


위에서 지적한 학문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정치의 요체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文人’의 덕목이다. 이는 바로 직전의 유금필전과 대비된다.


유덕자가 왕조를 창업했더라도 성공과 실패는 각기 그 분야, 즉 문과 무의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는데 달려 있음을 보여주며, 아울러 발탁된 이들은 최선을 다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헌신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의거하였음을 말해준다.


열전 제5에서 최응전 이후에 나오는 인물들의 전들은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의 의지나 권유로 귀부, 귀순했거나 태조의 휘하 장졸 출신으로 공을 세워 출세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앞부분에 등재된, 즉 창업 당시의 동지에 해당하는 인물들과는 차이가 있다.30)
결국 열전 제5, 특히 주축이 되었던 개국 공신들의 전을 통해 창업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건국 과정에서 자기희생과 헌신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로써 창업과 건국의 당위성을 구체화시켰다.


창업과 그 뒤에 행해지는 수성은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되어 있다. 수성 작업이 얼마나 확실하고 효과적이었는지에 따라 왕조의 안정이 판가름 날 것이었다. 이에 관해 ‘진고려사전’에서는 광종과 성종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언급하였다.31) 열전에서는 제6 이하가 그에 해당한다.


특히 열전 제6을 세밀히 살펴보면, 광종 때 활약했던 徐弼부터 현종 즉위에 공이 컸던 蔡忠順에 이르기까지 수성기 주요 인물들의 전이 수록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개국공신에 버금가는 수성기 신하들의 전형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 나오는 서필전은 고압적인 국왕으로 널리 알려진 광종에 대한 간언으로 채워졌다.

첫 번째 것은 “신이 외람되게 재상의 자리에 앉은 것만으로도 이미 은덕을 넘치게 받았는데, 금 그릇까지 내려주시니 더욱 황공하고 분수에 넘치는 일입니다. 또한 복식과 용기는 등급의 차별을 밝히고, 사치와 검약은 치란에 관련됩니다. 신하가 금 그릇을 사용하면 임금은 장차 무엇을 쓰오리까?”라는 것이었다.32)

이는 수성기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을 과감하게 그 요점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임금은 서필의 말을 보배로 삼겠다고 응답했다. 즉 그의 간언이 지닌 의미를 인정한 것이다. 서필전에 실려 있는 다른 간언들도 마찬가지로 간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성격의 군주론이 실려 있는 崔承老傳 다음에 나오는 雙兾傳에서는 광종의 최대 업적인 과거의 실시를 기록하였다. 특히 쌍기가 여러 차례 지공거를 맡아 후학을 북돋우니 비로소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흥기하게 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33) 그만큼 의의가 큰 것이지만 간언을 통해 임금을 바로잡는 일보다는 순위가 낮았다. 다시 말해 임금을 바로잡는데 긴요한 간언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치적이라는 논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구조는 이후에도 재현된다.


29)『고려사』권92, 열전 제5, 최응
30)『고려사』권92, 열전 제5의 서술 순서에 따르면, 최응 다음에 최언위가 나온다. 그는 신라 사람으로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 그가 온 가족을 거느리고 돌아오니, 태자사부로 임명하고 문한의 임무를 맡겼다고 했다. 왕유는 출가하여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권유를 받고 벼슬했다. 박술희는 휘하 장졸 출신, 최지몽은 태조가 직접 부른 사람, 왕식렴은 태조의 사촌 동생, 박수경은 휘하 장졸 출신, 왕순식과 그의 전에 부전된 사람들, 공직, 박영규는 귀부, 귀순한 인물들이다.
31) “광종은 친히 궁궐에서 과거를 보여 관리를 선발함으로써 유학의 기풍을 점차 일으켰으며, 성종은 종묘와 사직을 세움으로써 통치기구를 완비한 바 있습니다[光廟臨軒策士, 而儒風稍興, 成宗建祧立社, 而治具悉備

].”라고 하였다.

32)『고려사』권93, 열전 제6, 서필
33)『고려사』권93, 열전 제6, 서필



광종 이상으로 수성기를 대표하는 군주는 성종이다. 그의 치세와 관련해서 수성하는 군주의 모범상이 제시된 것이 최승로전이다. 5조 사적평, 즉 지난 시기 임금들의 자취에 대해 논평하고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잘한 사적을 받아들여 이를 행하고 잘하지 못한 사적을 보고 경계하며, 긴급하지 않은 일을 없애 버리고 이롭지 않은 노역을 폐지하시어 오직 임금은 위에서 평안하시고 백성은 아래에서 기뻐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처음을 잘하는 마음으로써 마침을 잘하는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날마다 삼가 비록 쉴 수 있는 날에도 쉬지 말며, 비록 군주가 되었더라도 스스로 존대하지 말며, 재능과 미덕을 풍부히 가졌더라도 스스로 교만하거나 뽐내지 말고 오직 자기를 공손히 하는 마음을 돈독히 하며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을 끊지 않으시면 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올 것이고, 재앙은 기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하의 수명이 어찌 만년이나 되지 않겠으며, 왕업이 어찌 백세에 그칠 뿐이겠습니까?”34)


위 진술은 수성 군주의 덕목을 집약한 것이다. 군주의 마음가짐과 통치 방식이나 태도 등이 간결하게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는 기본적으로 군주의 내면에 관한 것이다. 동시에 이런 마음가짐에 의거해서 각종 사업을 펼칠 때 비로소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 다음에 군주가 해야 하는 긴급한 사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원래 시무책 28개조를 올렸으나 남아 있는 것은 22개뿐이다. 그 첫 번째가 “대체로 마헐탄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태조의 뜻이며, 압록강가의 석성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대조가 결정한 것입니다. 장차 이 두 곳 중에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판단하여 요충지를 가려서 강역을 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토착인 가운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 곳의 경비에 종사케 하고, 그 가운데 두 세 명의 편장을 뽑아서 이들을 도맡아 다스리게 하면 경군들은 교대로 경비하는 고생을 면할 수 있으며, 말먹이와 군량을 급히 운반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덜 것입니다.”라는 것이다.35) 즉 영토를 수호하는 일이었다.


과연 현재 남아 있는 22개조가 원형 그대로인지 아니면 중간에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바른 마음가짐 등을 제시한 군주론 다음에 나오는 시무책에서 맨 처음 영토 문제를 거론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즉 수성기 군주의 최우선 과제는 영토 수호라는 것이다.


문제는 두 번째로 나오는 “성상께서는 공덕재를 베풀기 위하여 때로는 친히 맷돌에 차를 갈기도 하고 때로는 보리를 찧으신다고 하시니, 저는 전하께서 친히 근로하시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 지금 전하께서 왕위에 있으면서 실행하신 일들이 저와는 같지 않으나, 다만 이런 몇 가지 일들은 전하의 몸을 괴롭게 할 뿐이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군왕의 체통을 바르게 하여 이득이 없는 일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이다.36)


첫 번째로 영토 수호를 말했다면 그 다음에는 적어도 안에서 임금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제시되어야 한다. 즉 상호 대등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덕재와 같은 군주로서는 쓸데없는 일에 수고하지 말아야 함을 지적했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임금의 행위를 직접 규제하는 간언에 속한다고 보면 의미가 없지 않다. 하지만『고려사』찬자들의 입장이 가미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37)


수성을 표방했던 성종 때 최승로전에 의거하여 군주의 내면 다스리기와 외적으로 수행해야 할 중요 사업에 관한 기본적인 상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를 이어38) 金審言傳에 나오는 성종 9년(990) 7월에 올렸던 봉사도 의미가 크다.


34)『고려사』권93, 열전 제6, 최승로

35)『고려사』권93, 열전 제6, 최승로
36)『고려사』권93, 열전 제6, 최승로
37) 22개조의 나머지 조목들도 앞의 2개와 마찬가지로 군주가 절실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金哲埈, 崔承老의 時務二十八條,『韓國史學史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90 ; 李基白 外, 『崔承老上書文硏究』, 一潮閣, 1993 ; 河炫綱, 崔承老의 政治思想,『韓國中世史硏究』, 一潮閣, 1988 등에서 상세하게 분석되었다.



그런데 다른 봉사의 경우와 달리 임금이 직접 뽑고서 내용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당시 절실한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등극한 뒤로부터 위업을 이룩할 것을 생각하여 중앙에는 관료들을 두고 지방에는 수령을 배치하여 지방관의 임무를 비우는 일이 없게 하고 풍속을 이롭게 하는 방책을 베풀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나는 어리석고 못난 사람으로 정치와 교화가 쇠퇴할까 우려할 뿐이었다.”라고 했다.39)


이는 중앙과 외방의 관직 제도를 수립하고 관료들을 배치해 보냈으나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심엄의 봉사는 관료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데 필요한 덕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최승로전이 군주론을 펼쳤다면 김심언전에서는 신하론을 제시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40)


김심언전에는 두 조목으로 된 봉사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 것에서는 먼저 說苑의 六正과 六邪에 관한 글을 소개하면서 대개 신하의 품행에는 육정과 육사가 있으니, 육정을 실행하면 번영하고 육사를 범하면 수치를 당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았다. 그리고 내용들을 언급하였다. 육정이 聖臣, 良臣, 忠臣, 智臣, 直臣 순으로 나열되었고. 육사는 具臣, 諛臣, 姦臣,讒臣, 賊臣, 亡國臣 순으로 정리되었다.

마지막에 이에 대한 결론으로 “현명한 신하는 육정의 길을 지키고 육사의 술책을 실행하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편안하고 아래 사람이 잘 다스려지는 것이다.”라고 했다.41)


다음으로『漢書』의 刺史六條政에 의거하여 지방관이 명심하고 살펴야 할 것 6가지를 제시하였다.42) 육정과 육사가 모든 관료들을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라면 이는 특별히 지방관에 한정된 것이다.


두 번째 조목에서는 관직을 설치하고 임무를 분장하는 것이 제왕의 좋은 법전이며, 수도를 세우고 여러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고금의 통칙이라는 전제 하에 西京에도 당나라의 東都에 지대어사를 설치했던 사례에 따라 사헌 1명을 배속할 것을 청했다. 이는 서경을 개경 버금가는 수도로 만들어 운영할 것을 청하는 것이다.43) 이는 태조 왕건이 추구하였던 북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로써 창업과 수성이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됨을 이해할 수 있다.


열전 제6의 말미에 수록된 崔沆傳과 蔡忠順傳에서는 수성기의 가장 위태롭고 극적이었던 현종의 즉위 과정을 다루고 있다.44) 그것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과정이었으며 그 안에서 충의지사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졌음을 강조하였다. 수성에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사적이었다.


열전 초반부에는 왕조의 창업과 수성에 절실했던 이념과 논리, 그리고 군주론과 신하론 등이 상호 연결되며 제시되었다. 이것은 후반부, 특히 쇠망을 이야기할 때 그 전제로써 매우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38)『고려사』권93, 열전 제6에는, 최승로전에서 김심언전에 이르기까지 광종대 활약한 쌍기를 제외하고 崔亮, 韓彦恭, 柳邦憲 등 3명의 전이 차례로 실렸다. 먼저 최량전에서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그를 불러 사우로 삼았다고 했다. 왕위에 오르자 마침내 그를 발탁하니, 모든 사람들이 바라던 바에 적합한 인사였다는 것이다. 한언공전에서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돼 그의 태도가 예법에 맞았고 그로 말미암아 관직도 받았다. 또한 송나라의 추밀원은 고려로 말하자면 숙직하는 관원과 서리의 직임이라며 그러한 기구의 설치를 청하여 관철시켰다. 유방언전에는 성품이 인자하고 관대했으며 급한 일이 있어도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이들을 통해 수성하던 시절 임금에게서 제일 필요한 덕목인 인재의 발탁, 그리고 관료로서 문화 선진국인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위를 선양하고 필요한 제도 문물을 수입하거나 군자다운 모습 등을 보여줌으로써 그 시기의 바람직한 신하상을 다양한 측면으로 서술하였다.
39)『고려사』권93, 열전 제6, 김심언
40) 이에 관해서는 金甲童, 金審言의 生涯와 思想,『史學硏究』48, 1994 ; 윤훈표, 고려시대 명예와 수치심의 사회적 배경과 기준 - 지배층의 관직과 사생활을 중심으로『동방학지』135, 2006 ; 이정훈, 고려 성종대 정국운영과 金審言의 6正 6邪,『韓國思想史學』31, 2008 ; 이성호, 김심언과 최충의 ‘6정 6사’ 및 ‘자사 6조’ 비교 , 『역사와 세계』41, 2012 등이 참조된다.
41)『고려사』권93, 열전 제6, 김심언

42)『고려사』권93, 열전 제6, 김심언
43)『고려사』권93, 열전 제6, 김심언
44)『고려사』권93, 열전 제6, 최항, 채충순



4. 보수와 쇠망 단계에 대한 정리 체계


보수와 쇠망에 대해서는 『고려사』열전에서 창업과 수성을 다루었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정리되었으며 그로 인해 파생된 문제도 여러 갈래였다. 그러므로 어느 한면에 국한시키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비교적 풍성하게 언급하였다. 그것은 그 시기의 자료가 풍부하였다는 사실 이외에『고려사』찬자들의 입장 또한 크게 가미된 결과로 보인다.


‘진고려사전’에서는 쇠망의 조짐이 인종 때부터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종 때 무신 정권이 수립되면서 크게 흔들렸고 마침내 강한 적국들이 교대로 침략해서 백성들을 해치던 차에 원종이 위급한 상황에서 대란을 평정함으로써 간신히 선조들이 물려준 왕업을 보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45)


원종을 중흥 군주, 또는 부흥 군주로 평가했던 것은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평화로운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무신정권을 종식시켰던 것과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이후 충렬왕대부터 공민왕대에 이르기까지 혼란이 계속되었다고 했다.46) 원과의 외교 관계가 안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 요소가 상존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했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체제가 크게 동요했을 것이나 궁극적으로 원의 정치적 간섭에서 파생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사회 내부의 모순도 심각했으나 보다 규정적이었던 것은 원의 간섭이라고 인식했다.


당시의 복잡한 사정은『고려사』에도 그대로 노출된다. 기존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고려사』세가에서는 원과의 관계를 수립하고 공주와 결혼해서 부마가 된 것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열전에서는 부정적 인물들을 수록하는 환자전, 폐행전, 간신전, 반역전 등에 원 세력과 관계되는 사람들이 많이 포함시켰다. 이는『고려사』 찬자들이 원의 섬김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결과라고 한다.47) 이렇게『고려사』의 구성에 따라 평가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원과의 관계가 복잡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간신전의 시기별 수록 현황을 조사한 연구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48)

시대

인종

의종

무신집권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공민

 우왕창왕


인원

3

1

1

4

5

1

1

3

 7

26


45) “그러나 그 후 후손들이 혼미하자 권신이 정권을 농락하면서 병란을 일으켜 왕위를 노리게 되었으니 인종대 이러한 일이 한번 벌어지자 의종 때에 와서는 결국 왕이 시해당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간악한 권신들이 번갈아가며 세력을 잡고서 바둑이나 장기 두듯이 임금을 바꾸어 앉혔으며 강성한 적국들은 교대로 침구해와 백성들을 풀이나 짚처럼 베어버리던 차에 원종이 위급한 상황에서 대란을 평정함으로써 간신히 선조들이 물려준 왕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迨後嗣之昏迷, 有權臣之顓恣, 擁兵而窺神器, 一啓於仁廟之時, 犯順而倒大阿, 馴致於毅宗之日. 由是, 巨姦迭煽, 而置君如碁奕, 强敵交侵, 而刈民若草菅, 順孝定大亂於危疑, 僅保祖宗之業.].”라고 하였다.
46) “그러나 충렬왕이 놀이판에서 간신들과 어울리다가 부자간에 서로 불화를 빚었으며 또한 충숙왕 이래 공민왕에 이르기까지는 변고가 자주 일어났습니다[忠烈昵群嬖於遊宴, 卒構父子之嫌, 且自忠肅以來, 至于恭愍之世, 變故屢作.].”라고 하였다.
47) 邊太燮, 앞의 책, 143∼144쪽.
48) 金光哲, 앞의 글, 1981, 135쪽에 나오는 표를 전재하였다.



쇠망기에 해당하는 우왕ㆍ창왕대에 다수가 수록되었으나 원간섭기가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실정이다. 한편 반역전에는 총 47명이 수록되었는데, 무신정권 수립 이후의 사람이 38명으로 그 중 17명이 몽골과의 관계 때문에 올랐다고 한다. 이는 고려 전시기 반역자의 1/3 이상이 몽골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것으로 찬술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중에는 심한 자도 포함되었으나 가벼운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결과는 찬자들의 민감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49)


『고려사』 세가와 열전 사이에 다소간의 모순을 노출하면서 간신․반역전 등에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인물까지 수록했던 것은 그만큼 복잡하고 미묘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원종부터 공민왕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왕실을 보수하여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지속되는 것이 중요했다. 자칫 잘못하면 고려는 자주권을 상실하여 원의 일개 성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동시에 사회 내부의 모순을 해소하는 일에도 소홀할 수는 없었다. 양자가 서로 연결되면서 고려를 극한의 상태로 몰아넣는 계기가 종종 형성되었기 때문이다.50)


일대 위기 상황에서 밖으로는 원의 세계 질서를 따르되 자주권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했으며, 안으로는 체제 모순의 해소를 위해 개혁 작업에도 나서야 했다. 두 분야는 별개이면서도 하나로 엮어야 제대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열전 정리에 있어서도 당시의 상황이 최대한 고려되었다. 몽골과 공식적으로 처음 대면한 고종 5년(1218) 강동성 전투의 두 주역이 서두에 수록된 열전 제16부터 원간섭기의 여러 문제가 총체적으로 집약된 李齊賢傳․李凌幹傳이 말미에 들어간 열전 제23에 이른다고 할 것이다. 주로 그 안에서 대내외의 여러 분야에서 파생된 문제들의 복잡한 양상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었다.


고종 5년(1218)에 벌어진 강동성 전투에서 고려와 몽골군이 공식적으로 처음 만났다. 거란의 잔존세력들이 본거지에서 쫓겨나 방황하다가 고려의 강동성에 웅거하였다. 이들을 뒤쫓아 몽골․동진의 연합군이 이르렀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하자 고려에 원조를 청하고 형제 맹약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후일을 염려하여 이에 응했다. 식량을 지급한 뒤에 군사력의 원조 요청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먼저 출동한 것은 金就礪였으며 그 다음에 그의 상관 자격으로 趙冲이 가세했다. 그들이 인솔한 고려군이 주축이 돼 몽골군 등과 연합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의 잔존 세력을 일소했다. 그런 다음에 몽골과 맹약을 맺었다.51)


강동성 일대에서 이루어진 양국 군대의 만남에 대해 몽골 측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 몰라도 고려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했다. 몽골군에 대한 식량 원조, 군사협력, 그리고 당시 몽골 원수 카치운[哈眞] 등과 맹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후일 양국 간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상황이 조성되면 마치 금과옥조처럼 즉각 활용되었다. 수시로 몽골에 대해 그런 사실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환기시켰다.52) 그러므로 양국 외교 관계에 있어서 고려 측의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49) 閔賢九, 앞의 글, 1975, 175쪽.

50) 金哲埈, 益齋 李齊賢의 史學, 앞의 책, 1990.
51) 이개석, 麗蒙兄弟盟約과 초기 麗蒙關係 성격 - 사료의 再檢討를 중심으로 , 『大丘史學』101, 2010
; 신안식, 고려 고종초기 거란유종의 침입과 김취려의 활약 ,『한국중세사연구』30, 2011.



강동성 전투와 몽골과의 맹약 체결의 주역은 열전 제16의 첫 번째로 수록된 조충과 그 다음에 나오는 김취려였다. 그런데 두 사람에 대한 평가에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먼저 조충에 대해서는 강동성 전투 당시 동진의 원수였던 完顔子淵이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고려인에게 “당신 나라 원수는 유달리 위대해 보통 사람이 아니다. 당신 나라에 이런 원수가 있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다.”라고 했다.53) 한편 김취려에 대해서는 몽골 원수 카치운이, “내가 일찍이 여섯 나라를 정벌하여 귀인들을 많이 보았지만, 형의 용모를 보니 어쩌면 그리도 기이하오? 내가 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휘하의 군사들도 한 집안처럼 보게 되었소.”라고 했고 이별할 때는 손을 잡고 문까지 나와 부축해 말에 태워주었다.54)


약간의 뉘앙스 차이를, 즉 한편은 동진, 다른 한편은 몽골의 원수를 내세워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업적이 중요했던 것은, “당시 몽골과 동진이 비록 거란을 토벌하여 우리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몽골은 오랑캐들 중에서도 가장 흉악하고 사나우며 이전에 우리와 우호관계를 맺은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라 전체가 깜짝 놀라 그것이 속임수가 아닌가 의심했다. 조정에서도 결정을 내리기를 주저하여 회답을 보내지 못하다가, 그냥 군사들에게 음식이나 제공하려 했다. 그러나 조충만은 의심하지 않고 계속 신속하게 보고했다. 몽골은 회답이 늦어지자 화가 난 나머지 크게 질책했는데 조충은 그때마다 적절하게 오해를 풀곤 했다.”55)라고 해서 모두 의심할 때도 과감한 조치를 취해 맹약을 성취시켰다는 점이다. 그것은 몽골과의 관계에 출발점이면서 하나의 모범 사례로 간주되었다. 훗날 고려는 이런 사실을 최대한 활용해서 원을 설득하여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몽골의 정복지에 대한 통제 방식이 맹약시 고려에는 하나도 적용되지 않았다. 맹약 자체가 동일평면상의 횡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정복․피정복의 관계와는 판이한 것이었다.56) 아무튼 그런 결과를 얻은 요인 중의 하나는 정부의 지침이 명확하지 않았음에도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했던 조충, 김취려의 임기응변식 대처57)라고 볼 수 있다. 즉 원에 대해 고려는 다른 정복지들과 상이한 대우와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52) 高柄翊,『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70, 170∼171쪽.
53)『고려사』권103, 열전 제16, 조충
54)『고려사』권103, 열전 제16, 김취려
55)『고려사』권103, 열전 제16, 조충
56) 高柄翊, 앞의 책, 182쪽.
57) 尹龍爀,『高麗對蒙抗爭史硏究』, 一志社, 1991, 29쪽.



열전 제16의 조충․김취려전부터 원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고려에서 내걸었던 주장과 노선의 기점이 됨을 보여준다. 이후 원과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점점 복잡해졌다. 더불어 그 관계가 사회 내부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이를 반영하듯 열전에는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는 여러 인물들이 수록되었다.


그 중에서도 국내외의 복잡한 상황에서 고려 측의 노선과 지향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열전 제23의 말미에 수록된 이제현․이능간전이다. 먼저 이제현은 충선왕에 의해 원의 수도인 燕京으로 불려간 자리에서 누구보다 태조를 본받을 것을 건의했다. 즉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준 군왕의 원대한 식견과 깊은 생각은 후대 임금이 따라갈 수 없는 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실적 대안으로 문치의 회복을 청했다. 학교를 넓히고 庠序를 일으키며 六藝를 존중하고 五敎을 밝힘으로써 선왕의 도를 천명하면 누가 眞儒를 등지고 釋子를 따라다니겠느냐고 반문했다.58) 유학 교육의 진흥이 우선되어야 함을 지적한 것인데 충선왕도 기꺼이 동의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당시 여러 갈래로 거론되었던 통치 체제의 補修에 대한 논리를 나름대로 정리해서 제시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59)


당시 안팎으로 어려운 국면에 놓였던 고려로서는 타개를 위한 여러 방책과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것은 창업만큼이나 힘들고 험난한 과정이었다. 국내 문제의 해결도 어려운데 거기에 원과의 관계가 더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었다. 아마 충선왕에게 창업 시절의 어려움을 거울삼아 현재의 곤란함을 극복하는 방도로 삼을 것을 은근히 권했던 것 같다.


그 다음에 매우 유명한, 즉 고려에 성을 설치해서 원에 병합시키려는 것을 반대하는 상서가 나온다.『중용』의 천자는 제후국을 존속시켜 줄 의무가 있다는 원칙을 제시하면서 입성 책동을 반대하고 고려의 존속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가운데 특히 역사의 유구함을 논했던 부분이 주목된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시조 왕씨가 나라를 세운 이래 모두 4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元에 신하로서 복종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친 것도 1백년이 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끼친 공덕이 깊지 않은 것이 아니며 조정에 세운 공로도 두텁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지금 들으니, 조정에서는 우리나라에 행성을 세워 중국의 다른 지방과 같은 행정 구역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정말 그러하다면 우리나라의 공은 제쳐두고라도 世祖의
조서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몇 년 전 11월에 새로 내려온 조서의 조목을 읽어보건대, ‘옳지 못한 것과 옳은 것에 대해 각각 달리 대처함으로써 천하를 안정시켜 세조 당시의 덕치를 회복시키고자 한다.’고 했으니 황제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진실로 온 천하의 복인데 어찌 우리나라의 일에만 세조의 조서를 적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60)


위 상서에서 고려 400년 역사에서 무려 100여 년 동안이나 원의 신하로서 지내왔다고 했다. 세조도 그런 공적을 인정해서 공주를 시집보내 대대로 인척으로서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 옛 관습을 고치지 않게 함으로써 종묘사직을 보전하게 하는 조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제현이 원과의 관계가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며 공로도 매우 컸음을 강조했는데, 이를 되짚어보면 후손들이 그 유구한 역사를 하루아침에 뒤엎어 종결짓는 것이 타당하지 않으며,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구한 역사 가운데에는 고려의 공적을 헤아려 옛 관습을 고치지 않도록 해서 종묘사직을 보전하게 했던 세조의 조서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아무튼 이런 주장 등이 받아들여져 고려를 원 영토로 병합하려는 책동은 중단되었다.61)


100여 년이 넘었다는 것은 지난 戊寅年(고종 5) 강동성 일대에서 조충과 김취려가 몽골군과 맹약을 맺었던 때부터 계산하여 얻은 결과였다. 그런데 이 유구함이 입성 책동을 저지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상황이 바뀌어 고려 측에서 원과의 비정적인 관계를 종식시키고자 할 때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58)『고려사』권110, 열전 제23, 이제현
59) 이에 대해 같은 것임에도『역옹패설』 전집 권1에서 더 첨가시켰던 것을 분석하면서 이제현은 전통적인 학풍이었던 시문장구의 풍조를 지양하고 경전교육과 도덕교육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고 보기도 한다(鄭求福, 李齊賢의 역사의식 ,『韓國中世史學史(Ⅰ)』, 集文堂, 1999, 323∼324쪽).

60)『고려사』권110, 열전 제23, 이제현
61) 高柄翊, 앞의 책, 246∼247쪽 ; 김혜원, 원 간섭기 立省論과 그 성격 ,『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81∼82쪽.



고려를 원에 병합시키자는 입성책을 주장하는 자들이 그 이유로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민생이 어렵다는 사실을 간혹 제기하였다.62) 이를 원천 봉쇄하려면, 나아가 심각한 민생 곤궁에서 벗어나려면 내부의 개혁이 필수였다. 이 점을 의식했던 이제현은 충혜왕이 폐정 끝에 쫓겨난 뒤 충목왕이 즉위하자 곧 상서를 올렸다.

모두 11개조로

⑴ 국왕의 도리를 다하되『孝經』과 四書 등을 강하게 하여 格物致知와 誠意正心의 도를 익힐 것

⑵날마다 편전에 나와 宰臣들과 국사를 의논할 것

⑶ 정방을 혁파하고 인사를 전리사와 군부사로 돌릴 것

⑷ 응방과 내승의 완전한 제거와 구제가 아닌 德寧倉․寶興倉 등의 혁파

⑸刺史와 수령에 적합한 사람을 임명할 것

⑹ 사치 풍조 배격

⑺ 과거에 수탈했던 포를 돌려주는 대신 내년도에 납부할 잡공으로 대치해줄 것

⑻ 兩宮의 식읍을 폐지하고 그것을 광흥창으로 귀속시켜 녹봉으로 충당할 것

⑼ 권세가가 탈점한 경기의 토지를 몰수해 녹과전으로 절급할 것

⑽ 至正 3년(1343, 충혜왕 4) 이전의 포흠 공부를 면제할 것

⑾ 폭정에 시달려 전매된 궁민을 관의 재산으로 속환시키되 매수한 자도 자수케 할 것 등을 청했다.63)


여기서 ⑴, ⑵는 국왕에 관한 것이고, ⑶∼⑸, ⑻, ⑼는 관료제, 또는 관료 일반에 해당되며, ⑹, ⑺, ⑽, ⑾은 민생에 관한 것이다. 이제현은 국왕부터 시작해서 전매된 궁민이나 포흠공부에 시달리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에 걸쳐 절실했던 폐정의 개혁을 건의했다.64)


이제현의 입성 반대와 내정 개혁에 관한 상서를 통해 원과의 특수 관계에 있으면서 체제 보존에 힘썼던 補修의 전형됨을 엿볼 수 있다. 원과의 관계와 내정 개혁은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있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라도 해결이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현이 제시했던 개혁안은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65)


열전 제23의 마지막에 실린 이능간전은 상대적으로 짤막하다. 그는 충선왕에 대해 진정으로 충성을 다했으며 입성책을 강력하게 반대하여 1등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조적의 난때 충혜왕을 호종한 공이 신하 중에서 가장 컸다고 해서 鐵券을 받았고 곧이어 寧川府院君으로 책봉되었다.


62) 입성론의 제기 배경과 관련하여 충혜왕의 실정이 가장 대표적이다(김혜원, 위의 글, 64∼65쪽).

63)『고려사』권110, 열전 제23, 이제현에 수록된 내용을 鄭求福, 앞의 책, 1999, 319∼320쪽에 의거하여 정리했다.
64) 이에 대해 미봉책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나(金哲埈, 앞의 책, 1990, 322쪽) 국가가 당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鄭求福, 앞의 책, 1999, 320쪽 주42).
65) 이에 관해서는 吳煥一, 麗末 李齊賢의 改革運動, 『史學硏究』49, 1995 ; 林容漢, 麗末鮮初의 守令制 改革論, 『人文學硏究』 1, 1996 ; 李源明,『高麗時代 性理學受容硏究』, 國學資料院, 1997 ; 申千湜, 李齊賢의 學文과 思想,『明知史論』 9, 1998 ; 김인호, 『高麗後期 士大夫의 經世論 硏究』, 혜안, 1999 ; 馬宗樂, 元 干涉期 益齋 李齊賢의 儒學思想,『한국중세사연구』8, 2000 ; 이익주, 14세기 전반 성리학 수용과 이제현의 정치활동 ,『典農史論』7, 2001 등이 참고된다.



그런데 충혜왕이 원으로 잡혀가자 재상과 원로들이 그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글을 올리자고 의논했으나 이능간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천자가 왕이 무도하다는 말을 듣고 죄를 주었는데 만약 주청하는 글을 올린다면 천자의 명이 잘못이라고 하는 셈인데 과연 그것이 옳겠는가?”66)


위 견해는 원과의 특수한 관계에서 보수하고자 했던 입장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원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임금조차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67) 다른 시기에서는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의견으로 보인다.


그만큼 당시 처했던 상황이 대단히 복잡했음을 의미했다. 자칫 잘못하면 자주권마저 상실돼 원의 일개 성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이에 극단적으로 국가를 지키려면 임금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즉 충과 불충이 이전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혹은 너무 느슨해서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기도 했다.


이 같은 사정이 열전 정리에도 반영돼 간신전, 반역전 등에 정도가 심하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수록되는 예가 많았다. 즉『고려사』에서는 원을 상국으로 인정하면서도 고려의 자주성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간신전, 반역전 등에 수록했다는 것이다.68)


반역전 서문에는 “공자가『춘추』를 지은 것에 의거하여 난신적자와 지역에 할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에게 특히 엄격했으며, 죽은 자라도 용서 없이 성토했으니 이는 후세의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함이다.”라고 했다.69) 여기서 지역에 할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는 그 대상이 분명하였다. 문제는 난신적자에 누구를 무슨 이유로 넣었는가에 달려 있다.


열전 제43, 반역전 4에 수록된 인물들을 대상으로 고찰하면, 대개 몽골과 관계가 깊었던 사람들이다.70) 맨 앞에 수록된 韓恂과 부록된 多智, 趙暉, 崔坦, 그리고 맨 끝의 삼별초난의 주동자인 裵仲孫은 지역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에 해당한다. 한편 金俊, 林衍과 그에 부록된 林惟茂는 무신 집정들이다. 그들은 난신적자로 분류해도 정황상 큰 문제가 없다.


그 이외의 洪福源, 李峴, 趙叔昌, 趙彛와 그에 부록된 金裕․李樞, 韓洪甫, 于琔 등은 공통점이 모두 몽골에 투항했던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상황인데, 불가피하게 항복했던 것이 아니라 전부 자진 투속했다. 그들 중에 이현, 조숙창, 한흥보, 우정 등은 나중에 귀국하였다.그로 인해 이현, 조숙창, 우정 등은 처형되었다.


그러므로 초창기에 투항해 나름의 위치를 확보했던 홍복원을 제외하고는 투항자들이 커다란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몽골에 자진 투항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실질적으로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고 혐의가 어느 정도인지를 헤아리지 않은 채 난신적자로 분류해 반역전에 수록했다. 자진 투항해서 비록 큰 것이 아니더라도 본국에 해를 끼쳤던 자들은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반역으로 처리했다.


66)『고려사』권110, 열전 제23 이능간
67) 채웅석, 원간섭기 성리학자들의 화이관과 국가관 ,『역사와 현실』49, 2003에서는 원간섭기에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고려의 군신 관계를 강조하는 계열의 인물들과 이능간처럼 원에 대한 배신으로서의 입장을 우선시하는 부류들의 차이를 논했다.
68) 閔賢九, 앞의 글, 1975, 175쪽.
69)『고려사』권127, 열전 제40, 반역 1, 서문
70)『고려사』권130, 열전 제43, 반역 4



원의 정치적 간섭이라는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보수는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한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안팎의 도전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결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 요인에 대해 대표격인 이제현전에서는 “성리학을 즐겨 공부하지 않아 그 방면에 조예가 없었기에 공자와 맹자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공론만 늘어놓았다. 또 마음 씀씀이가 정확하지 못하여 일의 기획이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식자들은 그것을 단점으로 여겼다.”고 했다.71) 한마디로 보수를 추진하는데 필요한 역량과 자질이 부족했다고『고려사』 찬자들은 평했다. 이에 대해 당시의 정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72) 하지만 고려 국가를 유지시켰다는 점에서는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쇠망기에 대해 ‘진고려사전’에서는 이미 인종 때부터 조짐을 보이다가 위조, 즉 우왕․창왕이 등극하면서 결국 붕괴되었다고 주장하였다.73) 하지만 붕괴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그에 앞서 공민왕 때부터 징조가 있었다고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공민왕대가 보수와 쇠망의 경계선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열전 제24 이후부터 쇠망의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기준은 전과 다른 원과의 관계 설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과의 특수한 관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보수를 추진하려는 입장과 달리 무엇보다 그것을 일거에 해소시켜 과거의 중원 왕조들과 맺었던 것처럼 복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특히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원과의 특수 관계를 해소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외침에 대비한 방위력 증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 점은 종전의 체제 보수를 논했던 입장과 다소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열전 제24의 서두에 나오는 廉悌臣傳, 李嵒傳에서는 공민왕의 반원 정치에 따른 대외 관계의 변화로 인해 파생된 군사 방면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74) 그들은 반원 정치 이후 공민왕의 대외 정책 추진에서 주요한 소임을 맡았다고 생각된다.


쇠망에 대한『고려사』열전의 정리는 매우 세밀하다. 세가의 기능 일부까지 넘겨받아 소원한 구석 없이 다방면에 걸쳐 자체 모순으로 붕괴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먼저 단대사의 기전체 정사에서 핵심 존재인 최후의 폭군이 열전 제46∼50에 걸쳐, 즉 우ㆍ창왕에 관한 서술로 정리되었다.75) 여기에 최후의 폭군에 관해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모든 요소들이 빠짐없이 기술되었다.76)


71)『고려사』권110, 열전 제23, 이제현
72) 정구복, 앞의 책, 1999, 352쪽.
73) “또한 충숙왕 이래 공민왕에 이르기까지는 변고가 자주 일어나 국운이 더욱 심하게 쇠미해진 결과 僞朝가 들어서 마침내 뿌리가 통째로 흔들려 결국 천명이 眞主에게로 돌아왔습니다[且自忠肅以來, 至于恭愍之世, 變故屢作, 衰微益深, 根本更蹙於僞朝, 歷數竟歸於眞主].”라고 하였다.
74)『고려사』권111, 열전 제24, 염제신, 이암
75) ‘辛禑傳’의 독특한 성격에 대해서는 이정란,『高麗史』辛禑傳의 편찬방식과 자료적 성격 , 『韓國史學報』 48, 2012에서 상세하게 논증되었다.



우왕의 경우 처음 출생부터 불확실하였다. 전왕조였던 태봉의 궁예처럼 누구의 소생인지가 명확치 않았다. 나아가 즉위도 간신전에 수록된 李仁任의 음모에 의해 이루어졌던 일로 묘사되었다.77) 즉 최후의 폭군과 간신이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 되는 셈이다.


우왕은 10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대개 학업에 관심이 없으며 환관과 궁첩들을 가까이하는 등78) 패륜의 조짐을 보이는 것을 언급하는 수준에 머물렀다.79)
하지만 점차로 그의 성장 과정에 맞춰 그릇된 행동의 강도와 횟수가 늘어난다. 갈수록 패륜 행위의 세기가 높아지면서 열전 제48, 즉 우왕 9년(1383) 이후부터는 거의 일상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전까지는 국가의 정사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간간이, 후반에는 좀 더 증가하지만 패륜 행위가 묘사되었다. 그러나 우왕 9년부터 패륜이 일상화되면서 국가 정사의 기록과 대등한 수준에 이른다. 마침내 우왕 10년(1384) 정월에 우왕의 광포한 짓이 나날이 심해져 사람의 행동 같지 않자 재추들이 惠明殿과 玄陵에 제사를 지내 빌기도 했다고 기록되었다.80) 이때부터 패륜을 넘어선 폐정으로 나아갔으며 전형적인 폭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같은 해 12월에 다음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우왕이 도성 남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이자 물품을 대느라 지친 역리가 “저 포악한 왕[獨夫]이 언제나 죽을까?”라고 욕설을 퍼부었다.81)"


그 이후에 쫓겨날 때까지 계속해서 폭군의 면모를 보여주는 기사들로 채워졌다. 그 폐정의 끝은 나라와 백성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요동 정벌이었고 마침내 그 잘못을 깨닫고 자진하여 왕위에서 물러난 것처럼 기술하였다.82)


이런 식으로 열전의 맨 끝 부분을 최후의 폭군으로 장식하였다. 그것은 고려의 멸망이 폭군의 폐정과 그에 의해 저질러진 그릇된 판단의 절정인 요동정벌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최영을 제거하는 자리에서 조선 태조는 “요동정벌이 대의에 거역되는 일일뿐만 아니라 나라가 불안해지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일을 일으켰다.”면서 위화도 회군에 대해 변명하였다.83) 결국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으로 인하여 촉발된 왕위 교체가 백성과 하늘의 뜻을 받들어서 행해진 결단임을 분명히 했다.84)


76) 그런데『고려사』열전에서 위화도 회군 이후 事實의 왜곡에 대해서는 이미 거론된 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金塘澤, 앞의 글, 2007이 참고된다.
77)『고려사』권133, 열전 제46, 우왕 총서
78)『고려사』권133, 열전 제46, 우왕 1년 12월
79) 대표적인 것은 우왕의 유모 장씨의 입을 통해 나왔다. “군왕은 반드시 날을 가리어 비빈의 처소에 행차하시는 것이 예법이온데 지금 들개처럼 어슬렁거리셔서야 되겠습니까?(『고려사』권134, 열전 제47, 우왕 5년 9월).”
80)『고려사』권135, 열전 제48, 우왕 10년 1월
81)『고려사』권135, 열전 제48, 우왕 10년 12월
82)『고려사』권137, 열전 제50, 우왕 14년 6월 경술

받아들였던 태조 왕건의 결단과 흡사한 서술 구조를 보인다.
84) 이는 ‘제3장 창업과 수성의 논리 전개’에서『고려사』권92, 열전 제5의 홍유 등의 창업 논리와 이를 받아들였던 태조 왕건의 결단과 흡사한 서술 구조를 보인다.



한편 최후의 폭군은 통상 의로운 신하와 의롭지 못한 측근을 양편으로 거느리는 것이 원칙이다. 결국에는 의로운 신하를 내치고 의롭지 못한 측근들과 밀착되면서 멸망에 이르게 된다. 먼저 의로운 신하들은 대개 조선의 개국 공신들로 채워졌다. 열전 제31 趙浚傳, 열전 제32 鄭道傳傳, 열전 제33 尹紹宗․吳思忠․金子粹 등이다.


먼저 조준전에서는 체제의 혼란과 그에 대한 개혁 방안이 집약되었다. 당시 민생의 가장 절실했던 토지 문제로 출발해서 중앙과 지방의 제도와 그 운영이 전반적으로 얼마나 병들고 헝클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며 근본적인 개혁이 시급함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의 모든 부문이 극히 혼란스런 상태에 놓여 있으며 그에 따른 민생의 고통이 매우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조준이 올린 건의안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모두 당시의 병폐를 적절히 지적해 잘못된 정치가 완전히 개혁되도록 했다고 기술했다. 반면에 공양왕은 사신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조준에 대해 ‘또 그의 얼굴을 보겠구나’라며 언짢은 마음을 표시했다.85)


그 다음 정도전전에서는 당시 사회 혼란의 주된 원인 제공자이면서 선량한 사람들에게 숱한 해악을 끼쳤던 참소자와 난신적자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나아가 불교의 폐해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했다. 특히 구체적으로 우․창왕에 연결되는 인물들을 참소자와 난신적자로 간주해야 된다고 규정했던 사실이 주목된다. 그것은 우․창왕이 王氏의 왕위를 도적질했기 때문에 祖宗의 죄인이며 왕씨의 자손과 신하들에게는 공동의 원수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창왕에게 동조해서 그들의 복귀를 바라는 자들이 당시의 난신적자라 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 존재가 李穡과 禹玄寶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의를 위해 두 사람의 처형까지 건의했다.86) 당시 유종이었던 이색까지 난신적자의 혐의가 있다는 정도전의 주장은 사회적 파장이 대단했을 것이다. 즉 그 누구도 난신적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고려말의 분열과 갈등이 더 이상 자체로 해결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87) 얼마 뒤 정도전은 공양왕에 의해 봉화로 쫓겨났다.88)


의롭지 못한 측근 가운데 단대사 기전체 정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존재는 최후의 재상인데, 간신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객관적 상황으로 본다면 요동정벌의 책임이 있던 崔瑩과 실질적으로 마지막 재상인 鄭夢周가 비정될 수 있겠으나 정황상 그것은 곤란하였다. 마침내 열전 제39에 수록된 이인임 이하를 최후의 간신으로 비정했다.89) 그 중에 맨 앞에 수록된 이인임이 핵심이었다.


85)『고려사』권118, 열전 제31, 조준
86)『고려사』권119, 열전 제32, 정도전
87) 위화도회군 이후에 단행된 체제 개혁 작업과 관련하여 벌어진 정치적 갈등은 마침내 왕조 교체를 초래할 정도로 심각했다. 당연히 다방면에 걸친 수많은 연구가 제출되었다. 그 중에서 이념 논쟁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일컬어지는 이색과 정도전 등에 대해 검토한 성과들이 주목된다. 대표적으로 韓永愚, 『改正版 鄭道傳思想의 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83 ; 牧隱硏究會編,『牧隱 李穡의 生涯와 思想』, 一潮閣, 1996 ; 都賢喆, 『高麗末士大夫의 政治思想硏究』, 一潮閣, 1999 ; 洪榮義,『高麗末政治史硏究』, 혜안, 2005 ; 김인호, 정도전의 역사 인식과 군주론의 기반 ,『韓國史硏究』131, 2005 ; 김영수,『건국의 정치』, 이학사, 2006 ; 정호훈, 鄭道傳의 학문과 功業 지향의 정치론 ,『韓國史硏究』135, 2006 ; 이정주,『性理學受容期 佛敎批判과 政治․思想的 變容』, 高麗大民族文化硏究院, 2007 ; 정재훈, 정도전 연구의 회고와 사상사적 모색 ,『韓國思想史學』28, 2007 등을 들 수 있다.
88)『고려사』권119, 열전 제32, 정도전
89) 그들의 열전은 거의가 비행 사실로 메워져 있다고 한다. 이는 고려사 찬자들이 토지제도의 문란이나 호적법의 해이, 신분제의 붕괴가 이들에 의해 말미암은 것으로 보았던 것에서 연유한다(金光哲, 앞의 글, 1981, 142쪽).



이인임전에는 ‘이인임이 어린 임금을 세워 자신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 하에 우왕을 세우고자 하였으므로 결정이 내려지지 못했다.’고 되었다. 즉 우왕 즉위에 관한 책임이 이인임에게 있음을 명시했다. 그리고 공민왕의 시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명나라 사신의 살해 사건도 실상은 이인임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증언이 나왔다. 간관 李詹과 全伯英은 이인임이 몰래 金義와 짜고 명나라 사신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와 명의 외교 관계를 파탄시킨 주범은 이인임이 되는 것이다.


그 밖에 부정부패, 개인적인 탐학, 월권행위, 날로 그릇되는 우왕을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것 등이 나열되었다. 그 뒤에 대간 윤소종 등이 올린 이인임의 탄핵 상소 전문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왕실을 더럽히고 조종을 욕되게 하여 그 추함이 천하에 퍼진 결과 천자가 삼한에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했으며, 개국 이래로 그 간악함과 죄악이 견줄 데가 없으니 林堅味와 廉興邦의 악행도 모두 이인임이 빚어낸 것이라고 했다.


이인임전의 전반부에는 그의 구체적인 죄악상을, 후반부는 그에 대한 대간의 탄핵을 실었는데, 이로써 나라를 망친 최후의 간신으로서의 면모를 확연히 했다. 동시에 이인임전 다음에 나오는 임견미, 염흥방도 그와 한 통속임을 명시했다.90)


끝으로 曹敏修, 邊安烈, 王安德은 모두 우․창왕을 세우거나, 또는 복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91) 쫓겨난 폭군과 그 후손을 다시 세우려고 음모를 꾸민자들은 당연히 간신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신전 서문에서 임금이 한번 그 술수에 빠지면 나라를 위기에 빠뜨려 패망에 이르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고 했는데,92) 폭군을 다시 세우려했던 자들의 죄악은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쇠망 단계에 대한『고려사』열전의 정리는 세가 기능의 일부까지 수용하며 전반에 걸쳐 자체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입증하는데 주력했다.


마침내 고려의 왕실과 그를 뒷받침하는 신료들은 쇠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의지와 자질이 모두 없거나 크게 부족했다고 서술했다. 그들의 집권은 민생의 파탄과 통치 제제의 붕괴 등을 가속화시킬 뿐이었다. 유일한 구원 방도는 새로운 덕망자와 함께 그를 보필하는 의로운 인물들이 출현하는 것이었고, 실제 그러한 모습을 열전 도처에서 묘사하였다.


『고려사』열전의 정리를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전왕조의 몰락이 자체 모순, 즉 자격없는 포악한 군주와 그를 옹립하며 부당한 권세를 휘둘렀던 간신들, 그리고 이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무능한 신료 때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들로 인해 쌓인 심대한 폐해는 조선이 들어서야 비로소 해소될 수 있음을 예견하는 것이다.


새로운 왕조에서 추진했던 주요 국정 과제 중의 하나인 건국의 정당성 선양을 위한 역사 바로 세우기가 열전 정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90)『고려사』권126, 열전 제39, 간신 2, 이인임, 임견미, 영흥방

91)『고려사』권126, 열전 제39, 간신 2, 조민수, 변안렬, 왕안덕
92)『고려사』권125, 열전 제38, 간신 1, 간신전 서문



5. 맺음말


『고려사』는『삼국사기』와 함께 기전체 정사에 속한다. 그리고 단대사로써 사학사상에서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전왕조인 고려에 대한 역사관을 국가적 사업으로 정립한 것으로 그 의미는 각별하다. 그 중심에는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확실하게 구현하는 것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개창 직후부터『고려사』편찬 작업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많은 시일과 인력이 투입되었음에도 종결이 쉽지 않았다. 드디어 세종 말년에 기전체로 전환되면서 급진전되었다. 이미 ‘체례궐략’이 예상되었고 또한 실제로 나타났음에도 굳이 체재를 바꾼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단대사로 전왕조사를 정리하는 기전체 정사의 정형화된 서술 구조로 교체의 정당성을 그 자체로 구현되게 만드는 장치가 주목된다. 전대사의 편찬을 통해 교체의 정당성을 천명한다는 취지에서 기전체로의 전환이 모색되고 마침내 실현되었다.


문종 원년에 편찬된『고려사』에는 본기가 세가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서술 구조상의 다양한 문제점이 파생되면서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기 어려워졌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최후의 폭군에 해당하는 우ㆍ창왕의 기사가 제외돼 열전에 실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유덕한 창업 군주와 함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인데, 막상 그 부분이 빠진다면 본기(세가)의 위신이 떨어짐을 면하기 어려웠다. 위계적 질서가 강조되는 기전체 정사로서는 ‘체례궐략’의 평가를 피하기 힘들었다.


그 결과 『고려사』에서는 본기를 대체하는 세가와 열전 간의 관계가 다른 기전체 정사의 그것과 다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본래 세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열전이 그 기능 일부까지 떠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고려사』열전의 위상이 독특할 수밖에 없었다.


열전의 정리 체계는 기전체 정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업과 수성, 보수와 쇠망의 단계로 구분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흥망성쇠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특히 쇠망 단계에 대한 정리에서 중점을 두었던 것은 자체 모순으로 붕괴되는 모습이었다. 최후의 폭군으로써 우왕을, 나라를 망친 간신에 이인임 등을 전면에 내세우며 총체적인 혼란상을 그렸다.

여기에 필히 수반되는 의로운 신하로 조준, 정도전 등을 등장시켜 통치 체제의 가파른 위기와 난신적자들의 준동 따위를 적시하면서 자체적인 해결 능력의 부재를 서술했다. 고려의 통치체제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이는 곧 조선이 들어서야 비로소 구폐들이 척결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새로운 조선 사회 만들기는 구폐, 특히 전왕조의 남겨놓은 폐단들을 철저하게 제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역사 바로 세우기는『고려사』열전의 정리 체계를 통해 한층 구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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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5. 7. 31 심사일: 2015. 8. 31 게재확정일: 2015. 9. 18



<Abstract>


Right modification of a historical view through the compilation of the biographies of the Goryeosa (『高麗史』 列傳) by the Joseon Dynasty


Yoon, Hoon-Pyo*


The Goryeosa is a formal history book of the Goryeo dynasty era written in annalistic form. The annalistic form is a historic descriptive form that comprise basic annals, biographies, treatises, tables, etc. Among them, the basic annals and biographies are the most significant.

The compilation of the Goryeosa started right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However, even after a while and several processes of documentation, the book could not be completed. As the historic description system converged towards the annalistic form, was finally completed in August 1451.

In the Goryeosa, sega (世家, the history of feudal lords) was used instead of bon-gi (本紀) in the basic annals. Although, this caused no big change in character and it only downgraded the focus of the bood from the history of the emperor to the history of feudal lords, it caused many issues with the expressions.

The most serious issue was that in the basic annals, the lyrics for the 32nd king, King U (禑王, 在位 1374∼1388), and for the 33rd king, King Chang (昌王, 在位 1388∼1389), were deleted in order to insert biographies. As a result, the status of the biographies was significantly upgraded. That is, they had to absorb part of the function of the basic annals and to play a systemizing role for the overall Goryeosa.

The biographies are categorized and sorted as per the stages of establishment and keeping, repairing, and perishing. They were as composed so as to cover the rise and fall of the Goryeo dynasty. At the perishing stage in particular, the book focused on its falling apart due to its self-contradictory character. For those reasons,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was inevitable and the Goryeosa tried to justify it in historic terms.


Key Words: Goryeosa, annalistic form, sega (世家), biographies, King U




東方學志 제171집(2015년 9월), 97∼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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