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성들은 가사를 주로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여성들의 일이 반드시 가사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그 외에 틈틈이 직조를 하여 의생활을 자급자족하고 세금을 충당하였다. 조선시대 여성은 생산 활동이나 일상생활을 살펴볼 때 신분에 따라 그 양상이 달랐다.
1. 조선시대 신분과 여성생활
1) 왕실여성 : 왕비와 후궁
○ 왕비 : 왕비란 왕의 정처이며, 국모를 지칭하는 호칭. 중궁, 모비(某妃). 모두 전(殿), 궁이라 칭함.
빈은 정1품. 세자의 정처인 왕세자빈과 왕의 후궁.
* 비빈의 수 : 고려는 빈의 수가 일정치 않고 적첩의 구별도 없어 여러 비는 동등한 신분적 위치에 있었던 것. 그러나 조선
건국 후 처첩, 적서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이 요구됨. 1비 이외에는 모두 후궁.
* 간택의(揀擇儀) : 비나 후궁을 간택할 때는 전국의 처녀에게 금혼령을 내림. 세종은 15세 이상을 가혼 연령으로 삼았고
세조는 연령의 제한을 없앴지만, 금혼령 대상 연령은 대개 16세 이하에서 8세까지. 비, 후궁을 간택하게 되면 조정에서는
가례색을 설치하고 전국에 연령해당자에게 금혼령을 내림. 간택 대상은 대개는 사대부 규수.
세자빈의 간택조건은 가계, 부덕, 자색(미모) 등 3가지, 자색에 치우치지 않기 위한 간택방법으로 처녀의 집을 순방하여
택하고 다시 이들을 창덕궁에 모아 선발함.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이루어짐.
동궁이 세자로 책봉되면 세자빈으로, 세자가 즉위하면 비로 승격됨. 또 비나 세자빈 자리가 비었을 경우, 재간택하는 것
이 원칙이나 경우에 따라 후궁 중에서 승격시켜 왕비나 세자빈으로 삼음.(숙종대 장희빈 사사 이후는 불허) 이씨는 본관
을 불문하고 제외됨. 후궁의 경우도 간택을 통해 들어오는 경우는 이씨가 없음.
* 교육 : 최종 간택에서 낙점받은 처녀는 그날부터 별궁에 들어가 일정기간 궁중예절과 왕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음.
예의범절교육을 마치면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왕비나 세자빈이 됨.
* 폐비 : 조선초 7대 동안 4,5차례 폐비문제가 대두되었고 3명의 세자빈이 폐출됨. 원인은 불의, 부덕으로 가법을 더럽힌
경우. 정치적 사건으로 왕 또는 세자가 폐위되었을 때 따라서 폐비 또는 폐빈이 됨.
* 은전(恩典) : 비의 경우 고향을 승격시키고, 향리 수를 증가시켜 줌. 후궁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음. 후궁은 노비 전결 등
을 급여함.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에, 어머니는 부부인에 봉하고, 각종 물품을 내려주고 죽었을 경우 조의를 위한 장례
용 물품 등을 내려줌.
왕비의 족친은 아주 무능한 자가 아니면 다 관작을 받음. 후궁의 근친에게는 1,2품에 해당하는 고관직을 부여하기도 함.
* 생활 : 절검을 미덕으로 삼아 비빈들은 검소한 의식생활을 추구. 부덕이란 미명하에 정신생활의 제약을 받음. 왕비는
아들을 낳는 것과 상관없이 죽어서는 종묘에 신위가 안치됨.
○ 왕비가 하는 일은 :
․ 왕비는 국모로서의 역할, 내․외명부를 거느림. 내명부에는 왕의 후궁과 상궁, 궁녀들이 속해 있었고, 외명부에는 종실의
처, 왕과 세자의 자녀, 문무반의 부인들이 속해 있었음. 왕비는 원칙적으로 무품계로, 품계를 초월한 존재.
․ 양잠과 방직을 손수함. 친농과 같이 왕비가 직조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일반 부녀자들의 양잠의식을 고취시키고자 친잠
(親蠶)을 강조함. 이때 친잠례는 부덕(婦德)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해 이념적으로도 양잠의 활성화를 기대함.
친잠 때에는 중궁이 왕세자빈과 내외명부를 모두 인솔하여 채상단 밖에서 의칭호 정경부인 정부인 숙부인 숙인 신인 영인
공인 의인 안인 단인 유인잎을 모아 광주리에 담는 행위를 한다. 여기서 왕비가 실제로 노동을 하느냐 않느냐는 중요한 문
제가 아니고, 왕비 자신이 충실하게 이러한 의식을 수행한다는 사실에서 직조노동의 중요성, 그 보급 노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
․ 여가를 이용하여 저술함. 소혜왕후 한씨 내훈 , 혜경궁 한씨 한중록 등.
○ 후궁이 되는 방법 :
1. 왕의 승은을 입는 것.
2. 왕비처럼 간택을 거쳐 후궁이 되는 경우. 2-3명의 후궁을 정식 간택을 통해 들였다.
후궁은 정1품 빈,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으로 나누어짐.
후궁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경우 특별한 대우를 받음. 정1품 빈의 품계와 궁호를 특별히 하사받았다.
-> 궁정동 칠궁 : 원종, 경종, 진종, 장조, 영조, 순조, 영친왕의 어머니
표 1 조선시대 후궁의 품계
품계 | 정1품 | 종1품 | 정2품 | 종2품 | 정3품 | 종3품 | 정4품 | 종4품 |
칭호 | 빈 | 귀인 | 소의 | 숙의 | 소용 | 숙용 | 소원 | 숙원 |
2) 양반 여성
양반여성은 남편의 직위에 따라 외명부 직첩을 받음. 관료부인의 산직체계인 외명부에는 당상관 부인은 ‘부인(夫人)’이라는 말이 붙고, 당하관 부인에게는 ‘유인(孺人)’으로부터 ‘숙인(淑人)’까지 ‘인’자가 뒤에 붙음.
표 2 조선시대 외명부
품계 | 1품 | 2품 | 정3품 당상관 | 정3품 당하관 | 종3품 | 4품 | 5품 | 6품 | 7품 | 8품 | 9품 |
칭호 | 정경부인 | 정부인 | 숙부인 | 숙인 | 신인 | 영인 | 공인 | 의인 | 안인 | 단인 | 유인 |
○ 양반 여성의 최대 임무 : 제사 모시기(봉제사)와 손님접대(접빈객)
* 봉제사 : 조선의 제사 범위는 본래 경국대전 에 「문무관 6품 이상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3대를 제사하고 7품 이하는
2대를 제사하며 서인은 단지 죽은 부모만을 제사한다.」고 되어 있음. 대부분의 양반 집안에서는 4대 봉사를 하는 것이 일
반적. 조선 후기에는 서민들의 경우에도 4대 봉사를 하기에 이름.
조선 중 ․ 후기 이후가 되면 윤회나 외손봉사가 줄어들고 여성들은 시집의 제사를 대부분 4대까지 담당하게 됨. 다례와
시제를 포함하면 많은 경우 10번 이상의 제사를 지내야 함.
* 접빈객 : 조선 사회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곧 집안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
양반 사회에 있어서 ‘접빈객’은 필수불가결한 공조기능. 여성들이 접빈객을 담당한 것은 단순히 집안일의 연장선에 그치
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사회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바탕이 됨.
* 가정 내 경제 관리 : 여성들의 가정 경제 관리는 크게 토지 관리와 노비 관리.
집안 내에서 남자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남자가 가정경제를 관리하는 경우도 없지 않음. 곳간 열쇠를 여성이
가짐.
3) 양인 여성과 노비 여성의 일
○ 농업 분야의 여성 노동 : 실학자 유수원은 우서 에서 「농가의 부녀는 농사일 하고 식사를 마련하느라 겨를이 없을 정도
로 바쁜데, 또 스스로 옷까지 짜서 입어야 하니 그 옷 짜는 것이 막히고 잘 나가지 못한다.」고 함.
조선시대 여성들이 농사나 가사 일을 하고 길쌈을 함.
가족노동에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인원이 대략 4~5명 선으로 본다면, 여자들의 노동력이 투입되지 않고서는 농사를
짓기 어려웠을 것. 이앙법 등 생산기술이 발달하고 농업형태가 집약농업으로 바뀌는 조선후기가 되면, 김매기의 감소 등
으로 남성노동중심이 되며 여성노동의 몫은 줄어들게 됨.
밭농사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참여율이 더 높았고, 노동력 투입에서도 일시에 많은 노동력이 요구됨. 조선 초기 인정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일반농민의 경우 당연히 남녀의 구분 없이 동시에 보리 수확에 참여했을 것.
「농사직설」 에는 게 젓 담구기, 식품저장, 장담구기 등 식생활의 가사일로서 여성들이 담당했던 일들도 수록되어 있음.
○ 직조(길쌈) 분야의 여성 노동 : 길쌈 즉 직조는 전근대 사회생활에서 농업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생산 활동.
조선시대에는 왕이 친농을 하는데 대하여 왕비가 친잠을 행함. 포는 화폐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중요한 것.
「남자는 밭 갈고 여자가 길쌈하는 것은 천하의 대업이다. 밭 갈지 않고 어찌 먹으며 양잠하지 않고 어찌 옷을 입을 수 있겠
는가」-> 견우와 직녀
당시 성역할 분담 형태를 대변해 줌. 길쌈은 신분의 차이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여성이 해야 하는 일. 대체로 한 포를 짜는데 40시간이 걸림. 가사노동을 제외하고 하루에 2-3시간 잡는다면 15일 정도 걸림. 목화는 재배부터 수확까지 대체로 여성
노동의 비중이 큰 농사일. 누에치기에서부터 양잠까지도 여성의 일.
조선시대 사람들은 의와 식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이라는 공통된 인식. ‘권농상(勸農桑)’을 수령 7사의 최우선적인 항목으로 하는가 하면, 국가에서 양잠을 장려하면서 일반적 권장책 외에 보다 구체적인 양잠활성화 방안을
강구하기도 함.
견․면 이외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직물은 麻, 즉 베로 화폐로 유통되어 쌀과 함께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생활용품. 견직물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생산이 적극 권장된 직물로서, 후비의 친잠례가 대표적인 여성 직조노동의 실례.
노비들은 신공으로 면주(綿紬)를 납부하거나 아니면 잠실의 잠모로서 역할을 수행하든 양잠에 관여함.
일반인들은 3월부터 실질적으로 양잠을 수행함. 누에의 종을 선택하는 것, 개미누에를 섬세하게 보살피는 일, 뽕잎 채취, 손질, 먹이주기, 실켜기 등이 모두 여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양잠은 스스로 갖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가사나 육아, 농사를 하는 틈에 수행해야 했으며, 양잠이 시기를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양잠의 어려움이 있었다. 양잠은 면이나 베와 달리 방적까지가 여성의 몫이며 방직으로 이어지지는 않음. 일반민 여성들의 직조노동 즉 길쌈은 면이나 베를 짜는 일이 대부분이며, 견 즉 비단직조는 일반 여성의 길쌈에 포함되지 않음. 견직에서 여성노동은 양잠에 한정되며 견직직조는 중앙의 견공장에서 이루어짐. 양잠에 의해 생산된 실을 견사(繭絲)라고 하는데, 일반민들의 양잠활동은 이 견사를 생산
하여 진상하는 데에 그침. 그런데 뽕잎 채취와 같은 단순노동에는 남자들도 참여하였지만 미미한 정도. 견사를 생산하는 일도 섬세함이나 근면성 외에 힘든 노동을 수반하였으므로 여자들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면직에서도 예외는 아님. 다른 농작물에 비해 유난히 김매기의 기간이 길고 횟수가 많았고, 목화 따는 일이나 실잣기 등
의 일이 낙후성으로 인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함. 당시 부녀자들은 농업노동과 가사노동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직물생산노동을 행하였으므로 생산하는 직물의 양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었으며, 주로 저녁식사 이후의 시간을 이용.
또한 세금을 내기 위해 급하게 길쌈을 함. 남자들의 군포는 2필, 노비에게 책정된 신공은 1필. 국가는 이들 포에 등급을
매기고 화폐로 유통시킴. 조선 시대 유통되던 세금과 화폐의 대부분을 여자들이 생산해냈던 것. 여성 직조노동의 국가적인
기여도는 매우 큼.
4)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의 등장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업은 물론 상업과 공업에서도 발전이 이루어짐.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거
나 경제력을 향상시켜 나감. 양인 여성들은 시전에서 직접 점포를 운영하기도 함. 여성이 운영한 점포를 ‘여인전’이라고 함.
18세기 말 정조의 문집인 홍제전서 에 의하면 120여개의 시전 가운데 여인전은 18개가 있었다고 함.
여인전 : 상우전, 하우전, 전우전, 송현우전, 정릉우전, 문외우전(우전은 과일 파는 가게) 족두리, 백당전(엿, 사탕) 채소전, 내분전(종로 거리에 있었음) 외분전(서소문 밖에)
-분전은 연지와 분. 침자전(반질 도구) 문내좌반전(간한 생선이나 젓같은 반찬류) 떡
거상 김만덕의 경우 : 10세 때 고아, 처음에는 기생집 의탁, 20세 넘자 양인 여성임을 관에 호소. 기생에서 벗어남. 이후
독신으로 지내면서 장사에 남다른 재주가 있음. 십수년에 만에 재산을 꽤 모음. 1792년(정조 16)부터 1795년(정조19) 사이
에 제주에는 흉년이 들어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못함. 만덕은 재산을 빈민 구조를 위해 희사함. 정조는 특별히 만덕을 내의원 의녀로 임명하여 서울로 오게 함. 만덕의 나이 57세 때. 왕비에게 인사, 금강산 유람하고 옴.
양반 여성들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경제활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함.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 여성들은 주로 삯바
느질을 하여 생계를 꾸려감. - 허생의 처
통천의 김씨의 경우 여자로서 큰 재산을 모으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가짐.
빙허각 이씨는 차밭을 경영하여 가계를 꾸려나감.
-> 여성들은 장사나 상업적 밭농사의 경영 또는 사채 행위 등 다양한 이익활동을 하여 돈을 범.
1696년(숙종 22) 양반 여성이 동전을 주조하여 나라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발생함.
작성자: 한희숙(숙명여자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