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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육자료

[옮긴글] 조선시대 양반문화 - 교육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4.09.30|조회수170 목록 댓글 0

조선시대의 교육은 양반의 전유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당시의 교육이라면 유교 교육을 뜻한다.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는 유교경전과 문명스러운 삶을 구가하는 시문(詩文), 선험적인 선례인 역사가 유교 교육의 3대 요소였다.

 

조선시대는 도덕사회였으므로 성인(聖人)의 가르침인 유교경전이 중시되었다. 도덕적 수양이 되지 않은 사람은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것은 문치주의(文治主義)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문은 양반들의 교양이요 상식이었으며, 문명스러운 삶을 사는 도구이기도 하였다. 시문은 언문(諺文)으로 짓는 수도 있지만 한문으로 짓는 한시(漢詩)가 일반적이었다. 한문이 어렵기 때문에 시문은 양반귀족들의 독점물이었다. 한편 문치주의 유교국가에서는 정통이 중요하고 선례가 중요하였다. 무력으로 귀결 짓는 무치주의 국가와는 달리 문치주의 국가에서는 선왕의 준례를 따라야 하였다. 그래서 모든 통치행위를 기록으로 남기고, 이 기록의 축적인 역사를 거울삼아 현실정치를 타개해 나갔다.

 

양반자제들은 다섯 살이 되면 이미 한문의 초학교과서(初學敎科書){천자문}(千字文), {유합}(類合), {동몽선습}(童蒙先習), {사략}(史略), {소학}(小學) 등을 익혔다. 초학교육은 가족이나 친족들을 모은 가숙(家塾)에서 이루어졌다. 여름철에는 시원한 절간 같은 데서 하과(夏課)라 하여 시문을 학습하였다.

 

여덟 살이 되면 원칙적으로 향교(鄕校)4(四學), 서당(書堂)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향교와 4학은 관립학교요, 서당이나 서재(書齋)는 사립학교였다. 그러나 양반자제들은 관립학교에 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양반들의 특권적인 교육기관인 사립학교에 가서 훌륭한 선생의 교육을 받기를 원하였다. 국가도 모든 비용을 지원해야 하는 향교교육 대신 개별적으로 경비를 조달하는 사립학교에 교육을 의존하고자 하였다. 농업국가로서의 여건이 좋지 않았던 조선으로서는 늘 국고가 넉넉지 못하기 때문에 국립학교는 부실하였다. 훌륭한 선생을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설도 열악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의 전통이 강하였다. 공립학교에는 양반 아닌 일반 평민이 정규학생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향교의 생도인 교생(校生)은 대부분 비양반자제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고, 천거(薦擧)를 통해 역학생(譯學生), 의생(醫生), 율생(律生) 등 중인(中人)직이나 미관말직이나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생이 되는 것을 선호하였다. 양반자제들도 실제로 출석은 하지 않았지만 양반생도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 등록은 하였다. 과거시험을 치려면 학적(學籍)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관학 가운데 중앙관료의 자제들이 들어가는 4학은 좀 나았다.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본래 생원진사시를 준비하게 되어 있었다. 성적이 좋은 일부 학생들은 승보시(陞補試)를 거쳐 성균관(成均館) 기재(寄齋)에 들어가 생원진사시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생원과 진사가 된 사람은 성균관에 들어가 출석성적[圓點] 300을 딸 때까지 문과시험 공부를 하였다. 입학과 졸업은 없으며, 300일을 출석하면 문과초시(文科初試)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양반들의 요구에 따라 3년마다 보이는 식년시(式年試) 이외에 특별시험인 별시(別試)가 늘어나자 출석성적도 감해주거나 면제해 주는 경향이 생겼다. 그럼에도 성균관의 시설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양반들은 직접 다니지 않고 종들로 하여금 대리출석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성균관도 시골 학생들로 채워지거나 과거시험이 있기 직전에만 몰리는 경향이 있었다.

 

행정실무나 기술교육은 담당기관에서 실시하였다. 이들은 잡과에 응시하였다. 무과는 문과보다 쉬워 양반자제들이 몰렸을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도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만 명 이상 뽑는 무과의 만과(萬科) 같은 경우에는 합격을 해도 꼭 벼슬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권위가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문과무과잡과에 합격하면 벼슬길이 열리는 것은 틀림없었다. 물론 이 가운데 문과는 귀하고 무과와 잡과는 천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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