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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4.10.10|조회수223 목록 댓글 0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이론(闢異論)에 바탕한 새로운 유교적 정치윤리사상.

 

송대 이후 여진족의 침공으로 한민족(漢民族)과 중화문화가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주자(朱子)는 한민족의 독립과 문화적 자존성을 확립하기 위해 유교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로 이민족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여, 민족적 화이의식(華夷意識)을 근간으로 한 위정척사사상을 체계화하였다.

 

위정척사사상의 바탕이 된 성리학은 한대 이래의 훈고학적 유교를 이기설(理氣說), 즉 의리(義理)와 심성(心性)을 중심으로 철학화한 형이상학적인 유교이다.

원래 위정척사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사(正邪)의 의식은 역사적 상황과 여건에 따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정통문화가 이질문화의 도전을 받았을 때 발생하는 의식이다.

 

주자의 위정척사사상도 근저에는 성리학의 이기설이 있으나, 형이하학적으로는 여진의 무력도발로 위기에 봉착한 중화적 정통문화인 유교를 수호하기 위하여 정립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건국과 동시에 신유교 성리학을 국가지도이념으로 받아들여 정통사상으로 정립해 갔다.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 뛰어난 주자학자가 배출되면서 성리학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은 점차 형식화, 전통화하면서 그 본질을 상실해 갔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실학(實學)이 대두하였는데, 실학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테두리내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마찰이 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세동점의 여파로 천주교라는 이질적인 서학(西學)이 들어오자, 유교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위정척사사상은 싹트기 시작하였다. 천주교가 전통사회를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정학인 유교를 강화 선양하고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정척사사상이 대두한 시기는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정조 초기로 추정된다.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적 화이의식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보수성과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성리학자인 유림들의 존명배청의식(尊明排淸意識), 이질적 문화를 무조건 비문화(非文化)로 말살하려는 태도는 주자학적인 배타성을 반영한 것이다.

천주교는 충효를 최고의 도덕으로 평가하는 전통적인 예교질서를 부정, 파괴하는 교리이기 때문에 성리학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단사설로 배척되었다. 나아가 이단사설인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는 사람이 아닌 금수로 규정되어 이른바 인수대별적(人獸大別的) 화이의식이 발생하였다.

 

주자학적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고 있는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도 천주교는 국가의 전통질서를 파괴하는 반국가적·반사회적인 위험사상이었다.

 

위정척사사상에는 중화적 벽이론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의 한계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한계성은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자각된 민족주체성의 확립에 의해 극복, 지양되어갔다.

 

위정척사사상은 그 바탕에는 주자학적 화이의식이 작용하고 있으나, 한말에는 보수적 화이사상을 애국우국의식으로 발현시켜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되어갔던 것이다.

 

한말에 있어서 위정척사사상을 애국우국의식의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시킨 사상가는 이항로(李恒老)와 기정진(奇正鎭)이다.

 

기정진은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인수대별적 의식을 이론화하여 서양인을 금수로 규정하고 배양의식을 현실적 역사의식으로 구체화하였다. , 그는 천주교를 물리치기 위하여는 우선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내수외양론(內修外壤論)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그는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을 펴서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하여 개국을 적극 반대하였다.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은 서양의 침략성을 간파한 역사적 통찰력이 있었고 이를 통해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지도이념인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의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은 기정진의 민족자존적인 위정척사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한 사람은 기우만(奇宇萬)과 송병선(宋秉璿)이다. 기우만은 1895(고종 32)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제의 만행과 위정자들의 친일개화를 응징, 배격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결사항쟁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송병선은 벽사론을 지어 양학(洋學)의 배격과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조약의 폐기와 조약체결에 참여한 역신들의 참형을 극력으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순국하였다.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양대 지주의 한 사람은 이항로이다. 그는 성리학을 주리철학으로 대성시킨 한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그의 심전주리설적 주리철학(心專主理說的主理哲學)은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이기는 하나, 근저에는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를 민족적으로 승화시킨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하는 애국우국정신이 있었다.

 

그는 병인양요 때 올린 상소에서 주전척화론(主戰斥和論)을 전개하고 천주교를 이단사설로 규정하였다. , 그는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하여 서양제품의 사용금지론과 불매불용론(不買不用論)을 제시하기도하였다.

 

그의 애국우국정신, 위민정치관, 문화적 자존의식, 경제적 배타성은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에서 위정척사사상의 전개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항로의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실천화, 행동화하여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주류가 되었는데,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 등이 대표적이다.

 

1880년에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청국인 황준헌(黃遵憲)조선책략으로 말미암아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이 발생하였다.

 

이 책자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의 대비책으로 조선국은 친청(親淸결일(結日연미(聯美)의 외교정책을 수립할 것과 서양의 제도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책을 쓸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림들은 이 책을 개국과 양화를 종용한 사설로 규정하고, 책을 국내에 반입, 보급한 김홍집을 처형하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남유생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만인소(萬人疏)가 그것이다.

 

이 상소에 대해 김평묵은 성현의 가르침을 지키고 왜양(倭洋)의 금수와 같은 풍습 등을 배격한 만고에 없는 상소라고 격려, 고무하는 글을 소청에 보냈다.

 

, 그는 강원도 유생 홍재학(洪在鶴) 등의 척왜소(斥倭疏)를 대필하여 일본과의 개화를 반대하면서 이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국왕을 비난하였다. 그 결과 상소의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 하여 홍재학은 참형되고 대필자 김평묵은 유배되었다.

 

그의 사상이 인수대별적 화이의식에 근거하고 있으나 단순히 배타적이고 보수적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민족자존과 민족문화의 자존을 위한 자각된 자주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어양론(禦洋論)은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실천이념의 중요한 갈래를 형성하였다.

 

유중교도 신사척사론이 비등했을 때 이에 동조하여 정통사상과 예교질서를 수호할 것과 화이적 춘추대의로 척양척왜할 것을 역설하여, 스승 이항로의 애국우국적인 위정척사사상을 실천하였다. 열렬한 항일의병장이었던 유인석(柳麟錫)이 그의 제자였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김평묵과 더불어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2대 실천자의 한 사람인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의 사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전자는 주로 국내정치적 차원에서 관인지배체제에 나타난 정치적·경제적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한 왕도정치의 이론으로 작용하였다. 후자는 주로 대외적 위기상황에서 외침을 물리치기 위한 왜양배척의 실천 명분론으로 전개되었다.

 

, 전자의 경우는 대원군 집정에 대한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한 상소로 표현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밀어닥친 왜세에 대한 척왜척화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상소들로 표현되었다.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바로 후자인 척왜척화적인 상소들에 의하여 구현되었다.

 

그의 사상은 이미 강화도조약 때 올린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에 나타나 있으나, 단발령을 계기로 정통문화를 스스로 지키겠다는 자수사상(自守思想)과 민족주체의식이 더욱 더 강해졌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의 사상은 항일의병 무력투쟁으로 행동화되었다.

 

이 조약을 민족의 자존권을 박탈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조약의 무효를 만천하에 공포할 것을 강력히 주창한 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구국제민의 실천철학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심화는 극변하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관념적인 상소운동이 아니라, 민중 속에서 위정척사를 행동화하면서 실천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역사적 상황변동에 따라 위정의 가치내용과 척사의 배척대상의 새로운 수정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70세의 고령으로도 항일의병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는,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 및 유소(遺疏) 등의 글을 통하며 애국충정을 피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한말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적 유교사상, 즉 성리학의 화이적 춘추대의와 존왕양이의 명분론을 사상적 근간으로 하고, 이항로의 애국우국정신과 기정진의 내수외양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사상은 그들의 제자 김평묵의 척화적 어양론과 최익현의 실천적 척화론에 의하여 항일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정착함으로써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한국적 위정척사사상의 특질이 있다.

 

위정척사사상을 한말에 있어서의 배타적·보수적인 사상, 근대화를 저해한 사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한말의 위정척사사상은 단순히 배타사상·보수사상으로만 볼 수 없으며 보다 긍정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사상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_한국학중앙연구원

 

 

 

1860년대 이후 이항로, 기정진 등 보수적인 유학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반침략반외세의 정치사상으로, 성리학적 세계관과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려 하였다.

 

1. 위정척사사상의 형성

조선 후기 성리학을 기반으로 서학(西學)의 전래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타난 사상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정도(正道)정학(正學)을 지키고 이단(異端)과 사학(邪學)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1860년대에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으며, 김평묵(金平黙)유중교(柳重敎)이진상(李震相)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 등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여기고 그 밖의 학문이나 사상을 사학과 이단으로 배척하는 위정척사의 논리는 성리학이 처음 성립했던 시기부터 나타났다. 중국 송() 나라 때에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 속에서 신유학(新儒學)으로 나타난 성리학은 요()와 순()에서 시작하여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정자(程子)주자(朱子)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의 정통성을 강조했으며, 그렇게 전해진 성리학만이 올바른 사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이러한 논리에 따라 불교와 도교, 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며, 위정척사는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논리로 쓰였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의 전래로 전통적인 가치 질서의 혼란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척사(斥邪)의 논리가 특히 강조되었는데, 1839년에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이 한글로 옮겨져 전국에 배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정척사사상이 반침략반외세의 정치사상으로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860년대이다. 1839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하고, 186010월에는 베이징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함락되면서 조선에서도 서양의 무력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또한 이양선(異樣船)이 수시로 출몰하고 통상 압력이 계속되면서 서양의 위협은 사상과 문화의 차원을 넘어 직접 국권을 위협하는 경제군사의 문제로 나타났다. 특히 1866년과 1871년 프랑스와 미국의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으며 외세의 위협은 현실화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항로기정진 등을 중심으로 외세를 척사의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국권의 보위와 안정을 꾀했던 위정척사사상이 형성되었다.

 

위정척사사상은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들의 실천은 개인적 상소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영남과 관동기호(畿湖)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국적인 집단 상소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1890년대 이후에는 충의(忠義)와 근왕(勤王)을 내세운 의병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2. 위정척사사상의 전개과정과 논리

위정척사사상의 전개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각 단계마다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논리가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며 외세의 군사적 위협이 본격화했던 시기로, 위정척사사상은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펼치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쇄국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위정척사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이항로와 기정진 등인데, 이들은 서양의 경제적 침략이 가져올 폐해에도 주목하면서 통상반대론(通商反對論)을 주장했다.

 

이항로는 전통적인 화이론(華夷論)과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근거해 주전(主戰)과 주화(主和)가 인류와 금수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며 단호하게 척화론(斥和論)을 펼쳤다. 그리고 통상(通商)을 반대하였으며, 서양의 물건이 기기음교(奇技淫巧)하여 민생에도 유익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국왕과 백성 모두가 서양의 재화를 쓰지 말아야 양화(洋禍)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양화배척론(洋貨排斥論)을 주장하였다. 이항로의 사상을 계승한 김평묵최익현유중교, 유인석 등도 모두 위정척사운동을 이끌었는데, 이들을 이항로의 호를 따서 화서학파(華西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정진은 유리론(唯理論)의 관점에서 위정척사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모색하였을 뿐 아니라, 두 차례에 걸친 병인소(丙寅疏)를 통해 당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조선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서양 재물의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바르게 고쳐 천하의 인심을 모으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내수외이론(內修外夷論)’을 펼쳤다. 기정진의 학문을 계승한 정재규(鄭載圭)기우만(奇宇萬) 등도 위정척사운동을 이끌었는데, 이들은 기정진의 호를 따서 노사학파(蘆沙學派)라고 부른다.

 

위정척사운동의 두 번째 단계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을 전후로 한 시기이다. 187411월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 척족(戚族)인 민씨 세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물려받은 고종(高宗)은 일본이 18759월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일으키며 통상조약의 체결을 압박해오자 이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이를 계기로 위정척사사상이 새롭게 고조되었는데, 이 시기의 위정척사사상은 첫 번째 단계와는 다르게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성격을 나타냈다. 그리고 외세의 침략이 일본의 통상조약 강요라는 형태로 나타남에 따라 개항반대론(開港反對論)과 함께 일본과 서양이 한 통속이라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김평묵, 최익현 등이다.

 

김평묵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홍재구(洪在龜)유인석을 비롯한 46명과 연명 상소를 하여 개항반대운동을 이끌었다. 최익현은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통해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요약해 제시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의 세 번째 단계는 1880년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황쭌센[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져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일본 주재 청 나라 참사관이던 황쭌센은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의 외교 정책을 펼쳐야 하며, 각 나라와 통상을 확대할 뿐 아니라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파견하고 서양인 교사를 초빙해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교와 천주교는 근원은 같지만 당파가 다르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므로 포교를 허용해도 조선에 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고종은 <조선책략>을 정부 관리뿐 아니라 유생들도 읽도록 하였는데, 18813월 경상도의 유생들은 이황(李滉)의 후손인 이만손(李晩孫)을 소두(疏頭)로 하여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려 <조선책략>의 내용을 격렬히 비판하였다. 이 상소에는 영남 지방에서 1만여명의 유생이 참여하였는데, 그 뒤를 이어 관동경기호서호남의 유생들도 집단상소를 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사상은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개화반대론의 성격을 띠고 나타났으며, 유생들의 참여가 당파를 넘어서 집단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자기의 도()를 기반으로 하되 서양의 기기(器機)를 수용하자는 오도이기론(吾道異器論)이 제시되어 사상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였다.

 

1890년대 이후 위정척사사상은 반침략반외세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하며 의병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이듬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을미개혁을 추진하자 이소응(李昭應), 유인석 등은 의병운동을 벌였다. 을미의병은 국수보복(國讐報復)이라는 반침략의 목표를 내세웠지만 반개화(反開化)의 보수성도 지니고 있었고, 유생 지도부의 사상적 한계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나타난 을사의병에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여 유생 의병장의 의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 시기에 활약한 유생 의병장으로는 최익현, 민종식(閔宗植) 등이 있다.

 

3. 위정척사사상의 특징과 의의

이처럼 위정척사사상은 서양의 이질 문화를 배격하고 성리학의 전통문화를 수호하려는 의식에서 출발하였지만, 외세의 침략을 배격하고 조선의 국권을 수호하려는 정치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19세기말의 상황에서 척사(斥邪)척양(斥洋)척왜(斥倭)의 논리로서 열강의 침략에 반대하는 반침략반외세의 정치운동을 뒷받침하였다.

 

하지만 위정척사사상은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명분에 기초함으로써 근대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위정척사 사상가들은 성리학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지배체제를 정도(正道)로 보았고, 서양의 이념과 문화를 인륜에 어긋나는 사도(師道)로 간주했다. 그리고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중국 유교 문화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문화적 자부심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

 

이항로는 화()와 이(), ()과 패(), 정학(正學)과 이단(異端)의 구분이 가장 중요한 3가지 분별이며, 사회도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그리고 천하의 근원은 중화이며, 이적은 그를 받들고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다만 이적도 의()와 예()로 다스리면 변화할 수 있는데, 조선은 법제풍속학문 등이 중국과 닮았고 학자들이 의리를 밝히는 성리학을 꾸준히 공부하여 중국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으므로 이적 가운데 중화에 가장 가까운 소중화(小中華)라고 하였다. 게다가 중화가 오랑캐인 만주족에게 점령되어 소중화인 조선만이 전통적인 중화의 문명을 지키고 있다고 보았다. 이항로는 이러한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정통성에 기초해서 서양을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간의 인륜과 도덕 등에 대한 이해가 없이 재화와 여색만을 탐하는 오랑캐로 여겼다. 따라서 서양의 위협은 국권의 위기이기 전에 소중화인 조선이 계승하여 지켜온 전통적인 유교 문명의 위기로 인식되었다.

 

유인석도 조선은 훌륭한 임금들이 대를 이어 잘 다스려서 사람들이 올바른 도를 따르게 되었다. () 나라가 망하여 중국의 문물이 없어진 뒤부터는 주() 나라의 예절과 법도가 노() 나라의 공자(孔子)에 의해 전해진 것처럼 4천년 복희(伏羲), 신농(神農)의 정치와 2천년 유학의 도가 조선에만 깃들여 있다.”고 하여 위정척사사상이 존화양이의 명분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위정척사사상은 병자호란 이후 서인(西人) 노론(老論) 정권이 명운을 걸고 유지해왔던 존화양이 의 명분과 소중화론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위정척사사상은 외세의 침략을 배격했지만,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소중화로서의 조선이었으므로 체제 내부에서 나타난 개혁 요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다. 결국 위정척사사상은 반외세반침략의 성격 때문에 대중적 기반을 지니고 의병운동으로 발전했지만, 봉건적 지배체제의 유지와 강화를 목표로 하였으므로 근대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발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위정척사사상은 전통체제의 강화를 통해 양반 지배층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보수적인 정치사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위정척사사상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리()를 중시하는 주리론(主理論)의 경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대체로 리()와 기()의 상호 관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근거해 리()의 주재성을 강조하느냐, 아니면 이이(李珥)의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에 근거해 기()의 상대적 독립성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영남학파(嶺南學派)는 이황의 주리론을 계승하였고,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이이의 주기론을 계승하였다. 하지만 위정척사사상을 주도한 이항로나 기정진은 기호학파의 학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리()를 중시하는 주리론의 경향을 나타냈다.

 

이항로는 모든 사물이 리()와 기()의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들로 보았다. 그러나 리()와 기()는 주객(主客), 존비(尊卑)의 차이가 있으므로 구별해서 논해야 하며, ()는 언제나 리()의 명령에 따른다며 리() 중심의 철학을 전개했다. 이러한 사상은 김평묵, 유중교 등에게 계승되었다.

기정진은 리()의 우위를 논하는 주리론에서 더 나아가 세계를 하나의 근본원리인 리()로 설명하는 유리론(唯理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기()는 리()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따로 구별해 논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기()는 단지 리()의 변용일 뿐이라는 리일원론(理一元論)을 제시하였다. 기정진의 사상은 정재규(鄭載圭), 기우만(奇宇萬) 등이 계승하였다.

한편, 영남학파의 주리론을 계승한 이진상(李震相)도 주기론을 비판하며 리일원론(理一元論)의 유리론(唯理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리()와 기()를 주객, 본말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그의 사상은 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 등에게 계승되었는데, 이들을 이진상의 호를 따서 한주학파(寒洲學派)라고도 한다.

이처럼 위정척사사상의 전개과정에서는 임헌회(任憲晦)나 전우(田愚)처럼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 등으로 이어진 주기론(主氣論)의 전통을 고수한 성리학자도 있었지만, 상소운동과 의병운동에 앞장서서 참여한 화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한주학파(寒洲學派) 등은 모두 이전의 전통과는 무관하게 리()를 중시하는 사상적 경향을 나타냈다.

 

이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더욱 굳건히 세워 현실에 대응하려고 했던 위정척사사상의 본질에서 비롯되었다. 곧 성리학적인 사회 질서가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올바른 이치임을 강조하고, 지켜야 할 정도(正道)와 물리쳐야 할 사도(邪道)를 분명하게 구별하려는 필요에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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