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
사적 465호
1946년 1월 경교장에 모여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모습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29(평동)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이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했고, 정치활동이 본격화되자 '서대문 경교장'이라 불렀다.
임시정부가 45년 12월 3일 첫 국무위원회(국무회의)를 연 이래 백범이 안두희의 흉탄에 숨진 49년 6월 26일까지 경교장은 격동기 해방정국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통일정부 수립 운동의 중심지였다.
48년 4월 백범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며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결심했다. 4월19일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고 외친 뒤 이북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48년 8·9월 남북에서 단독정부가 들어섰고, 백범은 49년 6월26일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백범이 숨지고 1층 귀빈식당에 빈소가 차려졌을 때는 경교장에서 서대문까지 통곡하는 이들이 줄을 섰다. 국민장을 거행할 때, 당시 최대의 애도인파가 거족적으로 몰린 명소가 되었다.
백범서거 당일 경교장 마당에 통곡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라이프지 기자가 안두희의 총탄흔적이 있는 창에서 찍은 사진
사라질뻔한 경교장
백범 서거 뒤 임정 인사나 가족들은 경교장을 떠나야 했다. 이후 경교장은 주인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중화민국 대사관저, 한국전쟁 때 미군 특수부대 사무실 등으로 쓰이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당시 고려병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1층 중앙홀과 응접실은 의약품을 받는 곳, 선전부는 병원 사무실, 2층 백범의 방은 의사 휴게실, 이시영 선생 집무실은 화장실로 쓰였다.
1996년 삼성에서 경교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17층짜리 신축 병원 건물을 지으려 했다. 이에 1980년대 말부터 백범 암살 진상규명 활동을 펴온 김인수씨(58)가 경교장 복원운동을 펼쳐 정부ㆍ서울시ㆍ삼성을 상대로 줄기차게 '경교장 지킴이 활동'을 벌였다. 달걀로 바위치기식 경교장 복원운동 앞에 '경교장은 단지 사유재산에 불과하다'던 삼성의 완강한 태도는 수세에 몰렸다. 그의 끈질긴 투쟁 속에 경교장은 결국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등록되고, 2005년에는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465호로 지정됐다. 우여곡절끝에 3년여에 걸친 원형 복원을 마치고 백범 서거 64년 만인 2013년 3월 2일 시민에게 개방됐다.
단아한 건축물
지하1층, 지상2층 규모의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고 1층의 출창(出窓)과 2층에 5개의 들임 아치창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이 일품이다. 시인 이상이 졸업한 경성고공 출신으로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김세연(金世演, 1897~1975)이 설계하여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어려웠던 복원과정
당시 보일러실과 부엌 등이 있던 지하공간은 전시공간으로 바뀌었다. 백범이 암살당할 때 입고 있던 ‘피 묻은 저고리’(혈의) 복제품은 목과 가슴 부위 혈흔이 선명해 당시의 격렬했던 정치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남자 속옷 바지에 빼곡히 쓰인 밀서엔 1948년 2월 당시 삼팔선 북쪽에 갔던 민족진영 조직원들이 백범과 이승만에게 보낸 북한 동향 보고가 담겼다.
2층엔 백범이 주요 인사들과 면담하고 국무위원회를 주관했던 집무실이 있다. 창문엔 백범 서거 당시 창을 관통했던 총탄의 자국을 재현해놓았다.
진입로와 정원, 연못 등이 있던 경교장 주변엔 병원 건물들이 들어차 있고, 임정 환영대회가 열리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추진됐던 건물 앞 정원은 주차장이 돼 있다. 주변 건물 탓에, 복원된 경교장은 마치 이곳만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숱한 역사적 영욕을 겪어온 경교장의 복원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2층 임정 요인의 숙소였던 일본식 다다미방의 격자 천장(우물머리) 복원은 졸속 고증으로 재공사를 거쳤다. 1938년 건립 당시 건물 세부를 기록한 일본 건축잡지 <조선과 건축>을 보면, 천장이 동판(棟板·오동나무판)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복원 설계업체가 한자의 뜻을 새기지 않고 구리판인 동판으로 번역하는 바람에 천장을 번쩍거리는 동판으로 채웠다가, 뒤늦게 건축사 전문가 자문회의에서 지적돼 허겁지겁 오동나무판으로 갈아 끼웠다.
2층 다다미방의 창살문을 우리 전통 창호문으로 복원했다가 역시 전문가들의 지적으로 일본풍으로 고쳤다. 당시 휴식처 구실을 했던 1층 선룸(천장 일부를 유리로 만들어 햇빛이 들게 만든 방)은 천장이 막힌 상태로 복원공사가 마감됐다. 병원이 주요 배관을 선룸 위로 설치한 탓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 배관을 옮기면 병원 시설이 마비될 정도로 중요하다고 해 원형대로 복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복원을 마친 경교장은 매주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되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백범기념관 출입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 있다.
'눈 덮인 들길 걸어갈 제 행여 그 걸음 아무렇게나 하지 말세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자료출처 : 한겨레신문, 시사IN 사진 : 우바시)
백범 선생님의 저 글을 새기며 오늘 하루도 정신차리고 살아야겠다.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