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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민속(3) - 두레, 뒷간여행기, 마실다니기, 마을축제, 말(馬),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12.01|조회수119 목록 댓글 0

농사일에 서로 협력하는 공동작업 '두레'

모심기와 논매기는 어린 모를 일일이 손으로 심어야 하고, 작은 호미로 넓은 논을 빈틈없이 매어야 하는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농사일이다. 음력 5,6월에 비가 내려서 논에 물이 있을때 모심기와 논매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기가 극히 제한된다.

짧은 시기에 많은 양의 농사일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한 집에서 개별적으로 작업하기는 벅차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두레'를 조직하여 서로 협력하면서 온동네가 함께  힘든 일을 짧은 시간에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했다.

두레는 중남부지역 논농사지대에서 한 마을의 농군들이 협력하여 농사를 짓거나,부녀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두레길쌈을 하는 공동노동조직이다. 두레를 조직하여 하는 공동 농사일은 남정네들의 모내기, 물대기, 김매기, 벼베기, 타작 등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추수할때까지 전과정에 걸친 일이다. 또 오늘날처럼 시장에서 옷을 쉽게 살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예전엔 어머니들이 직접 가정에서 삼을 심고 삼고 베를 짜서 온가족의 옷을 지어 입혔다. 이러한 길쌈은 많은 잔손질과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그래서 7월에서 8월에 걸쳐 마을의 부녀자들이 일정한 장소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두레길쌈'을 했다.

두레는 일만하는 것이 아니다. 두레일을 하면서, 혹은 두레일이 끝나면 함께 모여서 농악을 치며 한바탕 논다. 두레일을 하러 갈때에 농기를 앞세우고 장구 꽹과리 북을 풍물잡이들이 치며 들로 간다. 김맬때는 장구잡이가 혼자서 모심기소리, 논매기소리를 하면서 풍물을 잡는다.그리고 대체로 김매기를 마친뒤 두레일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먹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가지 춤과 소리를 부르며 일년의 노고을 잊고 풍년을 기원한다.

농사꾼들이 농사가 바쁠때 공동으로 협력하기 위하여 조직된 모임인 두레는 모두 함께 같이 일하고,같이 먹고 , 같이 노래하고 춤추는 우리조상들의 고유한 아름다운 전통이다

뒷간 여행기

일단 사람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물체, 특히 배설물을 부정시 여기는 것은 전세계 공통의 문화현상이다. 똥, 오줌 등이 그것으로 먹는 것 이상 중요한 일이 배설하는 생리현상인데, 우리는 유독 "먹음새 문화"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뒷간 여행기'를 통해 우리의 이면문화의 일면을 살펴 보고자 한다.

"오뉴월의 변소간과 처가집은 멀어야 좋다" 는 속담처럼 전통적 가옥 구조에서 뒷간은 본채와 멀리 떨어져 헛간이나 축사와 나란히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속담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뒷간 아니, 화장실은 집안으로 들어와 그것도 안방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고, 요사이 처가집을 시집 보다 더 자주 드나드는 것이 오늘의 세태다.

뒷간은 특히 부엌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재미 있게 가신 신앙과 처첩간의 갈등을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부엌과 뒷간이 떨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위생적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나, 이렇게 해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도의 문전본풀이에는 문전신이 남편이고 부엌의 조왕이 본처, 일곱 아들은 올래(집 입구)지기 주목신들이며 변소 각시는 첩이다. 뒷간 신인 변소각시의 간계로 본처인 조왕을 죽였다가 아들들에게 살해된다. 그래서 부엌의 물건을 변소에 가져가거나, 변소의 물체를 부엌으로 가져가면 조왕과 변소각시가 서로 시기하여 집안통티난다고한다.

그런데, 어디서나 변소 각시는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럽고 젊고 화장을 즐긴다는 관념이 있어 조심한다. 뒷간신은 긴 머리카락을 발에 걸고 헤아리는 버릇이 있으며, 사람이 갑자기 뒷간에 나타나면 놀라서 머리카락을 뒤집어 씌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때부터 앓다가 죽게 된다. 『삼림경제』'복거'조에 '측간에 갈 때 3-5보 떨어진 데에서 두서너번 기침소리를 내면 귀신이 자연히 피한다'라고 적고 있다. 또 '뒷간을 지을 때 좌향을 따로 잡아야'하고 새 뒷간을 짓고 나서 헌 것은 반드시 없애며 옛 뒷간의 똥도 치우는데 이때에는 물을 가득 채운 다음 "똥을 친다."라고 하지 말고 "물을 퍼내다"고 말해야 좋다'고 적혔다. 그래서 시골에서 야간 변소 출입시에는 헛기침을 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뒷간신을 쫓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네는 뒷간을 될 수 있는대로 안채나 사랑채에서 떨어진 데에 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특히 상류가옥의 안뒷간은 부엌 옆마당의 디딜방아간 벽에 붙여 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지어 바깥 뒷간을 대문 밖에 두는 일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밤 늦게 이곳에 드나들 때에는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무서움증이 뒷간신 관념을 낳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뒤를 보려고 힘을 쓰다가 쓰러지는 일도 있었을 터이므로 이러한 관념은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뒷간이 본채와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그 무서운 뒷간신이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요강이나 변기 등이 옛날부터 등장한다. 부여 군수리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변기는 그 역사를 대변해 준다. 호랑이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모양의 남성용 변기와 오늘날 좌변기 같이 위부분이 벌어진 여성용 변기는 그 생김새나 선의 흐름이 청자나 백자에 비견해 쓰임새만 다를 뿐이지 하나도 손색이 없다.

서민들의 뒷간은 냄새와 무서움으로 가득 찼고, 양반가에서는 여자들의 안변소와 남자들의 바깥변소가 있는 것이 우리의 화장실문화의 전부였다.

여기에 비해 궁중의 뒷간은 사정이 달랐다. 창덕궁 임금님의 뒷간은 별채가 아니고 집구조 안에 위치하며 내용물은 변기로 받아내게 되어있다. 밑에는 문을 달아서 바깥에서 청소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임금님의 배설물은 버리는 것이 아니고 어의(御醫)가 면밀한 검사를 한다. 변의 색깔, 냄새 등을 관찰하여 임금의 건강상태를 매일매일 체크하는 것이다.

뒷간은 깊이로는 단연 절간이 최고이다. 얼마나 깊은지 볼 일을 보고 나오면 비로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불교신자들이 많이 오고 수도하는 스님이 많기 때문에 자연히 일반 여염집 보다는 깊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뒷간이 서구형 주택과 핵가족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처음 서울에 와우나 마포아파트가 들어 섰을 때는 화장실이 집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변소였다고 한다. 아파트 문화가 들어왔지만 그래도 뒷간만은 집 밖에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뒷간이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국의 정서와는 맞지 않아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며느리가 앉았던 자리에 시아버지가 앉아야 했기에, 아파트의 모든 생활이 편했지만 화장실 이용만은 불편했다. 이제는 뒷간이 안방에 가장 가까이 자리잡고 가장 편안히 이용하는 공간이 되었다.바깥에 뒷간이 집안의 화장실로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한국적 정서와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렇다! 하나의 외래 문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기존의 가치와 절충을 하면서 정착되는 것이다. 밀려드는 서구문화가 무조건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큰 흐름에 조화를 이루면서 서서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눔과 토론의 만남 '마실다니기'

농촌에서 농부의 하루 일과는 대체로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논둑에서 점심을 먹고 일하고 약간 쉬다가 일하고 저녁먹고 마실갔다와서 잔다. 이웃집과 마을내을 볼일로 출입하거나 놀러다니는 것 등을 '마실다닌다'  '마실간다' 라고한다.

마을이란 명사기 일상생활에서 --가다, --오다, --다니다, --다녀오다 등의 동사와 결합하여 사용될 때는 볼일로 마을를 다니는 일, 또는 이웃에 놀러다닌다는 뜻이 된다. 마을 다니는 사람, 마을 온사람를 마실꾼이라고 한다. 길거리에서 마을사람들이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 보통 다음과 같다. '어디갔다오니껴 ?'하면 '마실갔다 오니더'한다. '요새 그 할배건강이 어떠띠껴 ?'하면 '마실댕길정도로 좋아졌더구만'하는 식이다. 마실을 다닌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 뿐만아니라,마을사회(생활)에 참여한다는 뜻이 된다.

노인들은 저녁을 먹고나면 마을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당나무 밑이나 마을회관으로 마실간다. 청년들은 개천이나 뚝에서 마실나와서 목욕을 하거나 환담을 나눈다. 노인들이 모이는 당나무 아래에서는 마을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걱정거리를 논의하고, 뚝에 모인 젊은이들은 내일은 누구 집에서 모심기를 하며 내알의 협조사항은 무엇인가 오해 신품종의 재배기술 농작물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마실가는 장소로 가장 두드러진 곳은 사랑방이다. 마을에서 나이차가 크면 말을 트지 못하고,맞담배를 할 수 없기때문에 자연히 같은 또래끼리 동네사랑방에 모이게 마련이다. 나이가 비슷하고 형편이 비슷한 사람들로 형성된 사랑방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하고 화기에 찬 것이었다. 시국담(時局談)도 나누고 소설책도 읽고, 농사기술을 교환하는 장소로서 기능하고, 일꾼의 사랑방은 짚신도 삼고 소쿠리도 절이고 또 여러가지 음담패설을 하면서 노래하는 장으로서 사랑방의 생리는 천차만별이다.마을사람들은 저녁식사가 끝나면 누구나 일응 발걸음이 사랑방으로 향하게 되고, 여기서 세상돌아가는 것을 알고 담소하며 즐거운 휴식의 시간을 보낸다.

마실다니기는 사회문화적교환의 통로구실을 한다.마실을 오고가는 마실다니기는 특정사항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의견이나 여론,정보 등이 전달되는 길이다.예를 들면 올해 마을제사를 지내는데 적합한 제관으로 누구를 뽑아야하고 제물은 어떠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등등을 마실다니면서 이야기된다. 현재 대중매체의 발달로 농촌에서도 전국 가처 세계 구석구석의 소식들을 안방에 앉아서 보고듣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실나가야만이 들을 수 있다. 마실다니는 것은 털레비젼이나 라다오, 신문 등으로 듣고 볼 수 없는 마을내의 소식을 전해듣는 길인 것이다. 오늘은 이양기로 누가 모내기를 하고 내일은 누구가 하느냐하는 소식,이웃집의 제사는 언지고 생일은 언제냐 하는 등의 이야기를 알 수 있다.

아이들은 골목의 놀이터에서 또래끼리 자기들 이야기를 나누고, 노인들은 당나무 밑이나 사랑방 마을회관 또는 마을가게에 마실가서 소식을나누고, 아낙네들은 우물가와 빨래터에서 얘기한다. 그래서 오늘 이웃집에서 어떤 별식을 해먹고, 어떤 손님이 오고, 그릇이 몇 개인가를 이웃사람들이 먼저 알게된다.

농촌에서는 평상시 오락이 별로 없다. 마을사람들이 마실가서 사랑방이나 마을회관 당나무 밑 또는 시원한 곳에 앉아서 담론를 나주고 가끔 장기나 화투를 치는 것이 오락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노인들은 마을회관으로 마실가서 오수(午睡)와 담론으로 휴식을 취하고 젊은이들은 같은 군정끼리 가게에 모여 술마시거나 농사이야기를 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푼다. 여름철에 저녁을 먹고나면 의례껏 마을사람들이 많이 마실가는 곳으로 가서 끼리끼리 모여서 목욕을 하거나 환담을 한다. 마실다니기는 농부의 고된 하루의 노동에서 벗어나 농촌생활에서 최소한의 활력소가 되는 여름철의 휴식과 피서의 장소이다.

마을사람들 상호간의 품앗이, 한정된 농기계로 마을전체의 작업을 하기위한 작업일정이 조정, 공동작업의 계획수립, 공동시설의 관리 등 마을일의 원할한 수행을 위해 자주 모여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농번기에는 바뻐서 공식적인 회합을 갖기 힘들기 때문에 주로 마실을 오고가는 사이에 이야기되고 논의된다.

마실가서 모이는 사람들은 같은 나이 또래들이다.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질서원리(秩序原理)의 하나가 長幼의 序이다. 그래서 요즘도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서로 나이를 묻고, 같은 나이면 생일을 묻고 그것도 같은면 生時까지 물어서 형님 아우를 따지기를 좋아한다. 나이가 같은 사람을 '동갑내기'라 하여 특히 친한사이가 되는 경우가 많다.나이가 비슷하다는 것은 마실다니기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예전 삼(麻)을 많이 하던 때와 지붕개량하기 전에는 마실가서 여자들은 삼삼기 , 물레질을 모여서하고 남자들은 가마니치기,새끼꼬기 등 간단한 실내작업을 하는 공동작업장이였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작업교육장이기도 했다. 농한기에 남자들은 주로 1년 동안 사용할 새끼를 꼬고 가마니치며 멍석을 만들었다. 이때 혼자서 작업을 하면 심심하고 작업능률이 오르지 않기때문에 같은 또래가 모이는 초당방에 마실가서 작업했다.거기서 함께 어울러 장난도 치고 마을 소문을 주고 받으며 재미있게 함께 일했다.그래서 비료가 풍부하지않던 시절에는 일부러 사랑방을 만들어 사람들을 마실오게 해서 오줌을 모아 쓰기도 했다.

마을에 큰일이 일어나면 마실다니면서 우선 마을어른들이 의논을 한다.마을에 대표적인 자치기구로는 동계나 반상회가 있지만 바쁜생활에 자주 온동민을 다 모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장이 우선 밤마실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을 한다. 이렇게해서 마을의 중대한 사안이 공식적으로 결정되기 전에 마실을 다니면서 그 문제에 대한 모든 마을사람들의 견해를 듣고 어느 정도이 합의에 도달한다.

마실다니기는 마을생활에서 부담없는 개인과 개인, 집과 집 사이에 일상절인 접촉이며 교제관계이다. 마실다니기는 마을 성원들간에 마을 내의 소식을 전해듣는 통로이며 협동생활의 바탕이 되고 협동관행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마실을 다니면서 마을내이 갈등과 불화를 해소 시켜서 마을생활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마을사람들 중에 패륜행위를 저질렸을때는 따돌림을 받는다. 즉 마을사람들이 그집에 마실을 가지고 않고 마실을 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더불어 사는 마을사회에서 마실를 다니지 못하고 따돌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마을축제

인간의 삶은 일과 놀이로 구성되다. 생산이나 창작 혹은 실제적인 이득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쓰는 것은 일이라 하며, 여가나 휴식, 예술감상이나 종교적 기원, 혹은 오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쓰는 것은 놀이라고 한다. 인간을 호모루덴스(homo ludens)라고 한다. 이것은 "놀이하는 인간"이란 말로,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유일하게 생업활동 이외에 놀이와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마을축제는 생활을 함께하는 마을사람들끼리, 혹은 생산과 노동의 농사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제사이자 잔치이며 놀이다. 마을축제는 정초나 단오 백중 등 명절에 많이 행한다. 경사나 제사를 위해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를 큰굿, 큰잔치,대동놀이라고 한다. 몇사람이나 가족들의 놀이가 아니라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축제야말로 마을사회에서 살아있는 뜻있는 놀이요 창조적인 의식이요 민중들의 즐거운 몸짓이다.

마을축제 또는 마을굿은 여러가지 형태가 있는데, 무당이나 마을농악대 혹은 마을사람들이 뽑은 제관 등이 중심이 되어 거행한다. 마을축제는 제사의식-지신밟기-놀이-뒷풀이의 순으로 진행된다.

먼저 서낭신이나 산신 당산할아버지 등 마을을 지켜주는 마을수호신께 정성껏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을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빈다. 그 다음은 제사를 통해 신의 강림을 받은 마을사람들은 농악을 울리면서 공동우물이나 동사 집집을 돌면서 지신을 밟는다. 성주신(마루), 삼신(안방), 조왕신(부엌) 등에서 집안의 평안과 무병을 기원한다. 지신밟기가 끝나면 가종 민속놀이가 펼쳐진다. 농악대가 중심이 되는 판놀이도 하고 마을사람들이 대거 참여하는 줄당기기도 한다. 놀이가 끝나면 마을사람 모두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즐기는 뒷풀이를 한다. 뒷풀이를 통하여 쌓인 한이나 응어리진 감정 상호간의 불화와 반목은 해소되고 협동의 의식이 신장된다.

이러한 마을축제가 끝나면 그 마을은 정화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이 전개된다. 부정과 불합리한 묵은 삶은 사라지고 신성하고 밝은 생활이 열리게 된다. 농사는 풍년이 들고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마을사람들은 화목하게 된다.

韓國文化에 나타난 말(馬)의 象徵的 意味

말은 12支의 일곱번째 동물로서 時刻으로는 오전 11시에서 오후1시, 계절적으로는 5월 절기, 方向으로는 남쪽에 해당되는 時間神이자 防衛神이다. 즉 우리 조상들은 이 시간과 이 계절, 이 방향에서 오는 나쁜 기운과 액운은 말이 맡아서 물리친다고 생각했다.

말(馬)하면 박력과 생동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외모로 보아 탄력있는 근육, 미끈하고 탄탄한 체형, 기름진 모발, 각질의 말굽과 거친 숨소리, 스피드와 순발력을 가지고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말은 옛부터 원시미술, 고분미술, 토기, 토우, 벽화, 옛그림 속에서 자주 등장하며, 구전되는 옛날 이야기, 민속신앙, 놀이 등 민속문화에서도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어, 말은 일찍부너 우리 민족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음을 알 수 있다.

<<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위만조선에도 말의 수가 상당했고, 騎馬의 습속과 말이 전투에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三國志>>(東夷傳)의 기록으로 扶餘의 名馬와 果下馬라는 두 종류의 말이 있었고, 濊이나 扶餘 에서는 말(馬)을  재산으로 간주했고, 東沃沮는 말이 적었다는 사실, 三韓地域은 모두 牛馬가 있었으나, 馬韓은 말을 타지 못한 반면에 弁辰韓은 말을 탔다는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아주 오랜 청동기시대부터 靑銅으로 만든 말모양 符籍을 사용한 유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액막이와 행운을 부르는 상징으로 말모양 장식을 썼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민속에서 날개 달린 말그림이 그려있는 符籍을 退厄進福府(액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부적)의 神馬府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말의 상징성을 읽을 수 있다.

신라.가야의 馬刻, 馬形, 騎馬形의 土器와 土偶, 고구려 古墳壁畵 등에 보이는 말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靈媒體로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타고 저세상으로 갈 때 타고 가라는 供羲的 副葬의  동물로 이해될 수 있다.

신화나 구전설화에서 말은 신성한 동물, 하늘의 使者, 帝王의 위대한 탄생을 알리는 靈物 또는 神母이며,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구실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특히 <<三國遺事>>, <<三國史記>>에서 말은 금와왕, 박혁거세, 고주몽 등 國祖가 태어날때 그 瑞相을 미리 알려주었고, 백제가 멸망할 때 말이 나타나 그 凶兆를 미리 豫示하여 준 신성한 동물로 이야기 되고 있다. 삼국의 건국신화나 천마총의 천마도에서처럼 말 가운데 특히 白馬는 최고지위의 조상신이 타는 말로 인식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백마는 고난시대에 희망을 가져다 주는 선구자나 민족영웅, 장수가 타고 오는 동물로서   백마란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희망의 상징으로 이미지화 되어있다.

세시풍속에서도 말은 六畜의 하나로 중요한 가축으로 인식하고 정월 上午日과 10월 첫말날에 특별히 말을 위해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낸다.

"신성한 동물" "상서로운 것의 상징"으로 수렴되는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일부 지역의 동제당에 馬像이나 말그림 속의 말이 마을을 수호하는 洞神으로, 혹은 동신이 타고 다니는 乘用動物로서 모셔지고 있다.  경남 고성의 석마리 입구에는 돌로 만든 말이 마을 입구에 나란히 놓여 마을 지킨다. 옛날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이 마을에 호환이 심해서 마을사람들이 절치부심을 하던 중에 웬 스님이 지나가던 길에 비책을 아려 주었다. 그것은 바로 石馬를 한쌍 만들어 마을 입구에 세우라는 것이었다. 석마를 세운 후에 호환이 사라졌고,  마을에서 이 석마를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왔다.  또다른 경우를 보면 어느 마을에 虎患이 있었는데 어느날 마을 노인의 꿈에 수염이 하얀 노인이 현몽하여 '나는 이 마을 지키는 산신인데 말을 만들어 동제당에 바치면  그것을 타고 호랑이를 물리치겠다'고 가르쳐 준다. 이튿날 마을사람들이 의논하여 말을 깎아 동제당 안에 바쳤다. 그 날 저녁 다시 마을사람에 산신이 현몽하여 '어제밤에 내가 그 말을 타고 호랑이를 물리치다가 그만 다리 하나가 뿌려지고, 현재 마을 어대에 있으니 고이 모셔다 당안에 봉안하라' 일러 주었다. 그 후에 호환이 없어지고 마을사람들은 매년 계속 말을 만들어 동제당에 바쳤다. 이러한 설화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말의 이용은 단순히 실용 혹은 수렵 및 간단한 경제적 단계에서 정복과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 정치적, 군사적 이용단계로 발달하였다. 부족구가, 삼국,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에는 말이 농경, 수공업의 원료, 군마, 교통통신의 역마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말띠타령"으로 좋지 않게 비쳤다. 우리 조상들은 띠짐승의 습성을 그 띠해에 태어난 아이의 운명과 결부시키는 습속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말띠에 대해 별나게 띠타령이 심하다. 그래서 "말띠 여자 팔자 세다"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그런데 중국이나 우리나라 문헌이나 수집된 자료에는 이런 속신을 뒷받침할 자료를 찾아 볼 수 없다. 조선시대에만해도 말띠 왕비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왕실에서 사주팔자를 따질 줄 몰라서 '말띠'를 왕비로 간택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말띠의 고약한 속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제식민지시대부터였다. 일본에서는 말해에 태어난 사람은 기질이 세어 말띠의 여자가 시집을 가면 남편을 깔아 앉아 남편의 기세를 꺾기 때문에 말띠 태생의 부인을 경원시하는 풍속이 수천여 년 전부터 있어왔다. 이러한 일본의 속신이 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확산된 것이다.

요즘에 제주도 일부와 관광지와 경마장을 제하면 실제 말의 모습은 보기가 힘든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말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사라졌지만, 대신에 말의 이미지가 투영된 예는 많이 볼 수 있다. 1000미터를 60초에 주파하는 말의 엄청난 속도는 스피드를 상징하는 자동차의 심볼마크로 등장하고, 튼튼한 네 다리를 갖고 있는 말의 모습은 양말과 신발의 상표에, 말의박력과 정력, 생동감은 남성화장품에서 , 교통통신의 수단이었던 말은 관광회사의 심볼마크에서 실제 모습이 아닌  말의 이미지만 투영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말에 대한 표현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문헌, 유물, 구전설화, 신앙, 놀이, 현대적 상품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말에 대해서 느끼는 관념은 어느 정도 변화없이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다.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신성한 동물"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 수렴되고, 하늘의 사신, 제왕의 출현을 알리는 영물, 예언자의 구실, 영혼과 마을 수호신이 타는 동울, 장수.선구자.영웅.새신랑이 타는 귀한 동물, 박력과 정력 스피드의 대표적인 상징동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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