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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민속(4) - 등잔불과전기불, 산가지와 전자계산기,귀신달구기와위하기, 소리판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12.01|조회수91 목록 댓글 0

등잔불과 전기불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래 먼 옛날부터 인간은 이 불에서 열과 빛을 이용하여 왔다.선사 시대의 주거지에서 볼 수 있는 화덕 자리도 취사 및 난방의 기능과 함께 어둠을 밝혀 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어둠을 밝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는 모닥불, 횃불 등을 들 수 있는데, 사람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토제등잔이나 소박한 목제등화구 등이 고안되고, 이러한 등화구는 시대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아름답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편 등화는 어둠을 밝히는 기능 외에도 의식용으로 사용되거나 봉화처럼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밤을 대낮같이 밝힐 수 있는 전기불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전기가 없던 불과 몇 십년 전만 하여도 사람들은 어두운 밤에 움직이는 것을 거의 삼가며 집에 머물렀고, 어두워지면 조명 시설이 없어 곧 자리에 누워서 자고 해가 뜨면 곧바로 일어나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래도 전기불이 없던 시절에도 불을 붙여 어두운 곳을 밝게 하는 기구인 "등기"가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야간 생활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기름을 담아서 불을 켜는 등잔, 등잔을 얹어서 사용하는 등경, 초를 꽂는 촛대, 들고 다니는 제등, 걸어 놓는 괘등, 실내에 놓는 좌등으로 이들의 명칭과 형태는 다를지라도 기름불이나 촛불을 이용하도록 만든 구조는 공통된다.

그 가운데 제등은 밤에 다닐 때나 의.예식에 사용하는 휴대용으로서 내부에 초를 넣은 것은 초롱, 등잔을 넣은 것은 등롱, 청사 홍사로 깁은 것은 청사초롱 홍사초롱 등 다양하다. 특히 조족등은 발 아래만 밝힐 수 있게 만든 등으로 내부에 회전식 초꽂이를 설치하여 등을 어느 방향으로 하던지 바로 설 수 있게 하였다.

그 외 화전민촌의 대표적인 등화구로서 코클이 있었는데 방 한쪽에 높이  1m 정도로 단을 설치하고 위로는 굴뚝을 만들어 관솔불을 피어 방을 밝히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그 열로 부분적인 난방을 겸한 조명 시설이자 난방시설이기로 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등기들은 기름이나 초를 이용하여 불을 켰다. 솜이나 삼실, 한지 등을 꼬아서 심지를 만들고 참기름, 들기름, 콩기름, 피마자 기름, 고기 기름, 고래기름 등을 연료로 사용하여 등잔에 불을 켰다. 초는 밀초, 소기름초, 돼지기름초 등을 사용했는데 궁중에서는 용이 조각된 용초와 모란꽃이 장식된 화초를 사용했다.

등화구는 밤에 불을 밝히는 기구일 뿐만 아니라 낮에도 각종 의식이나 혼례 때에도 분위기를 엄숙하게 하기 위해서 불을 켰다. 석가탄신일의 연등행사와 같은 종교의식이나, 사람이 죽은 상가에서 대문에 "기중(忌中)"이라는 글을 써서 다는 발등거리 등은 아직까지 이어오는 전통 등화구이다.

현존 유물로서 가장 오래된 등잔의 예는 고신라의 다등식 등잔과 백제 무녕왕릉의 등감에 놓였던 등잔이 있다. 다등식 등잔은 고신라나 가야의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는데, 4-6개의 등잔이 하나의 원통관에 연결되어, 한곳에 기름을 넣으면 여러개의 등잔에 일정한 유량을 유리하면서 불을 밝힐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또 무능왕릉의 등감에 놓였던 다섯개의 종지형 등잔이 있었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 말 석유가 수입되기 전까지 쓰인 등잔의 기본형이었다.

1876년(고종 13년)경에 일본으로부터 석유가 수입되면서, 심지꽂이가 따로 붙인 사기등잔이 대량으로 수입, 보급되었다.우리의 전통적인 등잔은 심지가 그저 그릇가에 대어서 불을 켜거나 발심지를 하여 그릇의 중간에 오게하여 불을 켜지만 석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바로 기름에 불을 닿으면 연소가 되기때문에 뚜껑을 겸한 심지꽂이가 따로 붙어야만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가스를 연료로 하는 간데라도 있었다. 1890년경에 처음으로 서울에 전기불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석유나 가스, 전기에 의한 조명이 있었지만, 최근까지도 제사나 고사 등에는 식용기름에 발심지를 해서 불을 켰다.  조도를 높이려면 심지를 두개 또는 그 이상으로 하여 불을 켜면 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을 쌍심지라 한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던 어렴풋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전기의 발명으로 인하여 지금은 모두 사라져 그 자취를 박물관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생활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지금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질 지 모르지만 전기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해도 등잔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첨단조명기구였다.

하루 일을 마치고 어두운 등잔 아래서 새끼꼬고, 짚신삼던 아버지와 그 옆에서 눈을 비벼가며 글을 읽는 아이, 그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 이 모두가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등잔에 대한 추억이 될 것이다

산가지와 전자계산기

우리 선조들은 셈하는데는 그리 밝지 못했는 것 같다. 특히 인정을 나눔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라는 말처럼  이웃간이나 친척사이에  손해와 이익의 계산은 크게 따지지 않았고 단지 인정으로 주고받았다.

숫자를 셈하는데 사용되었던 전래되는 민속유물은 막대기를 사용해서 숫자를 계산하는 산가지, 격자산법에 의해 곱셈이 가능한 주산반, 서로 기준이 다른 단위들을 쉽게 비교하고 환산할 수 있도록 위 아래로 움직이게 만든 환산반, 주판인 산반, 작은 막대는 1단위, 큰 막대는 5단위로 하여 볏단 등을 세는데 사용하는 계산대, 지게 짐을 세는데 사용하는 만보, 서산 등 여러 가지 계산법과 계산 기구가 있었다. 요사이 같으면 전자계산기나 컴퓨터가 있어서 버튼만 누르면 수백 억의 숫자를 눈 깜짝할 사이에 계산해내는 것에 비교를 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 계산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선조들이 가졌던 절약정신과 거래질서에 따른 도덕관을 함께 배여 있어 촌치의 자기 이익만을 추고하는 현대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산가지(산목, 산대, 산책)'라는 댓개비가 있다. 가는 대나무나 뼈로 젓가락과 같이 만들어 그것을 세로나 가로로 배열하여 셈을 했다.

이 산가지로 셈하는 방법은 일.백.만의 단위는 세로로 늘어놓고, 십.천.억(지금의 십만)의 단위는 가로로 늘어놓아 수를 나타낸다. 단 6이상의 수일 경우 5를 기준으로 5는 가로로 놓고 나머지 수는 세로로 놓되, 위 또는 아래 쪽에 놓는다. 즉,l(1),ll(2),lll(3),llll(4),lllll(5),T(6),ㅠ(7),Tll(8),Tlll(9) 등을 기본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621은 T=1로 놓고,2622는  =T=ll로 놓아서 수를 셈하게 된다.

동네사람들에게 외상 술을 많이 파는 주막에서도 이런 산가지의 셈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글을 깨치지 못한 주막의 주모에게는 이 산가지의 방식이 안성맞춤이었다. 주막의 기둥에 외상꾼의 특징을 숯껑으로 그리고 그 밑에 산가지 방식의 금을 그어 표시했다.술꾼의 얼굴에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검은 점을 하나 그리고, 스무일곱량이 외상이면 그 점 밑에 =ㅠ로 표시한다. 말하자면 점박이가 수무일곱량 외상술값을 먹었다는 뜻이다. 이 주막의 기둥이 외상장부였던 셈이다.

산가지는 단순하고 만들기도 쉬워서 계산하는데 만 쓰였는 것이 아니라 계모임이나 인간의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점, 놀이에도 이용되었다.

목돈을 모을 목적으로 산통계를 많이 조직했다. 계원이 한 달에 한 두번 날을 정하여 일정한 곗돈을 낸 다음에 산통 속에 계알을 넣고 흔들어 추첨하여 뽑힌 계원에게 곗돈을 타게 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산통계는 계원 전원이 한번씩 곗돈을 타야 하야 끝이 나는데 그렇지 못하고 중간에 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튼다는 뜻의 '산통 깬다'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산통점은 산통에 산목 또는 산가지를 여덟개 넣어두고 뽑아서 괘를 만들어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것이다. 나무 속을 깎아 만들거나 조롱박의 속을 파내어 산통을 만들고 여기에 산목을 넣는다. 산목에는 1에서 8까지 눈금을 새기고 장님이 손으로 만져서 숫자를 헤아릴 수 있도록 한다. 상위에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운 뒤에 점치러 온 사람이 자기의 소원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산통을 흔들어 산목이 섞이도록 한 뒤에 산통에서 산목을 하나씩 꺼내서 새겨져 있는 눈금을 읽고 여섯 번 되풀이하여 괘를 만들어 점을 쳤다.

산가지놀이는 셈할 때 쓰던 젓가락 모양의 짧은 댓개비를 가지고 노는데, 근래에는 산가지 대신에 성냥개비를 가지고 이 놀이를 함으로 '성냥개비놀이'라고도 한다. 이 놀이는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 어린이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즐긴다. 놀이방법은 산가지떼어내기, 산가지따기, 형태바꾸기, 산가지들기, 삼각형없애기, 쌍만들기 등이 있다. 이러한 산가지놀이는 어린이가 사물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 도형감각이나 역학적 기초관념을 심어주는데 큰 도움이 되는 놀이이다.

이처럼 산가지는 셈하는데 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계, 점, 놀이 등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산가지와 전자계산기의 계산능력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러나 그 차이는 삶의 질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차이다.전자계산기를 사용해도 계산을 다  못하고 바삐 허우적대는 현대인에 비해, 우리조상들은 산가지의 셈으로도 일상생활에서 셈을 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단순한 인정의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시월상달의 귀신 달구기(逐鬼)와 위하기(告祀.安宅)

우리네 생활에는 별나게 귀신들이 많았다. 어떤 보고서에 의하면 귀신의 종류가 273 종이나 된다. 일상생활 주위에서 그것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힘이 더 있으면 신으로 섬겼다. 그러다보니 신들도 다양하고 각양각색이었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귀신들을 우리조상들은 선한 신(善神)과 악한 신(惡神)을 크게 구분하여 인식하였다.

선신은 집안에 있는 조상신이나 가신(家神)들로 가족과 집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 악신은 귀신, 망령 등으로 주로 집밖에 존재하며 이들 신이 집으로 들어오면 해꿋이을 하는 부정적인 잡귀들이다. 이들 귀신들을 다루는 방법도 다양한데, 나쁜 잡귀는 쫓아내고 집 근처에는 을씬도 못하게 하는 귀신 달구는 방법과, 간단한 음식을 장만하고  무당을 불러 춤과 노래로 달래고 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귀신달구기는 주로 정초에 많이 행하나 객귀가 집안에 들어오거나 집안에 탈이 생기면 수시로도 행하고, 귀신을 달래고 위하는 의례는 정월과 시월 상달에 많이 이루어진다.

귀신이나 망령은 악신적이고 부정적이어서 집안에 들어오면 탈이 난다고 생각하여 주로 귀신달구기방법을 통해 물리친다. 정초에 머리카락이나 명씨(목화씨), 고추씨를 화로불에  태워 심한 악취을 내거나, 대나무를 태워 요란한 소리을 내거나, 혹은 대문에 구멍이 가는 체를 걸어두어 이들 귀신들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멀리 도망가게 한다. 삼재(三災)가 들었거나, 나쁜 귀신이 몸에 달라붙지 못하게 하고,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문간에 부적을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닌다.

상가집의 음식을 얻어 먹었거나 남의 음식을 먹고 난 뒤에 몸살난 것처럼 아프면 객귀가 몸에 붙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객귀물림을 한다. 객귀가 들렸는지를 콩을 씹어 먹거나, 숟가락을 좁쌀이나, 보리쌀 종지에 세우는 방법을 통해 객귀가 들렸는지를 확인하고 개귀가 들렸으면 바가지에 된장을 풀어 식칼로 환자의 머리를 세 번 뜯어 넣고 진언을 한 후 된장국을 대문 밖에 뿌리면서 식칼을 던지며 바가지를 엎어 놓는다. 이때 칼끝이 밖을 항해여 객귀가 나가고 아픈 것이 낫는다고 믿었다. 굿을 할때도 물과 불로 부정굿을 하여 굿장을 깨끗이 한다. 또한 금줄이나, 황토흙으로 집귀들의 접근을 막는다.

물론 이처럼 잡귀를 달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달래고 위하기도 한다. 굿의 뒤전거리가 그것인데, 굿이 끝날 무렵에 바깥마당에서 뒤전이라는 거리를 행한다. 뒷전이란 주로 굿에 몰려든 잡귀, 잡신을 풀어 먹이는 거리이다. 굿은 신들을 위한 일종의 잔치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거지와 같은 잡신들이 몰려들게 마련이다. 이들 잡신을 풀어먹이지 않으면 언제 탈이 날지 모른다.그래서 잡귀들을 위해 굿거리를 한다.

선신(善神)인 조상신(祖上神)이나 가신들(家神)에 대해서는 달구기보다는 달래고 위하는 고사와 안택의례를 한다. 이들 의례는 정월과 시월에 많이 나타난다. 정월보름전에 행사는 일년의 운수와 액막이를 위해서하는 경우라면, 시월에는 주로 주부가 추수감사와 가내 평안을 감사하고 비는 추수감사성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전부터 시월을 상달이라 하여 일년중 가장 높은 달로 치고, 고사.조상단지모시기.말날(午日).시제 등 선신을 위하는 의례를  많이 행했다. 10월의 첫 午자가 들은 말날이나, 주인의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에  각 가정에서는 붉은 팥시루떡이나 무시루떡들을 만들어서 손을 비비고 축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삼신, 성주, 조상, 터주, 조왕 등 일련의 가신들에게 햇곡식을 갈아 넣어 주었다.

시월상달에 귀신 위하는 일은 말날(午日)에 많이 행했다. 음력으로 시월 첫 오일에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외양간에 놓고 신에게 기도하여 말의 건강을 건강을 빈다. 같은 말날이라도 병오일(丙午日)의 피하고 무오일(戊午日)은 좋다. 병오일의 丙자가 病과 음이 같으므로 꺼리고, 무오일의 戊자는 무성하다는 茂와 음이 같기 때문에 무성하게 잘 되라고 이날 조상단지 쌀 갈기나, 고사까지도 말날이 많이 선택되었다.

전북지방에서는 농사를 다 지은 상달이라고 해서, 이때 집집마다 시루떡을 하고, 안방의 삼신제왕을 모시고, 음식을 외양간, 사랑, 머슴방, 나락가리, 쌀뒤주, 장광 등 곳곳에 조금씩 차려 놓는다. 이래서 "조왕에 놓고, 터주에 놓고 나면, 나 먹을 것이 없어진다"는 속담이 생겨났는데, 이때 집안에 놓았던 음식은 온식구들이, 나락가리나 사랑에 놓았던 음식들은 머슴들이 각각 먹는다.

보리고개가 있던 시절에 떡은 제삿날, 어른생일날, 설.추석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나고 별난 음식이었다. 그러나 시월만큼은 곡간이 넉넉하니 무싯날에도 떡을 해먹을 수가 있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내고, 떡 본 김에 굿한다"고 평소에는 먹을 수 없던 떡이 있기에, 먼저 신에게 바치고 손을 비벼 풍년과 집안의 안녕에 감사하고 물려서 신덕(神德)을 받고 나서야 식구들이 먹는다. 귀신과 사람이 함께 즐기고 함께 먹는 것이다.(神人共樂共食)

고사떡은 될 수 있는대로 여러 이웃과 나누어 먹는 것이 좋다는 속설이 있다. 집집마다 고사떡을 나눔으로서 인정을 나누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고사떡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서로의 인정을 확인하고 이웃끼리 서로 돕고 협력하는 한 동아리의 모둠살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즉 고사떡은 나누어지고 인정은 모아지는 것이다. 정(情)의 흐름이 단절된 삭막한 도시생활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여기서 고사 자체가 지니는 종교적 주술성(宗敎的 呪術性)보다는 '안정나눔'이라는 사회적 의미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民草들의 소리판 속의 신. 흥. 한. 멋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 의논하고 함께 노는 그 공동의 자리를 `판`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참 멋있는 분들이라 소리 잘하고 춤 잘 추고 짓거리 잘해 굿판 춤판 소리판 난장판 등을 잘벌렀다. 그래서 마을제나 걸립 그리고 설, 단오, 추석 등에 수시로 놀이판을 벌렸다. 이러한 판은 처음에 소리판에서 춤판으로, 난장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운데 강요나 억지도 없고 부조리나 배리, 그리고 차별도 없는 우리(WE-ness)가 되는 것이다.

판이 식거나 깨어지면 불쾌해 하고 판이 잘 이루어지면 살판났다고 기뻐한다. 놀이판과 관련되어 거론해야 할 것이 굿판 놀이판 탈판 춤판이 있다. 새해의 시작, 계절의 전환, 생명의 탄생과 죽음, 새로운 삶의 출발 등과 밀접한 관련 아래서 이러한 판이 벌어진다. 우리 조상들은 일상생활 속의 `한`과 `슬픔`을 판에서 특히 소리판에서 `신명`과 `흥`으로 풀어 가는 `멋`을 가졌다. 놀이판에는 웃음이 있고 흥이 있고 신명이 있고 풍자와 해학이 있는 마당이다. 즉 놀이판에는 신 흥 한 멋이 어울려진 한 마당이다. 생활 속의 `한`은 恨으로 怨恨으로 가지 않고, 한스런 일을 당해도 원한을 품지 않고 누구도 허물 하지 않으며 타령조로 마음속으로 삭이는 바로 그런 `한`이며 `신`은 한스런 삶을 잠시 잊고 생산하고 재창조하는 원동력이 깃들여 있는 놀이의 신명, 신바람, 신풀이가 그것이다.

`흥`은 풍성한 탕진 속에 풍요로운 내일을 기약하고 흥청거려 보려는 흥타령의 줄거움이다. 풍자와 해학 풍류가 어우러진, 저항과 인고, 질타와 용서가 융합된, 불협화음이 리듬으로 되는 곳에 놀이판의 `멋`이 자리한다. 이러한 신 흥 한 멋의 소리판에서 무질서 속에 질서를 발견하고 난장판 속에서 우리는 한동아리임을 느낀다.

민속 놀이판은 질펀한 흥겨움, 신명 풀이가 그 본질이다. 그것은 난장판으로 절정을 이룬다. 건강한 놀이판은 놀이꾼과 구경꾼의 특별한 구분 없이 한데 어울려 즐기는 가운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생활 공동체로서의 유대를 다지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놀이판에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들러리 노릇만 하고 시간과 돈과 정력만 낭비할 뿐이다. 오늘날의 소리 문화도 지금까지 이야기한 민요와 비교할 때 과연 건강한가를 반문하면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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