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총 청동 항아리의역사적 미스터리
- 고구려는 신라를 군사적으로 도왔다?
고구려 호우, 경주서 출토
정치·군사적 영향력 있던 경주의 고구려 지휘관이
고구려 국가의 상징으로소장하던 것이라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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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총에서 발견된 청동제 항아리. 필자 제공 |
천년왕국 신라의 수도 경주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 정도는 대릉원을 방문한다. 그 대릉원 북쪽에 위치한 경주 노서동의 한 고분을 해방 직후인 1946년에 한국인 전문가들이 최초로 발굴·조사했다. 이때 특이한 항아리 하나가 출토돼 당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뚜껑을 덮었을 때 높이가 19.4㎝이며, 바닥에 글자가 새겨진 청동 항아리, 즉 청동 호우(靑銅 壺?)였다. 이 고분의 주인공을 알 수 없고 호우(壺 병 호, ? 잔 우)가 발견됐으므로 이 무덤은 호우총(壺?塚)으로 명명됐다.
이 호우의 바닥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井 표지의 문양과 함께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는 16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16자 명문의 의미는 “광개토대왕의 사후 3년째인 415년 을묘년에 아들 장수왕이 국강상에 모신 아버지 ‘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하는 의례행사 때 사용하기 위해 호우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열 번째임”이다.
호우총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왜 광개토대왕과 관련이 있는 호우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발견된 것일까? 그리고 경주에서 이 호우가 발견된 역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호우총이 주변의 미추왕릉·천마총과 가까이 있으므로 무덤의 주인공은 왕에 버금가는 당대의 고관대족일 가능성이 높은데, 일반적으로 실성왕(實聖王) 11년(412)에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눌지왕(訥祗王) 2년(418) 박제상(朴堤上)의 노력으로 신라에 돌아온 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일 것으로 본다. 복호가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이 호우를 가지고 왔으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가 사망하자 무덤에 부장품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다른 가능성-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를 포함한 친고구려 세력이 고구려의 상징으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호우를 가지고 있다가, 호우총의 주인공에게 건네주고, 그가 사망하자 무덤에 부장품으로 들어간 경우-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호우가 만들어질 이 무렵에 고구려와 백제는 대동강-한강 사이의 중간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국운을 건 치열한 전쟁을 벌인 것 같다. 초기에는 백제가 공세를 취했으나, 광개토대왕 대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우위를 점하는 상태였다. 한편 신라는 왜(倭)로부터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약탈 및 침략을 당하자,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해 어려움을 해결했다. 이에 대해서는 광개토대왕 비문을 중심으로 다음 회에서 자세히 알아 보겠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하에서 신라가 취한 정책은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고구려에 기대 나라의 안전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신라에 군사적 보호막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신라는 어떠한 반대 급부를 고구려에 지불했을까?
첫째, 고구려는 신라를 자국의 뜻대로 조종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라에 인질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내물왕(奈勿王) 37년(391) 정월에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인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고, 실성왕 11년(412)에 전왕(前王)인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인질로 보낸 것이 이를 보여준다.
둘째, 더 나아가 고구려는 신라의 왕위 계승에 직·간접으로 간섭해 고구려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을 신라의 왕으로 즉위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인질로 가있던 실성이 401년 7월에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은 402년 2월에 내물왕이 사망하자, “신라인들이 ‘내물왕의 아들은 어려서 왕이 되기에 적당하지 못하며, 실성은 지혜가 밝고 사리에 통달하며 앞일을 멀리 보는 식견이 있다’고 하여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했다”고 한다. 이 사료는 실성이 왕위계승에 대한 밀지를 고구려에서 받고 귀국 후 전왕을 몰아내고 즉위한 것을 시사한다.
실성왕의 뒤를 이어 417년에 즉위한 눌지왕은 고구려인이 알려준 정보(실성왕이 경주에 있던 고구려인을 시켜서 눌지를 죽이려 했는데, 고구려인들이 눌지의 외모가 준수하고 정신이 우아해 군자의 풍모가 있음을 알고, 눌지에게 실성왕의 음모를 털어놓았다)를 접하고,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했다고 한다. 실성왕이 ‘눌지를 죽이라’고 부탁한 고구려인은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의 지휘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호우총의 호우는 군사적 보호를 대가로 정치적·군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경주의 고구려 지휘관이 고구려 국가의 상징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호우총은 광개토대왕 시기 및 그 이후에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이 있었고, 그에 따른 고구려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비밀 열쇠다.
이 무렵 경주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했음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다음 기록에서 확인된다. 고구려 왕이 정병(精兵) 100인을 보내 신라를 지키게 했는데, 한 군사가 신라인 마부(馬夫)를 동행해 귀국할 때, 마부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가 우리나라에 패할 날이 멀지 않았다”라 했다. 신라인 마부가 몰래 도망해 돌아가 그 말을 전하자, 신라왕이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 사람들에게 “집안에 기르는 수탉(鷄之雄者)을 모두 죽이라”고 했고, 신라인들이 그 뜻을 알고 고구려 사람을 모두 죽였다. 여기서 수탉은 새깃털 모자를 쓰는 고구려인, 즉 고구려를 뜻한다.
허중권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출처> 국방일보 '허중권 교수의 고대전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