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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토막역사

[옮긴글] 일제강점기 히트 상품 '고무신' - 고무신이 대박난 이유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04.17|조회수334 목록 댓글 0

 

 

● 국산 고무신의 등장


고무신은 1910년대부터 

도입되기 시작했으니

 


처음에는 나름 

최신식 고급으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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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표 고무신을 신어보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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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순종임금도 신으셨다가

그 출중함에 반해버린 신발이라능."


당시 신문에는 

이런 식의 광고가 많았다.


순종이 정말로 고무신을 신었는지는

확인할 순 없지만,

 

 

▲ 고종(좌), 순종(우)


다른 회사도 비슷한 광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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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표 고무신이야말로

이강 전하가 손수 고르시고, 신고 계신 신발이라능."


여기서 '이강 전하'는 고종의 둘째 왕자요,

순종의 아우였던 의친왕을 말한다.

 

 


그가 특별히 거론되는 것은

유독 반일의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거북선표 고무신도 등장하였으니,

 

 

▲ 물결바닥이 특징인 거북선표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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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표 고무신을 신어보라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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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미끄럼 방지 기능도 갖춘

최신식 고무신이라능."


당시의 국산 고무신은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건드려서


신발 판매에 연계하려는

마케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1996년 2월 22일자)

 

 

▲ 거북선표 고무신은 워낙 인기가 있어서, 나중에는 유사품 주의 광고를 해야했다.



● 짚신을 대체한 고무신


그렇게 등장한 고무신은

빠른 시간 내에 대중적인 신발로 자리 잡게 된다.

 

 

▲ 당시 고무신 가게


고무신의 장점은

무엇보다 질긴 내구성에 있었다.

 

▲ 질긴 고무신, 별표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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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 고무신은 찢어지지 않는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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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축이 닳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1년 사용을 보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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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선에 흙이 묻지 않고,

가벼워서 신기 편한 고무신!"


이와 같은 광고는, 고무신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짚신의 단점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 강철보다 견고한 지구표 고무신


사실 볏짚으로 

만든 짚신은


평균 5일 신으면 닳아 없어져버릴 만큼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 짚신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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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보통 일 년에 

70켤레의 짚신을 신었다능."

(김태수, 꽃가치 피어 매혹케하라 p.34)


게다가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착용감이 좋지 못했고


비만 오면 스펀지처럼

 

물기를 빨아들여


축축한 데다 

쇠망치처럼 무거워졌다.

 

 


특히 측간이나 

더러운 곳에 신고 들어가면


발이나 버선이 쉽게 오염되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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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찝찝해."


반면 고무신은 

여러 장점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내구성이 좋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비싸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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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이 신었던 가죽신보다

훨씬 저렴했다능."


또 비가 와도 나막신으로 

갈아 신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가볍고 

착용감 또한 좋았다.

 

 

▲ 순사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의 신발이 고무신이다.


다만 벗겨지기 쉽고

내한성이 전혀 없어


겨울에 신기에는 불편함이 많았지만,

이는 짚신도 마찬가지였다.

 

 

▲ 방한성을 위해 털고무신이 고안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신발은 크게 이러했다.


짚신과 미투리

 

조선시대 서민들의 대표적 신발로,

짚신과 미투리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짚신과 미투리의 차이는 뭘까?

사실 생긴건 둘 다 비슷하다.

 

 

▲ 짚신(좌), 미투리(우)

 

다만 짚신은 

재질이 지푸라기인데 비해

 

미투리는 소재가 

마, 모시로 만들어진다.

 

 

▲ 짚신 만들기

 

미투리가 좀 더 질기기 때문에

미투리가 더 비쌌고, 

좀 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신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양반들은 

이런 짚신과 미투리를 신지 않았을까?

 

아니다.

양반이라도 형편이 안되면 짚신을 신었다.

 

 

▲ 과거시험 보러 가는 선비들

 

또 여행 중에 가죽신을 아끼기 위해

짚신을 신는 양반들도 많았다.

 

또 짚신(미투리 포함) 중에는 이처럼

장화 모양의 짚신도 있었다.

 

가죽신

 

가죽신은 일반 상민들은 신지 못하게 돼 있었다.

특히 노비는 절대 신어서는 안 됐다.

 

다만 조선 후기,

신분제가 붕괴되던 시기에는

 

상민들 중에는 

가죽신을 신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으니,

 

 


씨름도를 보면 둘 다 상민이지만

한 사람은 가죽신을, 다른 사람은 짚신을 신고 있다. 

 

 



● 모양을 바꾸자 크게 히트를 쳤다


고무신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대중들의 눈길을 크게 끌지는 못했다.


당시 고무신은 오늘날 구두 모양이었으니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낯설어했던 것이다.

(김태수, 꽃가치 피어 매혹케하라 p.35)

 

 

▲ 1930년대 외국의 고무신


그런데 이걸 조선 사람이 신던

신발을 흉내 내서 팔았더니


이게 웬걸!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남자 고무신은 짚신을 본뜨고,

여자 고무신은 갖신을 본뜬 게 주효했다.

 


 

"아따, 모양이 참말로 좋구마잉."


그렇게 고무신이 인기를 끌자

우후죽순으로 고무신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21년에 2개이던 공장이

1933년에는 72개로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한편 고무신 수요가 급증하던

1920년대에 부유층을 타깃으로 한 


서양식 구두도

속속들이 들어섰으니,


 

당시는 이런 서양식 구두를 두고

'세계 개조'라는 거창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화점의 구두 한 켤레 값이 12~13원 정도였다.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월급이

20원이 채 되지 못할 때였으니,


양화점 구두를 신는 

여인네들을 두고


벼 두 가마니를 신는다고 해서

용맹스러운 여자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 구두 한켤레 = 벼 두섬 : 용맹스러운 아가씨


그에 반해 고무신의 가격은

 

구두의 1/30도 안되는, 40전이었다.


당시 짚신이 10전, 

미투리가 25전이었을 때였다.

 


 

● 여성들의 로망, 흰고무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서민들이 


고무신 정도는 마음 놓고 신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1920년대 신문기사를 보면

고무신 절도 기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1924년 2월 인천에서는 

고무신을 훔치다가 점원에게 붙들려서


 

매를 몹시맞아 혼수상태가 되어

병원에 입원한 아이의 사연이 있기도 하다. ☞ 참고


고무신의 가격이라고 해봤자,

짚신의 3~4배 값밖에 안 됐지만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 짚신 장수 : 정작 본인은 고무신을 신었다


이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어서

여전히 짚신을 신고 다니거나


아예 맨발로 다니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한편 거무튀튀한 

일반 고무신과 다른


새하얀 흰고무신은

나름 고가의 신발로 평가받았으니,

 

 


특히 시골 여성들에게는 

선망의 물품과도 같았다.


 

마치 요즘의 페라가모와 같은

명품 구두라고나 할까?


 

김유정의 단편소설 

'금따는 콩밭'의 내용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순이는 밤새도록 흰고무신을 

신었다 벗었다 했다.

 

신코가 뾰족한 것도 

신기하거니와


휘어잡으면 

한 움큼 되었다가도


손을 놓으면 팔딱 제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흰고무신을 갖게 된 순이는 

하늘로 올라간 듯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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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가 생각하기에 

흰고무신은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라도

함부로 신을 것이 못 되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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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마을에도 

흰 고무신을 신은 여편네라고는


구장댁 한 사람뿐인 것만 보더라도

분명히 귀한 신발임에 분명했다.


1937년이면 도시민들은 

대부분 고무신을 신었던 시절이었지만


흰고무신 정도면,

시골의 순박한 여인네에게


 

가슴을 콩닥거리게 만드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 고무신 공장의 노동자


하지만 고무신이 

잘 나간다고 해서


고무신 공장의 노동자들도 

좋은 대접을 받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 50년대 삼화고무 공장의 여공들


고무신 공장엔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의 3배 가까이나 됐는데


이들의 노동 조건은 

가히 끔찍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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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고무신 공장을 탐방한

 

기자의 글을 보면 경악스러울 정도다.

(1932년 월간 신동아 6월호)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고무 찌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마문이 열리자 

130도나 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쩌진 고무신들이 

지독한 냄새를 피우며 쏟아졌다.


그 옆에서 하루종일 그런 냄새를 맡으며

일하는 꽃같은 여공들이 있었다.


 

롤러를 잡고 

고무신 바닥을 눌리는 


그녀들의 얼굴은 금새 붉어지고 

팔에는 힘줄이 굵어진다.


옆에서는 그녀들의 아이들이 

젖을 달라고 보채기도 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만큼
고약한 고용주들도 문제였으니,

 
당시 공장 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고용주를 위해 고기를 사다 바치거나,
빨래까지 해주어야 했었다.
(김태수, 꽃가치 피어 매혹케하라 p.43)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고용주나 공장장의 눈에 거슬리게 되는 날이면

 
그날로 공장을 
쫓겨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에 일거리는 부족했고,
실업자들은 득실거렸다.

 
공장에서 욕설과 구타가 난무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그보다 힘든 것은 
'불량품 배상제도'였으니,

불량품이라도 나올 경우 노동자들은 
정품 한 켤레 분의 임금을 받지 못 했던 것이다.
(김태수, 꽃가치 피어 매혹케하라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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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악한 시설에서
하루 12시간이 가까운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란, 

일반 봉급자들의 60% 수준인
월평균 12원 70전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조악한 수준이었다.


● 전시체제 : 다시 돌아간 짚신 시대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국내의 고무 산업은 크게 휘청거렸다.

동남아에서 수입되는, 고무의 유입이 중단되면서 
고무신 값은 전년의 3배로 올랐고

그나마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품귀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1인당 1년에 한 켤레만 사 신을 수 있는

'일족 구입권'이라는 
배급표를 나눠주게 된다.
(김태수, 꽃가치 피어 매혹케하라 p.44~45)

때문에 당시에는 찢어지거나 구멍나면 
기워 신어야만 했고

 
불에 달군 쇠틀로 
찢어진 고무신을 녹여 붙여주던

방랑 수선공이
때아닌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원료난은 더욱 심각해지고

 
귀한 고무는 
군용품을 조달하기에도 벅찼으니,

당시 고무신은 쌀 한 말과 교환될 만큼
귀하신 몸이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재빨리 
짚신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흐미, 다시 짚신을 신으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국 학교에 짚신을 신으라는
훈령이 떨어지는가 하면

소학교에서는 앞다투어 
'전교생 짚신 신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다시 짚신과 나막신이
전에 없이 활발히 거래되었다.

결국 짚신은 해방이 될 때까지
대량으로 생산 유통되었던 것이다.


● 평등을 상징했던 '검정고무신'

해방 이후 고무신은
신발 점유율의 85%를 차지하던 국민 신발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이 땅에 평등사상이 만연해진 가운데,

검정고무신은 그런 평등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과도 같았으니, ☞ 참고

 
웬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면
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모두가 같은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탓이다.

 
50~60년대까지만 해도 
고무신은 막걸리와 더불어

선거 유세장의 어른들에겐 
돈봉투처럼 통했고,

 
모래밭의 아이들에겐 
장갑차나 기차로 변신하는 전천후 장난감이었다.

다 찢어진 폐고무신이라도
고무신 조각은 아이들의 지우개 대용으로 쓰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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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 공책의 
재질이 후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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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으로 지우다가 
곧잘 공책을 찢어먹곤 했지만.."

엿장수가 지나가면
강냉이나 엿가락과 바꿔먹을 수도 있었다.

 
혹은 어머니가 아이를 혼낼 때면
흔히들 고무신으로 쥐어 패곤 했었다.
 
 
하지만 이런 고무신은 
70년대부터 

피부와 위생적인 측면을 고려해
점차 운동화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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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을 신다 보면 땀 흡수가 안되어
무좀에 걸리기 일쑤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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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 재질이 발뒤축을 물어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일이 잦았다능."

하지만 그렇더라도 
고무신은 80년대까지

물가 조사에 
필수 품목이었을 만큼

농촌의 노인들에게
꾸준히 애용되고 있었고

 
오늘날에도 고무신은
교도소의 죄수들의 신발로 보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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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성이 떨어지고 잘 벗겨지는 점 때문에 
도망치기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라는데.." 

그런가 하면 산사의 스님들에게
고무신은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다.

그것이 마치
무소유의 상징인 양 말이다.

 
그렇더라도 절간에 가면
누구의 것인지를 표시하기 위해서

고무신에 꽃, 별, 무늬, 부호 
등을 새겨 넣는가 하면

 
튀는 스님들은 
'나이키'를 그려 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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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조선 나이키."

외국에서도 고무신은 있다.
우리와 다른 모양이라서 그렇지.

특히 아프리카에 가면
폐타이어를 잘라서 만든 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원래는 베트남전 당시 
만들어진 것이 유래가 되어

 
호치민 샌들이라 
부르기도 한 것이

요즘은 아프리카로 전래가 되어

 
아프리카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고무신이 된 것이다.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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