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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백제] 시대가 만든 폭군, 의자왕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07.10|조회수38 목록 댓글 0

시대가 만든 폭군, 의자왕

  

의자왕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가? 보통은 '의자왕'하면 삼천궁녀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의 가사 중에서도 '백결 선생 떡방아 삼천 궁녀 의자왕 황산벌의 계백, 맞서 싸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라고 나온다.

 

그러나 과연 의자왕은 삼천궁녀를 거느린,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라를 망친 왕이었을까?

의자왕이 그런 왕이 아니었음을 여러 증거를 제시하며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우선, 가장 먼저 규명해야 할 것은 삼천궁녀의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의자왕이 41명이나 되는 자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분명 후궁은 존재했다. 그러나 삼천궁녀에서 삼천은 상징적인 것이며, <삼국사기>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백제 멸망 당시 사비성의 인구는 5만이었다고 했는데, 그 중에 3천이 궁녀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궁녀도 나이가 많거나 너무 어려서는 안 되며, 당연한 것이지만 반드시 여자여야 한다. 6% 가까이 육박하는 수가 젊은 여자 궁녀라니, 이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점이다.

 

비유를 해보자면, 한국의 인구가 4800만이라 가정할 때, 그 중 궁녀가 288만이라는 소리인 것이다.

 

게다가 사비성과 궁의 규모를 보아도 3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주할 곳은 없으며, 당시 백제의 궁녀들이 지내던 곳은 3백명도 들어갈 수 없다. 이로 보아, 삼천궁녀는 없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삼천궁녀란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삼천궁녀란 말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현대에 와서는 통설처럼 굳어진 것일까?

 

민구손의 아들이자 조선 전기의 문인인 민제인이 한번은 과거에 떨어져 실망해서 자신이 지었던 <백마강부>를 읊었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구름처럼 많은 삼천 궁녀를 바라보니'

 

유교 정신 실천과 사대주의를 근본삼는 조선에선 의자왕은 좋지 못한 인물이었다. 신라를 핍박하여 평화를 깨고, 당을 등졌다. 그런 나머지 조선에서부터 의자왕에 대한 악평이 확대된 것이다. 사람들이 삼천궁녀를 진실로 믿게된 것을 전문가들은 대중가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손로원 작사 <백마강>인데, 이런 대목이 있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 보자 삼천 궁녀를

 

이 대중가요는 일제 강점기 때 발표되어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이후 대중들에게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정설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의자왕의 몰락 원인이 '사치와 향락'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보겠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백제 멸망의 원인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인용하도록 하겠다.

 

백제는 말기에 와서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많았다. 또한 대대로 신라와 원수 사이가 되고 고구려와는 화친을 계속함으로써 신라를 침공했다. 유리한 조건과 적당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들을 점령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과 친하고 이웃을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말과 어긋난다. 이에 대해 당 천자가 두번이나 조서를 내려 원한을 풀라고 했지만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명을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패망한 것이다.

 

결국 김부식은 의자왕이 사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졌다고 적은 것이다. <삼국사기> 내에 사치와 향락을 누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라 중심에 사대적인 <삼국사기>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 진위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의자왕에 대한 평가와 그가 행했다고 기록된 행동들이 멸망 당시와 그 전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자왕이 당으로 끌려갈 때 1만 2천여나 되는 백성들이 의자왕을 조금이라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곳은 백성을 떠나보냈다 하여 유왕산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기록에도, 백제의 백성들이 거리로 나와 대성통곡하였다 하니, 신라와 당에 대한 원한과 의자왕에 대한 슬픔이 대단하다 하겠다.

 

웅진으로 갔던 의자왕이 갑자기 항복한 것에 대해, 웅진을 지키던 자가 의자왕을 잡아 넘겼다는 설이 있다. 그것에 대해서도 조금 써보고자 한다. 이것이 너무 터무니없는 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재 신채호는 '웅진성 수성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동맥이 끊이지 않아 당에 포로가 되어 묶여 갔다.'고 주장했다.

 

얼마 전 발견된 '대당 좌위위대장군 예식진 묘지명'과, <구당서>의 '소정방전'에 백제 웅진성을 지키던 좌평 예식(예식진)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에 항복했다는 것이다. 예식은 그 공으로 좌위위대장군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런 설은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해도 웅진과 임존 등의 백제군 주력군과 근거지가 있었으며, 웅진으로 간지 며칠만에 항복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제대향로를 옮겨갈 틈이 없어 묻어두었는데, 항복보다는 저항에 더 의지가 있었기에 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단 며칠만에 항복하려고 웅진까지 몸을 피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여러 의문에 위의 기록을 대입하면 답이 나온다.

 

결론을 내리자면, 의자왕은 제목처럼 결국 시대가 만든 폭군인 것이다. 조선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것도 얼마 되지 않은 기간동안 말이다. 그는 40여 성과 대야성을 점령한 것과 같이 훌륭한 인물이었다. 유왕산에서 백성들에게 재회를 약속했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타국에서 약속을 회상하며 쓸쓸하게 죽어갔을 의자왕에 대해 생각한다면 근거없이 그를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할 짓이 아니다.

 

의자왕은 억울한 인물인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의자왕의 인품과 성격에 대한 평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웅걸차고 용감했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632년(무왕 33)에 태자가 되었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는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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