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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 백제의 부흥운동

작성자시리게푸른하늘|작성시간15.12.14|조회수34 목록 댓글 0

백제부흥운동의 전개 과정


서기 661년 부여성이 함락되고 난 뒤 웅진성에서 의자왕이 잡혀 많은 백제인들과 함께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인질이 되어 잡혀간 지 1년 후였습니다. 복신 장군은 강서의 군사들을 모아 백제의 진현성을 탈환하게 되었습니다. 백제의 부흥운동에 나선 것이죠.


잠깐 복신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볼까요? 그는 백제 무왕의 조카인 동시에 의자왕의 사촌 동생이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백제왕국의 재건에 발벗고 나선 것이군요.


복신은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바로 이곳 주류성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가 울금산성이라는 것이죠. 이곳 울금산성에 집결한 백제인들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왕자 부여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편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서북부 지방 백제 유민들의 호응을 얻어 한때 사비성까지 쳐들어가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지키는 사비성을 포위하자 당나라에서는 유인궤를 급히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백제부흥군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복신은 임존성으로 퇴진하였습니다


이때 복신은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들은 다 죽이고 땅은 신라에게 주기로 약속하였다 하니,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싸우기나 하자."는 격문을 내걸고 백제유민들의 호응 아래 여러 차례 나당 연합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복신을 주축으로 한 백제부흥군은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옹산성, 사정성, 진현성 등을 공격하여 이를 탈환하였습니다. 그밖에 신라군이 금강 상류를 통하여 내려보내는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니 나당연합군은 한때 곤궁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신은 도침과 반목하여 도침을 죽이는 한편, 자기의 세력을 믿고 장차 부여 풍까지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짓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부여 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챈 부여 풍이 먼저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은 백제부흥군 지도부의 분열로 인하여 전후 4년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부안 지역을 배경으로 울금산성에서 백제를 재건하려 사년 동안이나 노력하였지만 그것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이 풍요로운 땅, 소박하고도 세련된 문화가 자리잡았던 이 땅은 신라인들의 외면 속에서 잠시 잠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 백제 땅에서 조용한 새벽을 두드리며 아침을 열어보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이 좌절된 지 약 230여 년만의 일입니다.


서기 892년 신라 서남 해안의 비장이었던 견훤은 벼슬을 그만두고 무리를 이끌고 무진주의 수부인 지금의 광주지방을 탈환하고 백성들에게 자신이 백제 의자왕의 원한도 풀겠다고 선언하여 민심을 모아 지금의 전주 지방인 완산주로 진출해, 마침내 892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이후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 그리고 기존의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을 형성하여 서로 쟁패를 다투었습니다. 특히 927년에는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웠고 또 고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백제는 그 세력이 강성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930년 후백제는 고려와의 안동전투 등에서 크게 격파되면서 주도권은 고려에게 넘어가고, 이어서 934년 웅진 이북(지금의 공주)의 30여성을 빼앗기면서부터 대세는 고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으로 인하여 내분이 일어나 아들 신검, 양검, 용검 등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이에 견훤은 3개월 뒤에 탈출하여 고려에 항복하였고 신라 경순왕도 935년에 고려에 항복하여 1000년 사직을 끝맺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936년 고려 태조는 10만 군으로 후백제를 공격하여 신검 등의 항복을 받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이리하여 후삼국시대는 끝나고 새로이 고려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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