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역사]
신라는 삼국시대 고대국가의 하나로 BC 1세기에 영남지방에서 일어나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한반도의 판도를 가르고 7세기에 최초로 한반도를 통일한 왕조로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하였다. 국호는 신라·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칭하였는데, 모두 마을을 뜻하는 사로(斯盧)로 해석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역사를 3기로 구분하여 통일 이전을 상대(上代),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한 때부터 780년까지의 신라 최대의 전성기를 중대(中代), 혜공왕이 반란군에 의해 죽은 뒤로부터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를 하대(下代)로 나누어 구분한다. 초기의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의 3성(姓)이 주체가 되어 6부족 연맹체를 이끌어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4세기에 들어 내물왕이 왕호를 마립간[통치자]으로 개칭하고, 3성 중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면서 고대국가의 실질적 시조로서 왕권을 장악하였다. 왕권의 안정기에 들어간 신라는 법흥왕 때에 이르러 520년 율령을 공포하고, 528년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고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법흥왕 23년을 건원 원년이라 하였고, 병부(兵部)와 상대등 등 새로운 관제를 설치하여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이룩하였다. 진덕여왕 때 정권을 주도하였던 진골 출신의 김춘추는 상대등 알천(閼川)의 양보로 왕에 추대되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성골 출신의 왕계는 진덕여왕으로 끝이 나고 이로부터 진골출신의 왕계가 시작되었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청원하여 나·당연합군을 편성, 660년 백제를 멸망시켰고, 문무왕은 백제의 부흥항쟁을 진압하는 한편 역시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668년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영토를 조직적이고 능률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전제 왕권의 확립을 위한 지배체제의 정비 및 개편과 새로운 문화창조에 힘썼다. 768년 김대공(金大恭)의 난을 시발로 각간(角干)에 의한 반란이 3년간이나 계속되다가 내물마립간의 10대손 김양상(金良相)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위의 쟁탈전은 더욱 격심해져 하대의 155년 기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이와 같은 왕권의 불안정은 중앙의 행정체제를 뒤흔들어 귀족연립적인 정치형태로 변질되고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로 인하여 지방의 호족세력이 다시 대두되어 후삼국시대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918년 후삼국 중 가장 강대하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의 신하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는데, 신라는 고려와의 친선정책으로 한동안 정권을 유지하였으나 고려가 후백제에 대하여 군사적인 우위를 차지하자, 935년 경순왕은 마지막 화백회의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자진 항복함으로써 시조로부터 56대 왕, 992년을 이어 온 신라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라사회는 골품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고정시킨 귀족 중심의 사회로서, 오늘날 경주에 남아 있는 안압지·임해전·포석정 등은 당시의 호화로운 귀족들의 생활상을 반증해 준다.
한편 농민의 생활은 일본 쇼소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서원경 지방의 장적을 통하여 그 실태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는데, 당시 촌(村)은 10호 정도의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부락을 기준으로 3~4개의 촌을 관장하는 촌주(村主)가 중앙의 통치를 대행하였다.
신라에서는 미술·공예·문학·유학·불교 등이 크게 발달하였다. 신라의 미술은 고분과 불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와 여러 고분에서 나온 출토품들은 매우 세련된 솜씨를 보여 준다. 또한 통일신라의 대표적 예술작품인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문학에서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서 쓴 이두(吏頭)가 만들어 졌으며 삼대목 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하여 왕가의 위업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국사가 편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