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 신라는 국가라는 틀 속에 씨족, 부족, 소국 연맹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독특한 나라이다. 당시 국가들은 대개 중앙집권적 체제를 바탕으로 왕권 중심의 정치를 펼쳤으나, 신라는 그 태생적 특이성 때문에 쉽사리 전제왕권 체제를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원래 진한 6국의 부족 연맹 체제로 출발하였다. 영토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변 소국과 마한 왕실, 가야 왕실 등을 흡수하였고, 통일 이후에는 고구려계 왕족들까지 귀족으로 편입시키면서 매우 복잡하고 특이한 정치 조직을 형성했던 것이다.
신라 사회를 논하자면 반드시 거론하는 것이 골품제도이다. 이 제도는 신라가 6부족 연맹체를 이룰 당시에는 뚜렷한 윤곽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한의 왕족인 김알지계와 왜족 계열인 석탈해계 등이 왕위에 오르면서 가야계가 유입되어 박, 석, 김 왕조와 가야계 귀족이 서로의 기득권을 보장받기 위해 타협한 결과이다. 말하자면 국가의 팽창 과정에서 병합된 소국 혹은 가야와 같은 연맹국 왕실을 귀족으로 편입시킬 때 그 등급의 기준이 되었던 제도였다.
골품제도는 골제와 두품제가 합쳐진 것인데, 골제는 왕실 내부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이는 왕비 간택이나 왕위 계승, 또는 왕실 후예의 신분을 결정하는 잣대였다. 왕실이 팽창되고 그들이 주요 귀족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귀족 사회에 서열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두품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6세기 초에 이르면 골품제로 정착되어 법으로 규정된다. 그 뒤로 400여 년간 골품제는 신라 사회의 계급을 구분하는 원리로 작용하였다.
왕실의 골제는 원래 성골과 진골로 구분됐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또 『화랑세기』에는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이는 대개 어머니의 출신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기준이 밝혀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는 혁거세왕부터 진덕여왕 때까지는 성골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 후로 성골이 사라져 진골이 왕위를 세습했으며, 진골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 무열왕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도 진골과 성골의 구분 기준을 밝히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 기록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학자는 『화랑세기』를 근거로 진골정통을 진골, 대원신통을 성골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단정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자료가 없다.
엄밀히 말해서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진골과 성골의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쩌면 진골과 성골은 그 혈통보다는 왕위 계승권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내막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쨌든 골제가 근간이 되어 골품제는 법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는데, 귀족 6두품과 왕실의 성골과 진골을 합해서 8개의 신분으로 구분되었다. 귀족 중에서도 1, 2, 3품은 비록 귀족이긴 하나 평민과 다를 바 없는 계층이다. 또 4, 5, 6품은 중급 귀족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신분이었다. 진골은 왕족 출신의 상급 귀족으로 관계의 요직을 독식하였다. 그리고 성골이 사라진 뒤에는 진골에서 왕을 배출했다. 또 중급 귀족의 꼭대기에 있는 6두품은 ‘득난(得難)’ 이라고 하여 좀처럼 얻기 어려운 신분이었다. 하지만 이들 6두품도 중앙 관부의 우두머리는 될 수 없었다.
관리에 임명된 사람들은 대부분 4, 5, 6두품과 진골들이었는데, 이들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은 17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4두품은 17관등인 조위로부터 소오, 대오, 길사, 사지를 거쳐 12관등인 대사까지만 오를 수 있었고, 5두품은 11, 10관등인 나마와 대나마까지, 6두품은 9관등인 급벌찬에서부터 사찬, 일길찬을 거쳐 6관등인 아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5관등인 대아찬부터 파진찬, 잡찬, 이찬, 이벌찬 등은 오로지 진골만 오를 수 있었다. 이들 관리들은 두품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 황색으로 관복이 구분되었다.
골품제는 단지 정치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이나 의복, 주택, 생활용기, 우마차의 자재 등에서도 두품에 따른 규제가 있었다.
화백제도 골품제와 함께 신라 정치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규정되는 것이 화백제인데, 화백제는 신라의 독특한 합좌제도이다. 이 제도의 기원은 초기 연맹 국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것이 정착된 것은 상대등 제도가 마련된 후부터이다.
상대등이란 진골, 즉 왕족 출신의 대신을 통칭하는 대등의 의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백회의는 곧 대등들의 합좌이다. 이 자리에서 왕위 계승과 폐위, 전쟁, 선전포고, 그 이외에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 대사를 논의했다.
이 회의는 만장일치제를 원칙으로 하고, 국사를 의논할 때는 이른바 영지를 택해 모였다.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은 진골 중에서도 이벌찬 또는 이찬과 같이 높은 관등에 오른 인물이었다. 때론 상대등을 맡고 있던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화백은 신라의 삼한 통일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대폭 줄어든다. 신문왕 이후 가속화된 중앙집권화와 행정을 총괄하는 집사부 설치로 말미암아 설 자리가 좁아졌다. 집사부 설치 이후에는 이곳의 장관인 시중이 실질적인 행정 수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중을 지낸 인물이 상대등에 오르는 관례가 있었던 만큼 화백은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귀족 사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 조직 신라의 중앙 행정은 법흥왕 이전까지는 부족장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다. 그러다가 법흥왕 때에 병력 관계 업무를 총괄하는 병부가 생겼고, 또 귀족회의 의장인 상대등 제도가 성립되면서 조금씩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진흥왕 대에는 관리의 규찰을 맡는 사정부와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품주가 설치되었다. 진평왕 대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위화부, 선박과 항해를 담당하는 선부, 또 품주로부터 공부와 조부가 분리 독립하였다. 그 외에 수레나 가마 등의 운용 업무를 담당하는 승부, 의례와 교육을 주관하는 예부 등이 설치되었다.
진덕여왕 때에는 김춘추 등의 친당파가 주도 세력이 되어 당나라의 정치를 모방한 대대적인 행정 조직의 개혁이 단행된다. 국왕 직속의 집사부, 품주의 기능을 받은 창부, 입법과 형사를 관장하는 이방부를 설치한 것도 이때이다.
그러다 경덕왕 대에 이르러 모든 관부의 명칭을 당나라식으로 바꿨다. 하지만 17년 뒤인 혜공왕 대에 원래대로 복구하였다.
지방 조직 신라의 지방 조직은 군사 조직과 맞물려 있었다. 신라 초기에는 지방 조직이 모두 각 부족장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그러다 지증왕 대에 이르러 지방을 주와 군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군사 조직의 운용 차원에서 이뤄졌다. 큰 성에 설치한 주의 장관을 군주, 작은 성에 설치한 군의 장관을 당주라고 하였다. 이는 후에 군주는 총관과 도독으로, 당주는 태수로 명칭이 변경된다. 또 작은 규모의 성은 통일기에 이르면 현으로 개편되고, 그 수령을 현의 등급에 따라서 현령 또는 소수라 하였다.
주군 제도와 별도로 소경 제도도 운영되었다. 소경은 작은 도성의 개념이었으며, 주와 군의 지배를 받지 않고 바로 도성과 직결된 특별 행정 구역이었다. 통일 이전에는 아시촌(함안), 국원(충주), 하슬라(강릉) 등지에 설치되었다.
통일 이후에는 지방 조직도 큰 변화를 겪는다. 통일 이후 신라 왕실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결과는 9주 5소경으로 나타났다. 9주는 중국의 옛 우왕 때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의 옛 땅에 각각 3개의 주를 설치하고, 주 밑에는 군과 현을 설치하였다. 이때 9주는 북쪽에서부터 한주, 삭주, 명주, 웅주, 상주, 완산주, 강주, 양주, 무주 등이다. 5소경은 북원경(원주), 중원경(충주),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금관경(김해) 등이다.
주군현과 소경 밑에는 촌, 향, 부곡이라는 마을 단위의 행정 구역이 있었다. 촌은 양인이 사는 지역이고 그 우두머리를 촌주라 하였으며, 향과 부곡은 천민이 사는 곳이었다. 이 두 지역은 모두 현령의 통제를 받았다.
군사제도 신라는 원래 진한 6부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6부병을 편성하고, 왕도를 지키도록 했다. 따라서 이때에는 다소 사병 성향이 강한 각 부의 병력이 지방을 방어했다. 그러다 6세기에 들어와서 중앙집권적인 군사 제도를 확립하고, 왕이 직접 전 군을 다스리는 총사령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각 성의 부대를 당(撞)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발전하여 정과 서당으로 변했다.
진흥왕 대에 왕도 주변의 6개 당을 하나의 대당으로 통합했고, 각 지역도 당을 결합하여 대당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정이라고 하였다. 이때 형성된 정은 총 6개로 왕경의 대당과 상주정, 신주정, 비열흘정, 실직정, 하주정 등이다.
국가 군대 조직인 6정 이외에 화랑도와 같은 별도의 조직이 있었다. 화랑도는 귀족들이 이끌고 있던 사병을 국가가 흡수하여 인재 양성 기관으로 변화시킨 형태였다. 대부분의 귀족 장정이 화랑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화랑도는 6정의 장교를 양산해 내는 교육기관의 성격이 강했다.
통일 후 신라의 군사 제도는 9서당 10정으로 변모한다. 9서당은 중앙군이고 10정은 지방군이며, 이 조직 이외에도 지방군 성격을 지닌 여러 조직이 있었다. 9서당은 신라인 외에도 병합된 고구려나 백제의 군사들이 포함된 것이 큰 특징이다. 10정은 각 지역의 주둔군으로서 각 주에 1정씩 설치되었는데, 한산주는 범위가 너무 넓어 정이 둘 설치되었다.
이외에도 기병 조직이나, 국경 수비대 등 별도의 군사 조직이 더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