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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묵상글(강론글)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05|조회수113 목록 댓글 0

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묵상글(강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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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5일 금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보니파시오 성인은 673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엑시터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성인은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교로 축성되어 마인츠 교회를 
다스리며, 동료들과 함께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우고 재건하였다. 
성인은 프리슬란트(오늘날 네덜란드) 지방에서 
전교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시성하였다.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3,10-17



사랑하는 그대여, 10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처신, 
목표와 믿음, 끈기와 사랑과 인내를 따랐으며,
11 내가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서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내가 어떠한 박해를 견디어 냈던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12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13 그런데 악한 사람들과 협잡꾼들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면서, 점점 더 사악해질 것입니다.

14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17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복음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37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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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에 본당 교우들과 함께한 성지순례를 은혜롭게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특별히 본당 성경반 교우들이 함께하였습니다. 우리 본당에는 수녀님, 부제님, 평신도가 함께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이 있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국 교회에도 ‘청년 성서 모임’, ‘성서 40주간’, ‘성서 100주간’과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 많은 신앙인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 주었고, 특히 젊은이들이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우리는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도 성경을 묵상하며 살아온 분들의 눈빛과 태도 속에서 깊은 믿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순례를 하면서 또 하나 깊이 느낀 점이 있습니다. 공항을 이용할 때 프리체크(PreCheck), 라운지, 글로벌 엔트리(Global Entry)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긴 줄을 서지 않고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프리체크, 기다림 속에서도 편안히 쉴 수 있는 라운지, 입국 절차를 간편하게 해 주는 글로벌 엔트리. 같은 공항, 같은 비행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여정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우리 신앙생활과 참 많이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삶의 ‘영적 프리체크’와 같습니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무엇이 옳은 길인지 분별하게 해 줍니다. 성경은 또한 ‘영적 라운지’와 같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머물며 위로와 평화를 얻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영적 글로벌 엔트리’와 같습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다윗이 성령 안에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라고 고백했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시면서 동시에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단순한 문자로만 보지 않으시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셨습니다. 성 보니파시오 성인 역시 이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였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앙이라는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여정은 달라집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삶의 길이 분명해지고, 어려움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본당의 성경반과 교회 안의 다양한 성경 프로그램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총의 길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지순례에서 받은 은총을 마음에 간직하며,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저희가 말씀 안에서 길을 찾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말씀 안에서 쉼을 얻고 힘을 얻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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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정체’를 깨우쳐주십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율법학자들과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인물로 이해해 왔습니다.
다윗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강대국을 갖추고, 종교,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이루었고, 약 4,000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단과 합주단을 조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다윗은 민족의 희망이었고, 민족 자긍심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로마 통치 아래에 있던 당시의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는 성경 말씀을 근거(2사무 7,12;이사 9,2-7;11,1;12,23;15,22 등)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곧 그들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곧 ‘새로운 다윗왕조의 지상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을 부수어버립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곧 당신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신 메시아”로 밝히십니다.
이는 <시편 110,1>을 인용하여, 예수님 당신의 ‘메시아적 신성’을 계시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혈육으로는 ‘다윗 가문’에 태어났지만, 신성으로는 창조 이전부터 계신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갈라 4,4) 놓이셨고,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로마 1,3). 그러나 그분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면서 마리아의 “주님”이시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면서도 마리아의 창조주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되 위엄으로는 마리아의 “주님”이시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되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며, 세상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말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7)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의 말씀을 “기쁘게” 듣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희의 주님이오니, 당신의 말씀이 저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희의 기쁨이오니, 저희가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주님!
다윗을 만드셨듯이, 저를 만드소서.
다윗을 통로로 삼아 오셨듯이, 저를 통로로 삼으소서.
다윗에게서와 같이,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소서!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다윗의 주님이시듯,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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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성전은 딱딱한 돌과 제도의 공간이지만, 아울러 군중의 숨결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출렁이는 광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신학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메시아, 곧 다윗의 자손’이라는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으시면서도, 그것을 해체하시고자 물으십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종교적 표지가 아니라, 
다윗의 약속에(2사무 7장 참조) 뿌리를 둔 
정치적 종말론적 희망이 응축된 이름이었습니다. 
유다 전통은 그가 왕조를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이 전통을 부정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시편 110(109)편 1절을 인용하시며 물으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님”(마르 12,36)이라 부른다면,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상식을 바탕으로 다시 묻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을 넘어, 다윗보다 위에 놓여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 물음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새로이 보게 하며, 유다 전통에만 머물러 메시아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무뎌진 믿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우리에게도 물음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예수님의 이미지 또한 너무 작지는 않은지요. 
인간의 생각과 습관과 상식 안에서 그저 우리의 기대와 
욕구를 채워 주시는 존재로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 ‘주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성전의 돌기둥 사이에서, 
한 칭호가 무너지고 더 큰 이름이 열리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 또한 날마다 낡고 굳어진 것을 비워 내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더 깊고 넓은 신앙의 고백은 우리의 좁고 편협한 언어를 허무는 데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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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경계를 허물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 당신이 감수한 가장 큰 위험은 무엇입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양극적 사고를 넘어서는 길

경계를 허물기!

2026년 6월 4일 목요일

재키 루이스(Jacqui Lewis) 목사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해 주지에 대해 성찰합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성장하고 발견하는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하게 됩니다. 여러은 자녀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며 지혜롭게 되도 하고, 눈앞에서 형성되어 가는 그 존재로부터 지혜를 얻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무엇이 되어 가는지 지켜보고, 관찰하며, 펼쳐지는 신비를 기뻐하며 누리십시오. 자녀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인도하되, 실험하고 성장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즉 여러분의 아낌 없고 강렬한 사랑은 자녀를 감싸 주며, 그들이 최고의 자아가 될 수 있도록 허락과 자신감을 줍니다. 자녀는 여러분의 사랑 속에서 기뻐할 것이며, 그것은 곧 자신만의 독특하고 놀라운 자아에 대한 사랑으로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깊이 받아들인 자녀는 당당히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충분하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라고요.

어떤 관계에서든 열렬한 사랑은 우리를 경계와 국경을 넘어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서로를 치유하게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즉 애정을 아낌없이 쏟고, 길 건너 이웃이나 지구 반대편의 이웃에게 파격적인 친절을 베풀 때, 우리 사이에는 새로운 공간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발견과 호기심, 배움과 성장의 공간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에 의해 변화되는 공간입니다. 이것은 경계의 공간, '메스티사헤(mestizaje: 혼혈과 혼합, 섞임을 뜻하는 말로 다른 인종이나 문화가 섞이는 과정을 설명할 때 쓰이는 말. 즉 다름 포용하는 로 해석할 수 있음)'의 공간, '양자 모두(both/and)'의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앎을 더 깊게 하고, W. E. B. 듀보이스(Du Bois)가 "이중 의식(double consciousness)"이라 부른 새로운 인식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자기 이야기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타자"의 이야기와 세계관을 통해서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공간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공감을 자라게 합니다. 이것이 곧 "우분투(ubuntu: 아프리카 철학에서 나온 말로 줄루족과 코사족 언에서 유래했음. 직역하면 '나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임)"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눈을 열고, 방 건너편을, 길을, 분열을, 국경을 바라보며 그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 우리의 자비, 우리의 마음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루이스는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어려울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들을 사랑하는 일은 큰 도전이 됩니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불편하며, 그러나 마음을 넓히고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여러분과 혈연으로 맺어진, 도저히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시험일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집 안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들이 여러분을 더 이상 참을 수 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매일 자기-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면서 여러분을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 미칠 지경이게 하는 십대 딸, 독립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들, 성격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여러분으로 하여금 짐을 싸서 떠나고 싶게 만드는 배우자…. 이 친밀한 이웃들 또한 사랑받아야 합니다. 비록 그들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비록 그들을 고칠 수 없더라도, 차이를 넘어 은총으로 붙들며 사랑할 때, 당신은 그들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겪어온 일을 버텨내는 데에는 어떤 지침서도 없지만, 새들이 날마다 나를 구해 줍니다…. 수년 동안 이 숲길을 걸어왔지만, 이제야 새들을 알아차리면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내게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실제로 혈압과 심박수를 낮춰 줍니다…. 나는 오랫동안 새들을 바라보며 즐기는 일이 흑인 퀴어인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새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새들이 지구의 리듬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Lazarus L.

References
Jacqui Lewis, Fierce Love: A Bold Path to Ferocious Courage and Rule-Breaking Kindness That Can Heal the World (Harmony Books, 2021), 109–110, 111–11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eth Macdonald,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강의 하구(河口)는 땅도 물도 아닌, 그 둘을 모두 넘어서는 세계를 드러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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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새 계명인 사랑의 계명입니다.
http://www.ofmkorea.org/ofmkfb/581050  2026.06.04 09:36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새 계명인 사랑의 계명입니다.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들어라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29예수님의 대답은 유다인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치는 신명기의 기도문(‘쉐마’)으로 시작합니다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첫걸음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며그분이 내 삶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인적인 사랑,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30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감정이나 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마음은 내면의 가장 깊은 중심과 의지목숨은 나의 생명과 존재 전체정신은 나의 지성과 생각힘은 나의 육체적 능력과 구체적인 행동나의 모든 역량과 존재 전체를 다해 하느님을 향하는 전인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31예수님께서는 질문자가 묻지 않은 '둘째 계명'까지 함께 묶어서 대답하셨습니다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눈에 보이는 내 이웃(특히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을 내 몸처럼 아끼고 돌보는 행동으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강물입니다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그리고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의 길은 하나의 길에서 만납니다. “이스라엘아들어라.”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되지 않고 들으라는 초대로 시작됩니다사랑은 말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형제의 목소리를 듣고피조물의 신음까지 듣는 사람만이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성 프란치스코도 먼저 들었습니다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나병환자의 침묵을 들었으며새들의 노래와 바람의 숨결 속에서 창조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그래서 그의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관계가 되었고교리가 아니라 삶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무엇인가를 더 많이 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오히려 존재 전체를 하느님께 열어 놓으라는 초대입니다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내 감정뿐 아니라 상처와 두려움까지도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목숨을 다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정신을 다한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복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힘을 다한다는 것은 사랑을 생각으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렇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먼저 내적 가난을 배웁니다내적 가난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은 선물로 아는 것입니다내가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고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집착을 내려놓고내 공로를 내세우려는 욕망을 내려놓고타인보다 앞서고 싶어 하는 비교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비로소 들을 수 있습니다가득 찬 그릇에는 물이 들어갈 수 없지만비어 있는 그릇에는 샘물이 흘러 들어오듯이비워진 영혼 안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들어옵니다그래서 하느님 사랑은 언제나 이웃 사랑으로 흘러갑니다예수님께서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하나로 묶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하느님 사랑은 강의 원천이고이웃 사랑은 그 강물이 흘러가는 길입니다원천만 있고 흐름이 없다면 강은 썩어 버리고흐름만 있고 원천이 없다면 강은 말라 버립니다.


기도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반대로 형제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의 근원을 잊어버린다면 사랑은 결국 지치고 맙니다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숨결이고 하나의 생명입니다그래서 우리의 일상은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공동체 안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형제를 받아들이는 순간노인의 느린 걸음을 기다려 주는 순간아픈 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순간실수한 사람을 비난보다 이해로 품어 주는 순간가족의 반복되는 부족함을 인내로 감싸 주는 순간그곳에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프란치스칸 겸손은 여기에서 더욱 빛납니다겸손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존재할 공간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말하고 싶은 순간에 들어 주는 것붙잡고 싶은 순간에 놓아주는 것지배하고 싶은 순간에 허용하는 것인정받고 싶은 순간에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그것은 작은 죽음입니다그러나 바로 그 죽음 안에서 사랑은 살아납니다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듯이자아의 집착이 죽어야 형제성이 피어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두 개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의 삶입니다하느님 안에 머물며 사람을 사랑하는 삶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만남으로써 하느님을 만납니다그리고 그 길의 중심에는 언제나 작은 이가 계십니다굶주린 사람외로운 사람상처 입은 사람나와 다른 사람때로는 내 곁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까지도그들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 순간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관계 안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을그리고 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피조물과 모든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그 사랑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이며성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이며오늘 우리에게도 열려 있는 복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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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05 04:45


- 모두를 사랑하자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율법 학자들이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기를 바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는 미국에 가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좋은 점이 참으로 많은 우수한 민족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몇 가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이고 극복해야 하지만
유대인들도 문제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선민의식,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저는 미국 생활 후에도 수차 이스라엘을 방문하며 이런 경험이 너무도 많았고,
며칠 전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구호선을 공격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그들의 비인도적인 행위들은
정말 하느님께서 뽑으신 민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걸 읽고 여러분은 근자에 일어난 일을 두고
제가 지금 강론하는 것으로 아셨을 텐데 이 강론은 제가 2010년에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짓이 어쩌면 지금도 이렇게 똑같은지요?
그들에게는 못된 선민의식만 있지 그들은 전혀 선민답지 않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선민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사람과 민족이 선민이고,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와 디모테오가 선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잘 아시다시피 바오로 사도는 인종주의자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오로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같았지만
예수님께 뽑힌 다음에는 참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그 사랑 가르침을 잘 따른 사람이고,
디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잘 따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가르침을 대대로 잘 따라야 하는데
얼마 전 아주 어처구니없는 뉴스를 읽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국회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전 세계 개신교인들이
모인 행사에 한국을 대표한다는 한 개신교 신자가 가자 지구 구호를
위해 가다가 피납된 활동가 때문에 우리 정부가 강하게 비판한 것을
놓고 대신 잘못했다고 사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바오로 사도를 따르는 것입니까?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정신이지
팔레스타인을 말살하고 가자 지구에서 몰아내려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교 정신이 아니고 제정신도 아니지요.


인종주의는 어떤 이유로도 안 됩니다.
혐오주의도 어떤 이유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 세계 모두에게 선포되어야 하고,
전 세계 어디서나 실천되어야 할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이 복음을 실천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박해와 고난을 겪었는지
상기시키며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모두를 사랑하자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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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코 12,35–37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윗 자신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단지 다윗의 자손이기만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성경 퀴즈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가
 메시아를 너무 작게 만들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많은 이는 메시아를
 정치적 구원자, 민족적 영웅,
 눈에 보이는 힘의 인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 역사 안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도 경배해야 하는 주님이심을 밝히십니다.
 곧 메시아는 역사 안에 오시지만
 역사를 넘어서시는 분이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드러난다고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말은
 그분이 참으로 우리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이고,
 다윗의 주님이시라는 말은
 그분이 단지 인간 영웅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뜻합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역사 안에 오신 분이시면서도
 우리를 그 역사 너머의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자기 기대에 맞게 줄이려는 경향을 자주 경계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내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는 분,
 내 편에 서 주는 분,
 내 생각을 뒷받침하는 분 정도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내 필요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다시 정렬하시는 주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내가 다 이해할 수 있는 크기로 축소될 수 없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의 질문은
 결국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단지 위대한 스승으로만 보는가,
 아니면 내 삶의 주님으로 모시는가?
 그분을 역사 속 인물로만 아는가,
 아니면 지금도 살아 계셔
 나를 부르시고 비추시는 주님으로 만나는가?
 아우구스티노에게 신앙은
 그리스도를 아는 정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삶의 중심을 내어 드리는 관계였습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작게 만들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주님을
 내 고민을 해결하는 수단으로만 찾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님의 말씀보다
 내 기대를 더 크게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성찰은
 내가 믿는 예수님이
 정말 복음의 주님이신지,
 아니면 내가 편리하게 만든 작은 예수님인지 묻게 합니다.


성 요한 다마스쿠스를 기억하는 오늘,
 이 말씀은 더 깊어집니다.
 강생하신 주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가까이 드러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묵상한다는 것은
 단지 외형을 보는 일이 아니라
 그분이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성화가 말없이 증언하듯
 복음도 오늘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로 모시고 있는가?
 스승인가, 위로자인가,
 아니면 내 삶의 주님이신가?
 나는 그분을 내 생각 안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말 하느님의 현존 앞에 서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좁은 기대를 넘어
 더 크신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제 생각의 크기로 줄이지 않게 하시고
 다윗의 주님이신 당신 앞에
 겸손히 서게 하소서.
 역사 안에 오신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역사를 넘어 저를 이끄시는 당신을 신뢰하게 하시며
 제 삶의 참된 주님으로 모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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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Bn/2105
박 베로니카26.06.04 19:58


나도 사랑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시는 하느님!




언젠가 공동체 아침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데, 살짝 늦게 일어난 한 청소년이 성전 문 앞에서 쭈볏쭈볏,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저는 활짝 웃으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크게 손짓했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된 청소년은 뒷좌석에 앉아 열심히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야행성인지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을 텐데, 늦게라도 미사에 나와준 것이 감사해서 강론 시간에 크게 칭찬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자주 묵상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신 분, 너그럽고 관대한 분이십니다. 미사 좀 늦었다고 대노하고 격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전 6시, 9시에 포도밭에 일하러 온 부지런한 일꾼들에게도 잘 왔다고 칭찬하시며, 넉넉한 하루 품삯을 건네시지만, 게을러터져서 정오, 오후 3시, 5시에 와서 딱 한 시간만 일한 일꾼들도 어여삐 보시며 똑같은 품삯을 건네시는 편안하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오늘 에수님께서는 하느님,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율법 학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사실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극진히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태어나신 메시아 예수님은 혈육을 취하신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 그분 자체이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도 하느님을 너무 편협된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온 세상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신데, 내 가정, 내 공동체, 나 자신의 사라사욕만을 끝도 없이 채워주시는 자판기같은 하느님으로 오해합니다.


전 세계, 모든 만민, 모든 생명체를 두루 보살피셔야 하는 크신 하느님이신데, 내 고장, 내 혈육, 내 가문, 내 나라만 애지중지하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시고, 지속적으로 복을 베푸시는 편애하시는 하느님으로 착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처럼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좀 더 폭이 넓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분을 나만의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느님으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나와 철저하게 맞지 않는 그도 사랑하는 크신 하느님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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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CX/1937
stellakang  26.06.05 04:23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1)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왕실의 후손 중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할 왕이(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그 믿음은 다음 예언들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미카 5,1).”


36절의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에서
앞의 ‘주님’은 ‘야훼 하느님’이고, 뒤의 ‘주님’은 ‘구세주(메시아)’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는,
“메시아는 적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세상의 통치권을 장악할 것이며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를 지상적인 왕으로만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메시아는 지상적인 왕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왕’이라는 예언입니다.


37절의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는,
“다윗 자신이 메시아를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했는데”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른 분이기 때문에, 다윗보다 더 높은(초월적인)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2) 예수님의 말씀에는
“메시아는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는 메시아”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께서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라는 말은,
“메시아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군중이 바로 알아들었음을 나타냅니다. 만


일에 다윗 왕실을 재건하는 일만 하는 것으로 그치는 메시아라면, 메시아 덕분에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정치적인 독립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일반 서민들에게는 별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지배 계층도, 기득권층도, 계급도, 신분도 없는 나라입니다.


만일에 이쪽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그 나라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이쪽 세상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그 나라에서도 낮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면, 그런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렇게 찬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물론 기득권층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빈손이 된다면...... 그런데 그것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에서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다.’ 라는 말은,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온 삶으로’ 어린이가 되라는 뜻이고, ‘버림’과 ‘비움’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학식이나 명예나 지위나 재산이나 권력 같은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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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2,35-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래된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으십니다. ‘메시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서 말이지요. 물론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맞습니다. 다윗 집안의 후손인 요셉이 그분의 ‘양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그분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 걸 그대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 의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유다인들이 사용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무슨 뜻이며 그 안에 어떤 바람이 담겨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에 근거하여, 다윗 가문에서 태어나는 자손 중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가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메시아가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자기들을 이끌어서 과거 다윗 왕국 시절에 누리던 그 영광과 번영을 다시 누리게 되리라고 기대했지요. 그런 점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 안에는 메시아가 다윗 왕처럼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어야 한다는 ‘바람’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건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의 그런 기대와 바람을 이뤄주어야 해’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그 나라의 주인이신 분께 자기들 뜻을 강요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헤아리고 따라야 하지요. 그런 점을 상기시키시기 위해 예수님은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 구절에서 앞에 나온 ‘주님’은 야훼 하느님을 가리키고, 뒤에 나온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구세주를 가리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단한 존재로 여겨 칭송하는 다윗 임금이 메시아를 언급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그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자기들 뜻과 바람을 그분께 강요할 게 아니라,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군중이 그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고 그들의 마음 속에 참된 희망을 심어주었기에, 그들이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자세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내 뜻과 바람을 이뤄줄 ‘도구’로 삼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순명하고 따라야 할 ‘주님’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참된 기쁨과 희망이 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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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5.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시는 구세주 예수님!~~~






오늘 복음에는 성서 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메시아가 반드시 다윗 임금의 후손일 것이라고 확신했을 겁니다. 사무엘하권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그 나라(다윗의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어떤 고정관념처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유다-이스라엘 민족 역사 안에서 영토를 가장 많이 넓힌 왕이었고, 다윗 임금 시대는 가장 튼튼한 왕권을 자랑하던 시기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들은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이런 다윗 임금과 같은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라고 분명하게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시]라고 일컬어지는 시편 110장 1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의 확신을 흔들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기고 하고, 또 단순히 다윗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을 훌쩍 뛰어넘는 존재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고 하신 이유는 메시아가 다윗과 같은 정치적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시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시는 메시아인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상적 권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고정관념 안에서 메시아를 자신들 생각의 틀에 맞는 존재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의 소설가 G.K. 체스터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을 우리 머릿속에 넣으려 하지 말고, 우리 머리를 하늘 속에 넣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머릿속에 그것을 담아 우리 생각의 틀에 맞추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이나 우주, 진리, 신비와 같은 것은 작은 인간의 머리에 가두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체스터톤은 우리 머리를 더 큰 하늘 속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진리를 억지로 붙잡아 머릿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신비 속으로 우리의 온 존재를 내어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내' 방식대로 다 이해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진리나 신비의 광대함 속에 자신을 맡기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메시아, 즉 구세주가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적 논리를 버리고 겸허함과 경외심을 지닌 채 우리의 이해를 무한히 뛰어넘으시는 그분께 우리 마음의 문을 온전히 열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변모시키실 수 있도록 우리 생각을 틀을 내려놓는 수양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내어 맡김이 바로 명상과 관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내어 맡김의 관상이나 명상은 고요한 가운데 내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을 지켜보는 일일 겁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거나, 아예 시도조차 하지도 못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 논리에 맞추어 메시아를 이해하려는 율법 학자들은 자기들 앞에 서시어 진리와 변모의 길을 선포해 주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던 많은 군중은 변모의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이 군중은 적어도 자기들 생각의 틀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은 단순히 이 세상 나라의 주권 회복이나 해방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하느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일치를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 존재의 현실을 깨달아 서로에 사랑과 관계 회복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육화하신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를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고자 한 의도는 하느님께서 당신 존재성 안에 영원성으로부터 갖고 계시는 의도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시고자 하는 계획을 이미 영원성으로부터 가지고 계셨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관계성인 것이고요!

모르긴 해도 군중 가운데 많은 이는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예수님을 통해 어렴풋이라도 감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마음의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성찰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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