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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연중 제9주간 토요일] 묵상글(강론글). -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이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06|조회수10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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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6일 토요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과부의 헌금 (마르12,38-44)

 

 

1독서<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십시오.>(2티모4,1-8)

 

사랑하는 그대여, 1 나는 하느님 앞에서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나만이 아니라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복음<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12,38-44)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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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코 12,38–44

예수님께서는 먼저

율법 학자들의 허영과 과시를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기며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긴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어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돈을 넣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고

마침내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렙톤 두 닢, 곧 아주 작은 돈을 넣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는 눈과

사람이 보는 눈이 얼마나 다른지 깊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액수를 보고

크기를 보고

겉으로 드러난 무게를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돈의 양보다 마음의 진실을 보십니다.

과부의 봉헌은 작아 보이지만

그 안에는 자기 삶 전체를 하느님께 맡기는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반대로 큰돈의 봉헌도

자기 과시와 안전지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하느님 앞에서는 그 무게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암브로시오의 시선으로 보면

과부는 단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남은 것 중 일부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생계를 포함한 전부를 하느님께 내어 놓습니다.

이것은 무모한 행동의 찬양이라기보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의 상징입니다.

곧 그녀는

자기 삶의 마지막 안전판까지

하느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래서 그녀의 봉헌은

물질의 크기보다

마음의 방향과 믿음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또 예수님께서 이 장면을

율법 학자들의 위선 경고 바로 뒤에 놓으신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는 종교적 열심이 커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과 자기 안전을 더 사랑하는 삶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행동이

하느님 앞에서는 가장 깊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암브로시오는

참된 경건이란

사람에게 보이려는 열심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내어 맡기는 마음이라고 보았습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내가 무엇을 드리고 있는지보다

어떻게 드리고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나는 하느님께 남은 것을 드리는가,

아니면 중심을 드리는가?

나는 봉헌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성찰은

작아 보이는 내 일상 속에서도

진짜로 하느님께 내어 놓은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시간, 관심, 사랑, 기도, 돈, 재능,

그 모든 것 안에서

나는 풍족한 데서 조금만 내놓고 있는가,

아니면 삶의 중심을 참으로 드리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또 이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자리를 함부로 이용하는 위선을 경고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겉으로는 종교적 권위를 지녔지만

실제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습니다.

그래서 과부의 작은 봉헌은

아름다운 개인 경건의 예일 뿐 아니라

종교와 사회가 약한 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드린다고 말하면서

약한 이의 생계를 짓밟는 구조는

결코 거룩할 수 없습니다.

암브로시오의 신앙도

바로 이처럼 가난한 이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는 교회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웃종교 / 생태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과부의 봉헌은

절제와 한계의 영성으로도 읽힙니다.

많이 가진 자의 남는 것보다

적은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마음이

더 깊은 진실을 드러냅니다.

요한 록스트롬이 말한 지구 한계의 통찰도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를 깨웁니다.

많이 쓰고 많이 버리고도 조금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애초에 더 적게 차지하고

더 책임 있게 살며

공동의 집을 지키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참된 봉헌은

헌금함 앞에서만이 아니라

지구와 이웃을 대하는 일상의 절제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내 남는 것인가, 내 중심인가?

나는 작은 봉헌을 가볍게 여기고

큰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약한 이들의 삶을 진정 존중하는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서 그들을 더 어렵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겉의 크기보다

마음의 진실을 보십니다.

주님,

제가 남는 것만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당신께 드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과시보다 진실을,

풍족함의 자랑보다

가난 속의 신뢰를 배우게 하시고

약한 이들의 생명을 더 깊이 존중하게 하소서.

작은 봉헌 속에서도

당신 앞에 온 마음을 드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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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 ‘기술 공화국’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투자자인 Peter Thiel의 생각도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업가를 넘어, 기술이 앞으로 인간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저서 Zero to One에서 “0에서 1로 나아가는 창조”를 강조하며,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발전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기술 공화국’입니다. 앞으로의 사회는 기술이 중심이 되어 재편될 것이고, 그 핵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공지능입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담당해 온 사무직과 지식 노동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휴머노이드입니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로봇들은 생산 현장에서 반복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에너지입니다. 이 모든 기술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결국 지능과 몸, 그리고 힘을 균형 있게 갖춘 나라가 새로운 문명을 선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한 가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중심에는 결국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술은 세상을 빠르게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을 살리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랑과 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의 시대를 살면서도, 더 깊은 인간성과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오스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파견된 후배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1년 전, 교구의 요청으로 그 본당의 상황을 살펴보고 보고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조심스럽게 판단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이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목을 시작하는 신부님을 만난다는 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세 가지 다짐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의 뜻’,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뜻’을 먼저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목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내 뜻’이 앞설 수 있는데, 시작하는 자리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먼저 고백하는 그 모습이 참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 신부님의 길 위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또한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다짐 속에서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사목이 아니라, 이어지는 사목, 다음을 준비하는 사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마음에서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책임을 나누는 그 자리에서 교회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신부님께 환영의 인사를 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신부님을 통해 이 공동체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 마음 안에도 작은 다짐이 생겼습니다. 필요할 때 함께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사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제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남았습니다. ‘잘 되겠구나.’ 하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시작하셨으니,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겠구나.’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 바오로의 권고와도 이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앙은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이렇게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을 알려 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작은 정성을 보십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을 보십니다.

 

세상은 기술 공화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와 에너지가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전혀 다른 원리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위선과 허영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작지만, 정성 어린 헌금을 사랑하십니다. 구원은 능력과 업적이 아니라, 정성과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이 믿음을 간직하며,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작은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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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마음으로 헌신해야 밝혀주십니다.

이처럼,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사실,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동시에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순수한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일일지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 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는 지향이 깨끗해지게 하소서.

당신을 향한 마음이 갈림이 없이 오롯하게 하소서.

오로지 사랑하는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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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나열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언어는 따뜻하고 정겨운 교훈이 아니라 진실을 찾는 논쟁의 칼날이 되고, 그 칼날은 율법 학자들을 겨눕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길이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향한 우월과 교만의 무대가 됩니다. ‘기도’조차도 제 위신을 위하여 길게 늘어뜨린 장식으로 삼으며, 그리스 말 표현에 따르면 과부들의 ‘집마저 삼키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당시 관행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회적으로 취약한 과부들을 위한답시고 재산을 맡아 주면서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성전 제의를 위하여 봉헌하라고 권하면서 재산을 빼앗은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긴 기도는 제 이익을 위한 구실이며,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더욱 무겁게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 뒤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곧바로 장면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헌금함 맞은쪽에서 사람들이 돈을 넣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부자들의 많은 돈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가난한 과부가 가장 작은 동전 두 닢을 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액수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가 그 가치를 결정한다고요.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남는 것을 바쳤으나, 과부는 부족함 속에서 ‘자기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거대한 금과 은을 삼키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동전 두 닢으로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는가’, 또는 무엇을 ‘내맡기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가진 돈과 시간과 노력, 봉사를 바라는가. 아니면 그들의 온전한 삶이 하느님께 봉헌되기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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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마련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모든 이 또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양극적 사고를 넘어서는 길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마련하기!

2026년 6월 5일 금요일

 

리처드 신부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그 모든 복잡한 모습 속에서도 알아가고 존중하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 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과연 "하느님"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하느님은 교리와 교파, 시간과 장소, 민족과 인종, 성별과 성적 경향의 모든 경계를 포괄하고 초월하시며, 우리가 보고 겪고 누릴 수 있는 모든 한계까지 뻗어 계심을 알아차리십니까? 우리는 단지 성별이나 국적, 인종, 피부색, 사회적 계급만으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하느님 안에서의 참된 자아의 특성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잠시 입는 옷, 곧 토마스 머튼이 "거짓 자아"라 일컬은 것을 실체인 자아, 곧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콜로새서 3:3) 영혼으로 착각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믿지 않을 때조차도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 또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사회적 범주(사회에서 인정하는 우리의 구분)가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로서 자신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다른 이들"의 개성과 고유함을 존중하며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서로 다른 은사와 도전을 지닌 고유한 존재로 사랑하시며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을 작게 여기며 "빛을 함지 속에 숨겨 버린다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이루어질 자리가 생겨날 리가 거의 없을 겁니다. [2]

성공회 사제 엘리자베스 에드먼(Elizabeth Edman)은 어린 시절 자신에 대한 기대에 맞서 도전했던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는 1962년 아칸소 주 포트 스미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자라난 세상은 엄격한 이분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지요: 백인/흑인, 자본주의/공산주의, 북쪽/남쪽. 오 맞아요. 그리고 남성/여성. 그런데 그 구분은 저 같은 "톰보이"(남자 같은 여자 아이)에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가 다섯 살 때, 운동화를 고르기 위해 엄마를 억지로 신발가게 남자아이 운동화 코너로 끌고 갔습니다. "엄마, 이리 와봐요! 내가 원하는 걸 보여줄게요!" …

제가 점원에게 신발을 내밀자, 그는 말했습니다. "그건 남자아이 신발이에요."

그러자 엄마가 바로 잘라 말했습니다. "예, 그 운동화 4사이즈로 주세요."

엄마는 성악가였습니다. 엄마가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거룩한 음악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증언할 용기를 갖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우리 엄마가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하늘과 땅 사이의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겁니. 그곳에서 엄마의 가장 좋은 목소리, 가장 참된 자아가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여러분인 바를 그대로 살아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려 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여러분의 온 존재를 거룩함으 향하게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 때문도 아니고, 성경이 요구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여러분인 바 대로 여러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특별한 이유로 복잡하고 고유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존중하고 싶다면 첫걸음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십시오. 여러분인 바가 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으로 창조하신 인격체 그 자체가 되십시오. 아멘.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겪어온 일을 버텨내는 데에는 어떤 지침서도 없지만, 새들이 날마다 나를 구해 줍니다…. 수년 동안 이 숲길을 걸어왔지만, 이제야 새들을 알아차리면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내게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실제로 혈압과 심박수를 낮춰 줍니다…. 나는 오랫동안 새들을 바라보며 즐기는 일이 흑인 퀴어인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새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새들이 지구의 리듬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Lazarus L.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Books, 2021), 36–37.

[2] Richard Rohr, “True Self and False Self,” Daily Meditation, October 24, 2019.

[3] Elizabeth M. Edman, video companion to the book Queer Virtue: What LGBTQ People Know About Life and Love and How It Can Revitalize Christianity (Beacon Press, 201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eth Macdonald,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강의 하구(河口)는 땅도 물도 아닌, 그 둘을 모두 넘어서는 세계를 드러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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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06 03:24

 

-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이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요즘 저는 겸손과 진실 또는 성실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진실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저를 갈수록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겸손에 대해서 반성하고자 하는데

요즘의 저는 겸손한 것 같으면서도 겸손하지 않습니다.

 

예전의 저는 무척 교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저를 아는 것이 저의 겸손이라면 겸손이었기에

저의 교만에 대한 자각이 늘 있었고 그래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만의 면에서 제가 전보다 나아진 것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 제가 겸손해진 것은 아닌데 제가 마치 겸손한 자인 양 삽니다.

 

교만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해야 하는데

교만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겸손인 양 착각하며 산 것이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 것만으로 겸손해졌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요.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론 아직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은 기껏 잘해야 미워하지 않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무관심이라는 쉬운 방법이 있기에 오히려 사랑과 더 멀어질 수 있지요.

그렇지요미워하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관심과 무관계가 아닙니까?.

 

아무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

교만하지 않은 것 자체로 겸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전보다 덜 교만해진 것으로 겸손해진 줄 착각하였던 것인데

이런 저를 깨닫게 해준 계기가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지난주 저는 평화방송 <님따라 한평생>이라는 프로를 위해 인터뷰했습니다.

이 프로는 원로 사제 수도자의 주님을 따른 한 생을 소개하는 프로인데

이번에는 올해 프란치스코 파스카 8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칸 수도자를

찾다가 그렇게 원로도 아니고 자격도 없는 제가 인터뷰를 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제가 겸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1부는 그럭저럭했는데 2부를 마치고 나서는 왠지 찝찝했습니다.

 

왜 그렇게 찝찝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습니다.

1부에서는 부족한 제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어떻게 성소를 되찾게 됐는지

그것을 비교적 겸손하게 얘기한 데 비해 2부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은 저를 드러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풍부히 내렸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했는데

저는 은총이 많아진 그곳에 죄가 많아진 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선은 다 하느님의 것이고,

내 것이라고는 죄와 악습밖에 없다고 했는데

어찌 죄인에게 내려진 은총이 아니라 은총을 받은 나를 자랑하려고 했는지.

 

죄는 은총과 만나야 하지만

은총은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고 보존되는 것임을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닫고 뉘우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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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깨끗하고 투명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이 글은 침묵과 기다림 안에서 발견한 복음의 핵심을 깊이 있게 담으려 했습니다그 중심에는 "하느님께서는 유능한 사람보다 투명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진리가 놓여 있습니다프란치스칸 영성의 관점에서 보면이것은 바로 내적 가난의 신비입니다내적 가난은 자신을 비우고 무능력해지는 것이 아니라자신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무엇인가를 이루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남보다 더 옳고 더 높고 더 거룩해 보이고 싶은 마음결과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침묵은 바로 그 비움의 자리입니다침묵 안에서 우리는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세상은 내가 붙들고 있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공동체는 내가 통제해야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사람들은 내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하느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기 전에도 이미 일하고 계셨고내가 떠난 뒤에도 계속 일하실 분이십니다그래서 기다림은 수동적인 포기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가장 깊은 신뢰가 됩니다침묵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존재인지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만나게 됩니다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도구로 삼으십니다.

 

깨지지 않은 항아리가 아니라 금이 간 항아리를 통하여 빛이 새어 나오듯이상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을 통하여 자비가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복음은 강한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니라 투명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바로 그 투명함의 절정을 보여 주셨습니다그분은 힘으로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아 승리하지도 않으셨습니다오히려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희생양의 구조를 당신 몸으로 받아내심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인류 역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고누군가를 배제하고누군가를 희생시켜 공동체의 안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희생양이 되심으로써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 바치는 마지막 희생 제사가 아니라희생 제사의 종말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그분은 당신의 죽음으로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종교"를 끝내시고 "자비 위에 세워지는 하느님 나라"를 열어 놓으셨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 호세아의 말씀을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자비는 상대를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자비는 죄를 묻기 전에 상처를 보는 눈입니다자비는 누가 더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침묵과 기다림은 결국 우리를 이 자비로 이끌어 갑니다침묵 안에서는 비교가 사라집니다기다림 안에서는 경쟁이 사라집니다자비 안에서는 우열이 사라집니다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의 진실을 발견합니다우리는 완성된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비추는 창문들이며완전한 빛이 아니라 빛을 통과시키는 작은 등불들이며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담고 있는 연약한 그릇들입니다그러므로 우리의 소명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욕심과 두려움과 비교심이 조금씩 사라질수록우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입니다침묵은 바로 그 자비가 자라나는 공간입니다그 침묵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하느님께는 쓸모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거룩한 사람도 죄인도모두가 하느님의 빛이 통과하는 서로 다른 창문이며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이 머물고 지나가는 거처이며모두가 하느님의 자비가 세상에 드러나는 살아 있는 성사라는 것을그래서 기다림 끝에 남는 가장 깊은 고백은 이것입니다.

 

"주님제가 무엇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주님제가 당신 빛을 가리지 않는 투명한 창문이 되게 하소서제가 무엇을 소유하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당신 자비가 제 안을 지나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소서제가 높아지게 하소서가 아니라당신 사랑이 드러나도록 작아지게 하소서그리하여 제 삶 전체가 당신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의 통로요 도구가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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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 선포자에게 필요한 세 가지!

 

 

 

오늘 첫 번째인 독서 티모테오 2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스승 바오로 사도께서 제자이자 동료 사목자인 티모테오에게 착한 목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근조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사제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은 사제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번째 의무요 과제인 복음 선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 복음 선포는 일생에 한두번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입니다. 사제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선포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하십시오.” 복음 선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건강이 허락해도,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 들어가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② 복음 선포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복은 선포 여정에 반대와 몰이해, 시련과 박해는 필수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덕이 끈기와 인내의 덕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면서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류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해야 합니다. 낙담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자극도 필요합니다.

 

③ 주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다시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높은 시련의 파도가 다가올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당당히 중심을 잡고,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단한 것이, 제자들이나 동료 사목자들에게 그럴듯한 훈시 말씀만 건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말하고 생각하고 선포한 것을 있는 그대로 당신이 사셨습니다. 말과 행동, 가르침과 구체적인 생활이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를 향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정신없이 달려온 복음 선포 여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또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이토록 당당하게. 이토록 자랑스럽게 자신의 지난 세월을 소개할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마치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밀도 높은 삶을 살았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는 단 하루, 단 한 순간도 주님 외에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생애가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생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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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난한 과부의 헌금』


1) 여기서 ‘율법학자들에 관한 말씀’은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말씀’은 참된 신앙인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위선자들이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의 큰 문제점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는, “너희는 율법학자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입니다.


율법학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나타나엘’처럼 ‘진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요한 1,47).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는, 거룩한 사람인 척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이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긴다는 말씀은, 자기를 존경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마주치면 존경한다는 뜻으로 공손하게 인사했고, 회당 예배 때나 잔치 때에는 그들을 위해서 윗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 존경은, 진심으로 하는 존경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는 비웃으면서 겉으로만 하는 존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존경받는 것을 즐기는 쪽만 위선자였던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는 쪽도 위선자였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는,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흉내 낸 것, 또는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일 뿐입니다.

2)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탈출기에,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라는 율법이 있습니다(탈출 22,21).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3) ‘가난한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하느님을 사랑한 신앙인으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그 과부처럼 그렇게 하고 싶은데도 형편이 안 되어서 못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괜히 주눅 들기도 하고, 자기가 뭔가 많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말씀이,
그 과부를 본받으라는 뜻이긴 하지만, 누구다 다 전 재산을 바치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헌금(성금)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형편이 안 되어서 그 과부처럼 가진 것을 다 봉헌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가진 것을 다 봉헌한다고 해도, 칭찬받고 싶은 명예욕으로,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율법학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힘없는 과부들에게서 빼앗은 돈 가운데 일부를 봉헌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강도짓 같은 일로 빼앗은 돈을 봉헌한다면,
아무리 큰돈을 봉헌한다고 해도, 그것을 봉헌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감히 하느님을 자기들 범죄의 공범으로 만드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돈이든지 무슨 제물이든지 간에,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정말로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어야 합니다(레위 22,17-25). 그 전에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봉헌하는 사람 자신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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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자기 죄와 허물을 인정하는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경자 베다(672–735)는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이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긴 겉옷을 입고 다니거나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는 것을 즐기는 것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에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을 꾸짖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무엇을 나무라시는 줄을 잘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옷을 차려 입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겉으로만이라도 존경을 받는 것이 당시 율법 학자들에게는 당연한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런 현실을 직시하게 해 주었을 때 그들이 분노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의복은 우리의 알몸을 가려주고 추위나 다양한 환경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긴 하지만, 인간 문화 안에서 사람들의 자기 이미지와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특별한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이것이 나야!" 하고 말해 주는 강력한 언어가 되기까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옷은 하나의 언어인지도 모릅니다. 제복은 군대, 경찰, 성직자 등 특정 계급의 소속을 드러냅니다. 언어는 같은 언어를 쓰는 공동체 내의 합의이기에 개인적인 언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 언어는 아무 소용이 없는 언어겠지요? 마찬가지로 특별한 제복이나 모자도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복을 입거나 모자를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예복과 제복, 배지나 휘장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불안하며 다른 이들의 인정을 갈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제가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의복이나 제복 등에 의지하는 것에는 이보다 더 위선적이고 사악한 의도가 숨겨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복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리를 이루어서 다른 약한 이들을 착취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율법 학자들이 그런 옷차림을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활용하지 못했다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9세기 비잔틴 교회의 신학자이자 성서 주석가였던 테오필락토(Theophylact) 주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들에 대해 더 실랄한 비판을 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남편의 보호를 잃은 과부들에게 다가가 자신들이 그들의 보호자인 척하며, 기도하는 사람, 경건한 사람으로 가장하여 그들을 속이고 결국 그 과부들의 집까지 삼켜 버렸다"라고요.

율법 학자들은 율법 지식이 모든 지혜의 총체이며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지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면 그 믿음은 불안해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정체성을 위협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랍비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특별한 모자도 쓰지 않으셨지만, 그들을 논쟁에서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끊임없이 적대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적대감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위선과 착취를 꿰뚫어 보시며 이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하십니다.

당시 과부는 가난과 무력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여인이 남편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체성 없는 가난한 과부가, 피상적인 정체성에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흔히 이 이야기를 가난한 과부의 관대한 헌신에 관한 경건한 이야기로 이해합니다만, 사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관대함은 분명 칭송받을 만하지만, 예수님은 사실 그 과부와 수많은 다른 힘 없는 이들의 관대함을 착취하는 제도와 그 제도에 매달려 자기들의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특권층에 있는 사람들이 약한 이들을 착취한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당연한 것으로 그 제도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예수님의 비평적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방향 전환을 도모하고자 한 율법 학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특별한 돌파구가 열렸을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은총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인정하는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은총의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총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런 율법 학자들처럼 아무리 큰 위선자들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며 감사의 정과 겸손의 정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 삶에서 오는 다른 불편함들이나 부족함들을 기꺼이 끌어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여기서부터 방향 전환이 시작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가경자 베다나 테오필락토 주교는 단순히 복음서에 나오는 율법 학자들만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들 시대의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이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 길을 열어 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계시니 저도 자그나마 희망의 빛을 보며 이 사랑과 자비의 주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이 새로운 하루라는 은총 안에서 깨어 도전하는 삶을 시작해 보겠노라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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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6. 연중 제9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에 박영희님 이 올리심.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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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2,38-44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정성인 ‘기도, 자선, 단식’을 행함에 있어서 율법학자들의 교만하고 위선적인 모습과 가난한 과부의 겸손하고 소박한 모습을 서로 대비시켜 보여주십니다. 먼저 복음의 전반부에서는 율법학자들을 강도 높게 질타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모든 행위를 “남에게 보이려고”, 즉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과시하여 보여줌으로써 그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기도, 자선, 단식을 실천하는 것은 불결한 것을 멀리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화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느님과 보다 가까워지기 위함입니다. 즉 그 기도, 자선, 단식은 하느님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재계’(齋戒)인 것이지요. 그런데 종교 지도자라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그런 재계를 행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은 헤아리려고 하지 않고, 그 행동을 통해 자기들이 영광을 누릴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악표양’이 되고 있으니 강도 높게 비판하신 겁니다. 
 
한편, 복음의 후반부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소박한 봉헌을 칭찬하십니다. 많은 부자들이 헌금함에 큰 돈을 넣은 것에 비해, 그녀가 봉헌한 돈은 고작 ‘렙톤 두 닢’, 오늘날 우리 화폐가치로 따지면 3천원도 안되는 적은 금액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시지요. 그건 그녀가 봉헌한 ‘액수’만 보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셨기 때문입니다. 거들먹거리며 큰 금액을 헌금함에 턱하고 집어넣은 부자들 다음 차례에, 보잘 것 없이 적은 금액을 봉헌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자기 처지가 너무나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겨우 저것밖에 안내느냐’며 자신을 비웃고 업신여기는 이들의 모욕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율법학자들처럼 ‘남에게 보이려고’가 아니라,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좋은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했기에, 그런 부끄러움과 업신여김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봉헌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런 그녀의 봉헌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참된 재계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분께 도움이 되고자 하는 그녀의 정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고자 노력한 그녀의 삶 전체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다른 이들처럼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즉 자신의 ‘일부’를, 그나마도 남들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이 빼앗기듯 내놓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봉헌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우리와 완전히 하나되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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