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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앞당겨도 살고 영원히도 사는 행복 등.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08|조회수84 목록 댓글 0

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앞당겨도 살고 영원히도 사는 행복 등.

1~2차(03:50), 3차(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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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강론글) 1차분 전일 늦은 오후나 04시전에 올립니다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 오늘은 1~2차분을 합하여 2차분 올리는 시간보다 먼저 올립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일찍 올리셨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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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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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08 02:55


- 앞당겨도 살고 영원히도 사는 행복






오늘 복음은 주님의 행복 선언이지만
저는 어떤 사람이 불행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제 생각에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은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은 행복 욕심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바람을 쐬고 있으면 그것이 행복인데 그것을 모르고,
지금 내가 잘 먹고 변을 잘 보면 그게 행복인데 그것을 모르고,
지금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을 알면 행복할 텐데 그걸 모르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계속 있으면 그게 행복인데 그게 행복인 줄 모르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면 그게 행복인데 그게 행복인 줄 모르고,
아무튼 지금 내게 있는 행복들을 보지 못하기에 불행인데 그걸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행복한 줄 모르는 사람은 행복할 줄도 모릅니다.
행복 비결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한 줄도 행복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행복 비결은 무조건 행복한 것이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도 바로 이 행복 비결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비결은 딱 한 가지 조건만 채우면,
곧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조건만 채우면 행복할 수 있고
그래서 나머지 조건은 행복의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햇빛 한 줌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가난이 있다면
또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소유했기 때문이라면 다른 조건들은 조건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너희는 불행하다는 불행 선언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너 코라진아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불행한 줄 모른다는 것은 자기가 행복한 줄 안다는 것이고,
지금 행복하기에 미래에 불행하게 될 걸 대비치 않는 불행이며,
지금의 행복에 취해 영원한 불행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불행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행복에 안주합니다.
회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릅니다.
칭찬에 귀가 먹은 행복이 불행인 줄 모릅니다.
영원을 생각지 않는 행복이 불행인 줄 모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여덟 행복을 말씀하시면서
지금 여기서의 행복도 말씀하시고
종말론적인 행복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입니다.
그 행복을 앞당겨도 살고 영원히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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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5,1–12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입을 여시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과 다릅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 가진 사람, 인정받는 사람,
고통을 피한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비어 있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로움에 목마른 마음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곧 행복은 조건을 다 갖춘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의 방향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오리게네스는
복음의 말씀을 읽을 때
겉으로 드러난 문장 안에 담긴 영적 길을 깊이 보려 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참행복 선언은 단순한 위로의 문장이 아니라
제자가 걸어야 할 내적 길의 지도와 같습니다.
마음의 가난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안에 하느님 자리를 남겨 두는 상태입니다.
슬퍼함은
절망의 갇힘이 아니라
세상의 상처와 자기 죄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온유는
힘이 없어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머물기 때문에 폭력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행복의 길이
겉의 성공보다 내면의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행복은
언젠가 보상받을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가 스며들기 시작한 삶의 징표입니다.
하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이 안에 이미 시작되고,
위로는 슬픔 속에서도 이미 다가오며,
평화는 온유한 사람 안에서 이미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멀리 있는 약속이면서 동시에
지금의 존재 방식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특별히 성실 / 온유 / 절제의 열매와 깊이 맞닿습니다.
성실은
참행복의 길에 끝까지 머무는 힘입니다.
세상이 다른 행복을 약속해도
복음의 길을 쉽게 버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온유는
오늘 복음 그 자체의 중심 열매입니다.
강한 말과 거친 손으로 세상을 얻으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방식으로 사람과 관계를 대하는 힘입니다.


절제는
즉각적인 만족과 눈앞의 성공에 끌려가지 않고
무엇이 참으로 복된 길인지 붙드는 내적 자유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도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행복이 세상의 박수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오리게네스의 시선으로 보면
제자의 길은 늘 내적 싸움을 포함합니다.
복음적 행복을 사는 사람은
때로 이해받지 못하고
때로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며
때로 외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길 안에 하늘 나라의 깊은 기쁨이 숨겨져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거룩한 독서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은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행복이라고 부르며 살고 있는가?
사람들의 인정인가,
통제할 수 있는 안전함인가,
눈에 보이는 성과인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 열려 있는 마음인가?
성찰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붙드는 행복의 기준이
복음의 기준과 얼마나 다른지를 조용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정말 복음의 행복을 믿고 있는가?
나는 마음의 가난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온유를 약함으로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의로움과 자비, 평화를 위해
성실하게 머무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참행복의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
세상이 말하는 행복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복음의 참행복을 배우게 하소서.
마음의 가난과 온유,
자비와 평화의 길에 성실히 머무르게 하시며
무엇이 참으로 복된 삶인지 아는 절제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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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모처럼 교구 사제들이 함께했습니다. 80년대에 신학교를 다녔던 선후배 사제들입니다. 오스틴으로 새로 온 신부님을 환영하는 자리였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주 볼 수 없었지만, 미국에 와서는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만큼 미국 생활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하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의지가 됩니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그 자리에는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신부님, 7개월이 지난 신부님, 그리고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이 함께했습니다. 저는 어느덧 8년이 넘었습니다. 한 달이 갓 지난 신부님은 아직 모든 것이 낯설고 바쁜 시간입니다. 그래도 먼저 그 길을 걸어간 동료 사제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7개월이 지난 신부님은 이제 막 하늘을 나는 새처럼 의욕이 넘칩니다.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은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처럼 여유가 있고, 말과 표정에서 감사가 느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제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에게 생긴 작은 원칙은 ‘오늘 하루’입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드리면 그것이 쌓여 과거가 되고,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모여 미래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행복 선언’, 또는 ‘진복팔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은 성공하고, 많이 가지고, 인정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행복은 소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의 행복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욕심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행복은 눈에 보이는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진복팔단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길입니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성적이 올라 부모님께 칭찬받았을 때, 뜻밖의 도움으로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서류가 순조롭게 준비되어 영주권이 나왔을 때, 기도의 응답으로 아픈 교우가 치유되었을 때,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의 순간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마치 도파민이 매 순간 계속 생성된다면 오히려 몸에 해가 되는 것처럼, 기쁨도 늘 같은 강도로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순간의 행복’이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에 감사했다면, 아픔의 시간에도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릴 때뿐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참된 행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상황을 바꾸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의 평화를 심어 줍니다.
 
저는 행복은 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길이 생깁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이웃과 함께 걸어갈 때 그 자리에 행복의 길이 생깁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로 살 수 있다면, 기쁨의 순간에도, 고난의 순간에도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이 말씀은 결과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초대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감사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복의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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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참 행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곧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먼저,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대체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행복하여라”(μακαριοι)는 용어는 <성경>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행복을 말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강조를 둡니다. 특히, 이 용어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선언됩니다(시 1,1; 2,12; 119,1-2; 128,1-2; 루카 1,42-45; 11,27-28; 마태 16,17).
또한,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은 어떤 특정 상황이나 특정 태도가 지니는 가치 기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영적 가난, 슬픔,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의로움 등 인간적 특정한 상황에서의 특정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결국, ‘참 행복’ ‘복음적 인간’‘복된 인간’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우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한 마디로,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4,10) 하셨으니, 회개한 이들이야말로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는 부유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는 부유하게 된 이들입니다.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가슴이 찔린 까닭입니다.
이들은 ‘온유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들’입니다.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인 까닭입니다.
이들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이들’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은 까닭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깨끗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입니다. 당신 손이 이끄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된 까닭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에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질 줄을 알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질 줄을 알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을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주님 면전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참 행복”을 따라 사는 이들이 참으로 복된 이들이요, 참 제자들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린 까닭입니다.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진 까닭입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여진 가닭입니다.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은 까닭입니다.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신 까닭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인 까닭입니다.
주님,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으로 행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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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는 군중과 제자 모두를 향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시작하고 또한 끝맺습니다(마태 4,25; 7,28-29 참조). 
산상 설교는 특정 민족이나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보편적 가르침입니다. 
먹고사는 문제, 울고 웃는 문제, 그리하여 이 삶을 
그토록 모질게도 살아 내야 하는 까닭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 선언은 현재 상태를 미화하거나 치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함, 슬픔, 무력함, 굶주림이라는 인간의 낮은 자리를 들추어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5,3)은 하느님 나라를 억지로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부족함을 견디며 하느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가난은 유다의 쿰란 공동체가 말하던 
‘영 안에서 낮아진 이들’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들은 유배의 고통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 내며, 자신의 힘 없음이 
오히려 하느님을 향한 기회이자 초대가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행복 선언이 그리는 현실의 ‘슬픔’은(5,4 참조) 역사 속 
이스라엘이 겪은 상실과 폐허가 된 시온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이 선언은 현실이 팍팍하여 가난과 
힘겨움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합니다. 
힘이 없기에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약하고 부드럽기에 ‘온유’합니다(5,5 참조). 
‘의로움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은(5,6 참조) 단순한 윤리적 욕망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정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삶을(5,7-9 참조) 꿋꿋이 살아 내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박해받는 이들에게(5,10 참조) 약속된 하늘 나라는, 
세상이 짓밟은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뒤집어 주실 새로운 질서가 됩니다. 
그 질서가 가리키는 행복은 현실의 찬란한 성공이 아니라, 
상처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조용한 회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기어이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어이’를 붙들고 살아 내는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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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관계성의 패턴!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는 것은 성부·성자·성령의 사랑과 일치 안에서 우리의 존재와 온 우주의 질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신적 교환의 신비를 끌어안기

관계성의 패턴

2026년 6월 7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삼위일체를 관계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를 하느님과 생명 전체와의 더 깊은 친교 안에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지에 대 성찰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천재성은 우리의 우주를 새롭게 배열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라 불리는 이 존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오직 이 하느님이 완전한 주심과 완전한 받으심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친교와 수용, 그리고 관대함이며, 성부·성자·성령 세 위격 사이의 완전히 자유로운 대화입니다. 모든 것은 셋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현실의 근본적 틀입니다. 현실은 끊임없는 자기 내어줌과 겸손한 수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아는 존재의 형태입니다. 삼위일체는 현실의 근원이며, 그 패턴이자 목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의 놀라운 점은 물리학자와 천문학자 같은 많은 과학자들이 현실의 상호연결된 본성이 참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통해 그들은 완전한 관계의 동일한 패턴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실이 무엇이든 간에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과거에 알던 것이며, 우리의 조상들이 직관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알던 진리입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 특히 서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상호연결성이나 상호존재의 가능성을 사실상 무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주로 지적으로 믿음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개인주의자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런 종교 이해는 참여의 신비가 아니며, 내어줌의 신비도 아닙니다. 오히려 올바른 정보를 얻으려는 탐구일 뿐이고, 이는 우리를 더욱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만들 뿐입니다. 그 결과 공동체는 점점 불가능해지고, 이는 정치와 국제 관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만 갇히게 되고,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던지는 유일한 질문은 "나는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아의 질문이지, 우리 안에 계신 삼위일체의 질문이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관계로 정의하는 이 근본적 이해로의 회심입니다. 오직 그 회심을 겪은 사람들만이 왜곡되지 않은 방식으로 예수께 회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삼위일체의 일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은 단지 민족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 권력의 도구, 천국행 티켓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로 회심해야 합니다. 오직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를 초대하시는 신비와 구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침묵 속에 더 깊이 자신을 내어맡길수록 더욱 평화로워집니다. 기도와 확언은 마음을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침묵이 함께할 때 그 순간에는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매 순간 우리 모두 안에서 흐르는 ‘존재의 강’과 하나가 됩니다. 내가 모든 것과 하나임을 깨닫는 것은 나에게 깊은 멈춤을 줍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이 함께하기를!
—Dave A.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Divine Dance: Exploring the Mystery of Trinity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04). Available as MP3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hivam Mistry,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끊임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신비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비워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흘러 들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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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성체성사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분의 혁명적 사건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분의 혁명적 사건입니다


우리가 바뀌어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바뀔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몸이며 쏟는 피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분의 혁명적 사건입니다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혁명은 성체성사의 신비로 드러납니다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내가 더 착해지면더 거룩해지면더 많이 기도하면하느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실 것이라고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를 말합니다우리가 바뀌어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하느님께 사랑받기 때문에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며우리의 완성에 대한 칭찬도 아닙니다그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아직 부족하고 미성숙했을 때아직 제대로 사랑할 줄도 몰랐을 때 이미 먼저 다가온 사랑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그 사랑의 가장 혁명적인 사건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그런데도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끝까지 충실히 따르면 내 몸을 내어주겠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오히려 당신을 떠날 사람들에게조차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이 복음의 충격입니다성체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은총입니다.


성체는 완전한 사람들의 식탁이 아니라상처 입은 사람들이 치유받는 식탁입니다성체는 거룩한 사람들의 특권이 아니라거룩하게 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의 양식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성체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우리는 다만 놀랄 뿐입니다. "주님어떻게 이런 저를 사랑하십니까?" 그 놀라움이 감사가 되고감사가 변화가 되며변화가 사랑이 됩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은 단순히 성체를 받아 모시라는 명령이 아니라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초대입니다그 사랑을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조금씩 그분을 닮아 갑니다.


판단하던 사람이 이해하게 되고미워하던 사람이 용서하게 되며붙들고 있던 사람이 놓아주게 되고높아지려 하던 사람이 낮아지게 됩니다이것이 성체성사의 열매입니다프란치스칸의 눈으로 바라보면 성체는 하느님의 끝없는 겸손입니다창조주께서 빵이 되시고전능하신 분께서 한 조각 음식이 되시며높으신 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시는 사건입니다그러므로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빵이신 그분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나 또한 형제들을 위하여 내어주는 빵이 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결국 성체성사의 가장 깊은 의미는 이것입니다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고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으며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성체는 그 사랑의 기억이 아니라 그 사랑의 현존입니다.


오늘도 그분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은 마침내 자신도 세상을 향해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이 몸은 형제들을 위하여 내어주는 몸입니다이 삶은 사랑을 위하여 흘려지는 삶입니다." 그때 성체는 제대 위에만 머무르지 않고우리의 일상과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복음이 됩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생명을 내 안으로 모시는 신비입니다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거룩한 예식을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그분의 삶의 방식그분의 사랑그분의 내어줌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내 존재 안에 받아들이는 일입니다예수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고 말씀하십니다이는 세상이 주는 만족으로는 인간의 깊은 허기를 채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우리는 빵을 먹고도 다시 배고프고물을 마시고도 다시 목마릅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그분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오시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그리고 나 또한 그분의 몸처럼 부서지고그분의 피처럼 흘러 누군가의 생명이 되도록 초대받는 것입니다성체성사는 받아먹는 사랑이며 머무는 사랑이며나누어지는 사랑입니다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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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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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만 원 짜리의 행복!






나이를 조금 먹어가면서 행복에 대한 기준이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벌고, 더 인기를 얻고, 더 대박을 내고...그러면 더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바도 참 많습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재산과 부동산을 보유하게 된 거부들, 행복할 줄 알았는데, 반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산 상속 때문에 벌어지는 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광경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 병고에 시달리게 되니,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쓰고 싶어도 걸어다니지를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하늘 높이 금자탑을 쌓았지만, 결국 열심히 죽 쒀서 개 주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재산이 행복 불행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참 행복은 소소한 일상 안에 담겨있음을 자주 체험합니다. 저같은 경우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그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든 뭔가에 열심히 몰입할 때입니다. 몰입의 대상이 좀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보다 복음적이고 생산적일 때, 느끼는 기쁨은 더욱 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 참된 행복, 진복팔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한 대목 한 대목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 같이 작고, 보잘것없고, 상처투성이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는 말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사는게 너무 바빠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파 눈이 핑핑 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 원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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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2)> 
 
1)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 말씀이 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이 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기를 바란다면”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기쁨, 평화, 안식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약속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실현되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중에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행복하게 될 테니, 가난해도 참고 살아라.”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가난에 굴복하지도 말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가난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여라.”입니다. 
 
가난에 굴복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등지고 돈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가난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가난을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한’ 상태로 오해한다는 뜻입니다.
가난은 우리가 힘을 합쳐서 극복해야 할 고통입니다.
누구에게나 가난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난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다가 결국 중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황에 공동체가 무관심하다면, 그 무관심은 큰 죄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일은,
대부분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사도 4,34).
이 말은, ‘남들보다 더’ 궁핍한 사람도 없었고,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도 없었다.’ 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먹을 때 함께 먹고 굶을 때 함께 굶는다면, 모두가 똑같이 그렇게 한다면, 가난함이 고통이 되지 않고, 그런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금방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행복하여라.”를 “행복하기를(구원받기를) 바란다면”으로 읽으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하늘나라만 추구하여라.”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이 가르침은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이 말씀에서 ‘부자’는, 하느님은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마태 6,24).
부자가 되기만을 바라는 사람도 포함됩니다(1티모 6,9).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3)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이들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분이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참 행복 선언’ 말씀은 그 자격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 됩니다. 
 
지금 현세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해서,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은 생각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잊은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자격을 얻을 수 없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이 가르침은, 지금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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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만으로 차고 넘치는 복된 삶을 향하여...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보복하려는 마음과 복수의 기회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나 크든 작든 이런 유혹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볼 때 이런 복수의 장면이 나오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이유는 그런 장면들이 우리 내면의 복수심을 간접적으로 해결해 주는 심리적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자주 이런 감정에 무의식적으로 휘말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이러한 "인간적"(그러나 사실은 비인간적인) 경향을 넘어,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태도를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바로 그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태도, 곧 진복팔단의 길을 제시합니다. 진복팔단은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인의 헌장입니다.

사실 당시 랍비들은 제자들과 토론할 때 서거나 걸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율법을 공식적으로 가르칠 때는 반드시 앉아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따라서 마태오가 굳이 "앉으셨다"라고 기록한 것은, 이어지는 가르침이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복팔단은 산상설교의 중심이며, 산상설교는 복음 전체의 심장과도 같은 가르침인 것입니다.

세상은 권력, 명예, 부, 성공 등과 같은 세상적인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기준을 뒤집으십니다. 세상에서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가난한 이, 슬퍼하는 이, 온유한 이, 의로움에 목마른 이, 자비로운 이, 마음이 깨끗한 이, 평화를 이루는 이, 박해받는 이—이 오히려 "참으로 복되다!" 하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진복팔단은 마치 높이뛰기 선수들이 계속 바를 높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을 한층 더 높여 줍니다. 그 핵심은 단 하나, "하느님만으로 차고 넘친다"는 깨달음입니다.
삶 속에서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왜 나는 진실하게 살려 하는데 고통이 왜 이리 많이 오는가?"
"왜 불의한 자들은 잘되고,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은 멀리 있는 것 같고, 부정한 방법을 쓰는 사람은 성공하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가?" 등등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복음의 원문이 사용하고 있는 "복되다"(μακάριος-makarios)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 이 질문들을 화두로 삼아 풀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를 우리 말로 "행복하여라!" 하고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 이 번역이 충분한 번역은 아닙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린 대로, 이 단어는 "복되다!" 하고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복된 상태 우리의 감정 상태와는 무관하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객관적 상태를 뜻합니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감사하지 못해도 이미 주어진 은총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아기가 자기 부모의 사랑을 모른 채 엄마나 아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다면 그 아기는 그 자체로 "복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행복의 상태는 감정의 순간적 상태에 불과합니다. 날씨처럼 변덕스럽고, 상황에 따라 쉽게 바뀝니다. 그래서 행복은 붙잡을 수 없고,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복수는 한 순간의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언제나 곁은 지켜 주신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어쨌든 복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복인 것이고요...
물론 그 상태를 의식한다면 그보다 더 금상첨화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만으로 차고 넘치는 복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행복하여라!"가 아니라 "복되어라!"입니다. 곧, 마음(영)이 가난한 이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은총 안에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으로 차고 넘치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중세 신학자들이 사용한 beatitudo(베아티투도)라는 라틴어도 단순한 감정적 행복이 아니라,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정렬된 상태, 곧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바르게 서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가 약하고 스스로 의지할 힘이 없을 때,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삶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성품—자비, 온유, 평화—를 우리도 조금씩 살아낼 때, 그 복됨을 깨닫게 됩니다.
진복팔단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상화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우리의 초상화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진복팔단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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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2.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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