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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묵상글(강론글). - 세상의 빛이란 것이 영광스러운가? 부담스러운가? 등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09|조회수10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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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묵상글(강론글) 
1차(04:15), 2차(04:58), 3차(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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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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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명칭(名稱)’과 호칭(互稱)‘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명칭은 주체가 ‘나’입니다. 나의 노력과 나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초등학생 때 ‘반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내가 반장이 되려는 이유를 발표하고, 친구들이 투표해서 반장으로 선출되면 그때부터 선생님도 친구들도 ‘반장’이라고 부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저는 신용 협동조합 ‘업무 이사’를 했습니다. 명칭은 업무 이사이지만 하는 일은 신학교 매점의 ‘사장’이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서품받은 후에 저의 명칭은 ‘보좌 신부’였습니다. 교우들은 저를 보좌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작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8년의 보좌 신부 기간을 지낸 후에 교구는 저를 본당 신부로 임명했습니다. 그 뒤로 저의 명칭은 주임 신부,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있을 때는 ‘교육 담당 신부’라고 불렸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가 교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을 때는 ‘성소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미주가톨릭 평화 신문에서 일할 때는 ‘사장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호칭은 나의 행실과 행동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때로는 나의 외모와 말투를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신학생 때 친구들은 저를 ‘조자룡’이라고 불렀습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은 싸움에 능했고, 관우와 장비처럼 도원결의했던 동지는 아니었지만, 제갈공명과 더불어 유비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는 판매부 사장도 하였고, 타종 반에서 삼종기도를 치기도 했고, 연극반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이런 외적인 활동을 보면서 친구들이 그런 호칭으로 저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직책이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동과 행실이 국민의 뜻을 저버린다면, 그 행동과 삶이 독선과 독재의 길을 걷는다면 국민은 그런 대통령에 대한 호칭을 부정적으로 만들어서 부르곤 합니다. 그런 대통령을 ‘광인(狂人)’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도 부하직원들은 상급자의 행동과 행실에 따라서 그에 걸맞은 호칭으로 부르곤 합니다. ‘천사, 멋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악마, 욕심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호칭’에 대해서 궁금해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하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왔다.’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는 옳게 대답하였다. 내가 너를 반석이라고 부르겠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호칭을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음식의 맛을 살립니다. 빛은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힙니다. 소금과 빛은 겉으로 드러나는 명칭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우리의 희생과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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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사명을 밝히십니다. 곧 우리의 신원과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 말씀은 쌍날칼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찌릅니다.
곧 내가 하는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할까? 혹 욕하지는 않을까?
또 내 행동이 진정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가? 아니면, 내 자신을 향하여 있는가?
또 내 행실은 사람들 앞을 비추고 있는 빛인가? 아니면, 뒤에서 궁시렁대며 불평하는 어둠인가?
그런데 대체, 왜 우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인 까닭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하신 그 사랑 때문이요, 이미 우리가 그 사랑을 먹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행하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그리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소금처럼 녹아들고’ ‘불처럼 태우되’ 그것을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신원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마태 5,13-14)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원이 ‘세상을 향하여’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세상’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비추는 빛이요, ‘세상 안에서’ 녹는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 안에서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와 불의를 막고 하늘의 맛을 내는 ‘소금’이요, 자신을 ‘태워’ ‘세상’을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는 다른 삶’, 세상에 살되 세속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彼岸)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비추는 이들이요, 단지 어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막아내고, 빛을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이끌어 가는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의 사명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이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빛”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로서 빛이신 분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사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Lumen Gentium)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마태 5,16)




주님!
제게서 착한 행실의 빛이 타오르고,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제가 타오를 수 있음은 제 안에 당신의 심지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불을 붙이시어 제 심지를 태우소서.
영의 바람을 일으키시어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제 몸뚱아리를 녹이고서야 빛이 되어 밝힐 수 있기에,
부서지고 사라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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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으로 인간의 부족함을 드러내신 뒤, 
곧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을 한 번에 규정하십니다. 
신앙인은 가난해도, 부족해도 이미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고 “세상의 빛”(5,14)입니다. 
이 말씀은 격려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선언입니다. 

소금과 빛은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이를 향합니다. 소금은 녹아 사라지며 맛을 내고, 
빛은 어둠을 밝혀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소금은 고대 세계에서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정화하고, 보존하며, 제물과 함께 바쳐졌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소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움’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제자들이 행복 선언에서 드러난 삶의 방식, 
곧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소금이지만 소금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쓸모없음은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자기 본성과 정체성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는 
행위는 제맛을 잃은 소금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5,16)를 찬양하게 하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서 6장이 말하는 위선적인 드러냄
(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등경 위의 빛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끝내 숨겨지지 않아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으니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무엇을 위한 마음’을 지녀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자연스러운 오늘의 ‘나로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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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긍정적인 관계성!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사랑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이며, 사랑 밖에서는 아주 빠르게 죽어갑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신적 교환의 신비를 끌어안기

긍정적인 관계성

2026년 6월 8일 월요일

리처드 신부는 관계성을 단순한 인간적 필요가 아니라 하느님과 현실의 본질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하느님이 절대적인 관계성(relatedness)이심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좋은 관계 안에 붙들어 두시는 궁극적인 생태계라고 우리가 부르는 이름입니다(콜로 1,17 참조). 우리가 눈앞에 있는 현실과 정직하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우리를 위하여 계속 일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벌거벗은 채로, 연약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완전히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의존하는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벌거벗은 연약함"이란 곧 타자성(다른 사람의 존재성과 그 영향력)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영향을 주도록 허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우리가 타자성이 우리를 바꾸거나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우리 삶에 대한 어떤 권한도 주지 않는 셈입니다. 홀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차단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사실 아무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처럼 절대적인 관계성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참으로 사랑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이며, 사랑 밖에서는 아주 빠르게 죽어갑니다. 삼위일체로부터 출발한다면, 사랑의 관계가 곧 보편적인 패턴, 즉 우리 존재의 본질이 니다.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에서 출발해 그것이 사실은 사랑이라고 모든 사람 설득하려 하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저는 50년 넘게 사제로 살아오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두려워한다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사랑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때로는 오히려 덜 사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모습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두려움에 기초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기만 하고,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 안으로 끌려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성령은 어떤 면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성령)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성령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있는지 규정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집단만 성령이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집단적 자기도취일 뿐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단계에서는 모든 집단이 하느님을 자기 주머니 속에 넣으려 하고, 하느님께서 자기 집단만 사랑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나 거룩한 신비를 찾는 것이 아니라, 통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곧 작은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며, 자신을 우월하게 느끼고 홀로 서려는 욕망일 뿐입니다.

저는 이 거룩한 신비를 통제하거나 지휘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단 하나, 제가 언제나 모든 것을 통해 끊임없이 이끌려 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하나의 하느님 현현(顯現)이나 '당신 자신을 드러내심'(epiphany)은 언제나 저에게 완전한 자기-내려놓음(항복-surrender)과 친교, 그리고 깊은 친밀함을 요구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침묵 속에 더 깊이 자신을 내어맡길수록 더욱 평화로워집니다. 기도와 확언은 마음을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침묵이 함께할 때 그 순간에는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매 순간 우리 모두 안에서 흐르는 ‘존재의 강’과 하나가 됩니다. 내가 모든 것과 하나임을 깨닫는 것은 나에게 깊은 멈춤을 줍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이 함께하기를!
—Dave A.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and Cynthia Bourgeault, The Shape of God: Deepening the Mystery of the Trinity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04).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hivam Mistry,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끊임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신비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비워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흘러 들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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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마태오와 루가의 참 행복 선언에 대한 비교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의 참행복 선언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두 복음을 함께 읽으면 복음의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장소의 차이
마태오 복음 (마태 5,1-12)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십니다. 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나이 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묘사하며,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법을 선포하시는 분으로 보여줍니다.


루카 복음 (루카 6,20-26)
예수님께서 평지에 내려오셔서 가르치십니다. 평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자리입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서 계시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2. 행복 선언의 대상
마태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가난을 영적인 차원까지 확장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으로 말하면 내적 가난, 곧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입니다.


루카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루카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 계심을 강조합니다.


3. 행복 선언의 개수
마태오, 8가지 행복 선언,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 영적인 성장의 계단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루카 4가지 행복 선언,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사람,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4. 불행 선언의 유무
마태오, 행복 선언만 있습니다. 루카, 행복 선언 뒤에 곧바로 네 가지 불행 선언이 나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지금 배부른 사람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불행하여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루카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세상의 가치와 정반대임을 더욱 강하게 보여 줍니다.


5. 신학적 강조점
마태오의 관심, "어떤 사람이 하느님 나라 백성인가?" 제자의 내면과 영적 태도를 강조합니다. 가난, 온유, 자비, 평화, 깨끗한 마음과 같은 내적 변화에 초점을 둡니다. 루카의 관심, "하느님 나라는 누구를 향하는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굶주리는 이들, 우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관심을 강조합니다. 사회적 정의와 자비가 중심입니다.


프란치스칸 관점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이 두 복음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루카의 가난을 실제로 살았습니다. 재산과 권력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동시에 마태오의 마음의 가난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가장 작은 형제로 여기며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참행복은 단순히 물질을 적게 가진 상태도 아니고, 마음속 생각만의 영성도 아닙니다. 참행복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서면서도 마음은 하느님께 온전히 열려 있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힘이 있어도 온유를 선택하고, 상처를 받아도 자비를 포기하지 않으며, 세상의 성공보다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입니다. 마태오는 행복한 사람의 내면을 보여 주고, 루카는 행복한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둘을 하나로 묶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라. 거기에 이미 하늘 나라가 있다.”


참된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이미 품고 사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채우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이미 하늘 나라가 시작됩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사랑했기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그 눈물은 버려지지 않고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위로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힘으로 이기려 하지 않고 부드러움으로 머무는 사람입니다. 그는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땅과 사람과 생명을 품는 사람이 됩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기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 갈망은 마침내 하느님의 충만으로 채워집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그 상처를 먼저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가 베푼 자비는 다시 그를 감싸는 자비가 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잡한 욕망과 계산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향해 단순해진 사람입니다. 그 단순함 속에서 그는 하느님을 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갈등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갈라진 마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은 진실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가 잃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 나라는 이미 그의 것이 됩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이 많아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가난과 눈물과 온유와 자비와 평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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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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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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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빛이란 것이 영광스러운가? 부담스러운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내게 영광스러운가부담스러운가생각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2-30대 때는 마땅히 그런 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후에도 염광교회니 염광고등학교니 개신교 신자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그들도 그렇게 하는데 우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고 갈수록 나 같은 죄인이 어찌 감히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겠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어둠이 되지 않고 악 표양이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이고 태도인데 그러나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라 얼치기 겸손이거나 거짓 겸손입니다.
그 부담스러운 걸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겸손이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는
우리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주님 말씀하셨는데
죄인인 우리가 감히 주님처럼 세상의 빛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아담처럼 감히 주님과 같아지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자 당신 신성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만 때문이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빛과 소금의 사명에 참여해야 하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맘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선을 나누는 선행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며
나의 선을 나누거나 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실천이 그리 어렵지도 않고 실천도 가능합니다.


요즘 저는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최정숙 선생님의 전기도 읽고 답사도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자기를 위해서 착하게 살고 옳게 살고 사랑으로 일생을 사신 분인데
그렇게 사시니 그것이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었던 것이었고,
또 독립지사가 되고 의사도 되고 교육자도 되고 교육감도 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분이 나를 위해 하느님 자녀와 프란치스칸으로 산다고 생각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면
위선자가 되거나 너무 부담스럽고 힘이 들어 결국 포기해 버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되고 묻게 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길 포기하고 편하게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어렵고 힘들어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저는 당연히 답을 알고 있고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알기에 오히려 묻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안다면 그렇게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묻지도 생각지도 않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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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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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5,13–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그리고 이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단지 자기 영혼만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 파견된 존재임을 보여 줍니다.
대 바실리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경건으로 닫아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소금과 빛의 비유는
복음이 인간 내면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관계와 역사 안에서
실제로 작용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소금은 눈에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음식을 보존하고 맛을 살립니다.
빛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을 보이게 합니다.
이처럼 참된 제자는
자기를 드러내기보다
세상이 썩지 않게 하고
타인이 길을 찾게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이라고 하신 말씀은
아주 깊은 경고이기도 합니다.
신앙이 이름만 남고
복음의 힘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이지만
삶 안에서 자비와 진실,
정의와 책임, 사랑의 향기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대 바실리오는
바로 이런 빈껍데기 신앙을 경계합니다.
가난한 이를 외면하면서 기도만 길게 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교리를 자랑하는 것은
소금이 짠맛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은 삶의 맛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빛이 나 자신에게로 시선을 끌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참된 빛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게 하기보다
하느님을 찬미하게 합니다.
대 바실리오는
자선과 선행, 공동체적 책임이
하느님 영광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선행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통로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성실 / 온유 / 절제의 열매와도 깊이 이어집니다.
성실은
한순간 번쩍이는 빛이 아니라
오래 타는 등불처럼 꾸준히 복음의 자리를 지키는 힘입니다.
온유는
소금처럼 조용히 스며들며
세상을 살리는 힘입니다.
절제는
빛을 내세우기보다
빛의 근원이신 주님을 드러내도록
자기 과시를 줄이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빛은
요란한 자기 선전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태도의 정직함 안에서 드러납니다.


대 바실리오의 시선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도
오늘 말씀 안에서 매우 선명해집니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부패와 무관심, 폭력과 탐욕 속에서
복음적 양심을 지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절망과 혼란 속에서
희망과 진실의 방향을 비추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세상을 피해 숨는 일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더 깊은 책임을 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자기만 맑아지려 하지 않고
세상을 조금 더 맑게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참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빛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신앙의 이름은 지니고 있지만
복음의 맛은 잃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착한 행실로 하느님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더 큰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 사람을 세상 안의 소금과 빛으로 부르십니다.


주님,
제 삶이 짠맛을 잃지 않게 하시고
당신 복음의 향기를 오래 지니게 하소서.
빛을 숨기지 않게 하시되
그 빛이 저를 드러내기보다
당신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실과 온유와 절제 안에서
세상을 살리는 작은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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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 
 
 

가만히 저를 돌아보니 제가 좀 싱거운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에 진실성이 없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실없는 말, 애매한 말을 남발해서 주변 사람들을 햇갈리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주 다짐을 합니다.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좀 진중해지자고. 비록 우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음식 속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 음식을 맛갈지게 만드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자고. 
 
맛에는 참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매운맛, 신맛, 단맛, 쓴맛...다양한 맛이 우리 미각을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맛의 배경이 되며, 다양한 맛을 조화시키고 어우르는 재료는 아무래도 소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때로 보관이 잘못되거나, 지나치게 오래 방치해 놓으면, 소금 고유의 짠맛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짠맛이 사라진 소금, 그거 어디에 쓰겠습니까? 
 
눈이 내린 후 얼어붙은 빙판길에 뿌리면 도움이 되려나요?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쓸모없는 존재,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공공단체, 도무지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는 모임,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며, 자기들끼리만 희희낙락하는 공동체...
바로 예수님께서 강력히 경고하시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모습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몇 가지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새삼 소금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물 조절을 실패한 나머지 물에 퉁퉁 불어터진 밋밋하고 심심한 라면 먹는 것은 고문입니다.
간 조절이 안된 매운탕, 소금 없이 먹는 삶은 계란...참 고역입니다.
어떻게든 소금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대단한 것 같고 요란스럽지만 실속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뭐든 다 합니다만, 결실이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주는 것이라곤 씁쓸함이요 쓴 맛입니다. 요란한 괭가리에 불과한 삶입니다. 
 
그러나 소금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야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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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1)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
(2)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따로 떼어서 구분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면, 그 삶이 곧 신앙의 증언이 되고 복음 선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신앙인 자신이 먼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 선포와 신앙의 증언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나 혼자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 잘해서 구원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자기 혼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관심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등불로 모든 사람을 비추라는 예수님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신앙인은 동방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별처럼(마태 2,9)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이 말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다.’는 신앙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3) 13절의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는 ‘탈렌트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8-30).” 
 
여기서 ‘쓸모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도,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밖에 버려진다.’ 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 멸망한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은
그냥 쓸모없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다시 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인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그래서 이 말씀은, “계속 그렇게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쩔 수가 없다.” 라는 말씀일 뿐이고,
구원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제 맛을 잃은 소금’에서 ‘본래의 맛을 찾은 소금’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4) ‘쓸모없다.’ 라는 말을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신앙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신앙인답게 살면서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즉 신앙인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쓸모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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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참으로 깨어 우리 안에 주어진 빛을 의식하려는 수양~~~






"산 위에 세워진 마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탈리아를 갈 때마다 보는 광경이지만, 이번에 이탈리아 성지 순례를 다니면서 이탈리아의 오래된 마을들이 거의 다 산 위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사실 이탈리아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런 높은 자리에 도시를 세우는 것을 선호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은 노인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그리 좋지 않은 위치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불편한 곳에 집을 지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이유는 전쟁을 대비하여 적이 다가오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높은 곳에 세워진 도시는 적의 눈에도 숨기기 어려웠겠지만, 반대로 적이 침략해 오는 것을 쉽게 알차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높이 있어도 눈을 뜨고 경계하며 지켜보지 않는다면 헛일이겠지요?! 그러니 이런 높은 곳은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시에 관해서만 해당되는 비유가 아닙니다. 인간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골짜기는 잠과 무의식을 상징하고, 언덕과 산꼭대기는 깨어 있음과 경계심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지(聖地)는 높은 곳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시온산, 타볼산, 시나이산(이스라엘), 몽생미셸(프랑스), 크로아 패트릭, 스켈리그 미힐(아일랜드), 태백산, 마니산, 묘향산, 계룡산 등(한국)…. 그 목록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는 단지 특정 종교만의 본능이 아닙니다. 인류 보편의 감각이지요. 힌두교인들은 시바가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에 거한다고 말합니다.

무의식을 선택하면 우리는 어둠의 골짜기로 내려갑니다. 잠을 자는 것이지요. 잠은 하나의 골짜기와 같습니다. 잠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실질적 의식을 잃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단순한 잠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을 만들어, 그것을 지나치게 보고 있으면 깨어 있는 시간마저 잠과 같은 상태로 바꾸어 버립니다. 더 깊은 잠으로 몰아넣는 약물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젊은이들에게 기묘한 자살 충동까지 생겨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중문화는 잠과 무의식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도피가 되고, 종교적 자기 초월을 흉내 내는 자기 상실로 변질됩니다. 술, 마약, 성(性)마저 이런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도망칠까요? 의식은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언덕 위에 선다는 것은 곧 깨어 있어야 하고, 드러나야 하며, 상처받을 수 있음을 아는 것인데, 그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깨어 있기 때문에 더 힘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를 파묻는지 모릅니다.
꿩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꿩은 위험에 직면하면 수풀과 같은 곳에 머리만 숨긴다고 합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머리 크기가 몸의 5%쯤 되는데, 그것을 숨기면 자신 전체가 숨겨진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머리를 숨기는 것은 적을 돕는 꼴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꿩은 실제로 머리를 숨기지 않지만, 우리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혹은 오늘 아침만 돌아보아도, 직접적인 체험에서 도망쳐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 순간들을 헤아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어떤 의식적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해져 있는 고정관념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의식으로의 도망은 어떻게 보면 속편한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이는 참된 기도와 명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인 이성적 분석이나 잡 생각을 다 내려놓고 깨어 진정한 현실을 바라보려는 수양과는 영 딴판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숨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요한 8,12). 그러나 우리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는 깊은 당혹감을 느낍니다.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시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안에 이미 심겨져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우리 안에는 꺼지지 않는 빛, 곧 바오로 사도가 말한 "하느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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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9.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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