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묵상글(강론글) 미우면 미운 대로 등
1 ~ 2차(04:30~:40), 3차(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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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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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10 03:13
- 미우면 미운 대로
오늘 저는 독서와 복음을 연결하여 묵상하고 싶었습니다.
열왕기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대비되고,
복음에서 큰사람과 작은 자가 대비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시작을 작은 자에서부터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일까?
바로 드는 생각은 자기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자기 안에 자기밖에 없는,
수용할 그릇이 작아 자기밖에 없는 자입니다.
남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하느님께서 들어갈 자리는 더더욱 없는 자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복음의 기쁨> 2항의 한 구절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고립의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헌이 얘기하는 ‘내적 생활’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누가 기도를 많이 하며 관상 기도라는 것도 하고,
요가나 마음 수련 또는 영신 수련을 열심히 하고,
좋은 강의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듣지만
그것이 다 마음 안에서 불안을 몰아내고 평안을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런 것들을 아무리 해도 그에게는 이웃과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없고
고립 안에서 그리고 이기주의의 외로움 중에서 계속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알의 예언자들도 이런 자들에 속합니다.
그들이 기도를 처절하게 하고 황홀경에 들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하느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황홀경은 어떤 황홀경입니까?
마약으로 인한 황홀경과 무엇이 다릅니까?
부두교도들의 황홀경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기도한다고 하는 우리에게도 심각한 경종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기도였는데
우리 기도는 하느님을 불러오는 데 실패한 바알 예언자들의 기도와 같지 않을까요?
나의 기도 안에 아예 하느님이 안 계시기에
마음의 평화는 있지만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닌가요?
나의 기도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이기는 하지만
나의 독방에 주님을 모셔 들여 밀애를 나누면서,
이웃은 밀애 방해꾼으로나 여기고 밀쳐냄으로써
이웃을 위한 사랑의 자리가 없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늘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밀쳐내고 하느님만 모셔 들이려고 하지만
사람을 밀쳐내면 내 안에서 하느님도 밀어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Deus Meus Omnia!’ 하며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모두시여! 라는 뜻도 되지만
나의 하느님, 모든 것이시여! 라는 뜻도 됩니다.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이시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모든 것이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아야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한 사람이라도 제외하면 나는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지 못해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누구를 미워할지라도 미우면 미운 대로 품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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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5,17–1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그리고 이어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십니다.
또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옛것을 무너뜨리고 전혀 다른 길을 여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가장 깊고 완전하게 드러내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율법은 단지 규정의 집합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없애시는 분이 아니라
그 참뜻을 밝히시고
사랑 안에서 충만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할 때
언제나 부분이 전체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
옛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충만해지는지를 깊이 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한 규범 준수의 강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더 깊은 의미를 얻는다는 선언입니다.
옛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중심을 찾고
사랑 안에서 제자리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하신 말씀은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진지하고 섬세한지를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큰 방향만 말씀하시고
작은 것은 아무렇게나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작은 계명, 작은 순종, 작은 진실, 작은 사랑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실은
거창한 결단보다
작은 것에 오래 충실한 태도와 연결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풀어 버리는 것과
계명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것을 대비하십니다.
이는 신앙이
생각이나 말의 수준에만 머물지 않고
삶으로 전해져야 함을 뜻합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의 신비를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이 완성하신 하느님의 뜻을
내 삶 안에서 구현하는 일입니다.
신학은 삶을 떠나 완성되지 않고
삶은 하느님의 뜻을 비출 때 더 깊어집니다.
성실 / 온유 / 절제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성실을 아주 분명히 가르칩니다.
작은 계명 하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
작은 선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내 일상 속에까지 스며들게 하는 태도,
그것이 성실입니다.
온유는
자기 해석으로 모든 것을 뒤엎으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질서를 공경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절제는
내 편의에 맞게 계명을 줄이거나 왜곡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 앞에 나를 맞추는 내적 자유입니다.
오늘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에
이 말씀은 더욱 깊습니다.
일치는 큰 주장만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작은 진실, 작은 신뢰, 작은 사랑,
작은 충실함들이 쌓여 공동체를 살립니다.
교회의 일치도
하느님의 뜻을 크게 말하는 데만 있지 않고
작은 계명조차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겸손한 순종 안에서 자랍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뜻을 큰 틀에서만 말하고
작은 순종은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사랑의 이름으로
정작 하느님의 질서를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작은 계명, 작은 약속, 작은 책임에
얼마나 성실한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작은 것 안에서 당신 뜻을 완성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
당신 뜻을 크게만 말하지 않게 하시고
작은 것 안에서도 충실하게 하소서.
하느님의 질서를 사랑하는 온유를 주시고
제 뜻대로 줄이거나 바꾸지 않는 절제를 주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길을
기쁨으로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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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경제 이론 중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다 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한 지혜입니다. 한곳에 모든 것을 투자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큰 손실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산 투자를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은행에서도 고객의 투자 성향을 묻습니다. 공격적인 투자도 있고, 안정적인 투자도 있습니다. 저는 비교적 안정적인 투자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분산할 수 없습니다. 내비게이션도 목적지를 하나 정해야 길을 안내합니다. 목적지를 여러 곳으로 설정하면 결국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조금, 세상도 조금 붙잡으려 하면 결국 어느 쪽으로도 제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한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오직 하느님께 두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 넘었고,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숫자로 보면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하늘에서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양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의 차이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오랜 시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힘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근의 미국과 이란 사이의 충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군사력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다시 협상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잠시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완전한 평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긴장과 불안 속에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힘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평화는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신뢰와 명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중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본당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 수가 많고 시설이 좋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공동체도 있습니다. 미국 본당에 세 들어 살아가며 많은 제약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작은 공동체일수록 서로를 더 잘 알고, 더 깊이 나누고, 더 따뜻하게 함께합니다. 장례가 나면 모두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나눕니다.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는 숫자와 시설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도 세상의 성공이나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갈라놓는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투자는 분산하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있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개인의 삶도, 공동체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모을 때 비로소 참된 평화가 시작됩니다.
엘리야처럼 혼자 남은 것 같아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참된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의 방향을 다시 정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랑입니다. 흩어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직 주님을 향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전쟁과 갈등 속에 있는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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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맨 먼저 하신 일은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고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시선에는 안식일 법을 어기는 일에 해당했습니다. 그리고 구마를 하시면서 정결례 법을 어기시고, 또 단식법을 어기셨고, 뿐만 아니라 율법을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셨고, 죄를 용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겉으로는 ‘율법의 파괴자’처럼 비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문자적이고 형식적으로 지켜지던 율법을 본래의 정신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율법을 ‘먼저’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타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그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지키고 가르치며,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닌 행실로 사랑하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며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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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기존 율법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을 이루려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본디 의미를 끝까지 찾아, 목적지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은 ‘참된 의미를 밝힌다’는 뜻으로, 율법을 철저히 따르거나 빈틈없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가 뜻하고 의도하는 바를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율법의 규범과 실천은 늘 그대로 이어 오지만, 더 이상 형식적으로 되풀이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율법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참조).
그러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5,18)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율법들처럼 율법의 어떤 규정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져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처럼 어떤 규정들은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됨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유연성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든 지키든, 누구나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5,19 참조).
율법은 단죄의 도구가 아니라 하늘 나라로 초대하고자 하는 하느님 자비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삶의 질서이며, 그 질서는 예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논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어기는 이에게도 율법의 이름으로 사랑과 연민과 자비를 전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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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서로 안에 머묾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지를 드러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신적 교환의 신비를 끌어안기
서로 안에 머묾(Mutual Interabiding)
2026년 6월 9일 화요일
CAC 명예 교수 신시아 부르조(Cynthia Bourgeault)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 바로 ‘상호 내주(서로 안에 머묾)’의 체험, 곧 하느님과 서로 안에서 하나 되는 경험임을 강조합니다.
이 [하느님 나라]의 의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어떤 분리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을 떠받치는 두 가지 핵심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하나 됨(Oneness)"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동양적 의미에서 "존재의 동일성", 곧 '내'가 그 자체로 신성하신 분과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것은 완전한 서로 안의 머묾입니다. 곧 "나는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내' 안에 있으며, '나'는 하느님 안에 있고, 우리는 서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신 상징은 바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4–5)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하십니다. 또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씀하시지만, 이는 당신만의 배타적인 특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은총의 현실이라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서로 안에 머묾"으로 인해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는 분리가 없으며, 이는 하느님의 사랑의 불가분의 실재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하느님은 우리 안으로 흘러오십니다. 사랑의 본성이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줄 때, 포도나무는 가지에 생명과 일치를 주고, 가지는 포도나무가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전체와 부분은 서로 사랑으로 응답하며 함께 살아가고, 서로에게 속하며 서로에게 의존하여 사랑의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분리 없음의 비전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분리가 없다는 것도 똑같이 강력하면서도 도전적인 개념입니다. (구약성서를 인용한) 예수님의 가장 잘 알려진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마르 12,31; 마태 22,39)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언제나 그것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대개 이 말씀을 "네 이웃을 네 자신만큼 사랑하라."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거기에는 "만큼(as much as)"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이는 곧 '네' 이웃을 '네' 존재의 연속으로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웃이 곧 완전한 너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두 개의 개별적 존재가 서로를 희생시키거나 자선을 베푸는 관계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위대한 생명의 두 세포일 뿐입니다. 각각은 똑같이 소중하고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두 세포가 서로 안으로 흘러들어가며 그 하나의 생명을 안에서 체험할 때, "다른 이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요한 15,13)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크게 확장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불가분의 실재가 곧 유일한 참된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여든 살이 된 사람인데, 가톨릭 신자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CAC의 활동을 통해 신시아 부르조와 지역의 지혜 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시아의 책들과 그녀가 인용한 저자들의 책을 통해, 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심지어 말할 수도 없었던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저는 예수님이 실제로 누구셨고 지금도 누구이신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 삶의 마지막 해들을 맞이하면서, 드디어 제 영성에 꼭 맞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 제가 열정을 느끼고, 의미가 있으며, 저에게도 합리적으로 다가오는 길을 찾게 된 것입니다.
— Mary F.
References
Cynthia Bourgeault, The Wisdom Jesus: Transforming Heart and Mind—a New Perspective on Christ and His Message (Shambhala Publications, 2008), 30–3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hivam Mistry,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끊임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신비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비워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흘러 들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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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026.06.09 19:41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세상의 소금은 첫째 맛을 내는 역할과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맛을 내는 역할은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소금이 없으면 싱겁습니다. 세상에 기쁨과 활력, 그리고 ‘살맛'을 더하는 존재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부패를 막는 역할입니다. 소금은 음식을 상하지 않게 지키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세상이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선한 영향력을 뜻합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과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주 작은 불빛도 밝게 빛납니다. 절망이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를 뜻합니다. 또한 빛은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두운 밤길의 등대처럼, 사람들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따뜻한 행실로 본을 보이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이 말씀은 단순히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라기보다, "너희는 이미 세상에 꼭 필요한 소중한 존재다"**라는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격려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엇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이미 그렇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명령하시기보다,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고 불러 주십니다. 이것은 성취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이미 심어 두신 정체성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맛을 살립니다. 빛은 자신을 위해 빛나지 않고 누군가의 길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관계 안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지켜 주고, 지친 이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며, 어둠 속에서 작은 희망 하나를 켜는 삶입니다.
프란치스칸적으로 말하면, 소금과 빛은 작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리는 존재입니다. 드러나지 않아도 깊이 스며들고, 높아지지 않아도 따뜻하게 비추며,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삶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너는 세상에 없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누군가의 삶에 맛을 더하고, 누군가의 어둠에 빛을 건네는 하느님의 소중한 현존을 드러내는 도구적 존재이다.”
소금과 빛의 현장에서 발견하는 관계의 구체적 진실
소금과 빛은 소금은 식탁 위의 화려한 음식 뒤에 숨어 있고, 빛은 어둠이 있을 때 비로소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과 빛의 삶은 특별한 업적보다도 우리가 매일 만나는 관계의 자리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소금의 삶은 누군가를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먼저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데서 시작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의견이 다를 때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는 대신 상대의 상처와 두려움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관계가 썩지 않습니다. 소금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는 늦은 밤 지친 얼굴로 돌아오는 가족에게 건네는 따뜻한 한마디가 소금이 됩니다. "수고했어."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하루 동안 쌓인 피로와 외로움을 녹여 줍니다. 누군가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작은 관심이 관계를 보존하는 소금의 힘입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험담이 시작될 때 침묵으로 화제를 돌리고, 상대를 비난하기보다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눈에 띄지 않지만 공동체를 지켜 냅니다. 음식 속 소금이 보이지 않듯이, 참된 소금은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빛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길을 찾는 사람입니다. 누군가 실패했을 때 "내가 그랬잖아."라고 말하지 않고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돼."라고 말해 주는 사람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이에게 미래를 보여 주는 사람이 빛입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이를 찾아가 조용히 손을 잡아 주는 일, 홀로 식사하는 사람 곁에 앉아 주는 일, 외로운 이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일, 슬픔 속에 있는 이와 함께 울어 주는 일, 이것은 모두 빛의 행위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운동보다 한 사람의 어둠을 밝혀 주는 작은 등불이 더 큰 기적일 때가 많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칸의 관점에서 소금과 빛은 "영향력"이 아니라 "관계성"입니다.
소
금은 음식 안으로 사라집니다. 빛은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힙니다. 둘 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의 영성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인의 생명과 기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입니다.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 형제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 상대를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려는 것, 용서를 청하고 용서하는 것, 자리를 양보하는 것, 공로를 독차지하지 않는 것, 침묵 속에서 기다려 주는 것, 이것이 소금과 빛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결국 소금과 빛의 진실은 성공에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내 곁에 머문 뒤 조금 더 따뜻해졌는가.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난 뒤 조금 더 용기를 얻었는가. 누군가가 내 존재 때문에 하느님의 선하심을 조금이라도 느꼈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과 빛은 바로 그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한 사람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마음,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는 마음, 드러나지 않아도 끝까지 사랑하려는 마음.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순간 이미 소금이고 이미 빛인지도 모릅니다. 그 사랑이 세상에 맛을 더하고, 그 사랑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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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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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작은 사람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귀여겨 들으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엄청나고 대단한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여기심을 잘 드러내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세상 사람들 시선에 작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사람들, 어린이들, 장애인들, 환자들, 노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사람들 눈에 별것 아닌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직무들, 일상의 작은 봉사, 설거지, 쓰레기 분리 수거, 배수로 청소, 담당 구역 청소...등등을 별것 아닌 일, 보잘것없는 일로 여기고 적당적당히 넘겨버리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살아보니 확실히 느끼겠습니다.
이 세상에 큰 일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소중합니다.
작은 일이 모여서 큰 일을 이룹니다.
큰 일은 작은 일들이 모여야 가능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대통령이나 대도시 시장, 교구장이나 관구장이 해내는 일들을 홀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들은 큰 틀만 짜고, 방향한 제시합니다. 지지하고 격려하고 고무만 할 뿐입니다.
실제적인 일은 작은 사람들이 해냅니다.
그들의 협조와 헌신이 없다면 그 어떤 결과물도 창출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헌신하고 있는 작은 일,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일상 안에서 자주 만나는 작은 사람들, 결코 작은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조력자요, 하느님의 협력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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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율법>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1) 여기서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려고(또는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이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서 완성되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망치고 있다고 오해했고, 유대교 중심의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오해했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에는, “유대교를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철저하고 엄격하게 율법을 지킨 것은, 겉으로만 철저한 것, 즉 ‘위선’이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위선이 유대교를 망친 주원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철저하셨던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이 ‘성전 정화’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사제들에게는, ‘파스카 축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대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를 잘 지내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또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제사용품들을 판매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위선이 파스카 축제를 망치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에게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거나 그저 몇 마디 말로 비판하는 것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충 적당히 넘어가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에서 보여주신 그 열정과 철저함과 단호함은 파스카 축제 실행과 하느님의 뜻 실천을 완성시키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위선자들은 눈에 보이는 십일조는 잘 냈습니다.
그러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위선자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큰 것과 작은 것을 나누고, 작은 것은 무시하면서 안 지킵니다.
19절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이고,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명들과 율법들 가운데 하나라도 자기 마음대로 작은 것이라고 분류해서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1ㄱ.22).”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7-28).”
율법주의자들은(위선자들은) 외적인 율법 준수만 강조하다가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자들이고, 하느님 없이 율법만 지키다가 하느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해서 율법 실천의 완성에, 즉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구원의 완성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생명의 빛’입니다(요한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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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의 눈으로....~~~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정의를 실현하고 사람들을 이 정의에 따라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참된 '정의'를 찾는 일은 매우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정의란 단순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깊이 살펴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잡하고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복잡한 정의를 끝까지 추구하기보다는 '법'이라는 규칙에 의지해 빠르게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즉, 법은 원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현실에서는 정의를 완전히 구현하기가 힘들다 보니, 사람들은 법을 '차선책'으로 삼아 그저 그 법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다인들은 이 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고발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요한 19,7).
그런데 참 묘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분명히 율법의 완성은 문자 그대로의 준수가 아닐 겁니다. 사실 예수님도 당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이 율법을 당당히 여러 차례 어기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글자에 집착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붙잡고 있다."(마르 7,8)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그것이 제정된 목적을 완성한다는 뜻이겠지요?!! 곧 정의(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 즉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함하는 단어)와 참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사야서의 말씀을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율법은 언제 완성되는 것일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켰지만, 예수님은 율법이 제정된 목적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율법이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종이에 인쇄된 법은 정의와 사랑을 향한 의지가 없다면 그 율법의 의미를 실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법의 규정을 그저 종이에 남겨두지 말고, 그 규정을 통해 참된 정의와 진정한 사랑를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정의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정의를 실현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현존을 깊이 의식하며 그분과 더불어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이를 통해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음 글을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사이트에 어떤 사람에 올린 글입니다. 아마도 이런 삶이 하느님 안에서 정의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나눕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조급함은 저의 주요한 약점 중 하나입니다. 추월할 수 없는 도로에서 느리게 가는 차를 따라가거나, 식당에서 계산서를 기다리는 일은 저를 몹시 초조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차근차근하게 행동하도록 하는 기회를 주시기도 전에 저는 폭발해 버리곤 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느님보다 더 빨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내'가 이런 상황들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내려다본다면, '내' 감정과 행동을 더 잘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도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난 다음 다시 제 앞에서 느리게 운전을 하는 차를 만났을 때, 저는 마음속으로 위로 올라가 그 차와 저 자신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손주들과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며 운전을 하는 노부부가 있었고, 그 뒤에는 다른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서도 앞 차가 느리게 가는 것에 대해 울그락불그락 화를 내며 눈이 휘둥그레진 채 운전을 하는 저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러고는 현실로 돌아와 제 차의 속도를 늦추고 편안하게 앞 차를 따라갔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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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0.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35 추가.
마태 5,17-19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하면 율법에 얽매이거나 허례허식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떠올립니다. 그건 그 당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자들을 치유해주시고, ‘정결법’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죄인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이 자기들을 옭아매어 힘들게 만드는 율법이라는 ‘멍에’를 없애주러 오신 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졌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시니,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어리둥절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배신감도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건 율법조항의 가짓 수를 늘리거나, 율법을 적용하는 원칙을 더 엄격하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율법을 왜 주셨는지 그 ‘이유’와 ‘뜻’을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을 그저 ‘글자 그대로’ 지키는데에만 연연함으로써, 율법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괴롭고 부담스러운 ‘족쇄’처럼 여겨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타개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딱딱한 글자로 새겨진 율법의 차가운 정의에,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 융통성을 부여함으로써 율법이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이지요.
율법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뜻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금지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건 그들이 당신께서 바라시는대로 올바른 길을 잘 걸음으로써 구원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십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율법 역시 사람들을 억압하고 제한하는 족쇄가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 뜻에 맞게 잘 살도록 격려하는 ‘원동력’이자, 그들이 하느님 나라까지 무사히 다다르도록 이끄는 ‘이정표’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어린 자녀가 첫 걸음마를 뗄 때 부모는 아기가 넘어진 횟수보다 걸음을 내딛은 숫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구원의 여정을 걷는 과정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져 죄를 지은 횟수보다, 우리가 당신 나라를 향해 몇 발이나 내딛었는지 그 걸음수를,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그 거리를 보시지요. 그러니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계명과 율법을 다른 이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무기’로 휘둘러서는 안됩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생각하며 모두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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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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