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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묵상글(강론글) -힘이 있고 힘이 되는 위로와 격려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11|조회수10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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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묵상글(강론글) 
1차(03:30),  2차 (05:18), 3차 (10:25)




6월 11일 묵상글 3시 30분에 1차분 올립니다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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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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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0,7–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리고 이어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말고
여벌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도 챙기지 말라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집에 들어가든 평화를 빌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주 또렷하게 보여 줍니다.
제자는 자기 이름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 소식은 단지 말에 머물지 않습니다.
병든 이를 살피고
부정하다고 밀려난 이를 깨끗하게 하며
사람을 묶고 있는 어둠에서 풀어 주는 실제적 행위로 드러납니다.
복음은 설명만이 아니라 치유와 해방의 사건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말씀에서 제자의 단순함과 청빈을 깊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돈주머니와 여벌을 챙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준비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이 세상의 힘과 계산에 기대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의 힘은
무장과 소유에서 오지 않고
보내시는 주님께 대한 신뢰에서 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세상의 안전장치에 꽉 매여 있다면
거저 받은 은총의 자유를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크리소스토모의 시선으로 보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은
복음의 심장을 드러냅니다.
은총은 거래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값을 치른 자에게만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먼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삶도
계산보다 증여,
보상보다 나눔,
통제보다 신뢰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내 공로처럼 붙들지 않고
다시 흘려보내는 삶,
그것이 복음적 제자의 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면 먼저 평화를 빌라고 하신 말씀은 매우 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첫걸음은
정답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눌러 이기려는 태도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하느님의 평화가 머물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복음 선포가 거칠고 교만한 방식이 아니라
삶과 태도 안에 드러나는 부드러운 진실이어야 함을 보았을 것입니다.
제자는 먼저 평화를 가진 사람이어야
평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성실 / 온유 / 절제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성실을
끝까지 복음의 사명을 붙드는 힘으로 보여 줍니다.
보상이나 박수 때문이 아니라
맡겨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걷는 꾸준함입니다.


온유는
집마다 평화를 빌며 들어가는 태도 안에서 선명해집니다.
상대를 정복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평화를 먼저 건네는 마음입니다.


절제는
많이 지니고 많이 확보하려는 본능에서 벗어나
주님이면 충분하다는 신뢰 안에 머무는 지혜입니다.
오늘 목요일 성모님의 날에
이 말씀은 더욱 따뜻하게 들립니다.
성모님은 복음을 요란하게 소유하지 않으셨고
조용히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세상 안으로 흘러 들어가
생명을 살리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과시나 힘이 아니라
평화와 단순함,
섬세한 배려와 신뢰를 지녀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실은 내 생각과 내 불안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흘려보내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 앞에 평화를 가지고 들어가는가,
아니면 긴장과 자기주장을 들고 들어가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평화의 제자로 세상에 보내십니다.


주님,
복음을 제 소유물처럼 붙들지 않게 하시고
거저 받은 은총을 거저 나누게 하소서.
평화를 먼저 전하는 온유를 주시고
불필요한 무장을 내려놓는 절제를 주시며
맡겨진 사명 안에 끝까지 머무는 성실함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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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동안 후배 신부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작년 8월에 미국으로 와서 교포 사목을 시작하였으니 어느덧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3월에 신부님 본당으로 ‘사순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있는 본당을 방문하고 싶다고 해서 좋다고 해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지내며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이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상 깊었던 것은 기억력이었습니다. 신부님은 12년 전에 만났던 달라스 본당 교우들의 모습과 그때 나누었던 대화까지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신부님의 기억력은 감탄할 만했습니다. 그 비결은 단순했습니다. 기록하고 저장하는 삶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교우들과 함께했던 영상까지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억은 사람과의 관계를 더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친화력이었습니다. 예전에 주교님께서 저를 미국으로 보내시면서 “조 신부는 사막에서도 잘 지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 적응력과 친화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신부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운동과 음악이라는 자신의 재능을 통해 처음 만난 사람과도 오래된 친구처럼 어울렸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공동체를 살리는 힘은 결국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바르나바 사도를 기억합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품으로 공동체를 세운 사도였습니다. 성령과 은총으로 가득했던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희망의 길을 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서 처음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도 바르나바의 헌신과 열매였습니다. 저는 문득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가 떠올랐습니다. 두 선수는 경쟁자였지만, 그 경쟁은 서로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성장시키는 경쟁이었습니다. 그들의 선의의 경쟁 덕분에 피겨 스케이팅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바르나바가 먼저 길을 열었고, 바오로 사도가 그 길 위에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바르나바가 감성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면, 바오로는 이성적으로 복음을 정리하고 확장했습니다. 바르나바가 공동체를 품었다면, 바오로는 서간을 통해 공동체를 가르치고 격려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누가 더 위대한가를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다릅니다. 바르나바도 바오로도 모두 하느님 정원의 아름다운 꽃들입니다. 서로 다른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루듯, 각자의 은총과 사명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니라 겸손이며,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순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씀은 2,000년 전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미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의미를 향해, 가치를 향해,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신부님 본당은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본당도 2027년에 설립 5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두 공동체 모두에게 이 시간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끌어 오신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새롭게 여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처럼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따르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된다면, 두 본당의 50주년은 분명 ‘은총의 50년, 희망의 50년’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바르나바처럼 위로하고, 바오로처럼 증언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또한 누군가에게는 믿음의 길이 되고, 희망의 길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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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도 바르나바 기념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파견”입니다.
<독서>에서는 바르나바 사도가 교회로부터 파견 받았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24)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그러니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하고,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거나 ‘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저 받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할 직무가 주어졌지만, 제자들에게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는 나라’, 곧 거저 주어진 나라임을 말합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가 가야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거저 주신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도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주어졌고, 하늘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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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마태 10,7)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와 자비의 손길이 이제 제자들의 손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은 이성적 설명이나 설득보다 구체적 치유와 자비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제자들이 행하는 기적은 하늘 나라의 선물이므로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 빠른 인간 세상의 논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지요복음의 논리는 값이 없기에 값진 것이고그 기쁨은 대가가 없기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제자들은 가난하게 파견됩니다.
자루두 벌 옷신발지팡이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파견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기꺼이 약한 모습으로 길 위에 서며그 자체가 하느님만을 신뢰한다는 예언자적 표지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10)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고 대가를 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의 일꾼에게 필요한 것을 책임지신다는 충실함을 드러냅니다(6,25-26 참조).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마을에 들어가면 마땅한”(10,11) 사람을 찾아내 한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기준은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응답하는 능동적이고 열린 마음입니다.
마땅한 사람의 열린 태도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가난한 제자가 먹거리와 머물 곳을 찾을 수 있는 하나뿐인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 열려 있고 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신 나라의 부유함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늘 파견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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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누가 의인인가?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 (시편 97[96],11) 이 말씀은 하느님께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체험을 아름답게 노래합니다여기서 빛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과 진리그리고 삶의 방향을 뜻합니다의인은 고난과 어둠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의 빛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와 상실눈물과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켜져 있습니다또한 기쁨은 순간적인 즐거움이 아닙니다마음 바른 이에게 솟아나는 기쁨은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서 얻는 만족이 아니라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깊은 평화입니다그것은 소유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존재에서 오는 기쁨이며성취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 안에서 이 말씀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성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병고오해와 실패 속에서도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이야기했습니다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성공의 열매가 아니라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데서 솟아나는 빛이었습니다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을수록 하느님의 빛이 더 깊이 스며들고자신을 작게 만들수록 더 큰 기쁨이 피어나는 역설을 그는 살았습니다이 빛은 먼 곳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한 번 더 이해하려 할 때아픈 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줄 때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옳음을 내려놓고 화해를 선택할 때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감당할 때그 작은 사랑의 자리에서 빛은 이미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마음 바른 사람의 기쁨은 큰 사건 속에 있지 않습니다아침 햇살이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순간형제의 안부를 묻는 따뜻한 한마디함께 식탁을 나누는 평범한 시간침묵 가운데 드리는 짧은 기도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피어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의인에게 솟아오르는 빛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표징이며마음 바른 이에게 솟아나는 기쁨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사랑받는 사람의 기쁨은 어떤 시련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오늘도 우리 안에 조용히 솟아오르는 그 빛과 기쁨이우리가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신다는 가장 아름다운 증언입니다의인과 마음 바른 사람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가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의인의 특징

의인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넘어져도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사람입니다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합니다진실을 따르기 위해 손해를 감수할 줄 압니다약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자신의 이익보다 공동선을 먼저 생각합니다판단하기보다 이해하려 하고단죄하기보다 살리려 합니다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의인은 늘 옳은 사람이 아니라늘 하느님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마음 바른 사람의 특징
마음이 바르다는 것은 마음이 단순하고 투명하다는 뜻입니다겉과 속이 다르지 않습니다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계산보다 진실을 선택합니다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줄 압니다타인의 성공을 시기하기보다 함께 기뻐합니다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기보다 하느님께 맡길 줄 압니다마음 바른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분열되지 않은 사람입니다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 안에서
프란치스칸 전통에서 의인과 마음 바른 사람은 바로 내적 가난을 사는 사람입니다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공로를 독차지하지 않습니다형제를 경쟁자가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입니다자신의 부족함까지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 맡깁니다소유보다 관계를성공보다 사랑을 선택합니다그래서 의인의 빛은 지식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 겸손의 빛이고마음 바른 이의 기쁨은 성공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입니다의인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고마음 바른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꾸밈없이 사는 사람입니다그들의 빛은 얼굴에서 드러나고그들의 기쁨은 관계에서 드러납니다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말보다 삶이 더 큰 울림을 주는 사람어쩌면 그런 사람이 시편이 말하는 의인이며 마음 바른 사람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칸적으로 묵상하면 소돔의 의인은 거창한 영웅이 아닙니다공동체 안에서 화해를 선택하는 사람미움보다 이해를 선택하는 사람힘없는 사람 곁에 머무는 사람자기 몫의 빵을 나누는 사람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성 프란치스코도 바로 이런 의미의 의인이었습니다그는 세상을 바꾸려고 권력을 잡지 않았습니다대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버림받은 나병환자에게 다가가고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였습니다어쩌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찾으셨던 열 명의 의인은특별한 종교인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관계를 살리는 사람하느님의 자비가 흐를 도구가 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그래서 소돔의 의인과 시편의 의인은 결국 같은 사람입니다그들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메마른 세상 속에서도 사랑과 환대와 자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그 한 사람이 한 가정을 살리고열 사람이 한 도시를 살리며작은 의로움 하나가 세상을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말하는 "의인"?
시편에서 말하는 의인의 특징을 더욱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묻습니다.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성읍을 멸하시겠습니까?" "45, 40, 30, 20, 10명이 있다면요?" 여기서 의인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소돔의 죄와 의인의 의미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소돔의 죄를 특정한 성적 죄악으로만 이해하지만성경은 더 넓게 말합니다예언자 에제키엘은 소돔의 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교만과도한 풍요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오늘날 잘 지키고 많이 바치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와 착각에 빠져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사람스스로 엘리트적인 사람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얀센이즘그리고 스스로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완전주의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자아도취적인 의로움으로 관계의 단절을 만드는 사람약자를 돕지 않음즉 소돔은 하느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너진 사회였습니다그렇다면 소돔 안의 의인은 누구일까요낯선 이를 환대하는 사람 약자를 보호하는 사람자신의 이익보다 공동선을 생각하는 사람폭력과 탐욕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하느님의 가난과 겸손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관계 안에 실천하는 사람바로 시편이 말하는 "마음 바른 사람"의 모습과 연결됩니다왜 열 명의 의인이 중요했을까유다 전통에서는 열 명 정도가 공동체를 이루는 최소 숫자로 여겨졌습니다하느님은 단 한 사람의 선행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라그 도시 안에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랑과 정의의 가능성을 찾으십니다의인은 단순히 자기 영혼만 구원받는 사람이 아닙니다그 존재 자체가 공동체를 지탱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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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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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11 05:13


-힘이 있고 힘이 되는 위로와 격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의 원명은 요셉이었는데
사람들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불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별명을 붙여 준 것입니다.
저 스스로는 당쇠란 별명을 제게 붙여 주었지만
여러분은 제게 어떤 별명을 붙여 주실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그에 대해 이렇게 전하기도 합니다.
바르나바는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이것을 볼 때 바르나바에 관해서 착한 사람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이라는 관점에서도 얘기할 수 있지만
오늘 저는 위로와 격려의 바르나바라는 관점에서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기로 한 이유는 그저께 한 자매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가정에 관해서 얘기 듣고 어떻게 위로와 격려를 할지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그 가정은 몇 년 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할 때
배고픈 저희를 먹여 주시고 잠자리도 제공해 주신 분들인데
며칠 전에 불이 나 벌통과 창고가 소실되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도 사는 집에는 불이 옮겨붙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씀인데
아무튼 이분들에게 어떤 위로와 격려를 드릴지 생각게 되었고,
오늘 그것을 마침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먼저 이런 경우 늘 제게는 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라는 말이 있지만 이럴 때 저는
제가 위로받을 처지에 있어야 하는데 위로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미안하고
더 나아가 같이 있어 드리거나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위로를 드리면서도 쭈뼛쭈뼛 위로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먼저 위로는 그의 슬픔과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 곧 공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로가 진실하기 위해서는
말로만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공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와 함께할게기도로 함께할게 하며 어떻게든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괜찮아질 거야나아질 거야 하며 희망적인 얘기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우리 신앙인에겐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위로는 하느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위로여야겠지요.
주님도 같이 아파하시고주님께서 함께 계시고주님께서 낫게 해주실 거라고.


그런 다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격려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 격려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위로만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도 된다면 힘들지만 일어서라고용기를 한번 내보라고 격려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은 물론 주님께서 힘주실 것이라는 말과 함께 격려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르나바가 위로와 격려를 잘할 수 있게 된 것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제가 위로와 격려에 쭈뼛쭈뼛하는 것이 바로 이것,
곧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의 위로와 격려가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성령에게서 나오기에
그 위로는 힘이 있고 받는 이에게는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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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주는 것이 받는 것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은 예수님의 여러 가지 비유 안에서 드러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신적 교환의 신비를 끌어안기

주는 것이 받는 것입니다.

2026년 6월 10일 수요일

CAC의 온라인 강좌 신적 교환(The Divine Exchange)에서 신시아 부르조(Cynthia Bourgeault)는 예수님의 한 비유를 "서로의 연결과 풍요"라는 관점에서 성찰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 됨"은 단순히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정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라는 은총의 춤입니다. 우리는 더 큰 전체 안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며 하나가 되어 갑니다. 하나의 지푸라기를 뽑아내면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살아 있고, 주고받으며, 숨 쉬는 관계의 장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분들 사이의 교류가 지닌 깊이와 넓이, 그리고 힘이 바로 그 공동체의 건강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관계성과 상호작용, 은총의 흐름을 넓히는 모든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반대로 고립과 단절로 이끄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의 풍요가 흘러드는 길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루카 복음 12장에서 가르치신 아름다운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비유와 상징을 겹겹이 더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들의 나리꽃을 보아라, 참새를 보아라,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세어지지 않았느냐."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그리시는데, 그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것, 가장 겸손한 것까지도 하느님께서 아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의 사랑스러운 구절로 마무리하십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하지 마라. 너희 자버지께서는 그것을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루카 12,32).

예수님께서 가장 반대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는 ‘쌓아두기’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재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에고는 궁극적인 "쌓아두는 자"입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합니다. 우리는 "나는 부자다, 나는 배웠다, 나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다."라는 자격을 쌓아둡니다. 우리는 원칙과 이념을 쌓아두고, 자기 정당화와 원망까지도 쌓아둡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모아 우리의 연약한 자기-정체성의 둥지를 두텁게 덮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태의 "쌓아두기"에도 맞서십니다. 그분은 철저한 "집착 없음"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곧, "주먹을 움켜쥐지 말고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넘어서는 풍요와 섭리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안을 흐르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직접 드러내는 조화와 아름다움, 생명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하느님의 다정한 영광과 섭리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어떤 형태의 "쌓아두기"에도 단호히 반대하셨습니다. 우리가 집착하거나, 방어하거나, 자기 정당화에 매달리거나, 고집을 부릴 때마다 곧바로 영적으로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를 전체로부터 단절시키며, 눈앞에서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풍요를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여든 살이 된 사람인데, 가톨릭 신자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CAC의 활동을 통해 신시아 부르조와 지역의 지혜 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시아의 책들과 그녀가 인용한 저자들의 책을 통해, 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심지어 말할 수도 없었던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저는 예수님이 실제로 누구셨고 지금도 누구이신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 삶의 마지막 해들을 맞이하면서, 드디어 제 영성에 꼭 맞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 제가 열정을 느끼고, 의미가 있으며, 저에게도 합리적으로 다가오는 길을 찾게 된 것입니다.
— Mary F.

References
Adapted from Cynthia Bourgeault, “Exchange in the Teachings of Jesus” in The Divine Exchange: Living in Sacred Rhythm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6). Enroll now to explore Christian wisdom traditions in this self-paced online cours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hivam Mistry,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끊임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신비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비워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흘러 들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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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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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오로 사도의 오른팔 바르나바! 
 

 
예루살렘에 본산을 두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모공동체이자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최초로 정착되기 시작한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큰 관심, 즉 기도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교회는 신생 안티오키아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감독 한 명을 임명했는데, 그가 곧 바르나바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며, 바르나바는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용기를 고취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는 키프로스 출신이고, 직업은 레위계 성직자였습니다. 
 
금수저 가문 출신으로 예루살렘에 금싸라기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수려한 용모에 탄탄한 학문, 깊은 신앙 등, 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당시의 대세남이었습니다. 
 
원래 바르나바는 열두 사도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두 번 씩이나 사도라는 호칭으로 기록될 만큼, 교우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모두 팔아 사도들에게 갖다바쳤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 그는 초대교회의 한 멤버로서 날개를 달고 열심히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큰 업적 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로부터 홀대받고 의기소침해 있었으며, 곤경 중에 처해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르소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습니다.
바르나바는 긴장 관계에 놓여있던 예루살렘 모교회 공동체와 바오로 사도 사이를 부드럽게 중재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만 1년 동안 의기투합했습니다.
두분의 합심 결과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신자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교회 공동체 조직도 안정되고 강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노력으로 첫 번 째 해외 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정착되었고,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바오로라는 큰 인재를 알아봤고 지지한 것이 아닐까요?
바르나바 사도는 지금은 비록 곤경 중에 처해 있지만, 바오로야말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로서 적임자임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고, 용기를 불어넣고 격려했으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또한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유다 세계를 넘어 이방인 세계로 문호가 활짝 개방될 수 있도록 바오로 사도와 함께 완고했던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를 설득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이 모든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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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7-13)> 
 
1) 여기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이 말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믿고 회개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종말이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마지막 날이 오면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사랑 실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복음은 ‘말’로도 선포되고 ‘사랑 실천’으로도 선포됩니다.
둘 중에 ‘사랑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받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 선포는(선교활동은) ‘돈벌이’를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 선포의 대가로 돈을 받으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겪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사도 8,18-20)”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돈으로 사거나, 돈을 받고 파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2)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줄이면, “빈손으로 떠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돌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와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돈벌이’를 하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빈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지고 갈 것은 믿음과 사랑과 자비 등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시는 분이니, 너희는 먹는 일을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라는 말씀은,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주는 대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있는 ‘부자들에 관한 지침’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 
 
신앙생활은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도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과 먹을 것이 있는데도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고민하는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정말로 굶주리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남겨 주신 숙제 같은 것입니다.
<굶주리는 처지가 아니고 더 좋은 것을 먹으려고 고민하고 집착하는 경우라면, 또 ‘믿음의 힘’은 안 믿고 ‘돈의 힘’만 믿는 경우라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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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이미 우리에게 긍정적인 권한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계속 가르치십니다. 그분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병자를 고치고, 죽은 이를 일으키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길을 가볍게 떠나라고 하십니다. 돈이나 여벌 옷, 신발조차 챙기지 말고, 자신들이 섬길 사람들의 너그러움에 의탁하라고 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놀라거나 불안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행길에 혹시 대비할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이 섭리에 의탁하라고 분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사람들에게 가서 병자를 고쳐 주고 무언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그분께 의탁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임무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가장 근본적인 전제를 마음에 간직하고 새길 수 있다면, 그분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권능을 발휘하여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이를 일으키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마귀를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멈추어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어떻게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울 수 있을까?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쁨과 희망, 위로를 나눌 수 있을까?"

예수님은 매일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며, 그 은총과 선물을 우리 삶과 세상 속에서 나누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가진 은총은 때로는 사소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도움의 손길, 외로운 이와 함께하는 시간, 마트에서나 길가에서 스쳐 지나가는 이에게 건네는 작은 미소조차도 은총의 나눔이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부여해 주신 풍요를 나눌 완벽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미소와 웃음, 사랑과 관심을 아낌없이 나누어 봅시다. 참으로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란 사실 우리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부정적이고 암울한 생각들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우리의 미소와 더불어 내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주님께서 주시는 힘이 우리 안에 이미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일전에도 언급해 드렸듯이, 우리 내면에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가 의식하여 찾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있어도 없는 것인 셈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이미 긍정과 사랑과 생명력의 힘이 주어져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이미 우리에게 이런 긍정적인 권한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주시는 권한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없는데도 있다고 자기 세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정한 현실이고 우리는 이 현실을 의식하여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도 제가 저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저에게 주어진 당신의 긍정적인 권능을 의식하여 그 긍정적인 힘을 저와 함께하는 이웃들과 제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나눌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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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 10:25 추가>


마태 10,7-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바르나바 성인에게 붙여진 ‘사도’라는 호칭이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요. 왜 바르나바 성인은 주님께서 직접 부르시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마티아 사도처럼 기도와 제비뽑기를 통해 따로 선발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사도’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그렇게 된 연유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 이스카리옷의 빈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사도를 뽑는 과정에서 마티아와 함께 최종결선까지 오른 사람이 바로 바르나바이지요. 사실 ‘바르나바’는 그의 본명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성령께 기도한 뒤 제비를 뽑았고, 그 결과 마티아가 선택되어 새로운 사도로 임명받았지요. 그리고 아쉽게도 제비뽑기에서 탈락한 요셉은 열 두 사도단에 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크게 괘념치 않고 그동안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한결같이, 성실하게 복음선포에 힘씁니다. 이처럼 하느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그의 선한 성품이,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그들이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해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격려하는 그의 진심이,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그의 순명이 그 누구보다 ‘사도다웠’기에, 요셉은 초기교회 신자들로부터 ‘사도’로 인정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며 살았던 초기 교회 신자들이 자연스레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게 된 것처럼 말이지요. 
 
요셉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슬픔과 괴로움을 겪는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그로부터 큰 위로와 힘을 얻었지요.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바오로였기에 회심 초기에는 신자들이 그를 잘 믿어주지 않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신자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받던 바르나바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도와주고 그리스도교 집회에도 데리고 가서 잘 소개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위로와 도움 덕분에 바오로는 ‘박해자’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지요. 
 
바르나바 사도가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슬픔과 괴로움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실천하면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보답해 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받아누린다면 그에게는 기쁨이 되고 나에게는 보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가 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나의 정성과 노력을 알아주시기에, 그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더 큰 기쁨이자 영광이 될 것입니다. 즉 내 사랑이 거부당하는 데서 느끼는 고통이 큰 만큼 하느님께서 더 큰 위안으로 갚아주실 것을 믿기에, 언제나 두려움 없이 후회 없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바르나바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여 참 평화를 누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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