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묵상글(강론글) 1차(04:00), 2차(05:00), 3차(08:30) 6월 12일 묵상글, 04시 0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 ======== < 1 차 >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1,25–30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버지께서는 이것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하십니다. 또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길이 교만한 자기확신의 길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마음의 길임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많이 안다고 스스로 여기는 이들의 계산 속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부족함을 아는 이들, 열린 마음으로 듣는 이들에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지혜 자체를 거부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지혜, 자기 힘으로 다 안다고 여기는 마음을 비추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복음에서 언제나 겸손과 마음의 태도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신다는 말씀은 무지한 사람을 칭찬한다는 뜻이 아니라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 자기 한계를 알고 하느님께 배우려는 마음이 은총의 문을 연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교만한 계산보다 겸손한 순종 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나에게 오너라” 하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은 매우 따뜻합니다. 주님은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더 무거운 짐을 얹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께 와서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짐을 지는 새로운 방식의 삶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은 주님 안에서 짐의 의미가 바뀐다는 뜻입니다. 혼자 질 때는 짓눌리지만 주님과 함께 지면 그 짐은 구원의 길이 되고 안식의 길이 됩니다. 크리소스토모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의 멍에가 편하다는 것은 제자의 길에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없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자기 힘만으로 버티는 삶,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삶, 율법의 겉모양만 붙드는 삶, 욕망과 불안에 끌려가는 삶이 실은 훨씬 더 무겁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 사랑과 신뢰의 멍에입니다. 그래서 짐이 있어도 그 안에 쉼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성실 / 온유 / 절제의 열매와도 깊이 맞닿습니다. 성실은 주님의 멍에를 쉽게 벗어 던지지 않고 끝까지 함께 지는 힘입니다. 온유는 예수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주님은 힘으로 누르지 않으시고 겸손으로 초대하십니다. 절제는 내가 내 삶의 모든 무게를 혼자 통제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께 배우며 내 욕심과 조급함을 내려놓는 지혜입니다. 성 카시아노를 기억하는 오늘, 이 말씀은 수도 영성의 핵심과도 이어집니다. 마음의 평화는 아무 짐도 없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짐이 정돈될 때 찾아옵니다. 내 안의 복잡한 생각과 불안, 끝없이 나를 몰아붙이는 소리들을 내려놓고 주님의 리듬에 마음을 맞출 때 비로소 참된 쉼이 시작됩니다. 카시아노가 말한 내적 절제와 분별, 기도 안의 평화는 바로 이 복음의 길과 닿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짐에 눌려 살고 있는가? 그 짐은 주님과 함께 지는 짐인가, 아니면 내 교만과 불안이 만든 짐인가? 나는 하느님께 배우려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다 안다고 여기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온유와 겸손 안에서 참된 쉼을 배우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 제 교만한 마음을 낮추시고 당신께 배우는 사람 되게 하소서. 혼자 지려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당신 멍에 안에서 참된 쉼을 얻게 하시며 성실과 온유와 절제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배우게 하소서. 아멘.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한국에서는 소풍과 수학여행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압사 사고 이후, 안전과 책임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학교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는 시간’입니다. 학교는 배움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경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시험과 평가를 통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비교되고 서열화됩니다. 그러나 소풍과 수학여행에서는 달랐습니다. 성적순으로 줄을 서지 않았고, 점수로 평가받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친구의 새로운 장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도 학창 시절 소풍을 가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응원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교실에서는 성적으로 평가받았지만, 소풍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풍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관계가 회복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풍과 수학여행은 ‘제3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의 공간도 아니고, 규율의 공간도 아닌, 관계가 살아나는 공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사랑입니다. 평가하기 전에 사랑하시고, 판단하기 전에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학교처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회당에서만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길 위에서, 호숫가에서, 들판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소풍과도 같고, 수학여행과도 같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었고, 때로는 실패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평가로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불러주시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마음, 부족해도 품어주시는 마음,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입니다.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음악회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소풍과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적이나 실력으로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재능을 자유롭게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며 기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노래를 잘하고, 누군가는 악기를 잘 다루고, 또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묵묵히 봉사할 것입니다. 그 모든 모습이 소중합니다. 그 모든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다양성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서로를 비교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잘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점수로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경쟁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신앙은 평가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며,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비교하기보다 격려하며, 평가하기보다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본당이, 우리 가정이,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에게는 ‘소풍과 같은 시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성심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평가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당신의 성심을 닮게 하소서. 저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이요,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곧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사제들이 ‘예수성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성화를 촉구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루가복음>의 병렬 구문에 따르면,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루카 10,21) 노래하는 예수님의 ‘마니피캇’(mangificat)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감사와 찬양의 노래요, 뒤 장면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이들에게 주는 ‘쉼’(안식)으로 초대입니다. 오늘은 이 <복음>을 ‘예수성심’과 관련하여 알아들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마태 11,25)를 우주의 주권자시라는 고백하면서, ‘아들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예수성심’은 무엇보다도 우선 ‘아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는”(마태 11,25)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찬양과 감사”의 감격적인 고백을 드립니다. 또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마태 11,26)라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동의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합니다. 그리고 아들로서, 아버지와 본질적인 동질성 안에서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7) 그래서 아버지께서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듯이, 당신께서도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에게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1,28)하시며 구원과 안식으로의 초대합니다. 이는 ‘예수성심’이 ‘아버지를 닮은 마음’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이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라기보다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요, 아버지의 ‘종’으로서 아버지의 자녀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며 그들의 아픔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 하시면서 ‘멍에’를 함께 메시는 ‘스승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가 혼자가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멍에’를 함께 메어주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지는 ‘멍에’에 올려 진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27).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사제들은 바로 그렇게 신자들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이들일 것입니다. 바로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마침내는 당신의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의 짐을 짊어지시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셨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이사 53,5) 바로 이 지고한 사랑의 마음이 ‘예수성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신 심장에 거부와 배신의 창을 꼬았건만 당신은 오히려 생명의 심장을 열어 주셨고, 우리는 당신에게 고통과 죄를 쏟아 부었건만 당신은 우리에게 은총의 피와 생명의 물을 쏟으셨습니다. 그 지극한 사랑으로 당신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우리의 불신과 불순명으로 피 흘리셨고, 저희는 당신 사랑의 심장으로 새 살이 돋았습니다. 저희 안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하고, 은혜로운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오니, 오 사랑하올 예수 성심이여! 당신의 피를 흘리는 능력 외에는, 아무 능력도 없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피를 흘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을 모르게 하소서. 오로지 사랑만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임의 사랑, 임의 성심만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 감사의 내용은 역설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을”(마태 11,25) 감추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 곧 치유와 자비,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 낯선 일일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11,25), 곧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세상을 읽어 내지 못합니다. 켜켜이 쌓아 온 삶의 방식과 그에 따라 이미 몸에 밴 자기만의 논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철부지들”(11,25)이 그 세상과 가깝습니다. 어린아이는 약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받아들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이해가 아니라 신뢰가 먼저 일어나는 자리, 그곳이 철부지의 자리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11,27). 이는 단순히 권력 선언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친교를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친교는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이에게만 열립니다. 25절에 나오는 ‘드러내다’는 그리스 말에서 ‘계시’의 동사형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대상은 “철부지들”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밝히 드러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거나 더 많이 노력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것은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나아가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가능합니다. 내 눈의 들보를 들어내 사람을, 세상을, 그 고유함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포도원의 일꾼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포도원의 주인이 공평함에는 관심이 없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포도원의 일꾼들 2026년 6월 11일 목요일 『신적 교환(The Divine Exchange)』 이라는 강의0에서, 신시아 부르조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살펴봅니다: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마태 20:1–16)는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자주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사람들을 불러 수확을 거두고자 했습니다. 그는 해 뜰 무렵에 나가서 일꾼들과 하루치 품삯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아침 아홉 시와 정오에도 다시 나가 사람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오후 세 시에도 길가에 서 있는 이들을 보고 "왜 아직 일하지 않고 있느냐?"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불러주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으로 가라." 하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품삯을 나눠줄 때가 되자, 그는 모든 이에게 똑같은 금액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아적 의식(egoic consciousness)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모두가 "이건 불공평하다!"고 외치지만, 우리가 분리와 결핍에 기초한 자아적 마음을 사용하는 한, 결코 공평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자아적 정신은 먼저 온 사람들이 손해를 봤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포도원 주인이 단순히 수확을 거두려는 이야기가 아닐 때에만 "작동"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늘 그렇듯, 포도원은 관계의 장(場), 곧 하느님 나라의 역동적 상호성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포도원 주인에게 어떤 이유를 투영하든, 그가 실제로 밝히는 이유는 사람들이 고립되어 그냥 혼자 앉아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너희도 포도원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이 날의 참된 열매는 단순히 포도를 수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함께 일하며 존엄한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노래가 울려 퍼지고, 함께 일하는 기쁨과 다양한 경험이 생겨납니다. 모든 이에게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진정한 비율에 두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비유의 마지막에 "더 많음과 더 적음"이 도입되면, 우리의 주의는 흩어지고 맙니다. 결론은 모든 이가 충분히 받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통상적인 하루 품삯이 공정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이미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열매는 포도송이가 단순히 수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일하며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포도가 발효되어 포도주로 변하듯, 이 공동의 노동은 인간적 상호작용과 풍요의 향기를 빚어내며, 다른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을 드러냅니다. 이 비유를 개인적 경쟁의 틀이 아니라 관계적 장(場)의 배경 속에서 읽을 때, 전혀 다른 요소들이 드러납니다. 그 관계적 장이 없이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향하고 계신지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머리로 이해하려 한다면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계속해서 "많고 적음"과 "이건 불공평하다."라는 생각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충만함에서 출발하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질서와 일치 속에서만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와 그 혁신적인 정신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원으로 오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느님 나라의 참여자가 되려면, 그 초대에 응답하여 "예"라고 말하고, 관계의 장(場)을 신뢰하며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아침 커피를 손에 들고 덮개 있는 파티오로 나가 아침 묵상글을 읽었습니다. 부드럽고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그 빗줄기를 바라보며 푸른 잔디와 꽃들, 나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 계셨음을. 그래서 저는 그분을 환영하며 또 하루의 생명을 허락하신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 Kaye B. References Adapted from Cynthia Bourgeault, “Exchange in the Teachings of Jesus” in The Divine Exchange: Living in Sacred Rhythm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6). Enroll now to explore Christian wisdom traditions in this self-paced online cours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hivam Mistry,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끊임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신비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비워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흘러 들어오십니다.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공존할 수 없는 두 나라에서 (2026, 6, 11 복음 묵상) 공존할 수 없는 두 나라에서 (2026, 6, 11 복음 묵상)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이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 사랑, 그리고 치유의 능력은 인간이 노력해서 대가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타인을 도울 때나 복음을 전할 때 어떠한 보상이나 대가도 바라지 말고, 순수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아낌없이 나누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네가 받은 것이 모두 선물이라면, 너도 선물처럼 살아라." 프란치스칸의 내적 가난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나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인이고, 주인이 아니라 전달자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친절과 관심과 사랑은 사실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잠시 맡겨 두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거저 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조용히 들어 주는 귀, 기다려 주는 견딤, 실수한 사람을 향한 용서, 외로운 이를 향한 따뜻한 눈빛, 병든 이를 위한 기도. 이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세상을 살리는 가장 귀한 선물들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는 흔히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의 노력과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은 온통 선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도 거저 받았습니다. 햇빛도 거저 받았습니다. 숨 쉬는 공기도 거저 받았습니다. 누군가의 미소와 위로도 거저 받았습니다. 용서받은 경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기회도, 상처를 견딜 힘도 거저 받았습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9) 이 말씀 또한 선교의 길을 떠날 때 물질적인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강력한 무소유의 권고입니다. 여정의 안전을 돈이나 식량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와 이웃의 환대에 의탁하라는 신뢰의 요청이기도 합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예수님께서 돈 자체를 미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붙잡고 살고 싶어 합니다. 재산을 붙잡고, 명예를 붙잡고, 관계를 붙잡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까지 붙잡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붙잡음이 아니라 맡김에서 시작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하느님의 선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적 가난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소유해도 그것에 묶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이 말씀은 매우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내 계획이 무너질 때도, 내가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 때도, "주님, 저는 여전히 당신을 신뢰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복음의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마태 10,12) 예수 께서는 이 말씀으로 제자들이 세상에 전해야 할 가장 큰 선물이 바로 '평화'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갈등이나 분열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안녕이 깃들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 집이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다면, 그 평화는 다시 전한 이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성경은 덧붙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첫 번째 선교 도구는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평화였습니다. 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깊은 신뢰에서 오는 내적 안정입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사람은 어디를 가든 평화를 가져갑니다. 가정에서는 다투는 사람들 사이에 다리가 되고, 공동체에서는 소외된 사람을 품어 주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말을 건네고, 낯선 이를 만나도 먼저 미소를 건넵니다. 평화는 존재의 향기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늘 인사했던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그는 평화를 말하기 전에 먼저 평화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읽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들은 단순히 선교 여행의 지침이 아니라,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을 이루는 세 가지 길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거저 받음의 길, 비움의 길, 평화의 길입니다. 공존할 수 없는 두 나라, 곧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하느님 나라와 내가 통치하는 내왕국 보여주신 말씀은 신앙의 가장 깊은 본질이자, 매일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치열한 내면의 영적 전투를 꿰뚫어 보는 고백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내 왕국"은 결코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갈 수 없는,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두 세계관입니다. 내가 통치하는 내 왕국 이 왕국의 왕좌에는 '나 자신'이 앉아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나의 계획, 나의 욕심, 나의 판단이 기준이 됩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음을 전하면서도 "전대에 금과 은"을 채워 넣고 싶어 하고, 내 힘과 물질을 신뢰하며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마음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 결과는 내가 주인 노릇을 하려다 보니 늘 미래가 불안하고, 주변 사람이나 환경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다 갈등과 집착이 생겨납니다. 외적으로는 평화를 말할지라도 내면은 늘 소란스럽습니다.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하느님 나라 이 나라의 왕좌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합니다. 이 나라의 특징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전대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으며, 만나는 이에게 평화를 비는 삶"이 실제로 일어나는 공간입니다. 내 계산과 방어벽을 내려놓고, 온전히 그분의 인도하심과 채워주심(섭리)에 나를 맡기는 자리입니다. 그 결과 내 손에 쥔 것이 없어도 하느님이 채우실 것을 믿기에 진정한 자유와 자족이 있습니다. 내 조건이 아니라 말씀이 내 안을 다스리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평화가 흘러나옵니다. 두 왕국의 갈림길, '내려놓음' "거저 주라"는 말씀도,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도, 결국 내 왕국의 영토를 넓히려는 움켜짐을 멈추고 하느님 나라의 통치 안으로 걸어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내 왕국이 무너진 그 빈자리에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 안에서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내 왕국'의 욕심을 내려놓고, 잔잔히 들려오는 말씀의 통치에 기꺼이 순종하며 참된 평화의 길을 걷기를 응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죽은 뒤에 가는 장소가 아니라, 누가 내 삶의 왕좌에 앉아 있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와 내 왕국의 싸움은 거창한 곳에서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평범한 관계와 일상 속에서 매일 일어납니다. 아침에 계획이 틀어졌을 때, 누군가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억울한 말을 들었을 때, 인정받지 못했을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무시되었을 때, 그 순간 내 왕국의 왕이었던 자아가 고개를 듭니다.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가?" "왜 나를 존중하지 않는가?"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가?" 내 왕국은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늘 비교하고, 경쟁하고, 계산하고, 방어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만나기보다 내 욕구를 채워 줄 존재로,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 결과 관계는 사랑의 공간이 아니라 힘겨루기의 공간이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의 통치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용서하여라." "남을 너 자신보다 낫게 여겨라."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씀들은 내 왕국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내 왕국은 움켜쥐라고 말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내어주라고 말합니다. 내 왕국은 높아지라고 말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내려가라고 말합니다. 내 왕국은 이기라고 말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납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왕국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겸손도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왕좌에서 내려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반드시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께서 더 좋은 길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자유입니다. 내 왕국을 지키려는 사람은 끊임없이 긴장하지만, 하느님 나라 안에 사는 사람은 맡길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내 왕국은 마치 한 마음 안에 자라는 두 나무와 같습니다. 하나는 자기중심성의 나무입니다. 비교와 경쟁과 두려움을 먹고 자랍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 나라의 나무입니다. 신뢰와 감사와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가 무엇에 귀 기울이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어느 나무는 자라고 어느 나무는 시들어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매일의 선택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내 주장을 조금 내려놓고,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고, 결과를 통제하려는 집착을 놓아버릴 때마다 내 왕국은 조금씩 작아지고 하느님 나라는 조금씩 넓어집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세상을 떠난 뒤에야 만나는 현실이 아니라, 내 안의 왕좌에서 내가 내려오고 말씀이 앉으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가 흘러나옵니다. 그 평화는 내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오는 평화가 아니라, 더 이상 내가 왕이 되려 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그것이 "전대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의 깊은 뜻이며, 프란치스코가 평생 걸어갔던 작음과 가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이제는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이 제 안에서 살아갑니다. 제 왕국이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오시기를 바랍니다." ---------------------------------------------------- ++++++++++++++++++++++++++++++++++++ ======== < 2차 >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12 04:49 - 무겁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 성심 대축일에 우리는 오늘 복음을 듣습니다. 예수 성심이 곧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라는 뜻이고, 이 축일을 지내며 이 마음을 배우라는 뜻이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부담감을 많이 느끼고 갈수록 부담감을 못 견뎌 하며, 그래서 조그만 부담도 감수하고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것은 미성숙할수록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서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심은 답을 줍니다. 어떻게 부담스러운 짐들을 잘 져서 사랑을 이룰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부담이 아니라 사랑이 될 수 있는 법을 알게 해주고, 일과 책임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법을 알게 해줄 것입니다. 무엇이? 예수 성심이. 그렇다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어찌 그렇게 해주는지 이제 보겠습니다. 짐 지는 것이 부담이 되고 고통이 되는 것은 그 근본적인 이유가 우리가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임은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결코, 부담스럽지 않고 전혀, 고통스럽지 않지요. 그렇다고 짐이 무겁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무겁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똑같이 무거운 짐을 지는데도 좋아하는 사람의 짐을 질 때는 고통스럽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의 짐을 질 때는 더 고통스럽지 않고 심지어 기쁘기까지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무거운 것을 들어줬다는 것이 오히려 기쁘게 합니다. 예수 성심은 이런 마음입니다. 사랑하기에 무겁고 싫어하는 일 곧 십자가를 기꺼이 지려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마음가짐에서 겸손과 온유한 마음도 나오고, 반대로 겸손한 마음에서 사랑의 마음과 온유한 마음도 나옵니다. 사랑할 때 ‘이것이 왜 내게’를 따지지 않듯이 겸손할 때도 따지지 않습니다. 하인에게는 주인의 짐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이 되듯 겸손한 사람은 ‘내가 왜?’를 생각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주어진 짐을 집니다. 사랑의 마음만큼 기쁨은 없어도 거부감에서 오는 부담감이나 고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짐을 지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에 이르러야 하고 이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겸손만 가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매달려 당신 심장에서 피와 물을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그리고 그중에서도 수난의 사랑(Passion)으로 그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난의 사랑을 지닌 마음을 우리는 오늘 성심이라고 칭송하며 우리의 마음이 이 주님의 마음과 같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 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3&id=2133384&menu=4770 최영근 [dimonz] 2026-06-11 ㅣNo.190067 동정녀 탄생설과 전인격의 영성화 오늘은 동정녀 탄생설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 * 누가복음 1장 34~35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 성경 누가복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마리아 라는 아가씨가 성령으로 인해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일화 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것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들 현대인들, 이성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일화 입니다 물론 믿는 사람들은 이성을 초월하는 믿음의 문제라고도 말을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처녀가 예수를 잉태하다?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능력인지 가늠이 안됩니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처녀" 라는 단어는 "젊은 여자" 라고 해석하는 성서 번역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병정에게 겁탈을 당한 마리아가 임신을 하였는데 성격좋은 요셉이 약혼중 임에도 용서하고 결혼을 한것이다 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 *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시아와 유럽 대륙에는 동정녀 탄생 설화가 많다고 합니다 가령 우리나라에도 아버지가 없는 또는 모르는 영웅 이야기가 있습니다 견훤 설화, 박혁거세 설화, 김수로 설화, 김알지 설화 등등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동정녀 탄생 설화 즉 아버지가 없는 또는 아버지를 알지못하는 남자가 수백명이 넘는다는 조사가 있다고 합니다 가령 고대그리스 플라톤과 나사렛 예수, 서구문명은 처녀가 낳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화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처녀에게서 태어난 특별한 인간 또는 위대한 사람에게 처녀 탄생설을 부과하는 것은 옛날 시대에는 그리 드물지않은 현상이었던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사도행전도 기록한 사람으로 베드로의 제자 이고 의사 라고 전해집니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은 아름답고 신비스런 문장 입니다. 마가복음 1장의 명확하고 건조한 문장과는 많이 다릅니다 누가공동체와 마가공동체는 서로 달랐나 봅니다 --------------------------------------------------------------- * 신자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비신자들을 갸우뚱 하게만드는 동정녀 탄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한발자국 더나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수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 구원을 이루신후, 세상에 살고있는 인간을 위해 크나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네, 성체와 성령 입니다 우리들 인간은 성체와 성령을 통하여 전인격의 영성화가 이루어 집니다 전인격의 영성화의 가장 좋은 예 나아가 가장 완전한 수준으로 올라간 경우는 바로 성모님 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으신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목격하신 시간, 예수님 승천후 성령님께서 강림 하신 시간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은 성모님을 변화시킨 사건 입니다. 성모님의 삶은 우리 신앙생활의 모범 이십니다. 전인격의 영성화는 악령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길수있게 해줍니다.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영적투쟁을 하는 우리에게 유용합니다 -------------------------------------------------------------------- * 매일 미사 드리고 묵주기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묵상을 추가하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전인격의 영성화를 묵상해 보십시요 ---------------------------------------------------- ++++++++++++++++++++++++++++++++++++ ======== < 3차 >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운명하시면서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 또 다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공경에 대한 근거는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 금요일 오후 세시,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십자가형은 형 집행 방법 중에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체력이 좋은 사형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틀 사흘까지 견딥니다. 집행관들도 피비린내 나는 사형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겠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형수들의 얼굴을 유심히 봅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적당한 때가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트립니다. 그럼 체중이 아래로 쏠리고 심장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즉시 운명하게 됩니다. 마침 다음날이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이 군사들에게 빨리 좀 처리해달라고 청합니다. 집행관들이 먼저 좌도와 우도의 다리를 꺾고 난 다음, 예수님 다리도 꺾으려고 봤더니,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사살 차원에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을까요?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옆구리, 곧 예수님의 심장,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을 의미합니다.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양육하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많은 분이 사제인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 성찬의 전례 시작 때, 포도주에 물을 살짝 부으시던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포도주가 너무 독해서 물로 희석시키는 의미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들은 포도주잔에 물을 살짝 첨가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사 경문에 살짝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미사 집전 사제는 포도주잔에 물을 넣으면서 마음 속으로 한 문장을 읽게 되어있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물은 인성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결국 포도주에 물을 넣는 행위는 죄인인 우리의 인성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곧 예수 성심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5-30)> 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 일을, “우리를 대신해서 멍에를 짊어지심으로써 우리의 멍에를 없애 주셨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십자가는 멍에가 아닌가?”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멍에를 없애기 위해서 당신이 스스로 짊어지신 멍에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또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고 가는 ‘나의 십자가’는, 멍에가 아니라 멍에를 벗기 위한 열쇠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위한 일이다.” 라고 표현하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한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의 멍에를 완전히 없애 주겠다.” 라는 약속입니다. 무거운 멍에를 벗기고 덜 무거운 멍에를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9절과 30절의 ‘내 멍에’ 라는 말과 ‘내 짐’이라는 말은 반어법적 표현일 뿐이고, 이 말의 진짜 뜻은 ‘우리의 멍에를 없애 주는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멍에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싶으면 내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살아라.”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내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니다. 너희에게 참된 해방과 안식을 주는 열쇠다.”입니다. <지금 ‘열쇠’ 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 쪽의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해방과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를 받아서 자물쇠를 열고, 스스로 멍에를 벗는 능동적인 응답을 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해 가실 때, 예수님이 가엾다고 울었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3,28.31)” 이 말씀은,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여라.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공경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더욱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 25절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말씀은, “가난하고 힘없고 무식하고 못난 사람들도 빠짐없이 구원하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뜻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음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라는 말씀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감추시고’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감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자들이 외면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또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도 모두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이고, 그런 자들이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분입니다.> 4)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온갖 멍에와 짐에서 해방된 사람이고,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한눈을 팔다가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이미 벗어버린 짐과 멍에를 다시 짊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2베드 2,20-21).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 사랑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노력해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이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마음(Heart)"은 성경에서 원초적인 개념이며, 하나의 원형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인간 존재 전체의 근원과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마음'은 반드시 사랑이나 애정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깊이 알게 되면, 그 마음이 절망이나 분노, 증오로 물들어 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 속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조건 없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며, 결코 증오나 양면적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의 첫 메시지이자 마지막 메시지는 바로 하느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 예수님을 심판자가 아니라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로 보내셨고, 그분의 거룩하신 마음(성심)은 한없이 크고 자비로우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보는 곳에서, 하느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보십니다." 이는 많은 이들이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약점과 한계 때문에 자주 넘어지는 현실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며, 선을 향한 노력을 헤아리시고, 성령을 통해 용서와 은총을 베푸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과 사랑을 살고자 하는 작은 의지만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기뻐하시며 우리 곁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그 선과 사랑을 살아갈 힘을 실어 주시는 지극히 어지신 어버이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 얼마나 아름답운 초대입니까! 이 말씀을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고, 마음에 새겨 두도록 합시다! 그래야 인생의 어려운 순간이 올 때마다 잊지 않고 이 말씀 묵상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 말씀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깊이 깨달아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가면서 그런 순간을 겪습니다. 삶의 비극으로 인해 짐을 지기도 하고, 때로는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에 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일상의 짐은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오너라…" 어떤 상황이든, 주저하지 말고 두려움 없이 당신께 나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나아가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나아감으로써 우리는 삶의 어떤 어려움도 견디고 걸어갈 힘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간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죄가 남기는 무거운 짐과 그 결과까지도 친히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그분은 우리의 눈을 바라보시며, 우리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삶을 함께 살아내셨고, 우리가 기쁘게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이 온유하고 영광스러운 초대를 묵상해 봅시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무엇이든, 그 안으로 예수님을 모셔 들입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를 함께 메어 주시고, 대신 그분께서 준비하신 온유한 멍에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십자가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셨던 십자가와 하나 되어 은총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주님, 제 삶과 제 존재 모두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당신께서 주시는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저를 향한 당신의 끝없는 자비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온전히 신뢰하고 싶습니다." ---------------------------------------------------- 260612.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4:00 추가. 마태 11,25-30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렇게 육지 끝에 다다르면 그곳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요. 이처럼 바다는 낮고 넓기에 모든 것을 다 자기 안에 받아들여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바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낮춰 겸손해지실 수 있었고, 당신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이들을, 심지어 목숨을 빼앗으려 드는 원수들까지 다 당신 안에 품으실 수 있었지요. 그리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당신을 닮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참된 안식을 주겠노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는 이유는 비단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닮아 바다와 같이 낮고 넓은 마음으로 차별 없이, 조건 없이, 끝까지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버지 뜻에 순명하여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당신 것으로 삼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과정에서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그 상처로 말미암아 우리를 낫게 하시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네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들의 허물과 잘못까지 다 당신 탓으로 돌리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시 돋힌 말과 생각 없는 행동으로 당신 가슴에 대못을 박아 피가 철철 흘러도, 끝까지 자식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닮고, 어머니의 사랑을 닮는다면 나에게 잘못했다고 해서 형제를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혔다고 투덜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형제가 죄를 지었음에 함께 마음 아파하며, 그 죗값을 함께 치르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참된 안식은 그런 사랑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고 주눅든 마음은 사랑 안에서만 편안하게 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남이 먼저 나의 쉼터가 되어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내 마음 안에 다른 사람이 쉴 ‘안식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온유함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겸손함은 나를 낮추는데에 머무르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과 사랑으로 높여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마음을 제대로 느끼고 닮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당신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 심장에 배신의 비수를 꽂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서 구원을 가리는 장막을 걷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잘못들을 쏟아 부었지만, 그분은 심장에서 피와 물을 쏟아 우리 죄를 씻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가, 우리를 생명의 양식으로 양육하는 성체성사가 되셨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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