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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 간직하는 마음 등.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13|조회수50 목록 댓글 0

                                       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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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 간직하는 마음 등
1~2차(03:30), 3차(08:50)




6월 13일 묵상글, 03시 30분에 1 ~ 2차분 올립니다.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공유할 계획입니다.


** 오늘 김찬선 신부님 강론글 일찍 올리셔서 1~2차 함께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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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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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13 03:24


- 간직하는 마음






우리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리고 난 다음 날에
성모님의 깨끗한 마음도 기리는데 오늘 저는 깨끗하심에 대해
다른 때와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통 깨끗한 마음이라고 하면 마음 안에 지저분한 것들,
예를 들면 욕심 같은 것이 깨끗이 치워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달라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렇게 얘기해도 충분하겠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 이런 비유를 드신 적이 있지요.
어느 집에 죽치고 있던 악령이 떠났다 다시 돌아오니
집이 깨끗이 치워진 채로 비어있었고 그래서 그 악령이 다른 악령들을
더 많이 데리고 오자 그 비어있던 집은 복마전으로 바뀐다는 얘깁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명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악령이 나가고 깨끗이 비어졌다면 성령을 모셔 들임으로써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더 많은 악령이 들끓는 복마전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도 같은 뜻일 것입니다.
마음 안에 잡동사니나 티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나 깨나 하느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마리아가 자나 깨나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성령의 정배였기 때문이고 그래서 삼종 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오니 성령으로 잉태하셨도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지금 우리는 하느님 말씀이라고 믿고그 말의 뜻이 뭔지도 알지만당시의 마리아는 믿기도 알아듣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그 말을 바로 마음에서 밀어내지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아들 예수의 알아들을 수 없는 행동과 말을 마음 안에 간직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깨끗한 마음일 뿐 아니라 간직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다른 수많은 말을 비어내고 하느님 말씀만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은 말씀을 마음속에 계속 잘 간직하여 완성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도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순간 깨끗한 마음으로 있다가
냉큼 모셔 들이는 것도 본받아야 하지만
들은 말씀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히 가야 하기에,
다시 말해서 먹었다가 바로 뱉어내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에
우리에게는 순간도 중요하지만, ‘영원히가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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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2,41–5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열두 살이 된 예수님도 함께 올라가셨다가
축제가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
부모는 예수님이 일행 가운데 계신 줄 알았지만
하루 길을 간 뒤에야 그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걱정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 가운데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가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하고 묻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뒤 예수님은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내시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 안에서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과
마리아의 믿음이 함께 드러난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시면서도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께 속한 분이십니다.
“제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씀은
그분의 사명이 이미 세상의 친밀한 관계를 넘어
하느님의 뜻 안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정을 버린 선언이 아니라
가정과 역사 안에서도
더 깊은 아버지의 뜻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시선으로 보면
이 장면은 단순히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 익숙한 기대 속에서 찾다가
마침내 아버지의 뜻 안에서 그분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그분의 깊이를 아직 다 알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자주 내 기대와 내 방식 안에서만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아버지의 뜻이 가장 깊은 자리에서 발견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인간 역사 안에서
듣고 묻고 머무시는 모습으로 드러나십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신비입니다.
참된 지혜는 모든 것을 즉시 말하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집 안에 머물며
듣고 묻는 데서 자라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런 장면을 통해
겸손한 지혜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또 복음은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다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 말씀까지도
마음에 간직합니다.


아우구스티노의 관점에서 보면
이 간직함은 믿음의 중요한 태도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즉시 설명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익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음 안에 머물게 하는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성실은 바로 이런 간직함 안에서 자랍니다.


성실 / 온유 / 절제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성실을
하느님의 일에 머무는 꾸준함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머무셨고
마리아는 그 말씀을 마음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온유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분노와 소유의 언어로 다그치지 않고
마음을 열어 두는 태도입니다.
절제는
즉각적인 결론을 내리려는 조급함을 멈추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지혜입니다.


오늘 토요일 이웃종교 / 생태의 날에
윌리엄 존스턴의 통찰과 함께 보면
이 장면은 더 깊어집니다.
침묵과 관상은
아무 생각 없이 비워지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 앞에 머물며
조급한 해석을 내려놓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셨고
마리아는 그 일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존스턴이 말한 깊은 관상의 길도
바로 이런 머묾과 경청의 태도와 맞닿습니다.
말을 줄이고 존재를 깊게 하는 길,
그것이 참된 영적 성숙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내 편한 기대 속에서만 찾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이해되지 않는 일을
금세 판단하고 설명하려 하지는 않는가?
나는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일을 마음에 간직할 줄 아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아버지의 집을 다시 찾으라고 부르십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제 기대 안에 가두지 않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 안에서 당신을 다시 찾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는 말씀도
성실히 마음에 간직하게 하시고
조급함 대신 온유를,
성급한 판단 대신 절제를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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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린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 길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을 드러내는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정에만 머무는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리아는 더 깊은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지만,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미쳤다.”라는 소문까지 듣게 됩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찾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나의 어머니이고 형제입니다.” 이 말씀 또한 마리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말씀도 가슴에 품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간직하고, 아파도 받아들이는 것이 성모님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인간적으로는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기에 그 길을 받아들이셨고,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드님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마음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채워진,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이후, 여러 발현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다섯 가지 당부가 있습니다. 첫째,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라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한 반복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공생활, 수난, 부활을 묵상합니다. 다시 말해서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함께 걸어가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고통을 예수님의 삶과 연결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둘째, 성경을 자주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식은 자주 듣고,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으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을 배우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 고백성사를 자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 죄가 쌓이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고백성사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한 달에 한 번의 고백성사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넷째, 미사에 충실히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평일 미사에도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미사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참여하는 가장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미사를 중심으로 살아갈 때 더욱 깊어집니다. 다섯째, 단식과 절제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라고, 더 많이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반대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훈련입니다. 절제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특별한 신앙인의 길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기본적인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결국 성모님의 마음, 티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자녀의 건강과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것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드님을 놓지 않으셨고,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이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믿고,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성모님의 다섯 가지 당부를 마음에 품고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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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항)


교황 비오 9세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항).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나셨습니다. 언제나 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나기를 바랍니다.

티 없으신 성모성심이여!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당신께서는 오로지 당신 아드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셨듯이, 저희 또한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하소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를 받아들이시어 저희 또한 당신 아들의 성심 안에 흠뻑 젖어들게 하소서.
그 사랑의 성심으로 제 형제들을 가슴에 끌어안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티 없으신 성모성심이여!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당신께서 오로지 당신 아드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셨듯이,
저희도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하소서.
오 어머니시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희를 받아들이시어
저희도 당신 아들의 성심 안에 흠뻑 젖어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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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성가정의 발걸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동사 가곤 하였다.”(루카 2,41)가 암시하듯 되풀이되는 경건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이 익숙한 리듬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됩니다.
유다 전통에서 성인의 책임을 묻는 나이에 가까운 열두 살에 예수님께서는 유다 전통의 익숙함을 끊고 성전에 머물기를 선택하십니다.
이는 부모의 실수라기보다는성년의 문턱에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결단이지요.


부모가 예수님을 찾아 헤맨 사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인 사흘을 미리 보여 줍니다.
성전의 율법 교사들 사이에 앉아 계신 소년 예수님의 모습은 뒷날 수난 직전 성전에서 펼쳐질 율법 교사들과의 논쟁을 미리 보여 주며주님 수난의 큰 슬픔을 마주하게 될 독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슬픔이나 고통 너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이 질문은 애타게 아들을 찾던 부모에게는 차갑지만믿는 모든 이에게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넘어 신성한 하느님의 자리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신앙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우리의 신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 사흘의 시간을 통하여 저만치 멀리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 한가운데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는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부모에게 순종하시며 일상을 보내십니다.
가장 신성한 순간과 가장 평범한 순종이 교차하는 지점그곳이 바로 우리의 삶이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하느님 현존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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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내가 너희 안에 머물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라!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 안에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신적 교환의 신비를 끌어안기

내가 너희 안에 머물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라

2026년 6월 12일 금요일


다음 강론에서 리처드 신부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친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다는 뜻을 전합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여러분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는 친구를 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올바른 관계 안에 머무르는 친구를 원하시겠습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친교 안에서 함께하는 친구를 더 원합니다. 사실 늘 옳다고만 하는 사람은 때로는 꽤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정답만 말하는 친구와, 언제나 연결되어 있는 친구 중 누구를 더 원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후자를 더 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서구 사회에서는 하느님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자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가 언제나 옳고, 정확하며, 심지어 완전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의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올바른 관계 안에 머무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곧 마음을 열고, 타인을 이해와 동정심으로 경청하며, 겸손히 받아들이는 삶을 뜻합니다. 또한 우리가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 대부분은 거의 매일 그렇게 살아갑니다. 저 역시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신과 다른 이들을 완전하지 못하고, 옳지 못하며, 정확하지 못하다고 단죄하곤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비유 중 하나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줍니다. 곧,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려 애쓰는 듯합니다. 우리는 거의 집단적으로 실패를 인정하거나 잘못을 고백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으며, 그로 인해 대부분의 경우 진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을 부르십니다. 곧, 겸손히 잘못을 인정하고, 은총 안에서 진리를 살아내며, 사랑과 동정심으로 친교를 이루는 새로운 인간상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결과 관계 안에서 겸손하고 열린 삶을 사는 이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우리가 신뢰하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도 왜 많은 이들이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그 모습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우리 인간이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참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 가지들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옳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아침 커피를 손에 들고 덮개 있는 파티오로 나가 아침 묵상글을 읽었습니다. 부드럽고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그 빗줄기를 바라보며 푸른 잔디와 꽃들, 나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 계셨음을. 그래서 저는 그분을 환영하며 또 하루의 생명을 허락하신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 Kaye B.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Being Connected over Being Correct,” homily, April 28, 201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hivam Mistry,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끊임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신비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비워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흘러 들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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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오 11,30 묵상)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말씀은 짐이 없는 삶을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누구나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면서그 짐을 어떻게 지고 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우리는 흔히 짐 자체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실제로 우리를 더 지치게 만드는 것은 짐의 무게보다도 그것을 혼자 지고 가려는 마음입니다.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공동체 안에서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병고의 아픔미래에 대한 불안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의 어깨를 누릅니다그런데 같은 상황 속에서도 어떤 이는 평화를 잃지 않고어떤 이는 무너집니다차이는 짐의 크기가 아니라 그 짐을 누구와 함께 지고 가느냐에 있습니다예수님의 멍에는 겨릿소의 멍에와 같습니다어린 소는 모든 무게를 감당하지 않습니다경험 많고 힘센 소가 대부분의 무게를 지고어린 소는 그 곁에서 발을 맞추며 걸어갈 뿐입니다.


신앙은 내 짐을 없애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주님과 보조를 맞추어 걷는 것입니다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내가 옳아야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는 것입니다모든 관계를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행위 이전에하느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그래서 어떤 때는 침묵하는 것이 짐을 가볍게 합니다용서하는 것이 짐을 가볍게 합니다또 사과하는 것이 짐을 가볍게 합니다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짐을 가볍게 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종종 십자가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거부하는 데서 더 커집니다우리가 경험으로 알듯이 가장 무거운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마지못해할 수 없이지는 십자가입니다예수님은 십자가를 없애 주지 않으셨습니다대신 십자가를 함께 지셨습니다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도갈릴래아 호숫가의 베드로가 실패와 죄책감에서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도그들의 짐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는 말씀은 사실 이런 뜻에 가깝습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네가 넘어질 때 내가 함께 일어나 주겠다네가 울 때 내가 함께 울겠다네가 길을 잃을 때 내가 길이 되어 주겠다네가 짐에 눌려 주저앉을 때 내가 그 짐의 무게를 함께 지겠다.


신앙은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기적이 아니라그 짐을 함께 져 주시는 분을 발견하는 은총입니다그리고 어느 날 뒤돌아보면짐이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짐을 지고 가는 내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새로워졌음을 알게 됩니다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하느님 나라는 짐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무거운 짐을 함께 져 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을.


하느님은 삼위일체 관계적 사랑이시고 나는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며 사랑받음에 응답하기 위하여 내 자유를 도구적 존재로 내어드릴 때마다 부할하신 주님의 영께서 내 안에서 일하십니다그러므로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은 사랑받음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의 현장관계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입니다하느님 나라의 학교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랑의 학교입니다이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은 예수님이라는 사랑의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며 자신을 살핍니다성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는 그 학교에서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닮으려다 그분처럼 되신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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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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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 성심과 한 쌍인 성모 성심! 






시골에서 살다 보니 도시에서는 절대 못볼 광경을 목격합니다.
어젯밤 해루질을 다녀올 때는 갑자기 제가 모는 자동차 불빛을 보고 고라니 한 마리가 튀어나왔는데, 아직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 고라니였습니다.
제가 천천히 달리니 안심이 되었던지, 제가 비춰주는 불빛의 도움으로 300미터 이상을 달리고 나서, 저를 한번 돌아보더니,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면사무소를 지나오게 되면, 그 뒤로 피정 센터까지는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한적한 도로입니다.
분교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예쁘게 생긴 어미꿩의 인도에 따라 열마리나 되는 아기꿩들이 줄줄이 차도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녀석들이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진풍경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녀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나쁜 사람 아니란다. 내가 지켜줄테니 다른 차들 오기 전에 빨리들 건너가거라!’ 
 
제가 갑자기 나타난 돌발 상황 앞에 어머 꿩은 엄청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도로 중간쯤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생각을 바꿔서 아기들을 이끌고
나름 초스피드로 건너갔습니다.
부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새끼 꿩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어미 꿩을 따라갔지만, 보폭이 짧은 탓에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새끼 꿩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어미 꿩의 모습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성이라는 것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하고 나면 그 뒤로는 완전히 어미 자신을 잊습니다.
하루 온종일 목숨까지 걸어가며 새끼들을 먹여 살립니다.
혹시라도 침입자가 새끼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성모님 역시 아기 예수님을 출산하신 이후의 삶, 보통 어머니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의 마음은 다른 어머니들보다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더 조심스러웠고, 더 노심초사했고, 더욱 많은 신경을 쓰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날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순간순간 지켜보신 성모님은 혹시라도 나로 인해
아기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은 늘 묵묵히 예수님을 위해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 늘 계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응했습니다.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예수님 주변만을 맴돌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연구하고, 예수님만을 관상했던 예수님의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런 마리아의 거룩한 마음이 곧 성모 성심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요, 세상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향해 지니셨던 똑같은 마음으로 오늘 우리 각자를 굽어보십니다.
어린 새 같은 우리가 걱정되서 늘 노심초사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런 탈 없이 하루 하루를 지내기를,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떠나 방황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 성심과 한쌍을 이루신 성모 성심께서는 한 마음 한 몸으로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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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41-51)> 
 
1) 우리 교회가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이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인데, 성모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잃은 아들을 애타게 찾으신 성모님의 마음과 죄인들을 애타게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같은 마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인들을(나를)
애타게 찾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2)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늘 함께 계셨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성모님도 함께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것도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 마음과 사랑에 응답하려면, 회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마음에 나의 마음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관해서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 12,33-35).”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 15,18-20).”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성모님은 ‘마음의 깨끗함’에서 모든 사람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진심으로 회개해야 하고, 마음속의 나쁜 것들을 억누르는 의지와 노력도 중요하고, 오직 마음의 깨끗함만을 희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8-19).”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ㄱ).”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마귀를 쫓아낼 수 없는 것처럼(마르 9,29),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기도’가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성모님께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쁜 것들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좋은 생각과 말들로만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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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성모님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새기심"과 안토니오 성인의 "기도와 헌신의 영을 간직함"을 묵상하며.... 






성모님께서 "마음속에 곰곰이 간직하고 되새기심"은 그리스도교 관상의 핵심이 무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독특한 해석으로 비추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과 성 요셉은 군중 속에서 아기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성전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그분을 다시 찾았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고귀한 탄생을 찾고자 한다면, 군중을 떠나 여러분이 온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혼의 모든 능력과 그 활동은 곧 군중입니다. 기억, 이해, 의지—이 모든 것이 여러분 마음을 분산시키므로, 그것들을 떠나야 합니다. 감각, 상상, 혹은 여러분이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그 무엇이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이 탄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솟아나야 하며, 그래야만 이 탄생이 참되고 분명하게 빛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활동을 멈추고, 모든 능력은 여러분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적을 섬겨야 합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오직 하느님께서만 그것을 행하셔야 하며, 여러분은 그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자신의 의지와 지식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께서 손수 그분의 지식으로 기꺼이 들어오시어 그곳을 환히 비추실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프란치스칸들이 기념하는 성인이 있습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1195-1231)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모님의 "마음속에 곰곰이 간직하고 새기신 삶"과 성 프란치코와 성 안토니오의 "기도와 헌신의 영을 마음에 간직하는 삶"을 함께 연결하여 묵상해 보겠습니다.

그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하느님께 자신을 열정적으로 봉헌하는 삶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그의 삶에 대해 잠깐 나누겠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본래 포르투칼 리스본 태생이고 그의 본 이름은 페르난두 마르팅스 드불룡이스(Fernando Martins de Bulhões)인데, 그는 15세가 되던 해인 1210년에 리스본에 있는 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의 상비센트드포라 수도원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친구들과 가족들의 잦은 방문으로 인해 마음에 산란해지자 그는 1212년에 코임브라에 있는 산타크루스 대수도원으로 옮겨가 거기에서 8년 동안 신학과 라틴어를 공부하며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1219년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수도원의 방문객들을 환대하는 일을 하면서 코임브라 외곽의 작은 은수처에 정착하여 살게 된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형제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소박하고 검소한 복음적 삶의 자세에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그 은수처의 5명의 형제들이 모로코에 선교를 갔다가 순교하였는데,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알폰소가 모로코 정부에 순교자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이 5명의 시신을 안토니오가 머물던 산타크루스(성 십자가) 수도원에 안장하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토니오는 자기도 이들처럼 선교하다가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에 장상의 허락을 받아 1220년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안토니오(사막의 대 안토니오 성인 주보)라는 수도명으로 새롭게 서원을 하게 됩니다. 그후 아프리카의 모로코로 선교를 지원하여 그곳에 갔지만 거기에서 심한 병을 얻어 포르투칼로 돌아오는 중 배가 항로에서 벗어나 포르투칼이 아닌 시칠리아 섬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시칠리아에서 출발하여 토스카나로 도착해서 그곳 수도원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하지만 병약한 그의 건강 상태 때문에 수도 생활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는 로마냐의 포를리 인근에 있는 산파올로라는 시골의 은수처로 이동되었는데, 이는 그의 건강 악화를 고려하여 내려진 조치였습니다. 그곳에서 안토니오는 한 수사가 인근 동굴에 만든 독방에 은거하며 개인적으로 기도와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1222년 어느 날, 포를리에서 프란치스코회 사제 서품식이 있게 되었는데, 도미니코회 수사들도 많이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사 중 누가 강론할 것인지를 놓고 예기치 않게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측에서는 도미니코회가 설교자회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만큼 뛰어난 설교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도미니코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강론대에 서기를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도미니코회원들은 프란치스코회의 서품식이었기에 프란치스코회원이 당연히 강론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강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로 참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크게 난처해진 수도원장은 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을 모색하던 중 안토니오가 가장 제격일 것 같아 보여, 안토니오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성령이 그의 입을 통해 말씀을 내려주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안토니오는 극구 사양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강론대에 서게 되었는데, 그의 강론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와 겸손한 태도 뿐만 아니라 강론의 주제 및 전체적인 내용 그리고 유창한 웅변 실력을 통해 청중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청중은 모두 수년간 아우구스티노회에서 수도 생활을 하면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아 올린 그의 해박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안토니오 성인은 설교자로 유명해지게 되었고,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에게 형제들을 가르칠 허락을 주게 됩니다. 안토니오에게 보낸 프란시스코의 편지에 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나의 주교(안토니오는 주교가 아니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신학자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주교"라고 부르고 있음)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렇게 그는 작은 형제회의 첫 번째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기도와 관상에 머물며 동시에 설교하는 일에 더욱 헌신하기 위하여 공식적인 직책에서 면제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랐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고해성사를 주는 신부로서의 그의 성공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중 1226년 10월 프란치스코 성인이 선종하자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에밀리아(Emilia) 관구의 관구장 대리로 선출되었으나, 설교에 전념하기 위해 1230년에 사임한 뒤 파도바 수도원에 정착하면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파도바 전체를 완전히 개종시킨 그의 설교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또한 그는 채무자,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는 일을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고 이단자를 개종시키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였습니다.
1231년 그는 수종 등을 겸한 열병으로 잠시 요양할 목적으로 캄포 산 피에로(Campo San Piero)로 갔으나, 병이 심해져 파도바로 되돌아오는 길에 베로나(Verona)의 아르첼라(Arcella)에 있는 클라라 수녀원에서 선종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안토니오 성인에게 분부하고 "기도와 헌신의 영"이란 마음과 정성과 애를 다하여 주님과의 깊고 친밀한 관계성 안에 있고자 하는 영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헌신(devotio)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CAC의 매일 묵상에서 리처드 신부님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요한 복음의 말씀에 대한 강론 내용이 소개되었는데, 이 강론에서 리처드 신부님이 강조하는 바가 바로 이 "기도와 헌신의 영"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모님이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새기신 바"이고요!

리처드 신부님은 이 강론에서 우리가 옳고 바르고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성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우리는 사실 죽을 때까지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사랑이요 자비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고자 하는 노력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와 신심의 영을 끄지 않는 삶의 자세라고 저는 봅니다.

이런 삶의 자세는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님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에서 솟아나는 것이고,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이 강조하며 살았고 또 안토니오 성인이 살아냈던 "기도와 헌신의 영"을 깊이 간직하는 삶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정성스럽게 살고자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족함과 실수, 흠과 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과 안토니오 성인을 기리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성 안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져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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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3.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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