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9-1. 복음 묵상

260614. 연중 제11주일. 묵상글(강론글) -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등.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14|조회수40 목록 댓글 0

 

 

출처 :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32



+++++++++++++++++++++++++++++++++++++++++++++++++++




260614. 연중 제11주일. 묵상글(강론글)  -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등.
1차((6월13일. 22:45),  2차(05:35), 3차(07:40)




14일. 묵상글, 13일 22시 45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


2026년 06월 14일 일요일
[연중 제11주일] 열두 제자 파견 (마태9,36-10,8)


1독서<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19,2-6)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이렇게 이스라엘은 그곳 산 앞에 진을 쳤다.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말하여라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 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그리




2독서<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5,6-11)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복음<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그들을 보내셨다.>(마태9,36-10,8)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토마스와 세리 마태오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


========


< 1차 >




----------------------------------------------------


260614. 연중 제1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9,36–10,8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것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그리고 곧바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과
병과 질병을 고치는 권한을 주시며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며,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십니다.


성 예로니모는
성경의 말씀을 단지 지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삶의 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곧 자비입니다.
주님은 먼저 사람들의 상처를 보십니다.
그들의 외적 수고만이 아니라
내면의 지침과 방향 잃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판단하기보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복음 선포는 바로 이 자비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연민을 느끼신 뒤
곧바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자비는
그저 안타까워하는 감정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로니모의 관점에서 보면
복음의 제자는
주님의 마음을 보고 듣는 사람일 뿐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참여하여
세상 속으로 파견되는 사람입니다.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이
이제 제자들의 손과 발, 말과 태도를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이 이미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세상에 필요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필요를 보고 응답할 사람이 적다는 데 있습니다.
친절과 선행의 주간에 이 말씀은 더욱 선명합니다.
세상은
거창한 영웅보다
아픈 이를 보고 지나치지 않는 사람,
상처 입은 이를 향해 다가가는 사람,
희망의 말을 건네는 사람,
실제 도움을 베푸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도 분명합니다.
하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이를 고치고
부정하다고 밀려난 이를 깨끗하게 하며
사람을 얽매는 어둠에서 해방시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말뿐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예로니모는
말씀을 사랑한 교부였지만
그 말씀은 언제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면
아직 충분히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친절과 선행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우리는 먼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비를 받았고,
용서를 받았고,
생명을 받았고,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내가 착해서 시작되는 일이 아니라
먼저 은총을 받은 사람이
그 은총을 다시 흘려보내는 일입니다.


친절 / 선행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친절이 단지 예의 바른 태도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친절은
목자 없는 양처럼 지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선행은
그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 안부 한 번,
작은 도움 하나,
누군가를 대신해 짐을 조금 나누어 드는 일,
이런 것이 다 복음의 선행이 될 수 있습니다.
성체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의 몸뿐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비 없이는 성체의 뜻을 다 살지 못합니다.
주님의 몸을 모신 사람이
상처 입은 이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의 열매가
친절과 선행으로 나타나야 함을 보여 줍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군중 속의 상처를 보고 있는가?
나는 누군가의 지친 얼굴을 그냥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거저 받은 은총을
거저 흘려보내고 있는가?
나는 친절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 자비의 일꾼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주님,
군중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당신의 마음을
제 안에도 심어 주소서.
상처 입은 이를 보고 지나치지 않게 하시고
친절이 실제 선행으로 이어지게 하시며
거저 받은 은총을
거저 나누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60614. 연중 제1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숫자에는 상징이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3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 삼자’라고 말하곤 합니다. 셋째 딸은 따지지 않고 며느리 삼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셋째 아들입니다. 반면에 4는 죽음을 뜻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4층이 없는 곳도 있습니다. 숫자 4와 한문의 죽음을 뜻하는 사(死)와 음이 같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상징적인 숫자가 있습니다. 오늘은 ‘40’이라는 숫자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40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정화와 준비, 회개와 변화’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이루십니다. 노아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40일 동안 비를 내리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을 씻어내는 심판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비가 그친 후에 노아는 40일이 지난 후에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제 물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는 40과 관련이 많습니다. 40년은 이집트에서 왕자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40년은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나이산에서 기도하였고,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물은 심판과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군사들은 물로 심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도 40일 동안 걸어가면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라고 선포했지만, 그 무너짐은 회개를 통한 변화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신 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40이라는 시간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변화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같은 40이라는 시간이라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세 왕,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은 모두 40년을 통치했습니다. 똑같은 40년이었지만 그 결말은 서로 달랐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하느님보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결국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졌습니다. 같은 40년이었지만, 사울의 삶은 점점 무너져 갔습니다. 다윗도 40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눈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의 주인공이 되었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같은 40년이었지만, 다윗의 삶은 회개를 통해 거룩함으로 나아갔습니다. 솔로몬 역시 40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받았고, 성전을 건축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교만해졌고, 결국 이방의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아쉬운 삶이 되었습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왕은 모두 같은 40년을 살았지만, 그 삶의 방향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쩌면 이 ‘40’이라는 숫자는 우리의 인생과도 닮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길고 짧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음을 전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받은 은총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불평하며 살 수 있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의 시간, 이 ‘은총의 40’은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이 시간 안에서 우리는 정화되고, 회개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울처럼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다윗처럼 회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솔로몬처럼 시작만 좋은 삶이 아니라, 끝까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구원의 방주’가 되어,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


260614. 연중 제11주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군중을 보시고”(마태 9,36)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시선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머물러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5,1 참조).
이들은 고통과 질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난 이들이며(4,2425 참조), 시대와 사회의 상처가 만들어 낸 불의이고 불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9,36). 여기에 쓰인 그리스 말은 애가 탄다애간장이 녹는다’ 정도의 의미로다른 이의 처지를 자기 안에 끌고 와 그 고통과 불행에 함께하는 깊은 자비를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자비는 대개 인간의 육체적 어려움과 고통을 향합니다이는 곧 제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지 미리 밝힙니다교회의 첫 선포는 논리적 설명이나 사변적 논쟁이 아닌구체적 치유와 돌봄이었습니다.


군중의 처지를 묘사할 때, ‘시달리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가죽을 벗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목자 없는 양”(민수 27,17; 참조에제 34)의 심상과 연결되며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다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조용한 비판이기도 합니다목자의 자리곧 돌봄과 보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도와 율법그에 따른 심판만 남아 있지는 않은지 오늘 복음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구실을 충실히 하지 못하는 목자들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여기서 추수는 심판의 상징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종말론적 부르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 가는 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종말이 다가왔음을 보여 줍니다.
내 삶의 한 조각으로 이웃의 조각난 삶을 이어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말이고 구원이겠지요.




----------------------------------------------------


260614. 연중 제1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하느님 백성의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체결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약 체결을 통하여,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독점적인 수취자가 아니라, ‘사제들의 나라’,의 사명, 곧 하느님과 중재를 이루는 보편적 구원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로마 5,11)라고 고백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났고, 모든 이가 구원을 받았음을 확인해줍니다.


<복음>은 세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치유의 장면’,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장면’,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이는 인도하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목자 없는 양”의 가련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괴롭힘을 당하고 짓눌리고 상처받고 “시달리며 기가 꺾여” 방향을 잃고 쓰러져 방치된 현실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말해줍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더욱 안타까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마태 9,37)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고 말씀하시면서도, 못내 “가엾은 마음”을 어쩔 수 없으신 까닭에 손수 그 “일꾼들”을 뽑으십니다.


그러니 <둘째 장면>에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것은 ‘가엾은 군중을 위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들에게로 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복음의 수취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의 사명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예수님의 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할 일입니다.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위축된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것은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은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도 ‘그분의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예수님의 마음’이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께서는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그리고 <셋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그러니 우리는 ‘이미 그 마음을 거저 받은 것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곧 이미 받았기에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지 않는 가짜인 자기가 만든 마음이 아니라, 거저 받은 진짜인 예수 마음을 주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이 되게 하소서.
가짜의 제 마음이 아니라 진짜인 당신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게서 드러내소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260614. 연중 제1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들이 톨스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옆의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면서 내 옆에서 밀어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면서 밀어내기도 합니다. 또 나와 같지 않다고 밀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성당 교우, 그밖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귀할까요? 지금 그 귀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먼 훗날에 그들이 내 옆에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신 뒤에야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귀함을 보지 못했음에 후회하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고 시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를 뜻하는 희랍어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지금 상처받고 억눌린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타락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율법의 무거운 짐만 지웠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로마에 세금을 가져다 바치는 세리 마태오도 있었고,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민족주의자 열혈 당원 시몬도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뽑으시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완벽한 의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실패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잊어버리고, 대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곤 합니다. 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 것이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언제나 준비되어 계시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준비를 그리고 하느님께 가까이에 있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너는 하느님을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매주 성당에 다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고, 또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학교에서는 배운 다음에 시험을 치지만, 인생에서는 시험을 치르면서 배우게 된다(톰 보뎃).




----------------------------------------------------


260614. 연중 제11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형제자매들은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상태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타인에 대한 시선은 좁은 시야(視野)로, 그것도 보여지는 것만을 편견과 선입견의 시선으로 그릇되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염기원은 「인생 마치 비트코인」이란 책에서 『 상식에서 벗어난 판단을 하는 사람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몸이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가난을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신이 가난한 사람은 그나마 가진 것도 모두 잃는다. 가난의 법칙이다. 실패를 통해 배운 게 없는 사람, 자신의 힘으로 좌절을 극복한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라고 말합니다.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선은 참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형성된 것이며, 이는 결국 자기 과거 상처의 어둠과 의존적 약함에서 기인한 결과물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자신이 가진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모든 것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갇힌 채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태16,23)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사탄은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그 무엇이 아니라 항상 타인보다 앞에 나서고 드러내기를 원하는 자아,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양 가식과 허세로 넘쳐나는 거짓된 자아라는 사탄입니다. 이게 우리 내면의 상태이고, 그 결과가 바로 현실 속에 드러난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입니다. 

오늘 복음엔 직접적으로 바리사이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란 거울을 통해서 바리사이들의 시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타인을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바라보는 바리사이들을 뒤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이 겉으론 거룩함과 깨끗함이란 시선을 가지고 타인 곧, 예수님을 포함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바리사이들을 뒤에서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결국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들의 뒷모습이 확연하게 보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어떤 시선으로 군중들과 특히 예수님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기도 하고 어울리는 예수님,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 자신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위선자라고 질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바리사이들의 시선, 곧 마음의 태도는 처음부터 비딱했고 오그라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에서 여차하면 빌미 거리를 잡을 의도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예수님을 향한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에서 이미 그들의 내적 태도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이런 왜곡되고 오그라든 마음의 소유자들이 예수님 당대의 지도층이었고 그로 인한 피해는 모두 다 민중들이 짊어져야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이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9,36)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전 남미를 두 차례 여행하면서 들었던 많은 사람의 자조적인 표현은 이렇습니다. 『 하느님께서 이 땅, 남아메리카에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딱 한 가지 주시지 않은 것은 바로 올바른 정치가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예전에 비해 남미 상황은 훨씬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않다고 봅니다. 정치계나 종교계나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변화와 발전은 요원합니다.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일꾼들, 사제와 목사들의 숫자는 분명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성직자들이 많아져서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 내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일꾼의 숫자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군중을 가엾이 여기는 목자입니다. 군중의 기를 꺾지 않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을 가진 성직자, 자신이 한 말을 실행하는 참된 하느님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일꾼의 수효가 적거나 없어서 지금 세상이 하느님의 밀밭과 포도밭에서 수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 제대로 된 일꾼들이 많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더 마음 안타까우리라 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고 추궁당하는 성직자가, 바로 제가 아닌지 타인을 바라보는 저 자신을 거울이신 예수님을 통해 바라봅니다.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꺾여 풀이 죽은 듯 보이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9,37~38) 예수님께서 언급한 ‘수확할 일꾼’이란 처음부터 씨를 뿌리고 모를 내는 일꾼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농사지어 놓은 것을 수확할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확할 일꾼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일꾼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사람을 살리는 일 곧 구원 활동입니다. 예수님은 강생과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요19, 30) 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인류 구원 사업을 계승할 일꾼들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성해 놓으신 인류 구원 사업을 계속할 열두 사도들을 뽑으셔서 삶을 통해 가르치시고 파견하실 겁니다. 그런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 14)라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 일꾼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들이려고 했지, 예수님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들이려는 일꾼이 적었고 적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였지만, 정말 믿을만할 예수님의 일꾼은 많지 않았고, 많지 않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꾼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먼저 홀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시고, 자신이 해야 할 일 곧 아버지의 뜻을 지속해서 실천할 사도들을 하나하나 이름불러 뽑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요15,16 참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3,14-15)라는 점입니다. 즉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점은 바로 스승이신 예수님과 몸과 마음이 함께 머물면서 삶을 통한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육은 이념적 교육이 아니라 스승이신 주님과 함께 삶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터득되고 내면화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측은한 마음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처럼 목자 없는 양들을 가엾이 여기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곁에서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심영(心靈)으로 충만할 때, 수확할 힘을 길러내고, 수확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 는 것은 그분의 언행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그분의 마음을 닮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열두 제자의 명단을 봅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점은 이들 대부분이 혈연이나 지연 그리고 학연의 측면에서 볼 때,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계승할 협력자가 필요하셨는데 그 선택된 제자들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정말 하찮은 사람,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소명받고 선택받은 것은 우리 역시도 제자들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분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 26. 29)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그들이 선택받기 이전의 출신 성분, 교육 정도, 성격, 직업의 현재 상태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래에 그 무엇이 될 가능성을 꿰뚫어 보시고 또한 하느님의 은총에 얼마나 순응하고 조화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라 봅니다. 그러므로 제자로 선발된 이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갈 단순하고 순박한 믿음을 지닌 하느님의 어린아이와 같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 하느님의 어린아이가 되려고 노력했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셨음을 자각하고, 우리 역시도 선택받을 수 있음을 다짐하면서 용기를, 희망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이 주간을 살아갑시다.
“언제나 주님 얼굴을 찾고 그 얼굴에서 반사되는 빛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


260614. 연중 제11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서로 연결되고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음의 축복!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그리스도교는 지금 전환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삶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신적 교환의 신비를 끌어안기

서로 연결되고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음의 축복

2026년 6월 13일 토요일

신비로운 "거룩한 교환(The Divine Exchange)"을 배우는 이들에게, 신시아 부르조(Cynthia Bourgeault)가 축복을 전합니다:

우리 시대의 남아프리카 영적 지도자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라는 진리가 바로 우주가 정렬되어 있는 에너지의 주파수입니다. 다른 모든 방식의 에너지 교환은 곧바로 [세상과] 우리의 삶의 경험 안에서 불협화음과 혼란을 일으킵니다." [1]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행위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는 세상 안에서 강해지고 굳건해집니다. 이로부터 이천 년 전, 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시며 그 길을 보여주셨고, 당신 자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써 이를 거룩하게 성화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시대를 앞서간 예언자, 씨앗을 뿌리는 이라 부릅니다. 그분이 선포하신 급진적인 경제적·사회적 비전은 단번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열과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힌 인류의 토양 속에서 거의 이천 년 동안 서서히 자라나야 했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인간 의식이 진화하여, 비로소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까지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전환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공동체적 소속감 역동적 나눔이라는 전혀 새로운 비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과학과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도, 한때는 너무도 급진적으로 여겨졌던 "역동적 상호 교환"이 온전한 일치와 조화, 곧 지구적·우주적 체계 안의 항상성을 이루는 근본 원리라는 생각이 점차 힘을 얻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의 고비를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곧 개인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바깥과 주위로 흘러가는 전혀 새로운 사고의 길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우주적 비전(cosmovision)"과 의식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생애 안에서조차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가르침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은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분에 대한 신뢰를 더욱 굳건히 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또한 그분이 씨앗을 뿌리신 그리스도교를 살아 있고, 현대적이며, 시대에 맞는 종교로 바라보게 하며, 이 아름다운 흐름의 비전—곧 나눔과 일치의 비전—을 새로운 우주적 관점(cosmovision) 속으로 전해 나갈 수 있는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제 공은 우리 공동체의 손에 놓 있습니다. 우리 이 비전과 함께 달려 나아갑시다.

References
[1] Michael Brown, The Presence Process: A Healing Journey into Present Moment Awareness (Beaufort Books, 2005), 246.

Adapted from Cynthia Bourgeault, “A Closing Blessing” in The Divine Exchange: Living in Sacred Rhythm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6). Enroll now to explore Christian wisdom traditions in this self-paced online cours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hivam Mistry,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끊임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신비 안에서, 우리가 자신을 비워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흘러 들어오십니다.




----------------------------------------------------


++++++++++++++++++++++++++++++++++++


========


< 2차 >




----------------------------------------------------


260614. 연중 제1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14 05:25


-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요즘은 전보다 분명히 자기 연민이 넘칩니다.
너나없이 자기 연민에 빠져 삽니다.


자기만 힘들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럴까원인을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먹고 사는 것이 너무도 치열하고
힘들어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너나없이 자기 연민에 빠져 살면
그 결과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곧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자기 연민에 대해 오늘 얘기를 꺼냈느냐 하면
군중에 대한 연민을 주님께서 오늘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연민만 드러내시지 않고
이렇게 된 원인과 그것을 풀 해법을 제시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


군중이 이렇게 기가 꺾여 살게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진정한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해야 할 것은 양들을 억압하고 잡아먹고 팔아먹는 거짓 목자를 대신할
진정한 목자를 하느님께서 보내주십사 청하라고 하며 열두 제자를 뽑으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나의 제자들아연민이 없이 등골이나 빼먹으려는 저 거짓 목자들과 달리
너희는 나의 제자답게 양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거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도 당신 제자로 삼겠다 하실 때 예라고 할 것인가그것이고,
오늘 탈출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가 주님의 소유가 되고,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또 흔쾌히 그리될 것인가그것입니다.


제 생각에 신자라면 영광스럽게 생각하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럽긴 해도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고,
나는 그런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만큼 살고 난 저로서는 제자 되는 것이 영광도 부담도 아니고,
능력의 문제나 자격의 문제도 아니고 사명이고 사랑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하신
오늘 주님 말씀이 바로 내게 하신 말씀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되고
기가 꺾인 이들을 위해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거저 받았고넘치도록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면 입을 싹 닦고 있을 수 없을 것이고,
오늘 연중 주일의 감사송처럼 감사의 노래를 이렇게 소리 높여 부를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옵니다저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선택된 겨레임금의 사제단거룩한 민족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저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며 외치나이다.”




----------------------------------------------------


260614. 연중 제11주일. 키엣 대주교님.
노예에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예로부터 조국과 나라가 없는 사람들은 늘 불이익을 당해 왔습니다. 특히 옛날에는 외국인들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본토 사람들에게 냉대와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여기시며, 작고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시고 구원하시며, 그들의 품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의 민족도, 나라를 가진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어 고된 노동과 학대를 당했고, 파라오는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그들이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땅을 주시고, 당신의 특별한 백성, 사제의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탈출기 19,5-6)
그러나 이집트의 노예 살이는 악마와 죄에 종살이하는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이집트의 노예 살이는 육신을 묶었지만, 악마의 멍에는 영혼을 묶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인간의 자유를 빼앗겼다면, 악마의 노예 살이에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를 빼앗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살이가 일시적인 죽음을 가져왔다면, 죄의 노예살이는 영원한 죽음을 가져옵니다.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하기 위해 모세가 파라오와 싸웠다면, 인간을 죄와 악마의 권세에서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싸우셨습니다. 인간이 더 깊은 비참함에 빠질수록, 하느님께서는 더 큰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옛날에는 모세를 보내셨지만, 이제는 당신의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자유와 땅을 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늘나라를 열어 주시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품위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고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을 점점 더 높은 품위로 들어 올립니다. 인간으로서의 품위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로, 세상 나라의 시민에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늘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과 우리를 부르시어 하늘나라를 넓히는 일에 함께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먼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그 다음에는 삶으로 하늘나라의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사도는 악마를 이기고, 죽음과 더러움과 나약함과 병의 흔적을 씻어 낸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여셨지만,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한다면 악마와 결별해야 합니다. 곧 옛 죄를 회개하고, 옛 생활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악마를 제압하시고 그 감옥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감옥에서 나오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라 주님과 함께 나아간다면, 마침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어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떼이어라.” 시편 100,3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내가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살펴봅시다. 죄, 두려움, 욕심, 상처, 오래된 습관 등 나를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 봅시다. 이 부르심이 나의 삶과 자존감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묵상해 봅시다.
3. 가정과 공동체, 학교, 일터 안에서 하늘나라의 표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자유와 평화와 생명을 전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


260614. 연중 제1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옛 현자 다산의 말씀이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내가 당당한 것은 어제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가르쳐서는 안 되는 두 글자가 있다. 바로 소일消日, 그럭저럭 한가롭게 보내는 세월이다."


레오 교황의 스페인 방문 중 마지막 카나리아 제도에서 한 강론 중 네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교회는 나라가 없는 곳에서도 존재한다.”
나라는 사라져도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영원합니다.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그들의 존엄성은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다.”
이민자들을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자비는 작은 몸짓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놓는 것이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작은 것부터 자비를 실천해야함을 배웁니다.
“여러분, ‘열린 성서처럼 되십시오(Be like an open Bible).’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얼굴, 삶, 사랑, 실로 모두가 편히 느낄 수 있는 말에서 발견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아니 우리는 성인들은 물론 주변에서 자주 열린 성서 같은 착한 형제들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 첫 대목에서 예수성심의 사랑이, 하느님의 자비하신 연민의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대로 살아 있는 자비의 성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요약이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엾은 인간 현실은 아마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제자들인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현실은 역시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첫째 일꾼이 예수님입니다. 청할 것 없이 우리가 직접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사야처럼, “제가 여기 있으니 저를 보내소서.”(이사6,8)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열두제자이자 사도들은 그대로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유다의 랍비이자 신비가인 여호수아 헷쉘의 언급입니다. 이름 없는 무명의 존재에서 주님께 선택 받아 참으로 존재감 충만한 제자이자 사도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열두 사도가 다 다르듯 우리들 역시 다 다릅니다. 비교할 것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각자 고유의 모습 그대로 주님을 따르면 다양성의 일치요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성립입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해당된다 싶습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민족들 가운데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처럼, 독수리 날개에 태워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당신 계약의 파트너이자 당신 소유임을 확인하는, 또 우리의 귀한 성소를 새롭게 확인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부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 화해를 자랑하라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뤄진 것입니다.”


역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를 확인하는 미사시간입니다. 우리의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은혜로운 신원을, 그리고 우리의 고귀한 사명을 확인하는 우리들이며, 성령을 통해 더러운 영들에 관한 권한도 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믿는 이들의 사명은 예나 이제나 똑같으며 우리들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넘어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3.나병환자들을 깨끗이 해주고, 4.마귀들을 쫓아내어라.”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치유입니다. 도대체 이 4개 병든 현실에 해당되지 않는 온전한 자들은 몇이나 될까요? 죄도 많은 세상이기에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알게 모르게 앓는 병자들이요, 희망과 꿈, 길과 삶의 의미를 잃고 <살아 있다하나 죽어 있는 자들, 죽어가는 자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며, 깨끗해져야할 영적나병환자들도 참 많을 것이며, 세속주의, 물질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 양극단의 맹신과 광신의 이념등 헤아릴 수 없이 온갖 종류의 마귀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입니다. 오늘날은 범세계적으로 마귀들의 창궐시대라 함이 옳은 진단일 것입니다.


요즘 각광받는 AI시대! 종말을 앞당기지 않겠나하는 우려도 듭니다. 편리하고 신속할수록 바빠지고 복잡해지고 여유를 잃고 조급해지는 역설입니다. 느리고 불편하고 힘든 것이 사람에게는 득이자 약일 수 있습니다. 식자우환, 아는 것이 병입니다. AI시대와 더불어 자연이, 인간이 망가지면 미래도 없습니다. 깨어 진리의 연인이 되어 정진하면 AI도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 우상이나 사탄이 되어 인간을 조종하고 지배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수확할 밭의 주님의 참 좋은 일꾼이,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사도가 되어 살 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자비하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ㄷ). 아멘.




----------------------------------------------------


260614. 연중 제11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 주님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애가 끊어지는 듯한 사랑과 연민의 정"을 의식해 봅시다~~~ 






자동차가 우리 문화에 깊이 들어와 있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자동차에 비유하여 어떤 상태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펑크가 났다."라고 하는 표현을 우리는 자주 쓰는데, 이 표현은 어떤 예정된 상황이 예기치 않게 장애가 생기거나 잘못되었을 경우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은유는 기계적이고 않고 유기적이었습니다. 농사, 포도 재배, 양치기, 고기잡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자연의 움직임은 대체로 서서히 이루어지고 느린 편이며 굴곡이 자주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또한 이런 자연의 움직은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기계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자연의 현상을 보면 늘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늘 흐리고 비만 내리거나 푹풍우가 내리치는 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자연인데도 우리는 이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잘 되어 가기만을 바라기에 어떤 일이 어긋나거나 잘못되었을 때 크게 실망하거나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보복 운전"이나 "묻지마 폭행 혹은 살인" 등이 이런 문화 현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이 편리하고 간편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은근과 끈기를 발휘할 의지마저 잃은 것이겠지요....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을 기계로 여기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그 차에 연민을 느끼지 않습니다. 불만을 품고 수리소에 가져갈 뿐입니다. 만일 사람을 기계로만 본다면, 마음이나 몸이 지쳐 무너진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고장 난 자동차를 대하는 태도와 같아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던" 그들에 대해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가엾게 여기셨다"라고만 번역하지 않고 "마음 깊이 가엾게 여기셨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마태오가 사용한 그리스어 σπλαγχνίζομαι(splagchnizomai-스플락크니조마이)는 특별히 깊은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문자 그대로 "내장(심장, 간, 폐)"을 가리키며, 기계에 대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깊은 연민을 뜻합니다.
우리말에도 "몹시 슬프서 애(창자, 또는 마음속 깊은 곳)가 끊어지는 듯하다"라는 표현이 있지요. 이것이 바로 마태오가 사용한 그리스어 "스플락크니조마이"에 해당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보시고, '나인'이라는 마을의 과부를 보시고, 그들을 향해 깊은 연민의 정으로 움직이셨습니다. 바로 그 동정심과 연민, 자비가 열두 제자를 파견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다스리고 복종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께서 보여주신 그 자비와 연민과 동정심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사실 발음하기도 어려운 그 단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성품 전체를 드러냅니다. 말하자면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마음 깊이 가엾게 여기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그분의 "애가 끊어지는 듯한 사랑과 연민"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연민과 사랑과 자비를 주변에 보여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주님께서는 여전히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셨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파견해 주시며 같은 정과 권한을 부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의 이런 "애가 끊어지는 듯한 우리에 대한 사랑과 정"을 깊이 의식하고 인식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급선무요 가장 중차대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적어도 1분(3분에서 5분이면 더 좋고요...) 이상 잠시 멈추고는 우리의 세상적인 관심사를 제쳐 두고 주님의 이런 애틋한 연민의 정과 사랑을 의식하기 위해 고요한 시간을 갖고자 하는 연습(수양)을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그리도 중요한 것입니다!~~~




----------------------------------------------------


++++++++++++++++++++++++++++++++++++


========


< 3차 >


----------------------------------------------------


260614. 연중 제11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원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




100억을 가진 대부호가 100만원 밖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내게 동업을 제안했다고 합시다. 누구라도 깜짝 놀라겠지요. 사업자금 든든하겠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프로젝트 역시 탄탄하겠다, 금상첨화인 것은 공동대표를 제안하면서 사업을 통해 창출되는 수익금의 절반씩을 나눠 갖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비슷한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만왕이 왕이신 분께서, 어마어마한 분께서, 삼라만상을 다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분께서 자랑할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제자들을 향해 인류 구원이란 큰 프로젝트를 들고 오셔서 동업하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 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 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 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


260614. 연중 제11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9,36-10,8)> 
 
1)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루카 6,1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따로 특별히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로 삼으신 것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조직과 제도를 만드신 것은,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도 당신의 일을 신앙인들이 이어받아서 계속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제도는 사실상 당신을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구원 사업은 우리를 위한 일이고,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을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협력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또 스스로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구원 사업이 예수님 승천으로 마무리되는 일이었다면 교회라는 제도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복음 선포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7-9).” 
 
2) 열두 사도는 ‘하느님의 건물’의 열두 주춧돌입니다.
신앙인들은 각자 맡은 직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사도 직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은 상속자들이기 때문에(로마 8,17)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들 자신들의 일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아버지의 일꾼들이기도 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가 다가오는데 아직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선교활동은 잃은 자녀를 찾는 일이면서, 동시에 일꾼들을 모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일꾼인 신앙인과 일꾼이 아닌 신앙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3)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지금은’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나중에’ 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또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저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자기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습니다.
식구들을 방치한 채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1티모 3,5)” 
 
예수님께서는 승천 전에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승천하실 때에는 ‘모든 민족들’에게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마태 28,19).
그렇게 복음 선포 대상이 확대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선포가 완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마태 21,4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은총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교회는 ‘돈벌이’를 하는 장사꾼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


260614. 연중 제11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9,36-10,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들의 모습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 하루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참 닮아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지금 우리도 참 여러가지 것들에 시달리고 있지요. 힘이 없어서 폭력에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유혹에 시달리며, 능력이 부족해서 일에 시달리고, 건강이 없어서 고통과 질병에 시달리고, 믿음이 없어서 근심 걱정에 시달립니다. 그렇게 여러가지 것들에 시달리다보니 자연스레 마음이 주눅들고 자신감을 잃어 기가 꺾인 채 살아갑니다. 좋은 일자리를 못구해서 의욕이 꺾이고, 돈을 못 벌어서 자신감이 꺾이고, 삶의 터전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자존감이 꺾인 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렇게 사는 게 힘에 부치면 지쳐 넘어지게 되지요. 
 
그런 우리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은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당신께서 보시기 좋게 창조하신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맘껏 누리며 살라고 당신 모습대로 우리를 지어 만드셨는데, 행복을 누리기는 커녕 좌절 속에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너무나 가엾고 안타까우시겠지요. 예수님도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고통과 시련의 풍랑에 시달리느라 몸과 마음이 지치고 꺾인 우리를 가엾이 여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엾이 여기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의 원래 뜻은 태중의 아기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리키지요. 어머니는 아기와 한 몸으로 연결되어 함께 숨쉬며 살아가기에, 아기가 아프면 어머니도 아프고 아기가 힘들면 어머니도 힘든데,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우리는 ‘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작고 약한 이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슬프면 예수님도 슬프고 우리가 아프면 예수님도 아픈 겁니다. 
 
우리 모습이 그렇게 보기 안쓰럽다면 당신께서 직접 우리 앞에 놓인 고통과 시련을 없애주시면 될텐데, 참된 기쁨과 행복, 보람과 성취라는 삶의 열매를 당신께서 직접 우리 손에 담아주시면 될텐데, 예수님은 왜인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놔두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특히 이 말씀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지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왜 예수님은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 하실까요? ‘추수’는 하느님의 일이고 그분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지만, 하느님은 인간 편에서의 자발적인 협력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며, 참된 사랑은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쌍방통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는 건 수동적으로 그분께서 주시기를 바라기만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꾼이 되어달라고 나를 부르시면 기꺼이 그 부르심에 응답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당신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건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지요. 가진 게 없어도, 배움이 짧아도, 특출난 재주가 없어도, 그분의 뜻과 가르침을 따르며 살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로 부르신 이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시어 병자들을 치유하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게 하시지요. 유다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중병을 앓는 환자들이나 마귀들린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 큰 죄를 지어 벌을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 그들이 겪는 고통이 하느님께 받은 ‘벌’이 아님을,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고 벌 주시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고 사랑하시는 자비로운 분임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내가 겪는 고통과 시련을 하느님이 주시는 ‘벌’로 여기며 체념하는 건 참된 믿음이 아니지요. 그리스도 신앙인은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굳게 믿으며 그 고통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고통을 겪게 하신 하느님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잘 헤아리고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이며 그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인 우리에게 그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셨고, 어떻게 해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존재여서가 아닙니다. 대단한 공로를 세워서도 아닙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를,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주신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큰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삶과 행동으로 그분 사랑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미사 끝날 때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하며 세상으로 ‘파견’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파견된 ‘특사’, 즉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사랑을 거저 베풀어 주셨음에 감사하며, 나도 이웃 형제들에게 사랑과 자비, 양보와 희생을 거저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