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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묵상글(강론글) 1차(00:30, 2차(03:45), 3차(08:40) 6월 15일 묵상글, 00시 3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 ++++++++++++++++++++++++++++++++++++ ======== < 1 차 >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5,38–42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옛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누가 너와 재판을 벌여 네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이 말씀은 듣는 순간 마음이 멈칫하게 됩니다. 너무 과한 것처럼 보이고, 현실과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을 모른 척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의 방식으로 악에 응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보복의 논리 안에 갇히면 결국 나도 그 폭력의 일부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더 깊은 자유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오리게네스는 복음 말씀을 읽을 때 겉으로 드러난 문자만이 아니라 그 안의 영적 방향을 깊이 보려 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말씀은 단순히 모든 불의를 수동적으로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이 미움과 보복의 사슬에 붙잡히지 않도록 하느님의 자유 안으로 들어가라는 초대입니다. 왼뺨까지 돌려 대는 사람은 약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정한 폭력의 규칙에 자기 영혼을 내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 속옷뿐 아니라 겉옷까지 내어 주고, 천 걸음이 아니라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말씀도 억지 굴복의 미화가 아닙니다. 오리게네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복음적 초과입니다. 곧 상대의 강요에 끌려가는 수동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 안에서 악의 계산을 넘어서는 능동적 응답입니다. 악은 늘 최소한의 정의만 허락하며 그 선 안에 사람을 가둡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선을 넘어 하느님의 자비와 자유가 어떻게 악의 논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친절 / 선행의 주간과도 아주 깊이 맞닿습니다. 친절은 상대가 친절할 때만 부드럽게 대하는 예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자존심과 분노가 먼저 치밀어 오를 때에도 그 반응을 한 번 멈추고 더 큰 선을 선택하는 마음입니다. 선행은 그 멈춤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보복 대신 평화를, 분노 대신 인내를, 자기 방어 대신 자비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제자의 싸움이 바깥의 사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능과도 관련된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되갚고 싶어 하고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본능을 그냥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된 사람답게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쉬운 길이 아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은총이 필요한 길입니다. 복음의 자비는 내 힘으로만 되지 않고 성령의 열매 안에서 자랍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는 말씀도 단순한 무분별한 허용이 아니라 닫힌 손이 아니라 열린 손으로 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움켜쥔 것만 지키려는 삶이 아니라 나눔과 개방, 하느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친절은 마음을 닫지 않는 힘이고 선행은 손을 열 줄 아는 힘입니다. 거룩한 독서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내가 어디에서 가장 쉽게 반응적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상처받으면 즉시 되갚으려 하는가? 나는 억울함 앞에서 곧바로 분노만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가 지킬 것만 생각하며 하느님께서 열어 주실 더 큰 길은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성찰은 악에 대한 내 반응 방식 자체를 복음 앞에서 다시 보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강한 사람인가, 아니면 보복을 멈출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인가? 나는 상처 앞에서 친절을 잃지 않는가? 나는 내 손을 열 줄 아는가? 나는 악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더 깊은 자유와 자비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 상처받았을 때 곧바로 되갚으려는 제 마음을 다스려 주소서. 악의 논리에 저를 맡기지 않게 하시고 친절과 선행의 길을 선택할 자유를 주소서. 닫힌 마음을 열게 하시고 작은 손해보다 더 큰 사랑을 택하게 하시며 자비 안에서 참된 힘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생활 성가 대회’가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나는 꽃이야’와 ‘감사해’가 공동체 안에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많은 교우가 함께 무대에 올라 하느님을 찬양했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가 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올해는 ‘인생’이라는 노래가 1등을 차지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교우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길고 길었던 겨울/ 봄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견뎌내고 보니 어느덧 봄이더라/ 숨 막히게 더운 여름/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참아내고 나니 어느새 가을이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움/ 등불 같은 친구 곁에 있었고/ 멀고 먼 길 홀로 걸을 때/ 누군가 내 손잡고 함께 걸으니/ 걸어온 길 돌아보니/ 나의 이야기 남아있고/ 빛바랜 기억과 흘린 눈물/ 우리의 인생이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움/ 등불 같은 친구 곁에 있었고/ 멀고 먼 길 홀로 걸을 때/ 누군가 내 손잡고 함께 걸으니/ 걸어갈 길, 눈 들어보니/ 까마득해 보이지만/ 새겨질 발자국 하늘빛 미소/ 그것이 은총이라” 고된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추억과 기억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사업이 사람을 잘못 만나서 쫄딱 망했던 기억, 공부 잘해서 의대에 갔던 아들이 지독한 스트레스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던 기억, 푸른 꿈을 안고 왔는데 아들은 평생 투석해야 하고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엄마는 혈액암으로 긴 투병을 해야 했던 기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어린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 성공하여 웃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죽을 줄만 알았던 아들이 건강을 회복하여 지금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투석하는 아들도 좋은 직장을 얻었고, 암 투병 중이지만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들과 딸을 선물로 보내 주셨고, 지금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래 가사처럼 등불 같은 친구가 있었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했었다고 합니다. 35년 저의 사제 생활을 돌아보면 ‘인생’의 가사처럼 추운 겨울도, 무더웠던 여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험난함의 길목마다 저를 지켜 주셨고, 좋은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사제 생활 첫해에 ‘유행성 출혈열’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덕분에 인생은 하루만 살아도 ‘흑자’요, 인생은 ‘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으로 갔을 때는 큰 본당으로 갔던 동창 신부님이 부럽기도 했지만 돌아보니 그 삼 년이 제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딱 맞는 성당을 맡겨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신문사에서 의욕적으로 홍보를 시작했을 때입니다. 미국 서부와 캐나다 밴쿠버까지 특강과 신문 홍보를 한 달 반 일정으로 야심 차게 기획했습니다. 제 앞에도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게 했습니다. 덕분에 코로나 팬데믹 동안에 좋은 신부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주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라는 잠언의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합왕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봇의 포도밭을 탐합니다. 결국 악한 방법으로 그것을 빼앗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성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실패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봇은 억울하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그의 억울함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라.” 이 말씀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 되갚고 싶어집니다. 억울하면 똑같이 갚아 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악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본능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를 살린 것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였고,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었으며, 우리의 계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하느님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세상은 “되갚아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노래 가사처럼 우리의 인생은 눈물과 기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고, 앞으로의 길에도 그 손길은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이 고백처럼, 우리가 악을 선으로 이기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수 입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일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0-4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동태 복수법’을 다시 이야기하십니다. 이 율법은 받은 상처를 똑같이 되돌려주려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수가 점점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울타리였지요. 범죄와 형벌 사이의 균형을 지키고, 폭력이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정의였습니다. 법은 대체로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나아가 법정의 논리를 넘어, 인간 마음의 깊은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악인’은 일상에서 우리를 모욕하고 상처 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굳이 “오른뺨”(5,39)을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폭행이 아니라 남을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잡이가 상대의 오른뺨을 때리는 것은 손등으로 치는 것으로, 당시 노예나 하인을 향한 모욕과 하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5,39)라고 하십니다. 이는 굴욕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모욕이 우리 안에서 증오가 되어 커지지 못하게 하라는 초대입니다. 모욕을 사랑이나 선의로 꺾어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라는 말씀도, 천 걸음을 가자는 이에게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말씀도, 굴복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선의를 끊임없이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억압의 한 걸음을, 사랑의 두 걸음으로 지워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러합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용서받고 위로받으며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자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삽니다.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새로운 삶의 방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초대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회심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새로운 삶의 방식 2026년 6월 14일 일요일 리처드 신부는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길"(The Way)이라고 성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새로운 종교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유다와 지중해 지역 안에서 유다교의 개혁파 분파로서 태동하였습니다. 바오로와 베드로, 그리고 다른 초기 선교자들이 어디를 가든지, 그들은 "길(The Way)"이라 불린 작은 신앙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수난, 그리고 부활을 삶의 변화를 이끄는 구원의 길로 강조하였습니다. 점차 이 운동은 성장하여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게 되었고,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환영하며 더욱 포용적이고 은총 중심적인 모습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보편적(catholic)"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서기 80년경에는 인도와 프랑스에까지 그리스도인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시대(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약 500년 동안)는 문화와 정치, 경제가 극적으로 변화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새롭게 태동한 신앙을 깊이 형성하며, 전례와 의식, 그리고 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역사학자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tler Bass)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초기 신앙의 기록을 관통하는 놀라운 메시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1]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는 교리나 영원한 구원에만 머물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다스리심(하느님 나라)" 안에서 살면서 지금 여기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데 중심을 두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급진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게 매력적이면서도 제국의 세계관을 위협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신앙 공동체는 재물을 축적하기보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나누어 사용하였고, (새로운) "길(The Way)"을 따르는 이들은 세속적 계급 질서와 문화적 규범을 따르기보다는 인종과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함께 살아갔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수백 년 동안, 그분의 가르침은 대부분 초대 교회 안에서 충실히 지켜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제국의 가장 낮은 자리와 변두리에 머물며, 배척당하고 배신당하신 주님의 처지를 함께 나눌 때,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평화의 삶, 단순한 생활, 모든 이를 포용하는 공동체성, 원수까지 사랑하는 복음적 가치들은 신자들이 지하 카타콤에서 은밀히 모일 때 더욱 선명하게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 문헌은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함과 관대함의 가르침에 충실했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서기 90년경에 편찬된 『디다케』는 이렇게 전합니다. "여러분의 형제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그것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썩지 않을 것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라면, 썩어 없어질 것들은 더욱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당시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순수하고 단순하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제국의 영향이나 합리화, 타협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4]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리처드 로어 신부님께서 '새 예루살렘 공동체'의 탄생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1970년대의 카리스마적 쇄신 운동을 통해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와 같은 영성의 일부를 넘어섰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령의 강력한 쇄신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Christopher E. References [1] Diana Butler Bass, A People’s History of Christianity: The Other Side of the Story (HarperOne, 2009), 26. [2] Richard Rohr, “The Beginnings of the Way,” Daily Meditation, September 2, 2018. [3] Didache 4:8. See Tony Jones, The Teaching of the Twelve: Believing and Practicing the Primitive Christianity of the Ancient Didache Community (Paraclete Press, 2009), 23. [4] Adapted from Richard Rohr, Dancing Standing Still: Healing the World from a Place of Prayer (Paulist Press, 2014), 4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ice Xerty, untitled (detail), 2023,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나의 나이테처럼, 초대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랑과 기쁨, 친교의 테두리를 넓혀가며 성장하였습니다.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무상적 시혜와 보편적 자비 무상적 시혜와 보편적 자비 하느님의 무상(無償)적 사랑 무상(無償)이라는 말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은 대가 없이, 조건 없이, 먼저 주어집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받기 위해 더 착해져야 하고, 더 많은 공로를 쌓아야 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은총은 거래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이며, 인간이 먼저 하느님께 나아가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선행적 은총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업적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감사로 채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덕마저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신 선물임을 알았습니다. ✨ 하느님의 보편적 자비 하느님의 사랑은 무상적일 뿐 아니라 보편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 5,45) 햇볕은 국경을 모릅니다. 비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만든 경계선 안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선인과 악인,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든 사람을 당신 사랑 안에 품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특정한 사람들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열려 있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끊임없이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지 않고, "누가 이미 사랑받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미 사랑받고 있습니다. ✨ 프란치스칸 영성 안에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 무상성과 보편성을 삶으로 살아내는 길입니다. 내적 가난은 "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비하가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선물이다." 라는 깨달음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기술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은총이다." 라고 고백하는 진실함입니다. 형제성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모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들의 삶은 끊임없이 이 고백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거저 받았습니다. 생명도 거저 받았습니다. 용서도 거저 받았습니다. 형제자매도 거저 받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 역시 거저 사랑하고, 거저 용서하고, 거저 섬기고, 거저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무상적 사랑과 보편적 자비가 우리 안을 통과하여 세상으로 흘러가는 살아 있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그 통로를 통해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지고, 조금 더 넓어지며, 조금 더 하느님 나라를 닮아 갑니다. 내가 가진 선한 것들, 내가 누리는 생명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모두 대가 없이 주어진 선물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흘려보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이 말씀은 단순히 가진 것을 나누라는 권고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이미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복음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청한 적이 없는데 생명을 받았습니다. 햇살도, 바람도, 물도, 부모의 품도, 누군가의 따뜻한 미소도 값을 치르고 얻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용서할 수 있는 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마저도 결국은 먼저 주어진 은총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주 받은 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었고, 내가 지켜야 하며, 내가 통제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 순간 선물은 소유가 되고, 소유는 두려움을 낳습니다. 잃어버릴까 염려하고, 남보다 적을까 비교하며, 더 많이 쌓아 두려 합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다르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기에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모든 것이 선물이기에 움켜쥘 이유가 없습니다. 움켜쥐지 않을 때 비로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했지만 가장 부유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모든 피조물을 형제와 자매로 품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따뜻한 시선하나, 진심 어린 경청 하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마음 하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거저 받은 사람만이 거저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분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무상적(無償的) 사랑이며 보편적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 5,45) 햇볕은 착한 사람의 집 지붕에만 내리지 않습니다. 비도 의로운 사람의 밭에만 내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를 먼저 사랑할지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선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선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어서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변화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혁명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보통 자격을 묻습니다. 얼마나 노력했는가, 얼마나 공헌했는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가를 따집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공로보다 먼저 선물이 있습니다. 태어남도 선물이고, 만남도 생명도 선물입니다. 용서도 선물이고, 구원도 선물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가장 작은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하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선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도, 사명도, 형제들도, 자연도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은총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적 가난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선물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식탁에 앉는 것도 선물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한 공동체 안에서 형제가 되는 것도 선물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기쁨도, 때로는 나를 성장시키는 시련조차도 선물일 수 있습니다. 이 선물의 세계를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비교하지 않습니다. 왜 저 사람은 더 많이 받았는가를 묻기보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가능해집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거저 받은 사랑은 거저 흘러갑니다. 거저 받은 용서는 거저 용서하게 합니다. 거저 받은 자비는 거저 자비를 베풀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햇볕처럼 차별 없이 내리고, 비처럼 경계를 넘어 스며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햇볕이 되고, 누군가의 단비가 됩니다. 그것이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방식입니다. 받은 것이 선물임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을 향해 선물처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평화가 되어 봅시다. 미소 하나를 거저 주고, 격려 한마디를 거저 주고, 용서 한 번을 거저 주고, 감사 한마디를 거저 주며 살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거저 주는 사람은 잃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풍요로움이 흘러가는 통로가 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통로를 지나갈 때마다 우리의 마음도 더욱 넓어지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오늘도 거저 받은 은총 안에서 거저 사랑하고, 거저 용서하며, 거저 기뻐하는 평화로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 ======== < 2차 >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15 02:30 - 사랑 대인(大人)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악인이란 어떤 악인인지 맞선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말하는 악인이 내게 악한 짓을 하는 악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인이요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악한 짓을 하는 악인이라면 그런 악인도 맞서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신 다음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네 왼뺨마저 돌려대라고 하셨지, 다른 사람의 뺨을 칠 때 내버려 두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도 남이 아니라 내게 재판을 거는 사람에게, 내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갑절로 해주라고 하신 것이지요. 이것은 보통의 우리와 다른 태도입니다. 우리는 보통 남에게 악한 짓을 할 때는 눈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내게 악한 짓을 하면 길길이 날뛰며 맞대응하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악행은 끔찍한 짓인데도 내 일이 아니니까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면서 내게 한 것은 악행도 아니고 그저 내가 싫어하는 행위를 할 뿐인데도 우리는 그 사람을 싫어하고, 싫어하기에 나쁜 놈이라고 하고 악인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므로 내게 악한 짓을 하거나 내가 악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짓을 할 때 맞서지 말라는 것은 그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라는 것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대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대인(大人)은 사랑의 대인입니다. 싫은 것도 사랑하는 대인이요, 그러니 싫은 사람도 사랑하는 대인이요, 정말로 악행을 내게 저질러도 사랑하는 대인이요, 악행도 보통 악행이 아니라 보통 사람은 그로 인해 불행케 되는, 그 정도의 악행을 내게 저질러도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사랑하는 대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게 대한 악행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악인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 이상으로 대인입니다. 엄마는 자식과 맞서지 않고, 엄마의 사랑은 자식의 어떤 악행도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이요, 적어도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말라는 것임을 깨닫고 실천하려는 우리입니다. ---------------------------------------------------- ++++++++++++++++++++++++++++++++++++ ======== < 3차 >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사악한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그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여인들이 존재해왔습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악함에 있어서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 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 39~42)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 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비보다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1) 이 말씀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라는 말에 대해서, “악인에게 천벌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아니면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로마 13,4).”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악행과 범죄를 당했을 때, 그 일의 심판과 처벌을 사법제도에 맡기는 것은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경찰과 사법부와 교도소는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이고, 하느님의 뜻을 집행하는 제도입니다. 2) 그런데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할 때 사법제도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침 제1독서에 왕비 이제벨의 악행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 자리에 앉히시오.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 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1열왕 21,9-11).” 바로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나봇에게 가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왕비 이제벨과 원로들과 귀족들과 불량배들이 모두 한 통속이 되어서, 아무 잘못도 없고 힘도 없는 나봇을 죽인 그 일은, 사랑과 자비보다 ‘선과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셔서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셨습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1열왕 21,23).” 나중에 왕비 이제벨은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2열왕 9,30-37).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나봇처럼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는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데, 가해자의 힘이 너무 커서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2-23)” 그 일과 비슷한 일이 바오로 사도에게도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사도 23,1-3)” 만일에 악행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 침묵 때문에 더 큰 악행이 계속 저질러진다면? 과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겉옷까지 내주고, 이천 걸음을 가 주는 것은,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일, 즉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회개시키기는커녕 악을 더 큰 악으로 키우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악행에 동조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루카 17,3ㄴ). 꾸짖어야 할 때 꾸짖는 것도 선과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뺨을 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에 대해서, “가르침과 행동이 다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자체가 다른 뺨마저 돌려대신 일이고,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은, 그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사제를 꾸짖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때에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기쁨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관계성과 사랑의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는 참 자아를 의식하려는 수양! 오늘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만약 모든 사람이 실천할 수 있다면 전쟁은 즉시 사라질 것이고, 우리 가정이나 우리 공동체 내의 작은 다툼까지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요?!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사회가 언제나 죄로 물들어 있으며, 그 안에 수많은 성인들이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범죄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회는 결코 변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든 성 빈첸시오 드 폴이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인물이 존재하여, 말이 아니라 희생의 삶으로써 이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성인들에 의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성인들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에 작용했지만, 역사는 여전히 죄로 얼룩져 있다…." 개인과 사회를 이렇게 뚜렷하게 구분하거나 심지어 대립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리아크가 말한 것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변의 영향을 아무런 분별 없이 받아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같은 영향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며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같은 환경 속에서 나태한 사람 혹은 이기적인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예언자요 주님의 참 제자, 즉 적극적으로 선과 사랑을 향해 도전해 가는 사람도 함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후자의 사람들이 우리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구현해 가는 사람들이고, 성령을 통해 하시는 하느님의 일에 동업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이제벨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잔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나봇을 죽이도록 음모를 꾸며 그의 포도밭을 남편 아합 왕의 채소밭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사실 아합은 왕으로서 수많은 밭을 가질 수 있었지만, 단지 편리하다는 이유로 나봇의 밭을 탐냈던 것입니다. 결국 이제벨은 자기와 남편 아합 임금의 에고를 위해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악할 수 있는가 하고 놀라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안에도 작은 '이제벨'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우리도 이런 이기적인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벨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합니다(마태 7,5). 사회는 서로에게 잘못된 것을 "개선하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결코 나아지지 않습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CAC(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의 7가지 모토 중 하나가 "나쁜 것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선과 사랑을 행하기보다는 어떤 것에 대한 대응, 혹은 반응(반작용)을 하는 데 많는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맞는 말일 겁니다. 이렇게 자기 방어를 하는 주체는 참 자아가 아닌 가짜 자아, 즉 에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에고는 "옳음과 그름"이라는 이원론적 계산에 민감하기에 과거의 잘잘못에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참 자아는 무엇이 옳거나 그르냐의 문제에 자신의 존재성을 두지 않고, 존재의 위대한 연결 고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두고자 합니다. 그래서 참 자아는 존재의 위대한 사슬의 원천, 즉 모든 관계성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에 나아가서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위대한 자아를 바라보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물론 우리는 에고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자기 방어에 신경을 쓸 때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될 때마다 이것이 참 자아의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인식하며 우리와 일치하고자 하시는 관계성과 사랑의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는 참 자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에고의 잘못된 방향을 늘 깨어 의식하며 더 큰 선과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젠가 읽었던 글에서 CAC의 모토와 비슷한 조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비판하는 데 힘을 쓰지 말고, 우리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것이 어떻게든 참으로 선한 것이라면, 악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제가 그 내용을 글자 그대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략 이러한 내용의 조언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진리가 아닐까 합니다. ---------------------------------------------------- 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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