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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묵상글(강론글). - 완전한 사랑의 발판이요 계단인 원수 사랑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16|조회수71 목록 댓글 0

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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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묵상글(강론글)
1차(260615.23:30), 2차(05:11), 3차(09:18)




6월 16일 묵상글, 15일 23시 3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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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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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5,43–48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하고 이르신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도 선한 사람에게도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도 불의한 사람에게도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복음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깊은 부르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피하거나 되갚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본능적 상식을 넘어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복음의 사랑은
감정적 호감의 범위를 넘어
하느님의 자비를 닮는 길입니다.


대 바실리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기 구원만을 챙기는 좁은 종교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사랑의 기준을 내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선한 이에게만 해를 주시고
의로운 이에게만 비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의 선함은
공로를 따져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향해 먼저 흘러갑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닮는다는 것은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상대하는 데 머물지 않고
더 넓은 마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불의를 정당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움이 내 영혼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내가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상처가 내 존재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 저항입니다.


대 바실리오의 관점에서 보면
원수를 위한 기도는
상대를 위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을 하느님께 다시 돌려놓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누구를 사랑하는가”보다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는가”에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랑의 범위를 넓히고
사랑의 질을 깊게 하라고 초대합니다.
친절은 여기서 더 분명해집니다.
친절은
상대가 친절할 때만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인간 존엄과 하느님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선행은
그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이어 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완전함은
흠 하나 없는 완벽주의가 아니라
사랑이 하느님처럼 넓어지는 성숙을 뜻합니다.


대 바실리오는
인간의 완전성이
자기 능력의 극대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곧 완전함은
더 냉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자비로워지는 것입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친절 / 선행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친절이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영적 결단임을 보여 줍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도
기본적인 존중을 지키고 있는가?
나는 상처를 준 사람 때문에
내 마음 전체가 거칠어지도록 내버려 두고 있지는 않은가?
선행은
좋은 사람에게만 더 잘하는 태도가 아니라
악의 사슬을 끊기 위해
내가 먼저 다른 방식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성령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원수 사랑은
내 힘만으로 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넓혀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쉽게 자기 상처 안으로 다시 웅크립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도덕적 부담 이전에
성령의 은총을 청하게 만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의 좁은 정의감과 보복 본능을 넘어
더 큰 자비와 분별로 이끄십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누구를 마음속에서 밀어내고 있는가?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느님처럼 넓게 사랑하려는 길을
정말 배우고 있는가?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한 번이라도 기도한 적이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사랑의 경계를 넓히라고 부르십니다.


주님,
제 사랑이 너무 좁지 않게 하소서.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 때문에
제 마음 전체가 어두워지지 않게 하시고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자유를 주소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더 넓고 더 깊은 사랑을 배우게 하시며
친절과 선행 안에서
당신의 선하심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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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생활 성가 대회’를 준비하면서 친교 분과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작년보다 참가팀이 적었습니다.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취소하고, 내년에 하자는 의견과 참가팀이 비록 적어도 연습한 시간이 있으니 계속 진행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는 참가팀이 적어도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대신에 본당 성가대에서 찬조 출연하고, 본당 밴드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정했습니다. 결과는 좋았습니다. 제일 먼저 성가대가 멋진 화음으로 생활 성가 대회를 열었습니다. 참가팀은 4팀이었습니다. 벤저민 팀이 출연했습니다. 6살 이하의 어린아이 30명이 출연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팔방미인 팀이 출연했습니다. 바이올린, 오보에, 피아노, 플롯, 기타와 4가족의 합창이 이루어졌습니다. 평소에 반 모임을 꾸준히 하던 분들입니다. 울림 중창단 팀이 출연했습니다. 두 달 전에 본당에 음악 교실이 시작되었는데 거기에서 공부하던 분들이 팀을 만들었습니다. 끝으로 자작곡 ‘주님은 나의 사랑’을 준비한 형제님이 출연했습니다. 참가팀이 4팀이라 모두에게 상을 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에게 하였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 저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참가팀을 보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 내년에는 저도 부주임신부님과 수녀님으로 한 팀을 만들어 찬조 출연하려고 합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지켜왔던 원칙이며, 질서입니다. 동양도, 서양도, 종교도 이런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그래야만 약한 사람도 존중받을 수 있고, 강한 사람은 겸손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켜놓고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는 사람에게는 결자해지를 이야기합니다. 공상과 망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뿌리지 않고 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필귀정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연과 업보의 결과 다시 말해 인과응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자해지,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인류가 지켜왔던 삶의 원칙과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원칙과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이고, 이것이 우리가 따르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옳고 그름의 인연을 끊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나눔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인터넷 서점을 방문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았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땅에 떨어진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제가 돈을 주고 사서 읽으면 저는 책 속에 있는 보물을 얻게 됩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쉴 수 있듯이 제가 읽은 책은 저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서점에서 2개의 보물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다른 하나는 ‘트렌드 2026’입니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의 표징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찾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을 넘어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서도, 나를 시기하는 사람에게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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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십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지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9-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있지만 나의 사랑이 절실한 사람,
바로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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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율법의 핵심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도인간이 그 계명의 뜻을 축소하여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라고 암묵적으로 해석한 부분을 정면으로 깨뜨리십니다.
본디 레위기의 문맥은 원수를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웃의 범위를 친구, ‘자기 사람으로 점점 좁혀 왔지요.
그러면 사랑은 이해관계에 따른 윤리가 되어 그 이해관계에서 밀려난 사람을 배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라는 낱말을 민족이나 정치의 범주로 제한하시지 않고개인의 삶에서 나를 적대시하는 존재 전체로 확장하십니다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라고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기도는 악과 원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선으로 악을 압도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의 바탕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품으신 선의에서 찾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분의 차별 없는 자비가 곧 하늘 나라의 질서입니다.
세리나 이방인도 자기편은 사랑합니다그러나 하늘 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제자는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나옵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는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기보다하느님의 선의가 친구와 자기 사람을 넘어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경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하느님을 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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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살아 있는 유기체, 곧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바라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초세기 교회의 "길"(The Way)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

2026년 6월 15일 월요일

리처드 신부는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초대 교회의 기초를 세운 데 끼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의 메시지가 구체적으로 육화되어야 함을 알았기에, 그가 "교회"라 부른 공동체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첫 비전은 너무도 단순하여 우리가 놓치기 쉽습니다. 곧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한 명의 복음서 저자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며(마르 6,7) 공동체적 방식으로 선포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홀로 있는 개인은 교회의 핵심 메시지를 온전히 전하는 데 합당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생애 동안,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직 제도화된 조직이나 통일된 신앙 실천 체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관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였습니다. 바오로가 이 살아 있고 유기적인, 구체적 육화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탁월한 비유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합니다."(1코린 12,12). 이 몸의 중심에는 공동체 전체를 생명력으로 이끄는 원천이 자리하고 있는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면서도 모두를 살리는 힘은 바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로마 5,5)입니다.

이 성령께서는 우주의 근본적 에너지, 곧 "존재의 근원"이시며, 성경 첫 구절에서 이미 묘사되고 있습니다(창세 1,2). 일치는 단순한 경건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체적인 역사(役事)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과 사랑으로 결합하시는 방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함께 있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1코린 12,27)라고 기록합니다. 모든 시련과 저항을 넘어, 이 빛나는 관계의 그물망 안에, 사랑의 진동하는 상태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공동체적 구원의 참되고 건전한 의미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가 세운 교회 공동체들은 타락한 제국 안에서, 곧 인간 존엄이 본래부터 존중되지 않았던 세상 한가운데서, 그의 복음 선포에 신뢰성을 부여하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우리가 새로운 삶,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믿어야 합니까?"라고 물을 때, 바오로는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릅니다. 이것은 새로운 사회 질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다인도 없고,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 이는 단순한 종교적 관념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사회·경제적 메시지이며,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용서와 치유, 정의의 실천은 새로운 공동 삶의 참된 증거입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교회와 신앙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종교는 머릿속 관념에 불과하며 거의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평화를 이루고, 용서하며, 화해하는 일은 훗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의 표징이자 사람들의 함께함의 대가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리처드 로어 신부님께서 '새 예루살렘 공동체'의 탄생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1970년대의 카리스마적 쇄신 운동을 통해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와 같은 영성의 일부를 넘어섰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령의 강력한 쇄신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Christopher E.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Essential Teachings on Loveselected by Joelle Chase and Judy Traeger (Orbis Books, 2018), 103–10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ice Xerty, untitled (detail), 2023, photo, India,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나의 나이테처럼, 초대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랑과 기쁨, 친교의 테두리를 넓혀가며 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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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나봇의 포도밭과 인간의 탐욕






나봇의 포도밭과 인간의 탐욕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는 성경 열왕기상 21장에 등장하는 사건으로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권력의 남용그리고 그로 인한 파멸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류 고전의 대표적인 비극입니다.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괴물로 변해가는지그리고 그 탐욕이 왜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탐욕의 속성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화려한 궁궐을 가지고 있었고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하지만 그는 궁궐 바로 곁에 있는 나봇의 작은 포도밭을 탐내기 시작합니다거기를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고 싶다는 사소한 이유였습니다여기서 탐욕의 본질이 드러납니다아합은 나라 전체를 가졌음에도가지지 못한 단 하나의 작은 밭에 집착합니다탐욕은 객관적인 결핍이 아니라,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했다'는 주관적 비교에서 시작됩니다. 99개를 가진 사람이 1개를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100개를 채우려는 속성그것이 바로 인간의 탐욕입니다


권력과 결탁한 탐욕의 잔혹함
나봇은 "조상의 유산을 갈아엎을 수 없다"는 신앙과 율법에 따라 왕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합니다정당한 거절이었음에도 아합은 밥도 먹지 않고 누워 앓아누울 정도로 심각한 집착을 보입니다.이때 그의 아내 이세벨이 개입하면서 탐욕은 잔인한 폭력으로 진화합니다이세벨은 왕의 권력을 이용해 거짓 증인들을 세우고나봇에게 모함을 씌워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음모를 꾸밉니다탐욕이 통제를 벗어나면인간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법과 정의심지어 인간의 생명마저도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합니다아합은 자신이 직접 손을 피로 물들이지는 않았지만이세벨의 악행을 묵인하고 나봇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포도밭을 차지합니다직접 악을 행하지 않더라도탐욕의 이익을 누리는 것 역시 공범임을 보여줍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인과응보와 파멸
나봇의 포도밭을 손에 넣고 기뻐하던 아합 앞에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납니다그리고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전합니다.*"개가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결국 아합과 이세벨은 예언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탐욕으로 얻은 포도밭은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는커녕가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저주의 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는 수천 년 전의 신화나 종교적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오늘날 우리 사회와 인간 내면을 비추는 거울입니다우리는 때로 내가 가진 수많은 포도밭(행복과 풍요)은 잊은 채타인이 가진 작은 포도밭을 부러워하고 시기합니다자족(知足)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 탐욕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나봇은 권력의 압박 속에서도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삶의 터전과 가치를 지키려 했던 평범하고 의로운 인물입니다거대 자본이나 권력이 약자의 소중한 권리를 짓밟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도나봇의 죽음은 우리가 지켜야 할 정의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집니다인간의 탐욕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마실수록 더 목이 마릅니다결국 그 목마름은 자신을 파괴하는 독이 됩니다나봇의 포도밭은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절제와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정직한 마음"이라는 것을 나지막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를 복음의 관점특히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그리고 프란치스칸의 내적 가난과 연결하여 바라보면 더욱 깊은 통찰을 얻게 됩니다아합의 비극은 포도밭이 없어서가 아닙니다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은 결핍을 만들어 냅니다충분히 가진 사람도 부족하다고 느끼게 합니다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아흔아홉 개의 선물은 보이지 않고남이 가진 한 개만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탐욕의 뿌리는 소유의 부족이 아니라 감사의 부족입니다.


반면 나봇은 포도밭을 단순한 재산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그것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선물이었고하느님께서 맡기신 유산이었습니다그래서 그는 왕 앞에서도 그것을 함부로 거래할 수 없었습니다여기서 두 가지 삶의 방식이 드러납니다아합은 모든 것을 소유물로 보았습니다그래서 더 많이 차지하려 했습니다나봇은 모든 것을 선물로 보았습니다그래서 맡겨진 것을 충실히 지키려 했습니다.


복음적 삶은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는 삶에서 거저 받은 선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비교와 경쟁의 왕국에서 감사와 형제성의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하느님의 무상적 사랑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나봇의 포도밭을 탐내지 않습니다이미 자신이 받은 햇빛과 비생명과 사랑형제와 자매오늘이라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부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그때 비로소 우리는 아합의 길이 아니라 프란치스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아합은 단순히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권력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인간타인의 권리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인간충분히 가졌음에도 더 가지려는 인간약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그런 의미에서 아합은 특정 시대의 특정한 왕 한 사람이 아니라모든 시대의 권력자 안에도심지어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나봇의 시선에 더 가깝습니다성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태양도바람도물도땅도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선물은 지배할 수 없습니다선물은 감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아합은 "내가 더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프란치스코는 "나는 이미 충분히 받았다"고 말합니다아합의 세계는 비교의 세계입니다프란치스코의 세계는 감사의 세계입니다아합의 탐욕은 결국 나봇을 죽였습니다그러나 더 깊이 보면 아합은 먼저 자기 영혼을 죽이고 있었습니다탐욕은 타인의 포도밭을 빼앗기 전에 먼저 자신의 평화를 빼앗습니다질투와 시기는 상대를 괴롭히기 전에 먼저 자신의 기쁨을 파괴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채워질수록 커지고커질수록 더 목마르게 만듭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소유의 확대가 아니라 관계의 회복으로 선포하셨습니다하느님 나라는 더 많이 가지는 곳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는 곳입니다나봇의 포도밭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선물의 세상에 살고 있는가소유의 세상에 살고 있는가?" 형제의 성공을 축복할 수 있는가다른 사람이 받은 은총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가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프란치스칸 영성은 세상을 "아합과 나봇"의 구도로만 보지 않고 먼저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누구의 포도밭을 탐내고 있는가?" "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 비판하면서 내 일상의 작은 권력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나는 형제의 명예와 자리인정과 성공을 부러워하며 또 다른 아합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예언자 엘리야의 목소리는 먼저 세상을 향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향합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이 질문은 정치인에게도기업가에게도종교인에게도그리고 우리 각자에게도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의 관점에서 보면전쟁의 가장 깊은 뿌리는 무기 자체가 아니라 탐욕과 지배욕그리고 타인을 형제가 아닌 적으로 보는 마음입니다성 프란치스코는 그 시대의 십자군 전쟁 한가운데서도 적진으로 들어가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대화했습니다그는 승리보다 형제애를정복보다 만남을 선택했습니다오늘날 세계 곳곳의 전쟁을 바라보며 우리는 현대판 아합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그러나 동시에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국가 간 전쟁은 거대한 규모로 일어나지만그 뿌리는 종종 우리의 일상 안에도 존재합니다내 주장만 옳다고 고집할 때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이기려 할 때용서보다 보복을 선택할 때형제를 경쟁자로 바라볼 때작은 전쟁은 이미 시작됩니다.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특정 인물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 안에서 탐욕을 내려놓고 정의와 형제애를 선택하는 삶입니다실제로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권력과 영토자원과 이념민족과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지도자들과 체제들이 끊임없이 존재해 왔습니다성경의 아합 이야기는 단순히 한 사람의 탐욕을 넘어권력이 인간의 생명보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봇 한 사람의 포도밭을 빼앗기 위해 한 생명이 희생되었다면현대의 전쟁은 한 사람의 포도밭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집과 마을삶의 터전과 미래를 앗아갑니다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들으신 것은 아벨의 피 흘림이었고나봇의 억울한 죽음이었으며이집트에서 신음하는 노예들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하느님은 언제나 희생된 이들의 편에서 역사를 바라보십니다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는 길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평화를 이루는 사람들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전쟁은 대개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지만하느님 나라는 "함께 살아가려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전쟁의 승리로 확장되지 않습니다한 사람의 마음이 탐욕에서 감사로지배에서 섬김으로적대에서 형제애로 바뀔 때 시작됩니다그래서 오늘도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는 권력자들에게는 정의를 요구하고우리에게는 회개를 요청합니다. "더 많이 차지할 것인가아니면 더 깊이 사랑할 것인가?" 인류의 역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평화의 길과 전쟁의 길로 갈라져 왔고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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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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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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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한 사랑의 발판이요 계단인 원수 사랑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수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모르는 이 없고
원수 사랑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진 애를 썼지만 원수 사랑이 쉽지 않아
원수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 때보다 더 괴로웠던 경험이 다 있을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고통에다 원수 사랑에 실패한 고통이 더해지는 경험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원수 사랑을 왜 굳이 해야 합니까?
주님의 명령이기에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건가요?


주님께서는 이 고통스러운 원수 사랑을 왜 하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혹시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명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라고 하신 그 뜻을 알고 해야겠습니다.


먼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임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수가 있으면 내가 불행하고,
원수를 미워하면 내가 고통스럽잖습니까?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에게 복수하려고 복수의 칼을 가지고 다니면
원수에 대한 미움이 나를 먼저 괴롭게 하고 복수의 칼이 먼저 나를 찌르잖습니까?


그러니 원수가 없게 되거나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원수가 아니라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려고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원수 사랑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원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불가능한 사랑을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을 리 없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원수가 원수인 한에는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나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원수이고 그래서 미워하는 것인데
어떻게 원수인 그를 원수인 채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원수였던 자가 원수가 아닌 사람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원수의 개과천선으로 그리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걸 바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걸 바라는 것이니 내가 바뀌어야겠지요.


어떻게?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참고삼으면 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어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우리가 발자취를 따라야 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넘겨준 사람을 벗이라 부르시고 기꺼이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괴로움과 모욕을 당하게 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것들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벗으로 여기면 되는 것입니다.
원수 때문에 불행했는데 원수 때문에 행복해지면 되는 것입니다.


원수 때문에 불행했는데 하느님 사랑 때문에 원수를 발판디딤돌계단 삼아
원수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면
원수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고 벗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수들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완전한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는 하느님의 그 완전한 사랑에까지 올라가게 하는 계단들입니다.


원수의 등급을 매긴다면 1등급의 원수는 제일 밑의 계단이고,
2등급, 3등급, 4등급의 원수들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 삼아 올라가다가
마침내 99와 100등급의 원수까지 사랑케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에 있어서
100%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원수까지 사랑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오늘 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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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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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록 대죄를 지었어도...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제벨이 합세해서 간계를 꾸며 아무 죄도 없는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피가 솟구치는 느낌이 듭니다. 
 
세상에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며 왕비란 자들이 그토록 비겁하고 옹졸하며 사악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는지, 인간말종의 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정의롭고 공평하신 분, 악의 세력이 더 확장하고 활개를 치도록 마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를 통해 대죄인들에게 마치 철퇴처럼 강력한 펀치를 날리십니다.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오...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엘리야 예언자의 강력한 경고에 아합은 다행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고개를 숙입니다.
자신의 옷을 갈기갈기 찢고 맨몸에 자루 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자루 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 묘한 분이십니다.
그토록 사악하고 악랄한 아합이었지만, 갑작스레 한풀 꺾인 그의 모습에 강한 연민과 측은지심을 느낍니다.
그의 뉘우치는 모습에 당신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매일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힘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가슴을 치는 우리를 보시고, 진노하시고 벌하시려는 당신 마음을 바꾸십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부족하고 부실한 왕이었지만, 그래서 부인 이제벨의 꼬임에 넘어가 인간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행동으로 하느님의 진노를 산 아합왕이었지만,
그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무게가 엄청납니다. 
 
그는 비록 대죄를 지었지만, 예언자 엘리야의 경고에 즉시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하느님의 진노 앞에 크게 가슴을 치며 자신을 바짝 낮추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진노는 그의 후대에게로 미뤄졌습니다. 
 
우리의 악행으로 인해 크게 진노하시면서도, 가련하고 나약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너그러운 마음 앞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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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 자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기 전에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습니다(창세 3,21).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카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그에게 표를 찍어 주셨습니다(창세 4,15).
그 일들은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좋은 예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시는 것은, 죄인들도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1-23)”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32).”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주시는 것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했음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그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요한 13,1-20).
배반자 유다도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으신 채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배반자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도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왜 회개하지 않고 떠나버렸을까?
마음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 자체가 완전히 식어버리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사랑하는 것도 거부하고 사랑받는 것도 거부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데, 그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선택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묵상할 때, 사랑을 실천하는 입장에서만 묵상할 때가 많은데,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도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여전히 똑같이 사랑하신다.
이웃들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답은, 회개와 보속, 그리고 사랑 실천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원수 같은 존재가 된 적이 없다.” 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과 ‘아닌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 성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회개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실제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원수처럼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 그 이웃이 원수 같은 나에게 사랑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실천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는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인 유대인을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마리아인이 베풀어 준 사랑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 사랑을 고마워한다면, 자기에게 사랑을 준
사마리아인에게만 보답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해야 옳지 않은가?> 
 
3)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친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쌓아 놓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지금 우리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 높은 벽들을 없애라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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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5.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아가페 사랑은 우리 인간 존재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부하시는 말씀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가장 완전한 표현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의 정점입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예수님을 움직였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아가페(agapè)"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당시 일반적으로 이미 쓰이지 않았던 단어라고 합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들은 "우정"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랑"을 뜻하는 "필리아(philia)"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이 새로운 사랑은 우정보다 훨씬 더 넓고 깊었습니다. 그것은 원수까지도 포함할 만큼 광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기에, 이는 하느님의 목소리 외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로는 원수에게 복수를 기원하거나 그들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것이 세상의 이야기이자 인간 존재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아가페는 우리 인간 존재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 곧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이 우리 내면에 이미 존재한다는 진리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런 이해는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더 놀라워해야 할 사실은 이 세상에 아가페 사랑이 그리 적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참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우리는 늘 암울하고 어둡고 잔혹한 소식만을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을 내어 놓는 사랑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가운데서 가장 비근한 것은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런 사랑을 놀랍게 여기지 않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것은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 즉 아가페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머니의 이런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자연스러운 헌신적 사랑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높이 올라가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들이 원수까지도 사랑한 예를 많이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할 능력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고 당부하셨겠습니까?!

비록 이런 사랑이 하느님만의 사랑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과 닮은 영의 모습(이는 외적인 모습이 아닌 본질적인 존재적 닮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에게도 그런 하느님의 사랑이 부여되어 있다는 진리를 믿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당부 뒤에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처럼 완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완전한 사랑의 아버지 안에 머물며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이 드러나게 하여 그 열매를 맺게 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 안에 머물려는 노력, 즉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나와서 하느님 안에 살다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일상 안에서 지속적으로 상기하며 살아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수양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솟아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해 일하시도록 우리를 내어 드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5; 12).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우리에게는 이 짧은 세상 안에서의 삶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이미 부여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더 큰 용기를 내어 세상적인 정신구조에서 벗어나 이미 우리 안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갈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는 이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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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6.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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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0:35 추가



마태 5,43-48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런데 레위 19,18을 보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는 말씀은 있어도,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은 없지요. 그걸 모르실 리 없음에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주를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으로 좁게 한정지어 생각하는, 그리고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는 유다인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바로잡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여 처우를 달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즉 ‘편애’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그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나 이웃과 원수를 차별 없이, 공평하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잘해주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여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는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의로움을 행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솔선수범’하셔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비춰주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공평’하고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참된 의로움에 이르려면, 나 역시 한쪽으로 치우친 ‘반쪽짜리 사랑’으로 만족해서는 안되지요. 나도 모르게 ‘팔이 안으로 굽는’ 부족하고 약한 본성을 극복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더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굳은 의지와 결단으로 원수를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적어도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를 내 ‘은인’과 같은 수준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정도로는, 그렇게 악을 피하는 소극적인 태도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갈 때, 악을 피하는 수준을 넘어 선을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자녀가 되어 그분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주님은 그저 죄 짓지 말고 ‘무난’하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 뜻과 가르침을 따르며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잘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저 지옥에 가지 말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 그분의 마음과 뜻을 헤아린다면 더 이상 ‘반쪽짜리’로 사는 것에 안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 사랑이신 그분을 ‘온전히’ 닮은 존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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