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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복음 묵상

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묵상글(강론글) - 깨달음과 깨어있음 등

작성자김 루 비|작성시간26.06.17|조회수31 목록 댓글 0

출처 :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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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묵상글(강론글)

1차(03:20), 2차(05:20), 3차(09:05)

 

 

6월 17일 묵상글, 03시 2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 이제까지 3차 이후 시간에도 1편은 추가하였습니다만 오늘은 2편입니다.(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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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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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6,1–6.16–18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또 자선을 베풀 때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시고,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단식할 때에도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말고

오히려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오직 숨어 계신 아버지께 보이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숨은 곳에서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선행과 기도 자체를 경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같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라도

사람의 시선을 얻기 위한 것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께 향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은 행위의 겉모양보다

마음의 방향을 묻습니다.

무엇을 했느냐보다

누구 앞에서 했느냐를 묻습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할 때

늘 인간의 내면과 하느님 앞의 진실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핵심은

겉과 속의 일치입니다.

겉으로 거룩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사람의 칭찬을 갈망한다면

그 신앙은 아직 중심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도 몰라도

하느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깊이에 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어 계신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것도 매우 깊습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비밀한 중심,

아무도 모르는 눈물,

말하지 못한 의도,

감추어진 사랑을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인상 깊은가보다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진실한가가 더 중요합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도덕 훈계가 아니라

하느님 닮음의 길입니다.

하느님은 겉모양의 과시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을 원하십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상대를 살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숨은 선행은

작아 보일지라도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매우 큰 무게를 지닙니다.

오늘 복음은

친절 / 선행 주간과도 아주 깊이 이어집니다.

친절은 박수받기 위한 친절이 아닙니다.

누군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상대의 상처를 덜어 주고

부담을 가볍게 해 주며

조용히 따뜻함을 전하는 마음입니다.

선행은

내 이미지나 평가를 세우는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자비를

흘려보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복음적 선행은

숨을수록 더 맑아질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깊이 말씀하십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어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공동기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중심이

하느님과의 만남이어야 함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영적 연출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는 진실한 관계입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이 진실한 관계를

신학의 시작이자 끝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은

먼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서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단식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드러내는 종교적 연출이 아니라

마음을 더 맑게 하여

하느님을 더 깊이 향하게 하는 훈련입니다.

친절과 선행의 주간에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내가 절제하는 이유는

남보다 더 경건해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남을 더 사랑하고

하느님께 더 열려 있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숨은 선행과 숨은 기도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큰 선언만으로 하나 되지 않습니다.

누가 더 옳은지 드러내는 경쟁보다

숨은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작은 친절을 쌓아 갈 때

일치의 뿌리가 자랍니다.

하느님 앞의 겸손은

공동체 안의 평화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사람들인가, 하느님인가?

내 친절은 진실한가,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는가?

내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인가,

아니면 종교적 습관이나 자기만족에 머물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숨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주님,

제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하지 않게 하시고

숨어 계신 아버지 앞에 진실하게 살게 하소서.

작은 친절과 선행도

당신 사랑 안에서 조용히 실천하게 하시며

기도와 절제 안에서

겉과 속이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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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때 서부영화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황야의 무법자’, ‘장고’와 같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내용도 인상적이었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특유의 음악입니다.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황야를 가르는 휘파람 소리, 그리고 긴장감 속에서 울려 퍼지는 기타 선율은 서부영화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시대는 폭력이 많았고, 총으로 문제를 해결하던 거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은 있었습니다. 결투하면 서로 등을 맞대고 일곱 걸음을 걸어간 뒤에 총을 뽑았습니다. 여섯 걸음 만에 먼저 총을 쏘면 비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마을에도 암묵적인 질서가 있었습니다. 어른을 만나면 인사해야 했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했으며,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런 최소한의 양심과 체면은 남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에도 규칙이 있었습니다. 선전포고하고, 민간인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국제적인 약속이 있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규칙이 자주 깨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지켜야 할 명분과 체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그런 최소한의 체면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을 하고, 민간인 시설을 폭격하며,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는데도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현실을 봅니다. 국제사회에 명분을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힘이 정의인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치 영화 속 ‘암수와 비수’가 난무하는 세상 같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숨기지 않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원했습니다. 돈을 주겠다고 했고, 다른 포도원을 주겠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거짓 재판을 꾸며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다윗도 충실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를 탐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합왕과 다윗이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말을 통해서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하느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유다는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자,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적어도 죄를 죄로 아는 마음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대는 더 무서운 것 같습니다. 잘못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고도 당당합니다. 욕심과 탐욕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예전에는 위선과 가식이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위선조차 사라지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종교 행위를 강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진실한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기도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선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은 ‘겉모습’이 아니라 ‘진실함’의 문제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그런 시대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습니다. 아합왕의 거짓과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한 사람만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사가 뒤를 잇게 하셨고, 아모스와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을 계속 보내 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하며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 많은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역사는 한 사람의 마라톤이 아니라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성인과 성녀들만의 신앙이 아니라, 이름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신앙인들이 함께 이어가는 역사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전하고, 신앙의 선배가 후배에게 믿음을 전하며, 공동체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거창한 능력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정직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마음입니다. 단식과 기도와 자선도 결국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점점 냉혹해질수록 우리는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점점 거짓되어 갈수록 우리는 더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힘과 욕망만을 말할수록 우리는 양심과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를 진리와 사랑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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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여전히 “의로움”의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곤 했습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그럴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향하여 있음”이 중요합니다. 곧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세 번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4; 6; 18)

 

사실, 오늘날 우리는 ‘자기광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광고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 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 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저는 어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천사는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말고,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숨어계신 당신 앞에 늘 머무르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 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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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경고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여기서 의로움은 단순히 도덕적인 품행을 뜻하지 않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의로움이 하느님을 향한 길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무대로 어떻게 바뀌는지를 꿰뚫어 보십니다인간은 늘 인정 욕구에 목마르고 그 욕구를 채우고자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제법 있지요.

 

유다 사회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을 향한 경건한 삶을 가다듬어 왔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들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고 끊임없이 가르치고는 하였지요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선행이 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될 때하늘의 상급은 사라지고 땅의 인정만 남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지 마라.”(6,2)라는 말씀은 과장이면서도 정확한 풍자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은 과장된 자기 연출의 유혹과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선자는 그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면을 쓰고 경건함과 올바름을 연기하는 사람이며종교 행위나 교회 제도로 자신의 삶과 명예를 챙기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향하여 서 있는 듯하지만사실은 사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합니다.

기도는 회당의 중심이 아니라집 안 가장 깊은 방에서 홀로 시작됩니다단식은 인정받거나 혜택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며 삶에서 조용히 하느님을 찾는 행위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서 세상의 그 무엇이 그리 가치 있겠습니까사람과 세상 눈치를 보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결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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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복음(기쁜 소식)을 살아내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기쁨의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초세기 교회의 "길"(The Way)

복음(기쁜 소식)을 살아내기!

2026년 6월 16일 화요일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서 자기들이 나누었던 특별한 언어적 표현을 넘어, 그들의 기쁨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체험한 동정심은 강력하여 모든 것을 이겨내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 확신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스승의 곁에 남아 있던 낙심한 소수의 제자들을, 인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힘 가운데 하나로 변화시켰고, 오순절에 내려온 불의 혀는 지중해 세계를 불타오르게 하였습니다. 말솜씨가 없던 이들도 성령의 은총으로 유창하게 말하였고, 그들은 그리스-로마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가 "복음"이라 불리게 된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의 원래 그리스어 표현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세대 안에서 이미 지역의 모든 주요 도시마다 복음을 뿌리내리게 할 만큼 뜨거운 열정으로 이 메시지를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된 소식을 선포할 때, 사람들은 들은 말씀만큼이나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변화된 삶을 보았는데, 겉으로는 평범한 남녀였지만 마치 "삶의 비밀"을 발견한 듯 보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어디에서도 접할 수 없는 평온과 단순함,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기쁨(happiness)을 드러냈습니다. 바로 여기, 모든 이가 성공하고자 하는 가장 큰 과업 ― 곧 "삶 그 자체" ― 에서 참된 성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미스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드러난 두 가지 놀라운 덕목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외부인이 남긴 가장 초기의 증언 가운데 하나는 "보라, 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상호적 사랑의 중심에는 사회적 장벽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평등한 제자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인종, 성별, 신분의 관습적 장벽은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다인도 이방인도, 남자도 여자도, 종도 자유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기능이나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친교는 참된 평등의 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두 번째 두드러진 덕목은 "기쁨"(happiness)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위험에 처하셨을 때 제자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의도하신 바가 놀라울 정도로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외부인들에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수가 많지도 않았고, 부유하거나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언제든지 박해로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적인 평화를 붙잡았고, 그것은 억누를 수 없는 기쁨으로 드러났습니다. 어쩌면 "(따스하고 밝게) 빛나는(radiant)"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기쁨과 희망으로 빛나는) 광채(radiance)"라는 말은 일반적인 종교 생활을 묘사할 때 거의 쓰이지 않지만,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알맞은 말은 없었습니다.

Story From Our Community

저는 십대 시절 [새 예루살렘 공동체(New Jerusalem Community)]에 속해 있던 청소년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제 삶을 변화시킨 그 사랑의 은총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전히 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신학·성경·종말론·심리학·철학·의사소통·갈등 해결 등 다양한 영역에서 깊이 있는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9세 때 저는 관상기도 주말 피정(워크숍)에 초대받았는데, 그 기도 전통은 지난 50년 동안 제 삶의 기둥이자 반석이 되어주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끝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Kathleen K.

References

Huston Smith, The Soul of Christianity: Restoring the Great Tradition (HarperOne, 2009), 76, 78–7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ice Xerty, untitled (detail), 2023, photo, India, UnsplashClick here to enlarge image나의 나이테처럼, 초대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랑과 기쁨, 친교의 테두리를 넓혀가며 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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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인간이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는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완전함이란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의 완전성은 단지 도덕적인 무결함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완전성은 조건 없는 사랑의 완성이며그 정점은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와 박해자들까지도 품어 안는 자비에 있습니다대상을 차별하지 않고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무한한 포용력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지니신 완전함의 본질입니다원수를 사랑함으로 완성되는 '우리 안의 완전성'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인간적인 감정으로는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연스러운 본성을 넘어선 신성한 초대로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완전성프란치스칸의 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완전성은 실수하지 않는 완벽함이 아닙니다모든 것을 잘하는 능력도 아니고흠 없는 도덕적 우월함도 아닙니다성경이 말하는 완전성은 사랑이 끝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상태입니다하느님은 선한 사람만 사랑하지 않으십니다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 돌보지 않으십니다당신을 외면하는 사람당신을 거부하는 사람심지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에게까지 햇빛과 비를 아끼지 않으십니다하느님의 완전성은 정의를 넘어서는 자비이며공정함을 넘어서는 선물입니다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완전성의 비밀을 "참되고 완전한 기쁨안에서 발견했습니다형제들에게 인정받을 때가 아니라 거절당할 때환영받을 때가 아니라 문전박대당할 때사랑받을 때가 아니라 오해받을 때에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면 거기에 복음의 완전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을 품어 주는 일내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을 위해 다시 미소 짓는 일공동체 안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형제를 판단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는 일상처를 준 사람의 이름을 기도 안에서 다시 불러 보는 일바로 그런 작은 순간들 안에서 하느님의 완전성이 우리 안에 싹틉니다하느님 나라는 완벽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서로의 부족함을 품어 주면서도 끝내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완전성은 결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을 멈추지 않는 상태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완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원수를 향한 이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완전성은 절정에 이릅니다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결점의 삶을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라날마다 사랑의 경계를 조금 더 넓혀 가라는 초대입니다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나와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고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하느님께 맡겨 드릴 때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완전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호간에 자신을 내어주는 관계적 내어줌에서 배우는 완전성은 우리의 관계에서 완전해지는 법을 통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관계를 통해서 충족될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삼위일체 하느님의 완전성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완결성이 아닙니다오히려 성부성자성령께서 서로를 향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받아들이시는 관계적 충만함입니다하느님 안에는 고립된 완전함이 아니라 사랑의 순환과 상호 내어줌이 있습니다성부께서는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성자에게 내어주시고성자는 받은 모든 것을 다시 성부께 돌려드리며성령은 그 상호 사랑과 기쁨의 결합 안에서 끊임없이 흐르십니다삼위일체의 완전성은 누구도 혼자 완전하지 않고서로 안에 머물며 서로를 충만하게 하는 관계 안에서 완전하다는 신비를 보여 줍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우리는 누구도 혼자 완전하지 않습니다누구에게는 지혜가 있지만 따뜻함이 부족하고누구에게는 열정이 있지만 인내가 부족하며누구에게는 깊은 신앙이 있지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우리는 저마다 부족함을 안고 태어납니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부족함 자체를 결함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오히려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내가 가지지 못한 온유함을 형제에게서 배우고내가 부족한 용기를 자매에게서 얻고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공동체가 보게 하시며내가 넘어질 때 누군가의 손을 통해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그래서 관계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성해 가시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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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형제성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형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입니다그리고 바로 그 다름 때문에 나는 더 풍요로워집니다내가 없는 것을 그가 가지고 있고그가 없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내적 가난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나는 혼자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가능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경쟁자가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겸손은 자신의 빈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형제성은 그 빈자리를 서로의 선물로 채워 가는 삶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호 내어줌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완전함이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서로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워 주는 것입니다완전함이란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상태가 아니라기꺼이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상태입니다완전함이란 홀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서로 기대어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관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선물처럼 받게 됩니다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우리 또한 삼위일체처럼 서로에게 선물이 되고 서로를 완성시키는 존재로 부름받았다는 뜻입니다.

 

완전성은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관계의 열매입니다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며 하나가 되시는 것처럼우리도 서로를 살리고 성장시키며 함께 하느님의 충만함에 참여할 때 비로소 완전해져 갑니다그때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나누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그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완전성이 우리 일상의 형제성과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하려면 견딤과 기다림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들입니다 견디고 기다려주는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커질때 받는 성령의 에너지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에너지가 없이 원수 사랑과 나를 힘들게 하고 박해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 사랑은 인간의 의지력만으로 이루어 내는 도덕적 영웅주의가 아닙니다그것은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힘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만이 조금씩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의 열매입니다우리는 흔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복음의 순서는 다릅니다먼저 하느님께 사랑받고그 사랑 안에 머물고그 사랑을 믿고그 사랑에 자신을 맡길 때비로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해서도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해를 비추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이러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원수를 사랑하는 길에는 반드시 견딤과 기다림이 따라옵니다상대가 변하지 않아도 견디는 것오해가 풀리지 않아도 기다리는 것배신당한 뒤에도 섣불리 단죄하지 않는 것상대의 성장과 회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이런 자리에서 드러납니다내적 가난은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내가 심판자가 되려는 자리를 비우고 하느님께 그 사람의 시간을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견딤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닙니다하느님께서 아직도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 적극적인 신뢰입니다기다림도 무기력이 아닙니다하느님께서 나를 기다려 주셨듯이 나도 누군가의 성장과 회복을 기다려 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기다려 주셨고깨닫지 못할 때에도 포기하지 않으셨으며배반하고 외면할 때에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도제자들이 모두 도망쳤을 때도십자가 아래에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을 때도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견딤은 사랑의 시간이고기다림은 자비의 시간입니다그리고 그 시간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삼위일체 하느님의 끝없는 상호 내어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선물입니다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오래 견딜 수 있고더 넓게 품을 수 있으며더 깊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사랑의 원천이 더 이상 내 작은 마음이 아니라결코 마르지 않는 하느님의 생명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그때 원수 사랑은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내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열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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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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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17 05:13

 

- 깨달음과 깨어있음

 

“네가 자선을 베풀 때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주님께서는 위선자들이 하듯이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며

그들은 자선의 상을 하느님께 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이미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상을 이미 받은 것이 왜 문제일까 이참에 생각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영화가 무슨 영화제무슨 영화제무슨 영화제에서

상이란 상을 다 받았고 모든 상을 완전히 휩쓸었다는 말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자선도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고,

저세상에서 하느님께도 상 받으면 안 되는 겁니까?

 

제 생각에 사람들에게도 하느님께도 받으면 좋을 것이고,

성인들이야말로 우리의 칭송도 받고 하느님께도 상 받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성인이 아니라 위선자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인데,

위선자는 그의 자선이 상 받을만한 자선이 아닌데도 상을 받으려니 문제이고,

무엇보다 인간의 상을 받은 받고 하느님 상은 받고 싶지 않은 것이 문젭니다.

 

이것이 위선자가 성인과 다른 점입니다.

성인은 인간의 상은 받고 싶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상을 받고 싶은 존재이고,

그래서 인간의 평가나 칭찬에 연연치 않고 그래서 휘둘리지도 않는 존잽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제 원수 사랑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능한 것처럼

이것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능한 것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늘 사람들과 지내니 불가능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제 나의 행복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려고 했던 것처럼

무엇이 진정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 깨닫게 되면 가능합니다.

 

물론 깨닫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깨닫기 위해서 욕심부리거나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차츰차츰 그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또 잘 보이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닫고,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는.

 

그러나 자유롭고 행복한 영혼이 되는 것은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서 자유로우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점점 더 사랑하고 사람보다 더 사랑할 때 되는 것이니

이것을 깨달아야 하고 깨달은 다음엔 이것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달음과 깨어있음,

나이 먹어가는 것이 좋은 것은 이렇게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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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나는 기도하면서 정말로 내 영혼을 충전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의 본문을 두 열로 나누어 한쪽에는 "숨은 가운데", 다른 쪽에는 "드러난 가운데"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본문을 다시 읽어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깊고 참된 내적 진실성이 필수적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무가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지 않으면 폭풍우에 쓰러지고 말 거나, 애초부터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다면 제대로 자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땅속 뿌리의 세계로 내려보내면, 거기에는 어둠과 침묵, 고요가 자리합니다. 이는 지상 세계의 빛과 소음, 움직임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나무와 같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을 "지상 위의 부분", 곧 외적이고 드러나는 부분에만 동일시한다면, 삶의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참된 성장을 위해 필요한 깊은 자원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위와 삶은 나무처럼, 풍성한 어둠과 침묵, 고요에서 솟아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이런 내면 지향적인 노력이 외적 생활로부터의 도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토머스 머튼은 많은 "관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실제로는 관상을 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라기보다는 단지 내향적인 사람들이거나, 일상의 고통과 복잡다단한 상황으로부터 피하려는 이들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전에 인터넷에서 읽었던 글이 기억납니다.

어느 지역 신문에 거의 매일 마을 성당의 성모상 앞에 앉아 거의 한 시간도 넘게 기도하는 한 젊은 부부에 대한 소식이 그 본당 신부님의 보고로 실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문사에서 그 젊은 부부 취재하기 위해 갔는데, 실제로 그들은 기도를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충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성당의 성모상 뒤에 충전선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휴대폰의 전기가 간당간당할 때마다 그곳에 가서 충전을 하였던 것입니다. ㅎ

물론 하느님께서는 그런 동기로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그들을 축복해 주셨을 것입니다만... 그들의 동기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나 그 사랑을 새기는 기도와는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헛웃음이 나오는 저 자신을 보면서도 동시에 "그렇다면 '나'는?"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저도 사실 성당에 앉아 기도한다고 하면서 참된 헌신의 영 없이 이일 저일 걱정하며 그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많았고, 의무감에 의해 기도한 적도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내' 에고의 만족이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앉아 있었던 적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솔직하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정말로 내 영혼을 충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에고의 만족과 욕망이라는 '세속적인 기계들"을 충전하고 있는가?"에 대해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가 당신과의 참된 만남과 친교의 시간이길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분의 이런 애틋한 주님의 사랑과 그 마음을 느끼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리 존재와 만나시기 위해 마음을 다해 기다리시는 사랑의 주님을 알아차리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그 내면 깊은 곳에 어둠이 자리하고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 어둠은 하느님 사랑의 빛을 훨씬 더 밝게 느끼게 해 주기 위한 배경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사실 이런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의 그 애틋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면 우리의 어두웠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삶 또한 변화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 삶이 변화하는 때는 우리의 마음이 진심으로 동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움직이시는 분은 우리 존재의 창조주이신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관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그 내면으로부터 밖을 향해 나아가는 것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압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적 생활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그와 함께, 그로부터 배워서 내적 생활이 활동으로 드러나게 하고 활동을 내적 생활로 끌어들여, 자유롭게 행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독서, 기도, 외적 활동이든 간에 눈을 내적 활동에 돌리고 그로부터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외적 활동이 내적 생활을 파괴하려 한다면 내적 생활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동업자로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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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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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풀릴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젊은 시절 돌아보니 저도 참 많이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했습니다.
장상들에게는 모범생 이미지를, 후배들에게는 좋은 선배 이미지를 심기 위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시선에 의존하며 사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과대포장된 나로 살려하다보니 하루하루가 참 피곤했습니다.
이제 조금 나이가 들고 철이 들다보니,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풀릴 일도 없고, 내세울 일도 없으니.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내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놀랍게도 삶이 참 편안해졌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제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임무-자선•기도•단식-의 바람직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명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들’의 모습을 배격하라고 크게 강조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허영심과 허세,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했던 부자들은 쥐꼬리만한 적선을 하면서도, 그것을 크게 떠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예의바르게 자선을 베풀지 않고, 공개된 자리에서, 플랜카드도 크게 내건 다음,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선을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은근히 자신들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치켜세우는 가장 비인간적, 비신앙적인 이벤트를 펼쳤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 앞에 당대 위선자들이 펼쳤던 치졸한 자선의 행태는 차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작은 사랑의 실천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겠습니다.
진실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한다면 이렇게 대응해야겠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종일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 이웃들이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자선을 베풀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선을 베풀려는 상대방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들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부(富)는 모두 내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자선을 우리의 지난 죄를 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보속이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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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6-18).” 
 
1) 처음부터, 즉 신앙인이 될 때부터, 위선자가 되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처음에는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을 텐데,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에 익숙해지고, 그러다가 점점 더 그 칭찬과 존경에 취해서 그것만 바라게 되고,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물론 칭찬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쪽에서는 대부분 진심으로 그렇게 하겠지만, 또 위선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더 잘하라고 그렇게 하겠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나쁜 결과로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에 ‘중독’되어서 위선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칭찬과 존경은 ‘사탄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누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나 되는 듯이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행동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 자신에게는 자랑거리라 하여도 남에게는 자랑거리가 못 될 것입니다(갈라 6,3-4).” 
 
<바리사이들이 처음부터 위선자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신앙의 순수성’을 추구한 사람들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존경에 취하고, 그러다가 서서히 위선자들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모든 바리사이들이 다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고, 그들 가운데에는 진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지만 진실했던 신앙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필리 3,5-6).> 
 
2) 칭찬과 존경에 취해서 위선자가 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위선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예가 갈라티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케파가(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우리가 성인으로 존경하는 사도들도 위선에 빠진 일이 있었다는 것은,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위험한 ‘함정’입니다.> 
 
3)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감추면 하느님의 눈에도 안 보일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착각이 곧바로 위선으로 이어집니다.
<내 눈에 하느님이 안 보이니, 하느님의 눈에도 내가 하는 일과 내 생각이 안 보일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되는 것.> 
 
예수님께서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신 것은, 그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 분”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0,30).
우리는 늘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
지금 이 행동은, 또 이 생각은 위선인가, 아닌가?”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누가 위선자라고 비난하면 화부터 냅니다.
“나는 절대로 위선자가 아니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성직자든 수도자든 일반 신자든 간에 예외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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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0:20 추가.

 

마태 6,1-6.16-18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전통적으로 실천해온 종교적 신심행위, 즉 기도와 자선 그리고 단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은 그런 신심행위가 그저 율법을 어기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는,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선행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런 재계를 충실히 지킨다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평소 삶이 하느님 보시기에 부족해도, 마지막 날 심판 때에 자신이 기도 자선 단식을 실천한 공로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물론 기도와 자선 그리고 단식을 실천하는 행위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가 될 때, 즉 그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얻지 못하면서 남들 눈치를 보느라 마지못해 하게 될 때, 그리고 그런 덕행들을 통해 내 마음과 영혼까지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그저 ‘겉모습’으로만 머무를 때, 그 덕행들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또 얻어야 할 유익을 놓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이 받을 수 있는 보상은 기껏해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인정과 칭찬은 참되고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내가 사소한 실수나 잘못만 저질러도 언제든지 비난과 원망, 심판과 단죄로 바뀔 수 있기에, 나에게 참된 기쁨과 보람을 가져다주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구원받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자선과 기도, 단식 같은 재계를 실천하는 근본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로운 척, 거룩한 척 잘보이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재계를 통해 마음 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비워내고 하느님 가까이 나아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나 행동보다, 그런 행동을 하는 우리의 마음과 지향이 얼마나 진실되고 성실한지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아보겠다고 무리해서 애쓰지 않아도, 그분께서 나에게 맡기신 소명에 최선을 다해 임하다보면 보상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그 일 자체가, 그 일을 통해 하느님과 더 깊이 일치되는 과정 전체가 바로 내가 신앙생활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자선을 통해 나도 모르게 재물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하느님께로 되돌림으로써 올바른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을 헤아림으로써 내가 그분 자녀로서 무엇을 해야할 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단식을 통해 내 마음 속에 있는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는 참되고 순수한 갈망을 지니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소원해져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람이 주는 보상을 탐하느라 마음이 갈라지지 말고, 오롯이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 뜻을 실천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10:25 추가.--------------------------------------------------

 

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숨어서 해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 6장에서 가르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방법을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분은 높은 곳에서 업적을 평가하는 심판관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을 봅니다. 결과를 보고, 성과를 보고, 직함을 보고, 명예를 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십니다.

 

말하지 못하고 삼킨 눈물, 아무도 모르게 견뎌낸 인내,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드린 기도, 인정받지 못해도 끊임 없이 행한 섬김, 상처를 안고도 포기하지 않은 사랑을 보십니다. 세상은 열매를 보지만, 하느님은 뿌리를 보십니다. 세상은 박수를 치는 무대를 보지만, 하느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을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골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닙니다. 그곳은 내가 하느님 앞에서 더 이상 꾸미지 않는 자리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이 골방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한 일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내 선행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마음까지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을 단순히 가진 것이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가난은 하느님 외에는 붙들 것이 없는 자유였습니다. 그래서 참된 가난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성부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비우고 아버지를 드러내시며, 성령께서는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우리 안에 흘려보내십니다.

 

사랑은 본래 자신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드러나기보다 내어주기를 원합니다. 어머니가 밤새 아픈 아이 곁을 지키는 일, 아무도 모르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의 수고, 공동체 안에서 알아주는 이 없어도 묵묵히 봉사하는 형제자매의 손길,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조용히 축복을 빌어 주는 기도. 이 모든 것은 세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밝게 빛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갚아 주신다"는 말씀도 세상의 보상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상은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더 깊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숨은 곳에서 사랑한 사람은 숨은 곳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선을 행한 사람은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갑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영혼을 가장 풍요롭게 하는 것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며,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 세상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히 자신을 내어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숨어 계신 아버지를 향해 살아가는 사람은 점점 더 숨어 계신 하느님의 방식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마치 땅속 깊은 곳의 샘물이 아무 소리 없이 나무를 키워 내듯이, 하느님의 은총도 우리 안에서 조용히 흐르며 겸손과 가난과 형제애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결국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가 됩니다.

 

"선하다는 의식 없이 행하는 선이야말로 진짜 선입니다."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선은 이미 '나'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지,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선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꽃은 자신이 향기롭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향기를 내고, 태양은 자신이 세상을 비춘다는 사실을 자랑하지 않으며, 샘물은 자신이 누구의 목을 축여 주는지 계산하지 않고 흐릅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해를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내려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선을 베푼다는 의식으로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내가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의식마저 비우는 것, 내 공로와 덕행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쓸모없는 종"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선을 이루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신은 다만 은총이 지나가는 작은 통로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사라질 때 더욱 깊어집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면서"나는 지금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진정한 친구가 친구의 아픔을 들어주면서 "나는 지금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계산하지 않듯이, 깊은 사랑은 의식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선을 행하려고 애쓰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단계는 선이 습관이 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단계는 선이 존재가 되는 단계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용서가 특별한 결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숨결이 되고, 나눔이 희생이 아니라 기쁨이 되며, 섬김이 의무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됩니다. 마치 나무가 열매 맺는 것을 의식하지 않듯이, 참된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자신이 선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성숙은 "나는 선한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사랑하고 계신다."라는 깨달음에 가깝습니다. 그때 선은 더 이상 업적이 아니라 은총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꾸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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