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36
|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묵상글(강론글) 1차(03:00), 2차(03:50), 3차(08:30) 6월 18일 묵상글, 03시 0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오늘 김찬선 신부님이 강론글을 일찍 올리셔서 2차분을 다른 때 보다 일찍 올렸습니다 나머지는 8시 ~ 9시에 3차분으로 공유합니다.(03:55) +++++++++++++++++++++++++++++++++++++++++++++++++++ ++++++++++++++++++++++++++++++++++++ ======== < 1 차 >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6,7–1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신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움직여 내 뜻을 이루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을 많이 하는 기도보다 아버지 앞에 서는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기도를 단지 입술의 종교 행위로 보지 않고 삶 전체를 바꾸는 학교로 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주님의 기도는 짧지만 신앙의 모든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기도는 이미 개인의 욕심을 넘어 공동체의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청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다시 빚어지는 자리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기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청하게 하십니다. 이는 기도의 중심이 내 욕구의 해결보다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져야 함을 보여 줍니다. 크리소스토모는 이 질서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기도가 자기 욕망을 강화하는 시간이 되면 오히려 마음은 더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먼저 바라볼 때 인간의 마음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별히 깊은 것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부분입니다. 용서는 기도의 부록이 아니라 기도의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크리소스토모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기도하는 입술과 충돌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정작 내 마음은 닫아 둔다면 그 기도는 아직 온전히 열리지 못한 것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상처가 깊을수록 용서는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를 감정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길로 말씀하십니다. 곧 용서는 상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상처가 내 영혼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은총의 선택입니다. 친절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상대의 잘못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악의 사슬을 더 길게 이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선행은 그 멈춤이 관계를 다시 살리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친절 / 선행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친절이 단지 부드러운 말투에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참된 친절은 용서할 수 없는 마음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느님 앞에서 내 마음을 다시 열어 보는 용기입니다. 선행은 내가 받은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주지 않고 관계를 살리는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그 힘을 길러 줍니다. 기도 없는 용서는 쉽게 지치고, 기도 없는 친절은 쉽게 얕아질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성모님은 모든 것을 다 설명받고 순종하신 분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며 하느님의 뜻에 머무신 분입니다. 주님의 기도도 이런 머묾의 길로 우리를 이끕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아버지 앞에 진실하게 서고 용서를 통해 공동체를 다시 여는 사람, 그런 기도의 사람이 되라고 초대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기도를 얼마나 관계로 살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 앞에 말은 많이 하지만 마음은 닫아 두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용서를 미루며 기도의 문도 함께 닫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우리 아버지”를 부르면서 정말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기도와 용서가 하나인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 기도를 말의 반복으로 만들지 않게 하시고 아버지 앞에 진실하게 서게 하소서. 제 안의 굳은 마음을 풀어 주시고 용서를 통해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며 친절과 선행의 열매가 기도 안에서 자라게 하소서. 아멘.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반가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의 사제서품 60주년과 문규현 신부님의 사제서품 50주년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형제 사제인 두 분은 서로 다른 길을 걷기보다 오히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오셨습니다. 한 분은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과 함께하면서 옥살이하셨고, 다른 한 분은 임수경 양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 옥살이하셨습니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현장에도, 용산 철거민의 거리 성당에도, 세월호의 팽목항에도 두 분은 늘 약한 이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세상은 편안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은 말보다 삶으로 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기도의 문장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기도는 단순한 암송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아픈 사람들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굶주린 사람의 배고픔과, 외로운 사람의 눈물과, 힘없는 사람의 절망을 함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분, 노 사제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만 바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냈습니다. 오늘은 두 분 신부님의 ‘서품 기념’을 축하하면서 제가 2009년에 썼던 글의 일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7년 전의 글입니다. “어제, 저녁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규현 신부님께서 단식 도중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문 신부님은 전주교구 신부님이십니다. 이제 나이가 60이 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쾌유하시어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문 신부님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임수경 양과 함께입니다. 남과 북이 분단된 이후,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온 최초의 민간인들이었습니다. 문 신부님은 혼자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올 임수경 양을 생각하였고, 임수경 양이 받아야 할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생각하였고, 착한 목자의 심정으로 임수경 양과 함께 돌아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또 이렇게 썼습니다. “문 신부님은 성령의 관심사를 생각하였습니다.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였고, 불의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이들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들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세상은 힘과 성공과 효율을 이야기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생명과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삶의 가장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민자의 삶도 그렇습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의 벽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웃고 살아도 마음속에는 말 못 할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문장이 아닙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한다면 굶주린 이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기도한다면 미움과 원망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내 욕심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 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승의 길이 제자에게 이어집니다. 신앙은 책으로만 이어지지 않습니다. 삶으로 이어집니다.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삶으로 전해지고, 사제의 믿음도 결국 삶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년의 두 사제를 보며 감동하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낮은 자리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사제로 살아오면서 자주 부족함을 느낍니다. 강론은 할 수 있지만 삶으로 증언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고, 침묵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다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주님의 기도를 어떻게 살고 있느냐?”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삶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말로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랑과 작은 희생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도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줍니다. 곧 그래서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으며,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기도는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 중세시대로부터 이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를 올바르게 바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6,8)라는 선언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그러니 이는 불안이나 부족함을 달래고 채우려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심을 바탕으로 한 신뢰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6,9)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아버지로서 친밀함을 동시에 붙드는 고백이자 외침입니다. 이러한 친밀함은 개인에서 시작되지만 “저희”라는 복수형 표현 안에서 공동체로 확장됩니다. 그다음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 중심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6,9)는 하느님 스스로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시는 종말론적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도(에제 36,23 참조), 백성이 현재의 삶에서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세를 포함합니다(이사 29,23 참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10)는 구약의 야훼 통치 사상을 재해석한 종말론적 청원으로,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게 하소서.”(6,10)는 순종의 윤리로, 앞선 두 청원을 더욱 간절히 요청하는 백성의 호소가 됩니다. 이어지는 청원들은 인간의 삶을 다룹니다. “일용할 양식”(6,11)은 모호한 내일의 잔치가 아닌, 오늘 하루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가리킵니다. 잘못의 용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조건이 됨을 강조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6,13)는 삶의 시련에 주저앉지 않게 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그리하여 악에서 구해 달라는 마지막 청원이 이어지지요. 결국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 앞에 인간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조용히 봉헌하며 내맡기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주님의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그리스도교: 사랑의 노래!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그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그리스도교: 사랑의 노래 2026년 6월 17일 수요일 교회역사 학자인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tler Bass)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길을 따라 신앙을 살았는지를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시작된지 초기 500년간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단순한 교리나 내세의 약속으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의 길로 받아들였고, 그 길은 신자들의 존재를 치유하고 새롭게 하며, 참된 영적 여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의 사람들"이라 불렸습니다. 성 유스티노(Justin Martyr, 약 100–165년경)와 같은 초기 호교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실천을 통해 예수님의 길이 "인생을 치유하고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유스티노에게 있어서 옛 삶의 방식은 지나갔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과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포용적 신앙이었습니다. 새로운 신앙의 효과가 어떻게 해석되든, 그리스도교의 반대자와 옹호자 모두가 이 종교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여성과 농민, 노예들에게조차 삶을 새롭게 질서 지을 수 있는 의미 있는 능력을 부여했습니다. 교회의 초세기 동안, 예수님께서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해, 즉 우리 자신을 전부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실천의 중심에 자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기들이 하느님 사랑에 기초한 삶의 길이 지닌 급진적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오늘날 많은 비평가들의 눈에는 그리스도교가 그다지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도 사랑이었고, 당신 삶으로 드러내신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열심한 신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살아내며, 그 사랑이 그들의 삶을 새롭게 빚어 가도록 체험하려 했습니다. 아레오파고의 디오니시오(약 500년경)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황홀경을 일으켜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께만 속하게 됩니다." 모든 신자들이 이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었고, 그들 역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며 때로는 어리석거나 심지어 외설적(prurient)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사랑의 길임을 드러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 이성이나 정치, 심지어 철학과 윤리적인 덕목이 아니라 - 사랑이야말로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본질적인 유대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사랑은 곧 하느님의 교향곡이며, 인간이 신앙의 실천—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길을 따름—을 통해 체험하는 완전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십대 시절 [새 예루살렘 공동체(New Jerusalem Community)]에 속해 있던 청소년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제 삶을 변화시킨 그 사랑의 은총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전히 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신학·성경·종말론·심리학·철학·의사소통·갈등 해결 등 다양한 영역에서 깊이 있는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9세 때 저는 관상기도 주말 피정(워크숍)에 초대받았는데, 그 기도 전통은 지난 50년 동안 제 삶의 기둥이자 반석이 되어주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끝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Kathleen K. References [1] Justin Martyr, First Apology, chapter 14, as quoted in Rowan Greer, Broken Lights and Mended Lives: Theology and Common Life in the Early Church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86), 13. Diana Butler Bass, A People’s History of Christianity: The Other Side of the Story (HarperCollins, 2009), 27–28, 31–3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ice Xerty, untitled (detail), 2023,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나의 나이테처럼, 초대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랑과 기쁨, 친교의 테두리를 넓혀가며 성장하였습니다. ---------------------------------------------------- ++++++++++++++++++++++++++++++++++++ ======== < 2차 >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18 03:42 -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뜻이 이루어지는 나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번 주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로 우리는 치프리아노 성인의 ‘주님의 기도’ 묵상을 내내 읽습니다. 어제 성인은 이렇게 주님의 기도 한 부분을 묵상하고 나눕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다스리지 아니하시는 때가 있습니까? 과거에 항상 있었고 또 미래에도 중단이 없으실 하느님의 나라에 시작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에 시작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늘 있었고 나는 늘 하느님 나라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 나라가 있다고 고집할 때부터 나는 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 나라가 없으면 하느님 나라가 제 안에서 자동 시작되는 겁니다. 내 나라가 없으면 나는 자동 하느님 나라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 나라가 있는 것이 좋을 것만 같지만 내 나라가 있으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내 나라에 갇히는 꼴이 됩니다. 이는 은둔형 외톨이가 자기 방에 갇히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한집에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 방의 문을 닫고 거기에 갇힙니다. 종종 Privacy(사적 공간)를 과하게 고집하면 이렇게 되곤 하지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 자유가 침범당할까 너무 두려워하여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방과 자기 세계에 갇히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내게 오심을 막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여는 것이 이미 와 계신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치프리아노 성인은 아버지의 뜻을 이룸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그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의 겸손, 행동에 있어서의 정의, 활동에 있어서의 자비심,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받는 해를 잘 참아 내는 것, 형제들과 화목을 유지하는 것, 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더 사랑하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는 것, 이 모든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이 말은 그리스도의 뜻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잘 따르기만 하면 우리도 우리의 뜻이 곧 하느님의 뜻이 되는 경지에 도달할 터인데, 프란치스코는 말년에 이렇게 되도록 다음과 같이 형제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가련한 저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신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로 당신 때문에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늘 원하게 하시어 내적으로 깨끗해지고 내적으로 빛을 받고 성령의 불에 타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이 경지를 얘기할 때 저는 공자의 그 유명한 나이론을 얘기합니다. 공자는 나이 서른에 입지, 마흔에 불혹, 오십에 지천명, 육십에 이순을 얘기한 다음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를 얘기합니다. 나이 칠십이 되면 욕심대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가 돼야 한다는 말인데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으로 바꿔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올라 있는가?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경지로 가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주님의 기도를 묵상하며 자문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 ======== < 3차 >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없이 겸손하고 진솔하며 인간미 넘치는 사람! 결정적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되었는지를 본인이 저술한 여러 서한들을 통해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심 이전의 그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향한 열정과 집념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산 헤드린을 비롯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제 세상을 향한 그의 열정은 하느님과 복음 선포를 향한 열정으로 뒤바뀌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코린토 2 11,2) 평생에 걸친 바오로 사도의 삶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삶의 키워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열정이었습니다. 회심 이전 그는 율법을 공부하고 유다인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있어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반하는 삶을 산다고 여긴 그리스도교인들을 체포하는데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 자신에게 맡겨진 이방계 양떼를 사랑하는 열정, 복음을 향한 열정, 선교를 향한 열정으로 철철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한때 그토록 기고만장하고 자신감 뿜뿜 풍기던 그였는데, 이제는 하느님을 향해서나, 이웃을 향해서나, 자기 자신을 향해서나 한없이 겸손하고 진솔하며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기를 바랍니다. 부디 참아 주십시오.” “나는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교황 교서나 주교님들 사목 서한을 읽어보았지만,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표현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강렬한 예수 그리스도 체험은 완고하고 뻣뻣하던 바오로를 세상 부드럽고 편안하고 자유롭게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잘 난 체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는데도 애써 거창하고 유려한 표현을 쓰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더 뛰어난 체 하려고 어깨에 힘도 주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그대로의 나,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가감 없이 표현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목자, 요즘으로 치면 베드로 사도와 더불어 교황님 역할을 수행했던 바오로 사도였지만, 그는 교우들에게 조금도 신세 지지 않고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여러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바람에 그들을 약탈한 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었지만 누구이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향해 지니고 있는 열정은 어느 정도인지? 오늘 나는 얼마나 겸손하고 진실하며, 인간미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부담주지 않는 청빈한 삶을 살고 있는지?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7-15)> 1) ‘다른 민족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입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고, 듣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게 바치는 기도는 그 자체로 ‘빈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고,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빈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 ‘믿음 없이’ 입으로만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만일에 기도를 하면서 “기도한다고 이게 될까?”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를 ‘빈말’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어떻게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실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고, 당신이 정하신 가장 좋은 때에,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두 번째, ‘실천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실천’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을 모두 가리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떠넘기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은, 주인이 하인에게 온갖 일을 시키는 것과 같고, 그래서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세 번째, ‘사랑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만일에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에는 관심 없이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입니다. 네 번째,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고, 바라고 있다면, 그 기도는 ‘빈말’이 되고 ‘거짓말’이 됩니다. 만일에 마음속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심이 가득 차 있다면, 그래서 그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이 되고, ‘거짓말’이 됩니다. 2)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도 기도를 ‘빈말’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날마다 바치는 기도여서 특히 더 그렇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라는 말은, ‘간절함’도 없고 ‘정성’도 없다는 뜻인데, 기도에 간절함과 정성이 없으면, 그 기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3) 주님의 기도는 ‘주님과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전부 다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일들이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것, 아버지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나타내고,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기도에 연결됩니다(요한 17,20-21). 용서 없이는 일치도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적극적인 회개’로 응답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주님께서 다 해 주시는 일은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 쪽의 능동적인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고, 주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으로 이끌어 주는 자녀의 기도~~~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방인들처럼, 말로써 하느님을 설득하려는 방식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끈질기게 요구함으로써, 마치 하느님께 "귀찮게" 굴면 결국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하며 기도하곤 합니다. 물론 루카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루카 18,1-8)를 들려주시면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귀찮게 졸라대는 과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핵심 주제는 하느님이 불의한 재판관과 비슷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 하느님은 완전 정반대의 마음을 지니신 분, 즉 자녀의 청을 언제나 마음에 두시고 이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크나큰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믿음"이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신뢰심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다가가는 자녀들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성부께서 언제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주의를 기울이시며,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6,8).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이 말씀에 신뢰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또 "나는 성부께서 늘 내 발을 씻어 주시며, 크고 작은 모든 순간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장 잘 아시고 나에게 최선이게끔 배려해 주시는 분임을 의식하고 있는가?"를요...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청원기도는 본래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올바른 마음 자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 은총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당신의 자녀인 우리와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사랑의 어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도의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로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청하는 방식과 기대하는 바가 달라집니다. 아버지, 특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는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고, 그분께서 내 삶을 돌보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느님의 참된 아들로서 살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자녀라는 이 의식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내'가 부모님께 친근하게 말하듯, 하느님께도 그와 같은 친밀함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열어, 성부와 맺고 계신 관계와 기도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의 기도를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 기도", 즉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자녀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주님의 기도"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기쁨을 느낀다면, 그분께서도 우리 안에서 자녀다운 모습을 보시고 참으로 기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마음에 두시고 배려해 주시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기준으로 '내' 정체성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고, 또 그 기준으로 '내' 삶의 의미가 좌지우지된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 기준에 의해 주어지는 자아가 '나'라고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참 자아가 아닌데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리며 살아가다 보니 하느님께서도 '나'를 그런 존재로 여기실 것이라는 착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아버지 기도]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온전히 의탁해야 하는 아기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기도를 바칠 때 엄마, 아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처럼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리 아버지 기도]는 말로 하는 기도라기보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며, 결국은 관상 기도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자신의 저서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에서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강조하여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무(無)와 무력함을 깨닫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슬프거나 낙담스러운 체험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깨달음이 깊은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기쁨과 생명의 근원과 직접 맞닿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묵상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우리 무(無)의 중심으로 진지하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과의 관계의 가장 깊은 실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단지 '머리로' 묵상한다. 상상 속에서, 혹은 욕망 속에서, 종교적 진리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데 그친다. 우리는 '마음을 찾는 것', 곧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우리 존재의 근원적 정체성을 깊이 인식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마음을 찾는다'는 것, 우리의 가장 깊은 정체성의 자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의 외적이고 일상적인 자아가 상당 부분 가면이며 허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된 자아가 아니다. 그리고 참된 자아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둠과 '무(無)'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가 하느님께 직접 의존하는 중심에 있다. 모든 그리스도교 묵상의 실재는 이 인식에 달려 있다. 따라서 그것 없이 묵상을 시도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발 없는 사람이 걸으려는 것과 같다." ---------------------------------------------------- 09:15 추가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도구적 존재로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 도구적 존재로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7절)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거나 그분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사랑 고백의 대상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일과 그분의 나라와 뜻이 먼저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앞부분(9-10절)은 나의 필요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곤 합니다. 하지만 참된 기도는 하늘의 뜻이 내 삶(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권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일용할 양식과 용서의 신비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1-12절) 예수님은 평생 쌓아둘 재물이 아니라 ‘오늘’ 필요한 양식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매일매일 하느님께 의탁하며 살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더불어 가장 강력한 조건이 붙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전에, 내가 먼저 타인을 용서해야 마음에 하느님의 자비가 담길 공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8절) 이미 나를 가장 잘 알고 계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랑받고 있음에 눈을 뜨게되면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움직이는 법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설명하거나 설득하거나 요구하는 행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느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나를 알고 사랑하고 계심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 곁에 앉아 아무 말 없이도 평안을 느끼듯이, 기도는 말보다 먼저 신뢰입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말은 줄어들고, 설명은 짧아지며, 침묵은 길어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많이 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머물러 줌으로써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관계의 방식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는 흔히 하느님 나라를 죽은 뒤에 가는 장소로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관계의 질서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통치하던 내 왕국이 내려오고, 하느님의 사랑이 중심이 되는 관계가 시작될 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내가 이기려 하지 않고 상대를 살리려 할 때, 내 주장보다 공동선을 먼저 생각할 때,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이해하려고 귀 기울일 때,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은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으로 말하면 이것은 내적 가난의 길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내 판단을 내려놓고, 내가 옳다는 확신마저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뜻이 머물 공간이 생깁니다. 일용할 양식은 관계 안에서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내일의 양식이 아니라 "오늘"의 양식을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오늘 주어진 은총을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오늘 나에게 필요한 양식은 빵일 수도 있지만, 따뜻한 위로 한마디일 수도 있고, 용기를 주는 미소일 수도 있으며,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부분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주님의 기도 가운데 가장 어려운 구절은 아마도 용서일 것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그 잘못에 대한 보복의 권리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상대를 놓아주는 동시에 그 사람에게 묶여 있던 나 자신도 자유롭게 하는 일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며,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긴 여정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견디고 기다려 주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내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께 용서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체험에서 흘러나옵니다. 주님의 기도는 삶의 방향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외워야 할 기도문이기 전에 살아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형제를 경쟁자가 아니라 선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왕국을 내려놓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사람은 오늘에 충실하게 됩니다.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결국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복음의 요약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바친다는 것은 단어를 천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갈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 한마디 안에는 이미 믿음이 있고, 가난이 있으며, 용서가 있고, 형제애가 있으며, 하느님 나라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도구적 존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기도는 무엇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이기 전에 나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내어드리는 봉헌의 기도가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첫마디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녀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자신의 계획보다 아버지의 뜻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기도가 아니라 나를 아버지의 뜻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이 기도는 "주님, 저를 아버지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로 써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 나의 침묵과 기다림, 나의 용서와 자비를 통해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심을 보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가 말한 것처럼, "주님, 저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것이 곧 아버지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삶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는 내가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주님, 제가 아버지 나라가 오게하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제가 있는 곳에 화해가 오게 하시고, 제가 머무는 곳에 형제애가 피어나게 하시며, 제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 희망이 살아나게 하소서." 라는 봉헌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구절은 주님의 기도 전체의 중심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가르치십니다. "하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래서 이 기도는 "주님, 제 삶을 당신 뜻이 머무는 땅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모님의 응답에 이르게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성모님은 하느님의 계획을 모두 이해한 뒤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결과를 알았기 때문에 "예"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을 도구로 내어드렸습니다. 자신의 몸과 시간, 자신의 미래와 안전, 자신의 이해와 계산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 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님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구적 존재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바뀝니다. 아버지, 저를 아버지 이름이 빛나게 하는 도구로 써 주십시오. 저를 아버지 나라가 오게하는 도구로 써 주십시오. 저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는 땅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오늘도 저를 통해 누군가가 위로받고, 누군가가 용서받고 누군가가 사랑받게 하소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260618.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0:10 추가 마태 6,7-15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그 ‘내용’에 대해 알려주시기 전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도해야 할 지를 먼저 알려주시지요.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중요한 것은 먼저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께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시며, 그것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적당한 방식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기 위해서는 보다 더 근본적인 믿음, 즉 하느님께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하지요.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 내가 그분께 무엇을 청해야 할 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당장 원하고 바라는 걸 달라고 청한다면 그건 기도가 아니라 ‘떼쓰기’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심을 믿으면 그분께서 언제나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의 ‘결과’를 모두 하느님 손에 맡겨드릴 수 있게 되지요.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 또한 하느님 사랑의 한 방식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하느님께 구체적으로 무엇을 청해야 할 지 기도의 ‘내용’에 대해 살펴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나 자신은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 뜻에 비추어 그분 뜻에 맞는 것을 청하되,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 하면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참된 기도인 겁니다. 그렇기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나 혼자 독점하지 말고 필요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어야 합니다. 다른 이의 배고픔을 외면한 채 나 혼자만 배불리 먹으려고 드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청한다면, 나 또한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몇 번이고, 진심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용서 못한 채 두고두고 증오하는 ‘원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주님께서 베푸신 귀한 용서와 자비를 헛수고로 만드는 것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청한다면, 내가 자주 걸려 넘어지는 유혹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되도록 그런 상황을 피하려는 최소한의 노력 정도는 해야 합니다. 죄가 주는 잠깐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유혹 앞에서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주저앉아 버린다면 그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참된 기도는 내 뜻을 들어달라고 하느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꾸준하고 성실한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겸손과 사랑으로 그분 뜻을 열심히 따른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의 선물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충만하게 누리며,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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